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누구십니까?2020.12.16.
이 괴물이 지금 누구한테 괴물이라 하는 거지? 괴물에게 괴물 소리를 들은 라틸은 황당했다. 하지만 괴물은 정말로 당황한 눈치였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꼴은 조금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그걸 본 라틸은 마음을 빠르게 잡았다.
‘지금은 저 괴물이 왜 저러는지 분석할 때가 아냐.’
상대가 두려워하고 있으니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 몰아붙여야 한다. 근거 없는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땐 근거를 알기 전에 일단 휘둘러야 한다. 사태 파악을 못 하고 있는 건 상대도 마찬가지. 라틸은 몇 초 만에 판단을 내리고서 입가에 미소를 띠고 괴물을 향해 돌진했다.
“죽어라!”
거기에 음향 효과를 넣어 주자, 괴물은 반사적으로 돌아섰다. 먼저 달려들다가 튕겨버린 게 조금 전 일인지라 일단 생각할 틈도 없이 달아나는 듯했다.
‘일단 잡자. 혹시 틀라 새끼와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
라틸은 최대한 속도를 내었다. 하지만 그자가 불이 다 꺼져서 앞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 미로 같은 정원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추적이 쉽지 않았다.
‘젠장.’
결국 라틸은 욕을 뱉으면서 멈춰섰다. 잘 깎아놓은 수풀은 라틸의 키보다 1.5배 정도 더 높았다. 그런 수풀로 된 미로 속에 들어가면 낮에도 길을 찾기 어려웠다. 당연히 한밤중에는 더욱더 어려울 터. 그런 데다 상대의 인기척조차 더는 느껴지지 않자, 라틸은 결국 추적을 그만두고 미로를 빠져나왔다.
‘무리해서 쫓다가 기습당하는 것보단 나아.’
아까는 대체 어떻게 그 괴물이 튕겨나간 건지 모르겠지만 또 같은 일이 있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칼라인?”
그런데 왔던 길을 돌아가 숙소에 가려고 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칼라인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언제 여기 왔어?”
라틸이 다가가자 칼라인은 미로 정원 쪽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깨어보니 옆에 안 계시기에 찾으러 나왔는데…… 이상한 남자를 쫓으셔서. 누굽니까?”
“모르겠어.”
“모르는데 쫓으셨습니까?”
칼라인의 목소리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라틸이 위험한 짓을 한 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투였다.
“뭐 어쩌겠어.”
라틸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작은 다리를 건너 숙소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습격자가 누구인지 하나하나 확인하고 쫓진 않잖아?”
칼라인은 자연스럽게 옆에 나란히 붙었다.
“습격자요? 아가씨를 습격했습니까?”
“날 습격하려고 온 건 아닌 것 같았어. 수상하게 지나가는 길이길래 그냥 내가 쫓아간 거거든.”
“주인!”
“쉿.”
라틸이 입에 손을 대고 말을 조심하란 신호를 하자, 칼라인은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에 손바닥을 댔다.
“나한테 들키니까 날 습격하더라고. 그리고 밖에선 둘이 있을 때도 주인 소리 안 하기로 했잖아.”
“후…….”
“근데 내가 쫓던 사람 말야. 사람이 아닌 것 같더라. 입 모양이 이상했어.”
칼라인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그런데 다짜고짜 쫓아가셨다고요? 안 무서웠습니까?”
“거기까진 생각을 못 해봐서.”
칼라인은 라틸의 대답에 더욱 곤란하단 표정을 지었다. 라틸이 너무 무모하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하지만 거의 숙소 근처에 도착하자 그는 곧 가볍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건 여전하시군요.”
“내가 뭘 여전해?”
칼라인은 대답 대신 손을 쓱 옆으로 내밀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라틸의 손을 잡았다.
“이 와중에?”
라틸이 황당해서 묻자 칼라인은 태연히 대답했다.
“이 와중이니까요.”
라틸은 자신의 손을 완전히 감싼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다가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져서 시선을 돌렸다.
“그거 알아? 넌 가끔 바람둥이 같아.”
* * * 다음 날 아침. 라틸은 하이신스가 미리 챙겨준 단정한 회색 의복을 입고, 머리카락 역시 하나로 깔끔하게 묶어 올리려 시도했다.
“젠장. 뻑뻑해.”
하지만 조각상 분장을 할 때 회백색으로 변해버린 머리카락은 아직까지도 너무 뻣뻣해 제대로 빗질조차 할 수 없었다. 라틸이 거울을 보며 끙끙거리자, 칼라인이 다가오더니 라틸을 의자에 앉히고 자신은 뒤에 서서 손으로 머리카락을 빗겨주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색은 언제 돌아올까요?”
“몰라. 빨리 돌아오면 좋을 텐데.”
“회백색은 싫으십니까?”
“그건 아닌데 지금은 너무 뻣뻣하잖아.”
