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아버님들은 경쟁 중2020.12.23.
‘안 되겠다. 내가 옆에서 민망해서 안 되겠어.’
칼라인이야 모르는 사람이라지만, 아이니가 자꾸 저렇게 나오면 이상한 소문 나는 거 진짜 한순간이라고. 아이니는 한 나라의 황후이다. 라틸은 카리센 황후가 타리움 후궁과 소문 나는 걸 듣고 싶진 않았다.
“폐하, 실례합니다.”
마음을 먹자마자 라틸은 슬그머니 아이니와 칼라인 사이에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며 둘을 떼어 놓았다.
“실례합니다, 실례해요.”
둘 사이로 물흐르듯 지나가며 ‘삭삭’ 밀어내자 아이니는 애통하게 울다가 자기도 모르게 뒤로 주춤 주춤 물러났다. 눈물을 닦으면서 그녀가 라틸을 쳐다보았다. 넌 뭐야, 하는 눈으로. 뭐겠어요. 이 남자 애인입니다. 라틸은 속으로만 구시렁거리면서 두 손으로 숙소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황후 폐하, 칼라인과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시는데. 들어가서 하시는 게 어떨까요? 남들 보기에 오해를 살 만한 광경이 많이 연출되니 옆에서 보기 걱정스러워 그럽니다.”
아이니는 그 말에 입술을 꾹 닫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거 보면 분명 침착한데 말이지…….’
“난 들어가고 싶지 않은데.”
무슨 소리야 칼라인. 너도 당장 들어가. 선만 긋지 말고. 오해면 오해다 아니면 아니다 어디부터 오해다 제대로 말을 해! 라틸은 말없이 칼라인을 숙소 방향으로 떠밀었다. * * * 숙소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자 아이니는 아까보다 한결 차분해졌다. 하지만 곧은 자세로 말없이 앉아 있을 뿐 눈동자는 여전히 혼란으로 가득했다. 돌발 행동으로 보는 사람을 아연하게 만들더니. 자기도 뭐가 뭔지 모르겠나 보다. 어떻게 해야 저렇게 되는진 모르겠지만.
“자, 차 나왔습니다.”
일단 라틸은 따뜻한 차를 아이니 앞에 내려놓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칼라인이 또 일어서서 도우려 했지만, 라틸은 고개를 빠르게 젓고서 그냥 앉아 있으라고 눈짓했다. 황제의 특사가 제자리에 앉아 후궁의 시중을 받는 건 이상하니까. 그렇게 해서 라틸은 탁자 위에 단출한 먹을거리를 차려냈다. 라벤더 향이 나는 찻잔 세 개와 황궁에서 나온 것치곤 썩 좋아 보이지 않는 과자 몇 덩어리.
‘과자가 황후님이 드시기엔 눅눅해 보이지만 내 책임은 아니지.’
“과자가…….”
“시비 걸었던 걸 사과한다고 황후님 시녀들이 가져다줬어요. 전 과자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렇게 바로 폐하께 대접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네요.”
라틸이 웃으면서 설명하자 아이니가 창밖, 아마도 시녀들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곳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라트라실 황제께서 보낸 특사에게 실례를 했군. 미안하네. 공식적으로 온 게 아니다 보니, 내 시녀들은 자네를…… 좀 오해하고 있거든.”
뭘로 오해하는진 차마 말 못 하겠나 보다. 어차피 다 아는데. 어쨌든 이 정도만으로도 됐다 싶어서 라틸은 칼라인에게 눈짓했다. 자, 봤지? 나쁜 사람 아니야. 얘기라도 한 번 해봐. 얼른. 라틸이 이렇게까지 하자, 신호를 받은 칼라인은 마지못해 아이니에게 물었다.
“왜 자꾸 이상하게 구시는 겁니까?”
그러나 칼라인이 말 한마디를 하는 순간. 아랫사람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던 차분한 황후는 순식간에 애처로운 눈빛을 가진 슬픈 사람으로 변했다.
“그대를 본 후 내내 그대가 나오는 꿈을 꾸고 있네.”
그런 애틋한 얼굴로 한 말이 꿈 얘기였다. 대체 무슨 사연이야. 무슨 사연이기에 칼라인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저렇게 휩쓸려? 보나 마나 아주 슬프고 지독한 사연이겠지, 생각하던 라틸은 입을 쩍 벌렸다. 꿈?
