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우리가 아는 사이였나?2020.12.09.
이게 무슨 상황이지? 라틸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아이니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이니는 라틸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있었다. 시선을 칼라인에게 고정하고만 있을 뿐. 처음 보았을 때 감탄했던 그 예쁜 멜론색 눈동자가 미동도 않고 한 사람에게 단단히 못 박혀 있다. 절대로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아닌데? 게다가 목소리만 듣고서 바로 칼라인 이름이 나올 정도면 스치듯 본 사람도 아닐 것 같다.
“아는 사이?”
그러나 라틸이 묻자 칼라인은 대번에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이니와 달리 칼라인의 목소리는 뚝뚝 떨어지는 쇠못 같았다. 아이니에게 화가 나서 저런다기보다는, 그냥 칼라인이 대다수 안 친한 사람들에게 보이는 평균적인 태도. 본인의 말처럼 그는 아예 아이니가 누구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 태도가 아이니에게 상처가 된 걸까?
“날 모른다고?”
아이니는 반쯤 끊어진 털실처럼 연약한 목소리를 냈다. 칼라인이 한 말에 두 눈은 커다래졌고 속눈썹은 파르르 떨렸다. 칼라인은 ‘네’ 대답하곤 한 마디도 더 하지도 않고서 라틸 쪽으로 도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사이인 거야, 대체?’
라틸은 괜히 볼을 긁적이고서 칼라인과 아이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나는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을 만난 것처럼 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상대를 ‘왜 저래?’ 하듯 대하니 중간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단 들어가자.”
라틸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어깨너머를 가리키고서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칼라인은 그 뒤를 따라오려 했으나, 누군가에게 옷을 잡혀 멈칫했다. 아이니. 그녀가 손을 뻗어 칼라인의 망토 자락 허리 부근을 잡아당긴 것이다. 그 바람에 칼라인이 썼던 망토 모자 부분이 뒤로 넘어가자, 검은 망토 안에 가려졌던 달빛 같은 스산한 아름다움이 드러났다. 그걸 본 아이니의 눈동자가 더욱 크게 울렁였다. ‘역시 너 맞잖아’ 하듯이. 반면 칼라인은 라틸을 보며 ‘이 사람 왜 저럽니까?’ 하는 듯 눈에 힘을 주고 입술을 꽉 일자로 닫았다. 라틸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나도 난처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니는 이 나라 황후인데. 자신은 지금 정체를 감춘 처지이다 보니, 하지 말라고 딱 잘라 말하기가 곤란해서. 그러자 결국 칼라인이 대놓고 아이니를 쳐다보며 말했다.
“누구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옷은 안 잡아당기셨으면 합니다.”
딱 잘란 말한 칼라인은 몸을 한 걸음 앞으로 뺐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니의 손에서 옷자락이 빠져나가자, 멍해졌던 그녀의 얼굴이 커피를 부은 것처럼 삽시간에 얼룩졌다. 이윽고 그녀는 무어라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실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풀썩 앞으로 쓰러졌다.
“으.”
라틸은 반사적으로 달려가 아이니를 받아들었다.
“칼라인. 이 사람 이 나라 황후야.”
라틸은 아이니를 푹신해 보이는 풀 위에 조심스레 눕히면서 작은 목소리로 칼라인에게 알려주었다.
“그렇습니까.”
그러나 칼라인은 여전히 시큰둥한 태도였다.
“진짜 모르는 사람이야?”
그걸 본 라틸이 어리둥절해서 묻자, 칼라인은 생각할 것도 없단 듯이 바로 대답했다.
“네.”
“만난 적 있는데 기억 못 하는 건 아니고?”
“일방적으로 절 알 수는 있겠군요. 저는 모릅니다.”
라틸은 핏기가 싹 빠져나가 창백해진 아이니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고서 그녀의 목 아래에서 손을 빼고 일어났다.
“일단 사람들한테 황후가 기절했단 걸 알려야 할 텐데.”
그러고서 ‘어떻게 알리지?’라고 칼라인에게 말하려는 순간. 빠르게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힘주어 돌을 밟고 오는데, 화가 가득한 발소리였다. 라틸은 물으려던 걸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저만치 자주색 돌길을 꽉꽉 밟으면서 한 무리의 여자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하나같이 비싸 보이는 옷차림인데다 머리 역시 공들여 손질한 걸 보니, 아이니의 시녀들이 분명했다. 잘됐다 싶어서 라틸이 그들에게 말을 걸려는 순간. 가까이 다가온 시녀들은 곧장 바닥에 누운 아이니에게 가더니, 마차에 치인 사슴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세상에, 황후 폐하!”
“이게 무슨 일이야!”
“폐하, 괜찮으세요?”
