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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우리는 같은 방향을 보면서 걷는데 (88/367)

88화. 우리는 같은 방향을 보면서 걷는데2020.12.30.

16551090366362.png“…….”

왜 대답이 없지? 기분이 상했나? 하긴, 기분 좋을 말은 아니지. 하지만 못 할 말도 아니었다. 어쨌든 칼라인은 후궁이고, 라틸 자신은 황제의 특사니까. 그 상태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이니가 라틸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를 한동안.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16551090366362.png“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16551090366371.png“네?”

뭐야. 칼라인이 자기에게 그런 상대라는 건가? 아니, 언제 봤다고? 라틸은 황당해서 대놓고 묻고 말았다.

16551090366371.png“칼라인 님을 죽도록 사랑하기라도 한단 말씀이십니까?”

질문을 하면서도 라틸은 아이니가 아니라고 대답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니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진짜 첫눈에 반한 거 아닌가 싶을 즈음. 그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16551090366362.png“그랬을지도 모르네.”

16551090366371.png“또 그 전생 얘기입니까.”

16551090366362.png“기억이 완전한 건 아니지만…… 아마도.”

16551090366371.png“그 기억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잖습니까.”

16551090366362.png“그럴까?”

16551090366371.png“네?”

16551090366362.png“그러면…… 이건 누구 기억일까?”

16551090366371.png“!”

말하는 상대의 표정이 너무 어두워 보여서 라틸은 더 무어라 하지 못했다. 차라리 ‘네가 무슨 상관이냐’면서 욕설을 뱉으면 같이 짜증 내줄 텐데. 멀어지는 아이니의 뒷모습을 라틸은 텁텁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칼라인 역시 미간을 찌푸리고서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문득 언젠가 도미스가 한 말이 떠올라서.

16551090395067.png“주인…… 엉뚱한 짓을 한 건 아니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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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한편, 타시르는 라나문과 대신관과 아예 식사까지 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돌입해 있었다.

16551090395078.png“가짜가 진짜 흉내를 내는 건, 거기에서 오는 이득이 있기 때문입니다.”

16551090395083.png“너무 상인다운 생각 아닌가. 세상엔 이득 없이 믿음이나 자존심, 정의감 같은 것만으로 행동하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16551090395078.png“네, 저는 상인이라 그것도 그 사람들의 이득이라고 봅니다. 자기가 믿는 걸 따랐을 때 얻는 성취감, 뭐 이런 종류의 정신적 이득이요.”

16551090395083.png“정신적 이득…….”

대신관은 라나문과 타시르가 나누는 이야기에 끼어드는 대신 조용히 식사를 하면서 언제 황제가 가짜로 바뀌었는지 생각해보았다. 사실 딱 짐작이 가는 지점이 있긴 했다. 가짜 황제가 나타났다가 쫓겨갔을 때. 아마 그때겠지.

16551090395078.png“어쨌든 제 말은 이겁니다. 가짜가 진짜 흉내를 내는 건, 거기에서 오는 이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짜가 진짜 흉내를 그만두게 하려면 그 이득을 끊으면 됩니다.”

16551090395083.png“폐하를 구하러 가지 않을 건가?”

16551090395078.png“모셔와야죠. 하지만 모셔오기만 한다고 별수가 생기진 않잖아요. 레안 황자님이 가짜를 두둔하고 있는 상황인데.”

대신관은 슬그머니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커다란 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1655109043012.png“무슨 수로 가짜가 진짜 흉내를 그만두게 할 건가요?”

대신관의 질문에 타시르가 쾌활해 보일 정도로 활짝 눈웃음을 지었다.

16551090395078.png“그래서 대신관님을 불렀습니다.”

1655109043012.png“나를요?”

16551090395078.png“대신관님의 백화랑술 도움을 좀 받고 싶은데.”

1655109043012.png“성기사들은 왜……?”

16551090395078.png“그전에 라나문 님.”

16551090395083.png“말해라.”

16551090395078.png“아트락시 공작님은 이 일을 알고 계십니까?”

  * * * 타시르에게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 라틸은 자신이 여기서 밤중에 보았던 그 괴물을 떠올리고 그 이야기를 하이신스에게 해주기로 했다.

16551090366371.png‘혹시 그 괴물이 헤움 황자일지도 몰라. 아니라면 아닌 대로 문제지만.’

마음을 먹은 후. 라틸은 하이신스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손님용 궁전을 나와 본궁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라틸이 계단을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16551090458374.jpg“사디 양.”

누군가 친절한 목소리로 라틸을 불렀다. 돌아보자, 아이니가 쓰러졌을 때 라틸이 범인이라면서 마구잡이로 우겼던 그 시녀였다. 이름이 루이스라고 했던가.

16551090366371.png‘뭐야. 왜 저래?’

별로 좋게 엮인 상대가 아닌지라 라틸은 떨떠름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무시하고 갈 입장도 아닌지라 라틸은 일단 멈추어 서긴 했다.

