90화. 재회가 반갑진 않지만2021.01.06.
세상에 저게 뭐야? 라틸은 놀라서 도끼 든 여자를 쳐다보았다. 라틸도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상태로 이미 한 번 죽은 틀라를 보긴 했다. 하지만 저 도끼 든 여자와 틀라는 상태가 전혀 달랐다. 틀라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죽었다 깨어난 줄 모를 정도로 살아 있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토끼 가면과 대화를 나누면서 자기 엄마를 걱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저 여자는 다르다. 누가 봐도 죽었다 깨어난 사람이었다. 생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피부. 혈색 없는 새하얀 입술. 타고나길 창백한 사람도 저런 피부를 가질 순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눈동자. 초점이 없는 데다 지나칠 정도로 커다래진 눈동자는 겁 많은 사람이 보면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올 정도로 스산했다. 실제로도 도끼 든 여자가 나온 창가 주위에선 온갖 비명소리가 다 들려오고 있었다. 그곳에 서 있던 사람들은 허둥지둥 창문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느라 자기들끼리 부딪치면서 넘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비명 소리 사이사이에 도끼 든 여자를 알아보는 소리도 끼어 있었다.
“레들러?”
그중 하나가 아이니였다.
“레들러니?”
얼결에 시녀와 호위들에게 떠밀려 창문에서 멀어지던 아이니가 갑자기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그 말을 시작으로 시녀들 사이에서도 “레들러 양이 맞아요!” “세상에.” 하는 숨죽인 소리가 크게 흘러나왔다. 도끼 든 여자가 섬뜩한 외양과 달리 가만히 선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만 하자, 무작정 달아나던 사람들도 잠시 멈추어 서서 그 무서운 시체의 모습을 제대로 살피기 시작했다.
“레들러 양은 얼마 전에 죽었잖아요?”
“장례식에서 시체가 없어졌다 하지 않았어요?”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아무래도 카리센에서 이름깨나 알려진 귀족 영애인 듯했다. 라틸도 한 시녀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이니 황후와 가장 친하게 지냈다던 시녀. 죽은 뒤 시체가 사라졌고, 아이니는 헤움이 그 시녀를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지. 저 시체가 그 시녀인 모양이다.
‘그럼 저 영애도 죽고서 부활한 건가? 헤움이나 틀라처럼?’
그러나 역시 이상하다.
‘틀라를 본 건 꿈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곳에서였으니 예외라 쳐도, 헤움 황자는 입을 벌리고 달려들기 전엔 보통 사람처럼 보였는데. 왜 저 여자는 상태가 저렇게 나쁘지?’
그때.
“레들러 양?”
시체 근처에 선 한 귀족이 조심스럽게 레들러에게 말을 걸었다. 무시무시한 외양과 달리 막상 안에 들어와서는 미동도 없이 서 있기만 하자, 겉만 저렇지 않은 이전과 같을 거라고 기대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말을 건네자마자 줄 끊어진 인형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시체가 들고 있던 커다란 도끼를 우에서 좌로 빠르게 휘둘렀다.
“으악!”
말을 건 사람은 아슬아슬하게 도끼를 피하고서 몸을 옆으로 굴렸다. 하지만 도끼에 스친 어깨에서 피가 나오자 피 냄새를 맡은 시체는 흥분해 날뛰기 시작했다.
“잡아!”
“죽여라!”
“아니, 생포해!”
'쾅 쾅' 소리를 내며 도끼가 온갖 물건을 다 부수기 시작하자,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황급히 뛰어갔다. 하지만 연달아 바뀌는 명령에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저 움직이는 시체를 잃어버린 귀족 시체로 봐야 할지 무시무시한 괴물로 봐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탓이다. 그 사이에 도끼를 든 시체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기사를 내려쳤고, 기사가 방어하는 사이 도끼를 놓더니 맨손으로 다른 기사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흐악!”
다친 기사가 목을 부여잡고 웅크리자, 기사들은 생포하고 뭐고 할 때가 아니란 걸 깨달았는지 위협적이고 날 선 공격을 시작했다. 괴물이지만 상대는 하나일 뿐이라 다행히 오래 지나지 않아 그들은 시체를 제압했다.
“저거 좀비지?”
라틸은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칼라인에게 목소리를 낮추어서 물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칼라인도 기사들이 시체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두 손과 다리를 꽉 붙드는 모습을 보며 대답했다.
“식시귀는 외관상 사람과 구분하기 힘들다고 하니까요.”
“헤움 황자가 저 영애를 좀비로 만든 걸까?”
“그럴 지도요.”
“그러면…… 저기 그러면 말이야.”