라틸은 칼라인의 손에 머리를 맡긴 채 한숨을 내쉬다가, 돌연 칼라인의 부드러운 손길을 의식하고는 우뚝 행동을 멈추었다. 라틸은 3cm도 빗기 어렵던 머리카락인데. 칼라인은 신기할 정도로 머리를 참 잘 빗었다. 심지어 아프지도 않게.
“……네가 머리 빗겨주니까 졸려.”
그 바람에 갑자기 잠이 와 중얼거리자, 머리 위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주무시겠습니까?”
“옷 구겨지잖아. 아침 약속도 있고.”
그러다 라틸은 귓바퀴를 스쳐 지나간 손길을 느끼고서 소름이 돋아서 등을 세웠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머리를 들자, 칼라인이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히 올리고 있었다.
“안 주무신다니 깨시라고.”
“이보세요, 용병왕.”
칼라인은 대답하는 대신 라틸의 이마에 그대로 입을 맞추더니, 바로 등을 밀어 라틸이 자연스럽게 의자에서 일어나게 해주었다.
“가시지요 주인.”
* * * 하이신스가 보낸 심부름꾼이 안내한 곳에 가보니, 이미 하이신스와 아이니는 도착해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이구야.’
하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는 전혀 부부다운 면이 없었다. 사랑 없이 정략 결혼한 부부들도 최소한 동반자로서의 애정이나 우정, 혹은 호감이 존재하긴 하는데. 저 둘은…….
‘아직도 사이가 많이 안 좋네.’
심지어 둘 다 불편해하긴 마찬가지였는지, 방문자가 들어오자 거의 동시에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안심해서 고개를 돌린 아이니는, 칼라인을 보자마자 다시 얼굴 근육이 굳어서 머리를 숙였다. 라틸은 그녀가 괜히 포크를 만지작거리는 걸 똑똑히 보았다.
‘아직도 저러네. 진짜 아무 사이 아닌 거 맞나? 아닌 거 같은데?’
심지어 하이신스조차 고개를 기웃하며 아이니의 이마를 쳐다볼 정도였다. 수상하게 여겨졌으나, 일단 라틸은 아이니 쪽으로 다가가 하이신스와 미리 약속한 대로 이곳에서 자신이 사용할 가짜 신분을 댔다.
“라트라실 폐하의 비밀 특사 사디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말씀드려야 할 일이 있어 직접 오게 되었습니다.”
아이니는 포크에서 손을 떼고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그녀의 시선이 다시 물 흘러가듯 칼라인에게로 다시 갔다.
‘나한텐 관심이 아예 없네.’
칼라인에게 닿은 아이니의 눈동자가 쇳덩이에 붙은 자석처럼 완전히 고정되자, 하이신스가 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다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눈으로 라틸이 앉을 자리를 가리켰다.
“저쪽에 앉으시오.”
라틸은 얼른 하이신스가 알려준 자리에 앉았다. 그 사이에도 아이니는 여전히 칼라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정도로 노골적인데, 시선을 받는 칼라인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 때문일까.
“타리움 황제 폐하의 후궁 칼라인입니다.”
칼라인이 굳이 자신을 용병왕이 아니라 후궁으로 소개하는 바람에, 라틸은 얼른 덧붙여야 했다.
“황후 폐하. 저희 두 사람은 비밀 특사이니, 칼라인 님이 이곳에 온 건 비밀에 부쳐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이니는 라틸 쪽으론 관심도 주지 않고 있었다. 라틸은 또 시무룩해져서 어깨를 떨구었다.
‘나도 좀 봐주지.’
하지만 무시당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누가 봐도 아이니는 라틸을 일부러 무시하는 게 아니라, 정신이 나가 다른 쪽은 신경도 못 쓰는 눈치였으니.
“후궁……인가.”
아이니가 충격받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칼라인은 “네.” 하고 덤덤히 대답한 다음 라틸의 옆자리에 앉았다. 칼라인의 태도도 여전했다. 저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란 태도. 아무 사이도 아니란 태도. 라틸은 앞에 놓인 냅킨을 천천히 펼치면서 아이니를 빠르게 곁눈질했다.
‘혹시 알던 사이가 아니라 칼라인한테 한눈에 반한 건가?’
* * * 식사하는 동안 라틸은 아이니에게 타리움에서도 죽은 틀라 황자로 추정되는 이가 계속 문제를 일으키고 있단 이야기를 해준 다음, 로드의 부활에 관한 전설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그렇구나.”
다행히 아이니 역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자 애써 칼라인에게서 시선을 떼고 제대로 이야기를 했는데, 개중엔 놀라운 이야기도 있었다.
“그대가 그렇게 말해주니 나도 내가 미치지 않았단 확신이 들어서 기쁘구나…….”
“사디입니다.”
“그래, 사디 경.”
‘난 진짜 아예 시야에 없나 보네.’