16551090458374.jpg“일전에는 정말 미안했어요.”

라틸이 우두커니 서 있자, 다가온 루이스는 퍽 진심 같은 표정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라틸은 루이스의 진정어린 표정을 전혀 신뢰할 수 없었다. 루이스는 전에도 미안하다면서 라틸에게 퍽퍽한 과자를 보낸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또 미안하다면서 저렇게 사근사근하게 다가오다니……?

16551090366371.png‘또 무슨 꿍꿍이야?’

16551090366371.png“아아. 괜찮아요.”

물론 이해는 갔다. 비밀 특사란 거짓말을 해서 아이니에겐 오해를 풀었지만, 시녀들은 오해를 풀지 못했기에, 아직도 라틸의 가짜 신분인 ‘사디’를 하이신스와 엮어서 의심하고 있지 않던가.

16551090458374.jpg“과자는 맛있던가요?”

16551090366371.png“황후 폐하께 드려서 저는 하나도 먹지 못했어요.”

16551090458374.jpg“!”

16551090366371.png“황후 폐하는 잘 드셨으니 아마 맛있었을 거예요.”

거짓말이다. 라틸이 아이니에게 그 과자를 대접한다면서 도로 준 건 맞지만, 아이니도 그 텁텁한 과자는 단 하나도 먹지 않고 갔다. 하지만 라틸이 일부러 아이니가 그 과자를 먹었다고 약 올리자, 루이스가 상냥한 척하던 입술을 잠시 통제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루이스는 빠르게 표정을 관리하고서 다시 미소를 띠었다.

16551090458374.jpg“신경 써서 준비한 과자를 하나도 못 먹었다니 안타깝네요. 또 보내줄게요.”

16551090366371.png“괜찮아요. 어차피 난 과자를 안 좋아해서 늘 손님 접대용으로만 쓰거든요.”

손님 접대란 말에 다시 루이스의 표정이 흔들렸으나 라틸은 모른 척 계단 위쪽을 쳐다보는 척하며 말을 이었다.

16551090366371.png“그보다 무슨 일로 부른 겁니까? 볼일이 있어서 빨리 가봐야 하는데요.”

그 말에 루이스가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16551090458374.jpg“곧 축제잖아요.”

라틸은 그 말을 듣자마자 루이스가 무슨 꿍꿍이인지 파악했다. 축제에 초대한 다음 망신을 줄 생각인가 보네.

16551090458374.jpg“사디 양은 폐하의 손님으로 여기에 머무르고 있으니, 당연히 축젯날 열리는 파티에 나올 거지요?”

16551090366371.png“초대받으면 가야겠지요.”

파티를 이용해 꿍꿍이를 계획하고 있으면서도 라틸이 파티에 참석할 거란 게 싫은지 루이스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빠르게 되돌렸다. 라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네 파티에 나오는 거 싫지? 나도 싫어. 나도 빨리 내 일 해결하고 우리 집 돌아가고 싶다. 제발 좀.

16551090366371.png“그런데 왜요? 파티 관련해서 제게 할 말씀이라도……?”

16551090458374.jpg“전에 일을 사과할 겸 사디 양에게 드레스를 빌려주고 싶어서요.”

16551090366371.png“드레스요?”

16551090458374.jpg“사디 양은 따로 챙겨온 옷이 없다 들었거든요.”

드레스에 뭔 짓을 해두려고. 라틸이 쉬이 대답하지 않자, 루이스가 친절하게 웃으면서 덧붙였다.

16551090458374.jpg“불안하면 먼저 디자인을 보고 정해요. 괜찮으니까.”

괜찮다는 데도 루이스가 계속 쫓아오는 바람에 결국 라틸은 루이스와 드레스 고를 약속을 잡고 헤어졌다. 그러고서 하이신스를 찾아가자, 하이신스는 이미 그 대화를 보고 받았는지 라틸을 보자마자 떨떠름하게 물었다.

16551090514621.png“정말로 황후의 시녀가 골라주는 옷을 입으려고? 좋은 의도가 아닐 텐데?”

16551090366371.png“손님으로 와 있으면서 싫다고 할 순 없잖아.”

16551090514621.png“싫다고 해. 내가 보내줄 테니까.”

16551090366371.png“됐어. 안 부딪치고 적당히 둥글게 굴러가다 돌아갈 거야. 시녀들이랑 싸워대면서 시선 끌고 싶지 않아. 네가 보낸 드레스 입으면 헛소문은 더 커질 거고.”

그래야 나중에 일이 해결되어서 돌아간 뒤에도 ‘사디’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 남아 있지 않을 테니. 하이신스는 라틸의 의도를 다 이해하진 못하는 눈치였으나 구구절절 캐묻는 대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16551090514621.png“그보다 나한테 물어볼 게 있다니. 무슨 이야기지?”

16551090366371.png“밤중에 여길 돌아다니는 이상한 괴물을 봐서.”

16551090514621.png“괴물?”