라틸은 마른침을 삼키고서 좀비에게서 시선을 떼고 칼라인 쪽으로 천천히 눈을 떨렸다.
“내가 조사한 바로 좀비는 감염성이 있었거든?”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허공을 찢어내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아아! 폐하!”
라틸은 확 그쪽을 쳐다보았다.
‘아이니!’
아까 도끼 좀비에게 쫓겨 들어왔던 귀족 커플. 그중 남자 쪽이 근처에 있던 아이니를 향해 입을 벌리고 달려든 것이다. 여자 쪽은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조금 전까지 달콤한 말을 나누고 함께 위기에서 탈출했을 연인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 귀족이 아이니에게 닿기 전. 빠른 속도로 날아온 검이 귀족의 이마에 박혔다. 검에 맞은 귀족이 바닥에 쓰러져 손을 꿈틀거리자 아이니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소?”
다가온 하이신스가 묻자 아이니는 질문을 받은 것뿐인데도 몸을 흠칫 떨면서 벽을 할퀴듯 짚었다.
“괜찮은가 보군.”
그걸 본 하이신스는 혼자 결론을 내고서 좀비에게 박힌 검을 뽑아 앞뒤를 살피며 눈살을 찌푸렸다. 라틸은 하이신스의 검집에 검이 없는 걸 발견했다. 검을 던진 사람이 하이신스였던 모양이었다. 다행이야. 라틸은 안심하다가 흠칫해서 그쪽으로 소리쳤다.
“폐하! 혹시 그 영애도 다치지 않았나 확인해봐요! 감염! 전염!”
라틸이 외치는 소리에, 아이니가 괜찮은지 확인하러 갔던 귀족들이 우르르 뒤로 빠져나갔다. 시녀들 역시 다리에 힘이 풀린 아이니를 거의 끌어내듯 부축해서 뒤로 데려갔다. 경비를 맡은 근위병 몇은 처음 도망쳐 들어왔던 귀족 여자에게 다가갔다.
“난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이마? 여긴 유리창을 깰 때 파편이 튄 것뿐이에요.”
그 여자가 자기는 멀쩡하다며 여기저기 보여주는 동안 사람들은 먼발치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 이번에는 전혀 엉뚱한 쪽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아아!”
다시 사람들이 우르르르 다른 쪽으로 이동했고 라틸도 휙 그쪽을 보았다.
‘감염성이…….’
처음 레들러를 붙잡기 위해 달려갔던 기사들. 그때 다친 기사 두 명이 눈동자가 레들러처럼 변해, 자기들을 치료해주던 의사와 그 옆에서 지혈을 돕던 동료 기사를 각기 물어뜯은 것이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지만 홀 안에서 본격적인 탈출 러시는 없었다. 정확히는 탈출할 여건이 아니었다. 문가에는 하이신스가 이마에 검을 던져 죽인 귀족 남자 좀비가 쓰러져 있고, 창문 근처에서는 지금 좀비로 변해가는 기사 두 명이 다른 동료 기사들과 싸우고 있다. 게다가 레들러, 첫 좀비는 밖에서 들어왔다. 들어올 때부터 드레스 여기저기 피가 튀어 있었고. 저 피가 자기가 좀비가 되면서 튄 피라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밖에서 하인들을 잡아먹으면서 튄 피라면 지금 저 밖에 뭐가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무기.”
라틸은 상황을 지켜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칼라인이 라틸을 보호하려는 듯 반보 앞에 서 있다가 돌아보았다.
“무기가 필요해.”
라틸이 입 모양으로 뻥긋거리자, 칼라인이 무기로 사용할 만한 게 있나 살피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없었다. 애초에 연회에 참석할 때 무기를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이거라도 챙겨야겠어.’
라틸은 일단 버터를 바르는 데 쓰는 뭉툭한 칼을 소맷자락 안에 넣으면서 상황을 다시 살폈다. 좀비가 되어가는 기사 둘, 그리고 그 기사에게 공격받은 기사와 의사를 만약을 대비해 묶어두기 위해 기사들이 대부분 그쪽으로 몰려갔다. 다행히 이마가 꿰뚫린 귀족 남자 좀비는 더 난동을 부리지 않고 얌전히 누워 있다. 여자 귀족은 본인 말처럼 감염되지 않았는지 가파르게 숨을 쉬긴 해도 변화할 조짐은 없었으나, 여자 귀족에게 다가간 근위병들은 만약을 대비해서인지 그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상황이 정리되자 하이신스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거리를 두고 라틸은 하이신스와 눈이 마주쳤다. 라틸은 입 모양으로 ‘괜찮아?’라고 묻기 위해 입을 조금 움직였다. 하지만 ‘찮’까지 말하는 순간. 갑자기 하이신스가 눈을 커다랗게 떴고, 라틸은 거기서 불안함을 감지하자마자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렸다. 데굴데굴 몇 바퀴 바닥을 구르다가 악사가 놓고 간 연주대에 부딪혔다. 바이올린과 악보가 얼굴에 떨어지는 걸 손으로 막고서 자신이 서 있던 쪽을 보자, 처음 나타났던 레들러가 칼라인과 싸우고 있었다. 기사들이 레들러를 붙잡고 있었는데, 자기들 틈에서 난리가 나면서 놓친 듯했다. 다행히 칼라인은 얼굴로 용병왕이 된 건 아니었는지 기사들보다 훨씬 손쉽게 레들러를 제압했다. 아니, 손쉬운 정도가 아니라 그는 고작 두세 번 공격을 피하자마자 대번에 레들러가 꼼짝도 못 하게 했다.
