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이 말을 똑똑히 전해라2020.12.06.
하이신스에게는 라트라실 밖에 없잖아? 시녀의 외침에 아이니는 물수건을 옆에 두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리가.”
하이신스는 순정적인 남자였다. 그 순정을 자신에게 주지 않아서 문제지. 그런 남자가 이상한 여자를 데려왔다고? 그것도 몰래?
“상인이거나 다른 나라 사절단이거나, 아니면 새로 온 관리거나 그렇겠지.”
“아니에요, 폐하. 황제께선 직접 그분의 망토로 여자를 꽁꽁 싸매서 어느 방 안에 데려가셨답니다. 그러더니 둘이서 한참이나 그 안에 있었대요. 외국 사신이나 관리를 데리고 회의실이나 집무실도 아니고 구석진 방에 데려가 오랫동안 있진 않을 거잖아요.”
시녀의 목소리는 분노와 흥분으로 평소보다 들떠 있었고, 아이니는 안 그래도 지끈거리던 관자놀이의 통증에 이젠 멀미까지 더해져 인상을 구겼다.
“폐하께서 집무실에 웬 조각상을 가져다 뒀는데, 그 조각상이 그 이상한 여자를 조각한 거래요.”
“무슨 소리인지 원.”
혀를 차면서도 아이니는 우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고서 응접실을 가로질러 복도로 나갔다. 시녀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저렇게 소란을 피워대는 걸 보니 무언가 평소와 다른 일이 있긴 있을 터.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내내 누워 있던 터라 뒷골이 당기고 허리도 뻣뻣해졌으므로, 밖의 공기를 쐬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하이신스 황제를 만나기 전 잠시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하얀 3층 테라스로 갔을 때였다. 희미한 장미향이 풍겨오는 난간에 기대어 서서, 저 아래로 펼쳐진 노란 장미밭을 바라보던 아이니의 눈에 시녀가 말한 ‘이상한 여자’가 들어왔다. 빳빳하고 거칠어 보이는 회백색 머리카락을 엉성하게 하나로 묶고 장식 없는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낯선 여자가 황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장미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 보세요.”
함께 온 시녀가 목소리를 최대한으로 낮추어서 볼멘소리를 뱉었다.
“몰래 데려온 것도 아니네. 아주 당당하게 데리고 다니시잖아요.”
“…….”
최근 아이니가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진 건 연인의 죽음과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 죽은 줄 알았던 연인의 부활에 놀라서가 아니었다. 물론 그 세가지도 힘들었지만, 결정적인 건 시녀이자 친구였던 레들러가 죽은 후 다시 만나게 된 헤움의 모습이었다. 이전에 피아노방에서 만났을 때는 자신의 얼굴조차 보이고 싶어하지 않아 자리를 급히 피했던 헤움은, 이번에는 그녀의 창가에 온전한 모습을 보였다. 반역을 일으키기 전 건강하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이목구비며 팔다리가 모두 멀쩡했고 혈색만 조금 나쁠 뿐이었다.
-네가 보고 싶었다.
헤움은 상냥하게 웃으며 다가왔으나, 그날 이후 아이니는 불쾌한 의심에 시달려야 했다. 왜 친구가 죽자마자 헤움의 상태가 저렇게 호전된 걸까, 하는. 미친 듯이 죽은 자의 부활과 흑마법 등에 관해 조사하기 시작한 아이니는, 마침내 자신의 의심이 의심이 아닐지도 모른단 끔찍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헤움이 옛 모습을 되찾은 건 혹시 레들러를 죽여서가 아닐까. 시체를 먹는다거나 피를 마신다거나 그런 짓을 해서? 이유야 뻔했다. 죽기 직전 레들러가 시도한 특이한 행동은 단 하나 뿐이니까. 부적.
“후우…….”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남편이란 작자는 여자까지 데려오다니. 아이니는 뜨겁고 조용한 분노를 느꼈다. 불에 벌겋게 달아오른 숯이 마음 어딘가에 놓인 느낌이었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를 어떻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황후 폐하가 쉽게 이혼해 줄 것 같지 않자 일부러 저러는 게 분명해요. 공작님을 동원해서라도 압박해야 해요.”
아이니는 돌로 만든 난간을 손톱 끝으로 타닥 타닥 소리가 나게 두드리다가, 미간을 찌푸리고서 돌아섰다.
“멋대로 하게 두어라. 저런 식으로 내게 상처를 주려는 모양인데, 어쨌든 난 절대 물러나지 않을 테니.”
아이니가 테라스를 떠나버리자, 소식을 전한 시녀는 뒤에 선 시녀를 돌아보았다. 그 시녀의 표정은 소식을 전한 시녀와 거의 흡사했다.
“황후 폐하는 다 좋은데 너무 방어적이세요. 때론 공격이 최선의 방어란 걸 왜 모르실까요.”
“우리 선에서라도 저 여잘 치워드려야 해요. 안 그래도 요즘 몸도 안 좋으신데 저런 여자까지 활개를 치게 뒀다간…….”