기절한 아이니가 대답할 리가 없었다. 불러도 아이니가 누워 있기만 하자, 그들은 아이니를 부르길 멈추고 굽혔던 허리를 펴더니 라틸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감히 황후 폐하께 이런 무례를 저지르다니, 제정신인가요?”
“여기 오는 길에 상황을 다 보았습니다.”
“당신이 황후 폐하를 쓰러트리는 거 다 봤다고!”
라틸은 황당해서 입을 벌렸다.
‘내가 뭘 어쨌다고?’
못 보고서 저러면 그냥 기가 찰 텐데, 다 봤다면서 저런 말을 하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이쪽이 뭐 저들 눈에만 보이는 염력을 써서 아이니를 쓰러트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쪽 이름과 신분이 뭐지? 누군데 감히 황후 폐하의 집에 눌러앉아 황후 폐하를 공격하느냐.”
그러나 라틸이 대답하기 전.
“여기는 내 집이고 사디 양은 내 친구인데.”
또다른 발소리와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는 무슨 권리로 짐의 친우를 괴롭히고 있는 거지?”
마지막으로 나타난 사람은 하이신스였다. 뒷짐을 지고 나타난 그가 시녀들을 온기 없는 눈으로 보며 묻자, 시녀들은 짧게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하더니 바로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선 늦게 오셔서 못 보셨겠지만, 저 여자가 황후 폐하를 공격해 쓰러지게 했습니다.”
“여기 황후 폐하께서 기절해 있는 걸 보세요.”
“황후 폐하께서 혼자 나타나시자 잘됐다 싶어서 이런 흉악한 짓을 한 게 분명합니다.”
라틸은 하이신스가 그 말을 믿을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라틸을 제일 오래 봐 온 건 하이신스였고, 그는 라틸의 검술 실력이 대단한 걸 알았다. 라틸이 쉽게 다른 사람에게 손을 쓰지 않는단 것도. 예상대로 하이신스는 대번에 코웃음을 쳤다.
“황후가 혼자 쓰러지는 건 나도 보았는데. 그것참 이상하군.”
그러고서 조롱조로 내뱉자, 설마 오는 길에 그가 다 보았을 줄은 몰랐던지 시녀들의 표정이 굳었다.
“염치가 없는 건지 양심이 없는 건지.”
라틸은 하이신스와 시녀들의 그 신경전을 보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하이신스가 황후 쪽 사람들이랑은 사이가 다 나쁘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 * * 눈을 뜬 아이니는 익숙한 천장 그림을 바라보며 미동도 하지 않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조금 전 꿈속에서 본 푸른 초원과 흩날리는 꽃잎들, 그 사이에서 바람과 향기를 받으며 서 있던 남자가 떠올라서. 당시의 감각이 너무나 생생해서 아까가 꿈인지 지금이 꿈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폐하. 일어나셨군요.”
옆에서 들려오는 밝은 목소리에, 아이니는 이쪽이 현실이란 걸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시녀 한 명이 걱정스러운 듯 재빨리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내가 여긴 왜……?”
“아까 그 이상한 여자를 보러 가셨다가 쓰러지셨어요.”
“이상한 여자? 아아. 그 여자.”
아이니는 쓰러지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리고서 이마를 찌푸렸다. 다시 한번 방금 꾼 꿈이 눈 앞에 펼쳐지면서 몸이 통째로 붕 날아오르는 듯했다.
“궁의 말로는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랍니다. 하지만 레들러 양이 죽은 후로 폐하께선 정신적으로 많이 약해지셨으니, 무리하지 말고 쉬는 게 좋대요.”
설명을 끝낸 시녀는 손에 든 화병을 끌어안고서 꽃과 줄기 너머로 아이니를 힐긋 보았다. 아이니는 반쯤 몽롱한 얼굴로 벽을 보고 있었다. 시녀는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슬며시 물어보았다.
“아까는 왜 쓰러지셨던 건가요?”
황제가 데려온 그 이상한 여자에게 왜 아이니를 공격했냐고 마구 항의했지만, 사실 시녀들도 아이니가 혼자 쓰러진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그 여자 때문이라고 우긴 건, 어쨌든 그 여자가 무어라 말을 했으니 아이니가 열이 받아서 쓰러졌을 거라 예상해서였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아이니는 친구가 죽은 후 심신이 쇠약해져 있었기에. 시녀는 아이니가 그 이상한 여자에게서 들은 헛소리들에 관해 이야기해 줄 거라 생각했다.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니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그자의 이름을 불렀는지. 왜 그자를 잡았는지. 왜 쓰러진 건지.”
“네? 그자요? 그 여자 이름을 알고 있으셨어요?”
“아니, 그 여자 쪽이 아니라…….”