‘뭐야? 이 황후님, 지금 칼라인이랑 꿈에서 연애하고서 이러는 거야? 아니 이 사람이……?’
칼라인 역시 황당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이니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엔 그게…… 내 전생 같아.”
칼라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황후 폐하께선, 황후 폐하가 전생에 저와 연인 사이였다 주장하시는 겁니까?”
아이니는 그 말에 대답을 하려다가 멈칫하더니 잠시 고개를 기웃했다.
‘왜 저러지? 새삼 말도 안 된단 생각이 드나?’
“황후 폐하. 저는 폐하의 전생 연인이 아닙니다. 설령 그렇다 한들 저는 현생을 살고 있는데 전생에 연인이었다고 해봤자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 그대는 전생이 아니고 나만…….”
아이니는 말을 하다가 또 입을 도로 다물었다. 역시 자기가 생각해도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드나 보다.
‘맞아. 아이니만 환생한 거고 칼라인은 안 한 거면 더 말이 안 되지.’
아이니와 칼라인은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도 않는데, 아이니가 전생에 칼라인과 연인 사이가 되려면 칼라인 나이가 대체 몇 살이어야 하는 거야? 잠시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말을 가장 많이 하던 게 아이니인데 그녀가 조용해져서 그렇다. 칼라인은 석상처럼 앉아서 눈을 내리깐 채 입도 뻥긋하지 않고. 결국, 그 상태로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보내기를 30여 분.
“이만 가 보겠다.”
아이니도 더 할 말을 찾기 어려운지 몸을 일으켰다. 아이니가 나가자마자 라틸은 다시 한번 더 칼라인에게 캐물었다.
“진짜 모르는 사인 거 확실하지?”
이젠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칼라인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 모르는 사람 같긴 하더라. ……그래도 혹시 의심 가는-?”
“없습니다.”
“그래.”
* * * 한밤중. 또다시 헤움이 나타났다. 라트라실 황제의 특사도 온 데다 요 며칠 헤움 황자가 나타나지 않기에 조금 안심했던 아이니는, 창가에 기대어 선 헤움을 보자 다시 괴로워졌다.
헤움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이니 뿐만 아니라 아이니의 친구들에게도 예의를 지켜주던 사람. 그랬기에 아이니는 헤움이 친구 레들러를 죽였단 의심을 하게 되자, 되살아난 헤움은 진짜 헤움이 아니라고 선을 그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되살아난 헤움을 없앨 방도를 찾으면서도 그를 마주할 때면 심장이 술렁이고 가슴이 갑갑해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요즘은 그런 기분이 드는 남자가 둘이라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대체 왜 자꾸 날 찾아옵니까?”
“그리워서.”
“그러면 숨어서 보세요.”
“그건 괜찮아?”
“아니, 안 돼. 찾아오지 마세요.”
“그럼 네가 그리울 땐 어떻게 하지?”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떠올리면 되잖아요.”
아이니는 헤움의 눈치를 보다가 지금 상황. 죽은 그가 걸어 다니는 이 상황을 빗대 덧붙였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채로 두어야 합니다.”
의도를 알아들은 건지, 헤움은 창가에 앉아 한 손으로 커튼을 만지작거리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예전에 네가 물은 적이 있지. 날 사랑하는 네 마음이 더 클까, 널 사랑하는 내 마음이 더 클까 하고. 이제 그 답이 나왔군.”
그 말에 아이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헤움은 한숨을 내쉬고서 돌아섰다. 항상 이런 식이다. 그는 오래 머물지도 않았다. 그때.
“잠시만요.”
나가려는 그를 아이니가 먼발치에서 붙잡았다. 말로 붙잡을 뿐이었지만, 헤움은 바로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니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혹시 이 궁전 안에 ‘사람이 아닌 사람’이 황자님 말고 또 있나요?”
아이니의 질문에 헤움이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그런 걸 왜 묻지?”
스산한 목소리에는 의심이 베어 있었다.
“날 없앨 방도를 찾는 건가.”
맞는 말이지만 연인이 던지는 저런 질문은 듣는 사람을 괴롭게 했다. 이 때문에 아이니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이상한 사람을 봐서 그래요.”