* * *
“음?”
라틸이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테라스를 올려다보자, 하이신스가 장미 한 송이를 꺾다 말고서 “왜?” 하고 물었다.
“아니. 누가 내려다보는 거 같아서.”
“내려다볼 사람들이야 많지.”
“신경 안 쓰나보네?”
“괜찮아. 내가 황후와 사이 나쁜 건 전국민이 아는 얘기니까.”
“…….”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라틸.”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닌 게 아닌 거 같으니 그러지. ……전에 얼핏 만났을 때 괜찮은 사람 같았어.”
“나와 그 여자의 문제는 상대가 괜찮은 사람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럼?”
“난 저 여자한테 원수야. 사랑한 남자를 죽이고 황제 자리에 오른 원수. 내게 저 여자는 날 죽이려던 동생의 연인이었다가 내 아내가 된 여자지.”
“…….”
“저 여자와 난 부부로 지내도 평생 서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어. 네가 얽히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니까 정말로 신경 쓸 거 없어.”
단호하게 말한 하이신스가 꺾은 장미에서 가시를 빼기 시작했다. 더는 그 화제를 잇고 싶지 않단 태도였다.
‘하긴. 나도 하이신스가 내 하렘 일에 잔소리를 하면 싫겠지. 어찌 됐든 나와 하이신스는 이제 남이고, 하이신스 부부 문제는 하이신스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
도움을 청하러 온 입장이기에, 라틸은 하이신스의 뜻을 존중해서 적당히 다른 데로 말을 돌렸다.
“여기 새소리 들으니 좋네.”
“성의없다.”
“진짜야. 여기 새소리 들으니까 네가 작고 귀여운 하얀 쥐처럼 우리나라에 숨어 들어왔을 때가 떠올라. 그때도 새들이 마구 울어댔지. 쥐를 봐서 그런가.”
“그 ‘작고 귀여운 하얀 쥐’가 혹시 쥐새끼 같았단 뜻인가?”
“흐흠.”
라틸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하자, 하이신스는 어이가 없단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유령 들린 조각상으로 분장해 온 사람보단 작고 귀여운 하얀 쥐가 훨씬 나은데, 사기꾼 양.”
“누구더러 사기꾼이래?”
“그보다 그 새들은 네가 즉위하면서 풀어놓은 새들인가? 내가 유학한 시절엔 새가 많이 없던 거로 기억나는데.”
“아니. 아닌데.”
“그래? 그럼 언제부터 늘어난 거지?”
“무슨 소리야, 새가 늘기는…….”
라틸은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기우뚱했다. 예전에 하이신스가 유학하던 시절. 그러고보니 그가 ‘카리센에는 새가 많다’면서 ‘우리나라에 오면 꼭 새들이 목욕하는 호수를 보여주고 싶다’ 말했던 기억이 나서였다.
“그러네. 원래는 새가 많이 없었는데.”
라틸은 중얼거리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지금은 새가 많지? 가짜가 나타나 달아나기 전, 라틸은 하렘을 오가면서도 새소리를 자주 들었다. 하지만 그 새소리를 들으면서도 이상하단 생각을 하지 못했으니, 아마 새소리는 하나둘 자연스럽게 늘어났을 것이다. 거기까지 떠올린 라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멈춰서서 확 몸을 돌렸다.
“새!”
“새?”
“오빠인지 틀라인지 모르겠지만 새, 아니면 새소리를 이용해서 궁전 안 정보를 주고받은 게 분명해!”
“정보라니?”
“젠장. 궁전 내부에 적이 많단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거든. 정보가 자꾸 새어나가서. 하지만 새를 이용했다면 숫자가 적어도 정보를 빠르게 교류할 수 있으니까…… 제기랄.”
* * * 하이신스는 라틸의 부탁에 따라 외부로 오가기 쉬운 가장 변두리에 손님방을 마련해 주었고, 라틸은 얼른 책상에 앉아 수도의 한 여관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칼라인에게 편지를 썼다. 그 쪽지는 하이신스가 빌려준 믿을 만한 심부름꾼이 궁전 통행증과 함께 칼라인에게 전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심부름꾼이 칼라인에게 도착하기 전. 그보다 한발 앞서 흑림의 암살자들이 칼라인을 습격하고 있었다.
“하녀와 사랑의 도피를 했단 분이 왜 여기서 우리를 사칭하고 있는지?”
그 암살자 중 하나가 칼라인의 얼굴을 알아보고 빈정거렸으나, 칼라인은 대답 대신 다섯 명의 암살자들을 차례로 훑어보며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필요한 건 하나인데. 나머지는 어쩔까.”