남자 쪽. 퇴폐적으로 아름답던 그 남자. 얼굴이 몹시 창백하고, 오싹할 정도로 잘생긴……. 아이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확신한 건 그를 떠올리자 갑자기 이상한 감정이 든단 거였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쁜 감정은 분명 아니었다. 그래서 아이니는 이게 더욱 이상하게 여겨졌다. 어떻게 아는지도 모르는 남자를 자신은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게다가 이 감정은 대체 무엇이고, 꿈에서 본 그 광경은 무엇일까? 꿈속에서 그녀는 부서진 유리 조각이 펼쳐진 바닥에 누워 있었고, 그 남자도 그녀의 곁에 함께 누워 있었다. 유리 조각은 그들에게서 새어 나온 피로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고, 두 사람은…….
“루이스 양.”
“네, 폐하.”
“그 남자를 여기 데려와 줄래요?”
아이니의 부탁에 시녀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황제 폐하가 데려온 그 이상한 여자의 손님이요?”
시녀는 ‘그 여자도 아니고 그 여자의 손님을 왜 굳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아이니가 명령을 무르지 않자, 시녀는 어쩔 수 없이 알겠다 웅얼거리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아이니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서 이불을 꽉 움켜잡았다. 다시 보면 알 수 있겠지. 이 이상한 일들이 대체 무엇인지. * * *
“흑림이 다녀갔어? 다행이다.”
라틸은 칼라인과 마주 앉아서 그가 흑림을 만난 일, 라틸이 전하라고 한 그 의미심장한 단어들을 말한 일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들었다.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칼라인이 ‘아이스 타시르에 슈크림’ 같은 말을 하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시킨 일이기에 라틸은 애써 정색을 유지했다.
“그게 무슨 뜻이었습니까?”
“타시르가 나한테 했던 농담이었어.”
“아이스 타시르가요?”
“응. 들으면 바로 알아들을 거야. 가짜가 아무리 내 흉내를 잘 내도 내가 후궁들이랑 주고받은 그런 말들까지 알진 못할 테니.”
“그렇군요…….”
“그런데 넌 진짜 여기 황후랑 아는 사이 아니야? 그쪽이 널 되게 아련하게 바라보던데.”
“아닙니다.”
“알고 보면 전에 애인 사이였다던가…….”
“절대로 아닙니다.”
칼라인이 정색까지 하며 아니라 대답하자 라틸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쨌든 타시르가 내 말을 이해하면 우리 쪽도 이제…… 세 사람은 되네.”
“그래도 아직 숫자가 모자라겠지요?”
“응. 귀족 측에서도 우리 편이 되어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라나문이나 게스타나.”
“클라인 황자는요?”
기대도 할 사람한테 해야지. 라틸은 자신과 칼라인을 불륜커플처럼 쳐다보던 클라인을 떠올리고 팩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걔는 카리센 사람이잖아. 하이신스랑 한 세트로 취급당할걸.”
“……서넛 경도 아마 폐하가 폐하란 걸 알 겁니다.”
“일단 사람을 보내뒀긴 한데. 아직 소식이 없어서 불안하네. 서넛은 날 못 알아볼까 봐 걱정되는 게 아니라, 오빠가 하는 말에 넘어가서 내가 진짠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할까 봐 걱정이야.”
“서넛 경을 믿으시는 줄 알았는데요.”
“믿지. 근데 원래 서넛 경은 나보다 오빠랑 더 친해서.”
그런데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칼라인이 일어나 문을 열자, 밖에 아까 라틸을 몰아붙였던 황후의 시녀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와야 하지?’ 하는 표정으로 서 있던 시녀는, 칼라인의 무미건조한 시선과 마주치자 차갑게 지시했다.
“황후 폐하의 명령이시다. 당장 따라와라.”
* * * 칼라인이 그대로 문을 닫아버리려 했으나, 라틸은 문이 시녀의 코앞에서 닫히기 전에 황급히 그쪽으로 다가가 웃는 낯으로 칼라인을 내보냈다.
“우린 눈치 보는 중이잖아.”
아주 작게 속삭이며 라틸이 옆구리를 찌르자, 칼라인은 마지못해 시녀를 따라 아이니가 기다리는 방으로 찾아갔다. 아이니는 응접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시녀가 칼라인을 데려오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녀들은 이런 신분 모를 남자를 아이니와 단둘이 두고 가는 게 걱정되는 듯했지만, 아이니는 그들 모두를 방에서 물렸다. 방문이 닫히자, 칼라인은 아이니에게 덤덤하게 인사를 하고 물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아이니는 소파와 탁자 사이에서 나와 칼라인의 바로 앞으로 다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을 보자 확신이 왔다. 역시 이 남자. 꿈속에서 본 그 남자야.
“황후 폐하. 말을 하시지요.”
목소리까지 익숙하다. 물론 꿈속에서 들은 목소리는 이것보다 훨씬 다정했지만. 아이니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혹시…… 우리가 아는 사이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