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중간에서 입장이 난처하게 됐다2020.12.20.
“폐하께서 로드일 가능성이 있다고요?”
“그래. 동생이 이렇게 되어서 나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나는 이 나라를 지켜야 하는 황족이네. 동생을 살리기 위해 세상 사람들을 다 죽일 수는 없어.”
“…….”
“동생이 내 입장이었어도 같은 행동을 했을 거야. 똑똑한 애니까.”
레안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넛은 눈을 내리깔았다. 레안은 덩달아 서넛의 발치를 보았다. 딱히 볼만한 것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러고 선 거겠지. 레안은 혀를 찼다.
“알아. 자네가 라틸을 얼마나 좋게 보는지. 하지만 서넛.”
“예.”
“아버지께서도 라틸을 염려하셨어. 실제로 조사를 명하시기도 했다 알고 있네. 아니, 굳이 내가 얘기 안 해줘도 자네도 알잖아? 아버지가 라틸에 대해 걱정했었단 거.”
레안은 말을 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아버지가 그러셨지. 그때도 자네는 아버지가 라틸을 조사하는 걸 반대했다지. 나중에 라틸이 이 사실을 알면 상처받을 거라고.”
“……지금도 상처받으셨을까 염려됩니다.”
영지에서 돌아온 서넛은 황제에게 다녀왔단 보고를 하다가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다. 혹시나 싶어 그 자리에 있던 레안은, 서넛이 대번에 가짜가 가짜란 걸 알아보자 가짜 황제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 달라 부탁하고서 구구절절 모든 사정을 설명했다. 소꿉친구인 서넛과 이 일로 반목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 설명을 했는데도 서넛이 영 못마땅해하는 눈치이자, 레안은 가슴이 아파졌다.
“서넛. 라틸이 로드가 아니란 게 확실해지면 당연히 제자리로 모든 걸 돌려놓을 거야. 라틸이 로드라면, 더 이상 라틸이 아닌 거고, 로드가 아니라면 라틸은 내 동생이야.”
“…….”
“난 자네가 날 도와줬으면 좋겠어. 자네가 근위기사로서 그대로 하던 임무만 해주어도, 가짜를 의심할 사람은 훨씬 줄어드니까.”
레안이 진심으로 하는 소리에 서넛은 말없이 계속 발치만 내려다보다가 깊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결정을 내린 표정. 레안은 긴장해서 친구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러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 나오자, 레안은 안심해 활짝 웃고서 친구의 어깨를 꽉 끌어안고 등을 두드렸다.
“잘 생각했네. 고마워.”
“선황제폐하를 위한 일이지 전하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서넛이 얄밉게 하는 소리에도 레안은 웃으면서 그의 등만 두드렸다.
“그럼 가짜 황제는 누구입니까?”
“음. 그건 비밀로 하겠네.”
“가짜지만 제가 모셔야 할 분입니다. 정보가 아예 없으면 곤란한데요.”
“괜찮아. 자네는 하던 대로 하면 돼. 그쪽이 알아서 잘 따라줄 테니.”
“……예.”
“이제 막 도착했다지? 지쳤을 텐데, 여기에 무거운 얘기까지 더해서 미안하군. 가서 좀 쉬게.”
레안이 서넛의 등을 두드리면서 웃자, 서넛은 다시 한번 더 인사를 올리고서 방 밖으로 나갔다. 레안은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한 손을 흔들며 인사하다가, 문이 완전히 닫히고 서넛이 보이지 않게 되자 지친 걸음으로 소파로 걸어가 눈을 감고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라틸. 식사는 제대로 하고 다니는 거냐……. 그냥 얌전히 신전으로 오면 안 되는 걸까. 응?”
* * * 서넛은 기사단 숙소로 돌아가는 대신 곧장 궁전 밖으로 나가, 골치 아픈 일이 생길 때마다 자주 가는 술집으로 향했다.
“늘 먹는 거로.”
그런데 술과 안주를 시키고서 구석 자리를 잡고 앉자, 점원이 물컵과 딱딱한 빵이 든 접시와 함께 작은 쪽지를 주고 갔다. 서넛은 쪽지를 쥐고서 점원을 쳐다보았지만, 점원은 서넛 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고서 얼른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폐하인가?’