그리고 흑림 암살자들이 저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도 전. 그는 눈 깜짝할 사이 암살자 다섯 명 모두를 제압하고서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 탁상 위에 조용히 앉았다. 암살자들은 칼라인이 ‘움직인다’고 느끼자마자 종아리와 무릎 부근에 큰 충격을 느끼고서 바닥을 굴렀다. 정신을 차렸을 땐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모두 같은 꼴이었다. 역시 용병왕. 암살자들은 속으로 탄식했다. 용병왕은 선한 이미지가 아니었고, 맡은 의뢰는 무서운 정도로 냉정하게 처리했다. 그런 자이니 분명 이번에도 섬뜩한 면모로 그들을 죄다 죽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칼라인은 그들의 목을 몸에서 분리해주는 대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암살자의 멱살을 잡아 힘만으로 일으켜 세우더니 이상한 말을 했다.
“너희 수장에게 이 말을 전해라.”
칼라인의 입에서 수장 소리가 나오자, 암살자들이 서로서로 눈치를 살폈다. 용병왕이 뜬금없이 그들을 사칭한 것도 이상한데, 갑자기 수장에게 말을 전하라니? 하지만 상대는 이미 반격할 용기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을 꺾은 인물이었다. 멱살이 잡힌 암살자가 캑캑대며 고개를 끄덕이자, 칼라인은 그를 바닥에 쓰레기 버리듯 툭 놓아주고 섬뜩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또박또박 한 자 한 자 말했다.
“암시장. 가자미. 아이스 타시르에 슈크림 올려서.”
“!”
* * * 왜 용병왕이 우리 수장님 위에 슈크림을 올려 달라 요구하는 거지? 암시장에서 가자미는 왜 사다 달라는 거고? 혼란에 빠진 암살자들이 쫓기듯 나간 후. 라틸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한 칼라인은, 자신의 할 몫이 끝나자 다시 조각상으로 변신해 잠입한 라틸이 걱정되어 창문을 열고 궁전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커다란 그의 몸을 가려줄 만큼. 기척을 감추고 라틸이 무사한지 확인하고 와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이신스의 심부름꾼이 라틸이 보낸 쪽지와 궁전 통행증을 전달해 준 덕이었다. 굳이 밤에 섞여 몰래 궁전에 잠입할 필요가 없어지자, 칼라인은 얼굴까지 가릴 수 있는 풍성한 검은 망토를 걸치고 하이신스의 심부름꾼과 함께 궁전으로 바로 들어갔다. 심부름꾼은 통행증을 전달하긴 했으나 상대가 그걸 받고 바로 따라올 줄 몰랐기에 많이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칼라인은 남들이 당혹스러워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후 말없이 심부름꾼의 뒤를 따라가던 칼라인은, 심부름꾼이 어색한 상황을 견디다 못해 “저기…… 폐하의 손님은 저쪽 방향에 머물고 계십니다.”라고 알려주자 그제야 그를 두고서 라틸이 머문단 방향으로 홀로 걸어갔다. * * * 비슷한 시각. 하이신스는 아이니와 헤움에 관해 이야기해 보기 위해 아주 간만에 황후의 방을 찾아갔다.
“죄송합니다, 폐하. 황후 폐하께선 잠시 산책하러 나가셨습니다.”
하지만 아이니는 보이지 않았고, 응접실에 남아 있던 시녀들은 평소 이상으로 그를 불편해하는 눈치였다. 하이신스는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하려다가, 불현듯 낮에 라틸이 정원에서 한 말을 떠올리고서 깨달음을 얻었다.
“황후가 누굴 찾아간 모양이지.”
“예?”
하이신스가 중얼거리는 말에 표정 관리를 못 하는 시녀 하나가 유독 손을 심하게 꼼지락거리며 시선을 떨구었다. 하이신스는 혀를 차고서 몸을 돌려 아까 라틸을 바래다 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그리고 하이신스의 예상대로 아이니는 ‘황제가 어떤 여자를 숨겨둔’ 손님방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숨겨두었다고 하기엔 너무 공개적인 듯하지만. 해코지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하이신스의 아내는 자신이기에, 그가 데려온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불쾌한 호기심이 들긴 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머문다는 방 근처에 도착해보니, 키가 아주 커다란 누군가 역시 그쪽 문 앞에 서 있었다. 망토에 달린 모자를 깊게 눌러써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모습을 다 감추었는데도 분위기가 아주 위압적인 사람이었다. 그 사람 역시 자신 외 또다른 손님이 있을 줄 몰랐던지, 인기척을 듣자 바로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관심 없다는 듯 바로 휙 고개를 돌려버렸지만. 대체 누구길래? 의아해하고 있자니 닫혔던 문이 열리면서 “왔어?” 하는 밝은 목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고 튀어나온 여자는 아까 테라스에서 보았던 그 회백색 머리 여자였다. 여자는 망토를 쓴 사람을 몹시 반갑게 맞이했는데, 그러다 아이니를 발견하고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어라.” 하는 소리를 냈다. 마치 아이니가 누구인지 아는 것처럼.
“아는 사람입니까?”
그러자 망토를 쓴 사람도 그제야 아이니 쪽을 다시 보며 회백색 머리 여자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그 순간. 아이니는 심장이 바닥으로 쿵 내려앉는 느낌을 받고서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칼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