아이니가 말하는 ‘이상한 사람’은 칼라인이었다. 몇 시간 전. 아이니는 칼라인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이전에는 갑작스럽게 칼라인에 대한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기 시작해서,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말을 하면서 정리하다 보니 깨닫게 된 것이다. 자신이 기억하는 전생 속 칼라인은 지금과 똑같은 모습이라는 걸. 닮은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수준이 아니라 그냥 아예 똑같은 사람이었다. 환생하더라도 육신을 주는 부모가 다르니 외양은 바뀌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칼라인이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아니라면. 그리고 그렇게 오랜 삶을 젊은 모습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손님들이 머무는 곳에 괴물이 하나 있긴 했지.”
그때 헤움이 떠나면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이니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럼 역시 칼라인은……! * * *
“뭔가 착각한 거 아닐까?”
아침 일찍 로르드 재상을 찾아온 아트락시 공작은 ‘지금 황제는 가짜. 쫓겨난 황제가 진짜’란 이야기를 듣자 웃으면서 물었다. 조롱조의 웃음에 로르드 재상은 발끈했다.
“지금 내 아들 말을 의심하나?”
아트락시 공작은 그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말도 안 된다고 손을 저었다.
“내가 자네 아들을 왜 의심하겠나. 자네랑 달리 착하고 순한 애인데.”
“그럼? 그런데 왜 착각 아니냐 묻는 거지?”
“내가 의심하는 건 자네가 아들에게 물려준 머리라네.”
“아트락시이!”
로르드 재상이 버럭 화를 내자 아트락시 공작은 차분하게 차 마시는 시늉을 했다. 로르드 재상은 그 얄미운 꼴을 눈알이 빠져나 노려보며 설명했다.
“자네 아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하렘에 처박혀 있으니, 물론 자네 입장에선 내 말을 믿고 싶지 않겠지. 자네 아들은 짐작도 못 하는 걸 내 아들이 알아낸 거니까! 하지만 아트락시. 내 아들은 오랫동안 폐하를 짝사랑해 왔네. 국서 자릴 노리고 간 누구와 다르게 내 아들은 순수하게 폐하 하나만 바라본다 이 말이야.”
“아들 욕 그만하게.”
“흥. 멍청한 아들이라도 편들고 싶은가 보군?”
“아니, 자네 아들 욕 그만하라고. 정략결혼을 하면서 진지하게 사랑하는 게 순수한 건가? 멍청한 거지.”
“네 이놈 아트락시이!”
로르드 재상은 자꾸 라나문을 게스타와 비교하면서 내리깔고, 그때마다 아트락시 공작도 지지 않고 깐죽거리는 바람에 두 사람의 대화는 생각 이상으로 시간을 오래 끌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마쳤을 즈음, 두 사람은 우선 쫓겨난 가짜 황제를 찾아보긴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맞추었다. 아트락시 공작은 재상저를 떠나기 전 그에게 철저히 당부했다.
“우선은 게스타를 조심시키게. 절대로 가짜가 가짜란 걸 아는 척하지 말고, 오히려 가짜 옆에 딱 달라붙어 있으라 해.”
“왜?”
“그래야 가짜가 의심을 안 하지!”
“알았네. 내 조심시키지.”
차분하게 그 자리를 벗어난 아트락시 공작은 자신의 저택에 돌아가자마자 사람들에게 전에 쫓겨난 가짜 황제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조사해보라 지시했다. 그리고 집사에게 지시해 라나문에게도 편지 한 통을 전하게 했다. * * *
“왜 그러십니까, 도련님?”
라나문이 아트락시 공작이 보낸 편지를 펼치더니 인상을 찌푸린 채 가만히 굳어 있자, 그걸 본 시종이 물었다. 그러나 시종의 질문에도 라나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은 후에야 그는 편지를 접으며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군.”
“뭐가 말입니까?”
라나문이 좀 제정신을 차린 것 같기에 시종이 얼른 다시 물었다. 처음 물었을 땐 별생각 없이 질문한 것뿐이었는데. 라나문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지금은 정말로 아트락시 공작이 무슨 편지를 쓴 건지 몹시 궁금했다. 라나문은 아트락시 공작이 보낸 편지를 몇 갈래로 찢어 태우면서 차갑게 대답했다.
“지금 황제는 가짜라고. 진짜 폐하를 찾아올 테니, 가짜와 거리 두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