16551090366371.png“처음엔 괴물이 아니었지.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걸어갈 때마다 발치에 안개가 피어나긴 했지만 사람처럼 보였어. 그러다가 날 발견하더니 입을 쩍 벌리고 덤벼드는데, 입 크기가 장난이 아니더라. 혹시 아는 괴물이야?”

16551090514621.png“그렇게 들어선 모르는 괴물 같은데.”

하이신스가 고개를 기웃하자, 라틸은 그에게 종이와 펜을 빌려서 자신이 목격했던 그 괴물 생김새를 쓱쓱 그려냈다.

16551090366371.png“네 황후한테 헤움 황자가 계속 나타난다며. 혹시 이 괴물이 아닐까 싶어서 물어보려고.”

라틸이 그린 괴물 그림은 아주 정교하고 예리하진 않지만, 신체 특징을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하이신스는 라틸이 그린 그림을 자세히 살피더니, 곧 종이를 구기면서 중얼거렸다.

16551090514621.png“그렇군. 헤움 같은데.”

16551090366371.png“목적이 뭐 같아?”

16551090514621.png“내 목이겠지. 아니면 아이니거나. 어쩌면 둘 다.”

16551090366371.png“잡지 않아도 돼? 밤마다 여길 배회하는 눈치던데. 좀 찝찝하지 않아?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지 모르잖아.”

16551090514621.png“황후와 너 외엔 본 사람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은 헤움이 돌아다닌단 황후 말을 믿지도 않아.”

16551090366371.png“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 둘 거야?”

16551090514621.png“네 쪽에서 흑마법사라던가 그쪽 일이 공론화 되면 우리도 공론화시켜 보려고. 너는?”

16551090366371.png“내 복귀에 도움 줄 사람이 연락 오길 기다리는 중.”

라틸이 “파티 전에 왔으면 좋겠는데.”라고 인상을 찡그리고서 투덜거리자 하이신스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이 웃었다.

16551090514621.png“황후 시녀가 준 드레스를 입을 수 있다고 대범하게 말하더니. 그래도 신경이 쓰이나 봐?”

16551090366371.png“당연하지.”

라틸은 구시렁거리면서 루이스가 주었던 퍽퍽한 과자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하이신스는 라틸이 떠들어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라틸은 처음에는 하이신스가 자기를 쳐다보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하이신스가 한마디 말도 없이 자신을 뚫어져라 보기만 하자, 나중에는 시선이 신경 쓰여서 점점 목소리를 낮추었다. 결국, 말하던 걸 완전히 멈추고서 하이신스를 본 라틸은 그의 눈빛에서 애정을 읽어내곤 곤혹스러워졌다. 단순히 이쪽을 바라보는 것뿐인데. 그 눈동자 안에는 따뜻한 기운이 일렁였다. 라틸은 우물거리다가 결국 벌떡 일어났다.

16551090366371.png“할 말 다 했으니까 갈게.”

말을 마친 라틸은 얼른 돌아섰다.

16551090514621.png“바래다줄게.”

16551090366371.png“됐어.”

라틸은 딱 잘라 말했지만, 하이신스는 따라 나왔다.

16551090366371.png“됐다니까?”

16551090514621.png“나도 저 아래층까지 내려가야 해서.”

16551090366371.png“…….”

16551090514621.png“특사. 황제에게 뒤에서 따라오라 할 셈인가?”

라틸이 째려보자, 하이신스는 빙그레 웃고서 뒷짐을 지고 한 걸음 옆으로 떨어졌다.

16551090514621.png“이 정도 거리는 괜찮을까?”

라틸이 대답 대신 걸어가자 하이신스는 괜찮단 뜻으로 해석하고서 거리를 둔 채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걷는 속도까지 같아서, 발소리는 계속해서 동시에 들려왔다. 라틸은 눈을 내리깐 채 바닥만 내려다보면서 말없이 걸어갔다. 그러나 계단은 왜 이렇게 많고 복도는 또 왜 이렇게 긴지. 걸어가는 내내 발소리는 왜 이렇게 잘 맞는 건지. 그렇게 얼마나 걸어갔을까. 하이신스가 허탈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16551090514621.png“유학 시절엔 매일 붙어 있었는데. 도대체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16551090366371.png“네가 배신했잖아.”

16551090514621.png“……지금도 생각해. 내가 네게 보낸 편지를 네가 다 받았더라면, 상황은 지금과 달랐을까, 하고.”

편지. 그러고보니 누군가 중간에서 편지를 빼돌렸지.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져서 잊고 있었지만. 라틸은 씁쓸하게 웃고서 물었다.

16551090366371.png“너희 쪽에선 누가 빼돌린 건지 밝혀냈어?”

16551090514621.png“다가 공작. 너는?”

16551090366371.png“나는 아직 조사 중이었어. 조사 중에 일이…….”

터져서 진행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말하려던 순간. 라틸은 어머니가 상황을 설명해 주면서 해주었던 말 중 당시에도 좀 이상하게 여겼던 부분을 떠올리고 우뚝 멈추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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