서넛은 황급히 쪽지를 펼쳐보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쪽지를 쓴 사람은 근위기사단 소속 소스란 경이었다. 그래도 남긴 내용은 라틸과 관련되어 있긴 했다. -서넛 경, 지금 황제는 가짭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겠습니다. 서넛 경이 오실 때까지 매일 자정에 서문 수차 옆 커다란 나무 근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서넛은 시계를 확인했다. * * * 그날 밤. 일부러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때운 서넛은 약속 시각보다 한 시간 정도 이르게 서문으로 나갔다. 서문으로 나가 10분 정도 걸어가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돌아가는 거대한 수차가 보인다. 그 부근으로는 커다란 나무가 많았는데, 아직 소스란은 도착하지 않은 듯 아무도 없었다. 서넛은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후. 여기 계속 서 있으면 혹시 지나가는 사람이 수상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 싶어서, 수차 관리인이 사용하는 건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소스란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불 한 점 들어와 있지 않아 적막한 사무소 안은 서넛이 나무로 된 문을 열자 ‘끼이익’ 하는 오싹한 소리가 났다. 안으로 들어간 서넛은 문을 닫고 등불로 사용할 만한 게 없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그는 무언가를 발견하고서 한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거의 동시에 그 부근에서 등불 두 개가 동시에 켜졌다. 서넛은 눈썹을 조금 치떴다. 빛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레안 황자였다. 눈이 마주치자 레안은 한숨을 내쉬고서 안타깝단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네가 날 선택하길 바랐는데.”
그의 양옆에는 다른 근위기사들이 우르르 서 있었다. 하지만 소스란은 없었다. 서넛은 익숙한 부하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레안에게 물었다.
“소스란은 어디 있습니까.”
소스란이 거짓말을 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서넛에게 남긴 편지를 레안이 먼저 발견한 게 문제였을 뿐.
“같은 곳에 데려다주겠네. 잡아.”
레안의 명령이 떨어지자 동시에 검집에서 칼 뽑히는 소리가 났다. 여러 명이 동시에 내는 ‘스릉’거리는 검 소리는 두려워할 만큼 위협적이었으나, 서넛은 태연하게 자신의 검을 꺼냈다. * *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라틸은, 혹시 최근에 만난 그 수상한 괴물의 정체를 알 수 있는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 싶어 칼라인을 데리고 미로 정원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돌아다녀도 괴물에 대한 흔적이 보이지 않자, 라틸은 정돈된 수풀 사이로 삐져나온 라벤더 향을 맡으며 물었다.
“흑림 암살자가 타시르를 만났을까?”
“글쎄요. 하지만 이런 게 전문인 이들이니 언제든 말은 잘 전할 겁니다.”
“그렇겠지. 서넛 경은?”
“글쎄요. 서넛 경도 슬슬 궁전에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타시르랑 연락이 되면 라나문이나 게스타를 좀 설득해 보라 해야겠어. 아. 대신관도.”
“……대신관도 말입니까? 위험하지 않을까요?”
“대신관은 오히려 내 누명을 쉽게 벗겨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한참 진지한 얘기를 하면서 걸어가는 도중이었다. 미로 정원의 끝자락에 도착해 넓은 풍경을 앞에 두게 되자, 라틸은 그 얘기 하던 걸 멈추었다. 대신 주위를 둘러보면서 ‘예쁘긴 예쁘네’ 하고 카리센의 경치를 마지못해 칭찬하다가, 내내 궁금했던 걸 재차 물었다.
“그런데 넌 진짜 아이니 황후랑 모르는 사이 맞아?”
“또 그 얘기십니까.”
칼라인은 라틸이 아이니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싫은지 대번에 안 그래도 딱딱한 인상을 더 찌푸렸다.
“에이, 뭘 화내고 그래.”
그걸 본 라틸이 칼라인의 옆구리를 콕콕 팔꿈치로 찔렀으나, 칼라인은 팔을 뻗어 라틸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딱 붙이고서 단호하게 말했다.
“자꾸 화났다 그러시면 정말 제대로 화낼 겁니다.”
“내봐. 응. 내봐.”
그래도 라틸이 웃으면서 깐죽대기만 하자, 칼라인은 라틸이 완전히 자기와 마주 보게 했다. 그러고는 내내 쌓아뒀던 걸 이제야 푼다는 듯이 정말로 잔소리를 시작했다.
“솔직히 좀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어떤 게?”
“아이니 황후가 누굽니까.”
“누구긴 누구야 카리센 황후지.”
“낯선 여자입니다.”
“……아 뭐. 따지자면 그렇게 부를 수도 있긴 한데.”
‘친하진 않으니까.’
“그런데 낯선 여자가 자꾸 저한테 눈길을 보내고 따로 보자 하고 그럽니다. 그것도 아가씨 앞에서요.”
“음. 그렇지.”
“전 누굽니까?”
“……익숙한 남자?”
“아가씨 애인입니다.”
“!”
라틸은 애인 소리에 어색하게 웃었으나, 화내란 소리에 진짜로 화낼 작정인지 칼라인은 무뚝뚝하게 잔소리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아가씨 애인한테 낯선 여자가 막 추파 부리고 그러는데, 그거 보면서 ‘자리 비켜줄까?’ 이런 신호나 하고 있고.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내, 내가 언제 자리 비켜준댔어? 왜 없던 일을 막 만들어내?”
“어제 아침.”
“!”