“헤움이 처음 나타났을 땐 내 앞에 모습조차 드러내지 못했지. 하지만 내 시녀가 죽고 시체가 사라진 후에는 모습을 드러냈어. 난 헤움이 내 시녀 시체를 먹……고서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어쩌면 틀라 황자님과 헤움 황자님이 손을 잡았을 수도 있겠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로드란 존재가 부활하면서 두 사람도 같은 시기에 어둠에 물든 건지도 모르지 않는가?”
“라트라실 폐하께선 틀라 황자를 로드로 추정하고 계시거든요.”
내가 내 이름 부르려니 이상하네. 라틸이 샐러드 양배추를 괜히 뒤적이고 있자니 아이니가 물었다.
“헤움이 로드일 확률은 없는가?”
“제가 알기론 틀라 황자님 쪽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가능성은 낮지만 헤움 황자님이 로드일 수도 있지요.”
“…….”
“일단 둘 다 죽었던 자들이니 다시 잠들게 해야 합니다. 이건 분명해요.”
라틸은 마지막 말을 하면서 아이니의 눈치를 살폈다. 어쨌든 아이니는 헤움과 연인이었으니, 혹시 이 말에 불쾌해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다행히 아이니는 라틸의 말에 바로 동의해주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라틸은 안심해서 이번에는 하이신스 쪽을 보며 말했다.
“라트라실 폐하께선 헤움 황자님과 틀라 황자님, 그 외 다른 악한 존재들에 대한 정보를 교류하고 협력해 이 일을 같이 해결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이신스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라틸이 아이니를 보자, 아이니도 흔쾌히 대답해주었다.
“나도 성의껏 돕겠다고 폐하께 전해주게.”
“예.”
그 후 식사를 끝낸 다음에는 커피를 마시면서 연락을 은밀하고 빠르게 주고받을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다 보니 거의 아침 식사를 하는 데만 거의 한 시간 삼십 분이 걸리고 말았다.
‘방해되겠네. 가야겠다.’
라틸은 황제의 바쁜 업무에 대해 알기에, 시계를 확인하자 이쯤 하면 되었다 싶어서 적당히 말을 맺고 작별 인사를 했다. 라틸의 예상대로 매우 바빴던지, 하이신스는 인사를 받자마자 가장 먼저 자리를 떴다. 라틸은 아이니도 하이신스와 자리를 먼저 떠나주길 기다렸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기에 슬그머니 먼저 몸을 일으켰다.
“황후 폐하, 폐하의 귀한 시간을 더 뺏을 수 없으니 저희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러고서 칼라인을 데리고 나가려는 찰나.
“잠시.”
잘 가라고 인사까지 해주었던 아이니가 뒤에서 그들을 불렀다. 라틸이 돌아보자, 아이니는 칼라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라틸은 칼라인과 아이니를 번갈아 보다가, 아이니가 테이블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오자 얼결에 뒤로 빠졌다. 왠지 저기에 끼어 있으면 눈치 나쁜 사람이 될 분위기여서. 칼라인은 그런 라틸이 못마땅한지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미 아이니는 칼라인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결국 칼라인이 아이니를 보자, 아이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잠시 그대와 대화를 좀 하고 싶은데.”
라틸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엄지로 자기 어깨 너머를 가리키고서 입을 열었다. 그럼 난 먼저 가 있을까, 하고 말하려고. 그러나 라틸이 말하기 전. 칼라인이 사막 자갈만큼이나 건조하고 딱딱하게 거절했다.
“공적인 일에 관해서라면 사디 경에게 말씀드리는 게 낫습니다.”
그 말에 아이니가 라틸을 쳐다보자, 라틸은 어색하게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렸다. 칼라인은 아이니가 다시 자기를 보자 아까만큼이나 감정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적인 내용이라면 후궁 된 입장이다 보니 듣기 곤란합니다.”
“!”
그 말에 아이니는 몹시 슬픈 표정이 되었으나, 칼라인은 칼같이 인사하고는 라틸에게 빨리 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아가씨, 가시지요.”
어 가야지. 가야 하는데…… 라틸은 당장에라도 무너져내릴 것처럼 우두커니 선 아이니를 힐긋거리다가 일단 칼라인과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그 시각. 타리움 황궁에 도착한 서넛은 아이니를 보는 라틸만큼 황당한 기분으로 자신을 반겨주는 황제를 앞에 두고 있었다.
“고생 많았습니다. 언제나 경에게만 일을 많이 맡겨 미안한 기분입니다.”
라틸은 황제가 된 후로도 서넛과 시종장에게는 진지하게 황명을 내릴 때가 아니면 사적으로는 이전과 같은 말투를 고수했다. 시종장은 아버지 때부터 시종장이었다 보니 부하라기보다는 아버지의 친구나 삼촌 같은 느낌이 커서. 서넛과는 어릴 때부터 같이 훈련하며 기사들 말투로 티격태격해대는 게 습관이 되어서. 눈앞의 황제는 그런 라틸의 말투와 습관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얼굴도 똑같고 웃는 모습도 똑같다. 하지만……. 서넛은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