“이걸 써요!”
이름 모를 노부인이 어디서 난 건지 튼튼한 쇠사슬을 가져오자, 칼라인은 그걸로 레들러를 꽁꽁 묶었다. 레들러를 단단히 묶어놓은 칼라인이 라틸에게 다가오자, 라틸은 기사들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칼라인. 난 괜찮으니까 사람들을 도와줘.”
“아가씨 옆에 있겠습니다.”
“네가 나서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아. 나는 바깥쪽을 볼게. 사람들을 내보낼 수 있으면 내보내는 게 낫겠어.”
레들러를 제압하려 했던 기사들 쪽은 지금 난리도 아니어서 둘로 늘어난 좀비들이 어느새 다섯으로 변해 있었다. 다른 곳으로 더 퍼지지 못하게 둘러싼 채 방어하곤 있지만 그러면서 자기들 사이에서 계속 감염이 일어나는 듯했다. 라틸은 다시 하이신스 쪽을 보았다. 그 역시 자기 선에서 바쁘게 명령을 내리고 있지만, 뭐라 하는지 들리진 않았다. 칼라인은 라틸을 두고 떠나는 게 영 신경 쓰이는 듯했지만, 잠시 생각하더니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제대로’ 싸우면 아가씨가 더 강할 테니까요.”
“뭐? 그건 아냐. 하여튼 가봐. 빨리.”
칼라인이 그쪽으로 가서 순식간에 몇 배의 전력으로 보탬이 되는 사이. 라틸은 창가로 달려가 밖을 살폈다. 혹시 레들러가 이쪽으로 오면서 다른 감염시킨 사람들이 없는지 보기 위해서. 그리고 아무도 없는 것 같자 창문을 열어보려 하지만…….
‘열라고 만든 창문이 아니구나.’
여는 부분이 없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안 나가고 여기 있나 보네.’
만약 이 창문을 깼다가 밖에도 저런 시체들이 돌아다니면 이쪽으로 돌아와야 할 텐데. 창문을 깨면 좀비들 출입구가 많아지니 말이다. 라틸은 어쩔 수 없이 문가로 갔다. 저쪽으로 가면 하이신스가 위험하다고 중간에 막을 것 같지만, 다른 창문을 깨는 것보단 이게 나을 것 같아서.
“잠시. 사디 양.”
하지만 역시. 라틸이 문밖으로 나가려 들자 하이신스가 대번에 막았다.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나가지 않는 게 좋아.”
“밖을 살피려고요. 밖에 위험 요소가 없다면 사람들을 내보내야 합니다.”
“그 지시는 이미 내렸고 근위기사들이 밖으로 나갔다.”
이 와중에도 근처에 선 귀족들이 라틸과 하이신스 쪽을 힐긋거렸다. 라틸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 귀족 시체를 보았다. 이 시체는 아직 레들러만큼 죽은 자의 느낌이 강하진 않아서, 괴이할 정도로 커다래진 동공을 제외하면 크게 이질적이지 않았다.
“그러면…….”
무기라도 하나 달라고 말하려는 순간.
[저 괴물이 또 여기에.]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속마음에 라틸은 확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괴물’이라고 부르는 이 목소리. 헤움 황자. 인식하자마자 라틸은 하이신스 옆에 있는 기사의 검을 뽑고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잡아!”
검을 뺏긴 기사가 놀라 외쳤으나 그사이 라틸은 이미 문을 걷어차고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곧장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예상대로 그곳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헤움 황자는 라틸이 나타나자 눈을 부릅뜨며 옆으로 피했다. 허공을 벤 라틸은 얼른 균형을 잡고 검을 고쳐 쥐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으나 헤움 황자는 이번에도 라틸을 두려워하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허세를 부릴 겸 라틸은 황자를 향해 미소 지었다.
“또 만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