“말하진 않았지만 말하려고 했을 텐데. 다 봤습니다.”
아니, 얘는 그건 또 언제 봤대……. 라틸은 괜히 칼라인을 자극했다고 후회했다. 별말 안 하고 조용히 있길래 그냥 놀린 건데. 어제 아침 일까지 나오다니.
‘칼라인은 평소엔 과묵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차곡차곡 다 쌓아두나 봐. 그러다 기회가 될 때 흘려보내는 타입.’
“제가 다른 사람 볼까 봐 걱정 안 되십니까?”
“다른 사람 볼 거야?”
“안 볼 거지만 그래도 신경은 좀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았어.”
“제 주위로 다른 여자가 오기만 해도 경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전 잘난 남자니까요.”
안 그럴 것 같더니. 자기 잘생긴 건 잘 아는가 보구나. 라틸은 괜히 본전도 못 찾아 먹은 느낌에 시무룩해져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러면 네가 구속받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난 배려를 하는 거지. 널 믿으니까.”
“전 구속 받는 걸 좋아합니다, 주인.”
“!”
칼라인이 갑자기 귀에 대고 속삭이는 바람에, 라틸은 소름이 오싹 돋아서 그의 발등을 밟고 말았다. 그 바람에 라틸이 몸을 휘청이자, 칼라인은 바로 어깨를 안더니, 엄청난 힘으로 균형 잡는 걸 손쉽게 도와주었다. 라틸은 잠시 펭귄처럼 뒤뚱거리다가, 헛기침하면서 칼라인의 발등을 한 번 더 아프지 않게 밟았다.
“이건 뭐 하는 겁니까?”
“발가락 구속.”
“…….”
그걸 본 칼라인이 ‘유치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자, 민망해진 라틸은 발끈해서 마구잡이로 그를 몰아붙였다.
“왜 한숨 쉬고 그래? 해달라며. 구속해달라며.”
하지만 칼라인은 조금도 뒤로 밀려나지 않고, 라틸이 몰아붙이면 몰아붙이는 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때문에 자신이 혼자서 칼라인의 품으로 자꾸 밀고 들어가는 꼴이 되자, 라틸은 그를 몸으로 밀어내길 멈추고 제자리에 우뚝 섰다. 라틸이 팔짱을 끼고 째려보자, 그제야 칼라인은 화내는 척을 멈추더니 희미하게 웃으면서 라틸을 놀려댔다.
“제가 원하는 구속이 뭔지 잘 짐작이 안 가시나 봅니다, 주인. 어떻게. 원하면 시범이라도 보여드리는 게 나을지.”
“시범이라니?”
“보여드릴까요?”
“해봐.”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칼라인은 라틸의 양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자연스럽게 어깨와 팔을 타고 내려가 라틸의 양 손목을 잡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라틸의 두 손이 열중쉬어 자세가 되도록 하더니, 두 손목이 아프지 않게 겹쳐지도록 잡고서 웃었다.
“제가 아가씨를 잡아 버렸네요.”
“!”
뭘 하나 싶어 가만히 지켜보던 라틸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칼라인을 쳐다보았다.
“너 이런 거 좋아해?”
“예.”
“그럼 다른 여자들이 너한테 관심을 보일 때마다 내가…… 이런 걸 해줘야 해?”
라틸이 마른침을 삼키고서 묻자, 칼라인은 참지 못하겠단 듯 라틸을 놓아주더니 입술을 깨물고 웃음을 참으며 어깨를 떨어댔다. 그걸 본 라틸은, 그제야 자신이 완전히 놀림 받았단 걸 깨닫고서 가자미눈을 떴다.
“이보시오 용병왕.”
라틸이 짜증스럽게 불러도 칼라인은 계속 어깨만 떨어댔다. 라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서 칼라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만 웃고 가자.”
그런데 몇 걸음이나 걸어갔을까. 갑자기 수풀을 확 헤집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이곳에서 자신은 타리움 황제의 특사일 뿐이기에, 라틸은 얼른 칼라인의 팔을 놓아주고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빠른 속도로 걸어오는 사람은 아이니였다. 아니, 빠른 속도로 걸어오는 정도가 아니다. 그녀는 거의 뛰는 거나 다름없었다.
“무슨 일 있나?”
의아해서 라틸이 중얼거리고 있자니, 칼라인의 코앞까지 다가온 아이니가 라틸을 밀치고 칼라인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기며 외쳤다.
“뭐 하는 거야! 사람 좀 똑바로 봐 이 멍청아! 제발!”
황후답지 않은 말투에 눈물이 고인 눈동자. 원통한 목소리.
라틸은 얼결에 옆으로 튕겨 나간 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아이니를 보았다. 바로 방금 전 칼라인이 이럴 때 자기를 챙겨 달라고 하긴 했는데…….
‘아니, 진짜로 뭐 있는 거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