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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내 감정을 알고 있잖아 (80/367)

80화. 내 감정을 알고 있잖아20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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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088537811.jpg“폐하?”

그러고 있자니, 상인이 뒤에서 주춤주춤 말을 걸었다. 하이신스는 황급히 확 돌아섰다. 그러나 아까 조각상이 ‘나야 라틸’이라고 말을 건 일로 너무 놀라서, 이전과 달리 굳은 얼굴이었다. 상인을 질책하기 위한 표정이 아니었으나, 안 그래도 좌불안석이던 상인에게는 하이신스의 굳은 표정이 자신을 질책하는 것처럼 보였다. 안 되겠다.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낫겠어. 결국 상인은 양심에 가책도 오고 앞일도 두려워지자, 이건 아니다 싶어서 이실직고했다.

16551088537811.jpg“사실 폐하. 제가 준비한 조각상은 저게 아닙니다. 아무래도 그…… 중간에 착오가 생긴 모양입니다.”

1655108853782.png“착오?”

16551088537811.jpg“네. 다시 원래대로 가져올테니 부디 노여움은…….”

그러나 말을 다 끝내기도 전. 하이신스가 정색하고서 상인의 말을 끊었다.

1655108853782.png“됐다. 난 저게 마음에 드는군.”

16551088537811.jpg“예?”

정말? 저게? 상인은 놀라서 조각상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생동감 있는 조각상이긴 하지만…… 아니, 그보다 저 조각상 표정이 좀 바뀌지 않았나? 아까 황제가 ‘저 조각상 움직인 거 같은데’라고 말해서인가. 상인이 보기에도 조각상 표정이 약간 달라진 것 같았다.

16551088537811.jpg“폐하, 저 조각-.”

하이신스는 그 상인의 턱을 황급히 잡아 자신 쪽으로 돌렸다.

16551088537811.jpg“폐하…….”

황제가 박력 있게 그의 턱을 잡고 자신과 눈을 맞추게 하자, 상인은 심장이 쿵 떨어지듯 놀랐다. 황제는 어두운 숲의 엘프처럼 아름다운 얼굴이었고 눈매는 깊었다. 시선을 마주한 사람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얼굴.

1655108853782.png“저걸로 하겠다.”

그런 얼굴로 지그시 명령하자 상인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상인만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하이신스를 앞에 두고 감히 그 말을 거부할 사람은 없을 터였다. 상인이 반쯤 홀려서 수락하자, 하이신스는 그의 턱을 놓아주면서 이번에는 자신의 시종에게 지시했다.

1655108853782.png“저 조각상은 내 방에 세워두면 집중이 잘될 것 같군. 방으로 옮기도록 하지.”

시종이 ‘저걸요?’란 표정으로 놀라 쳐다보았으나, 하이신스는 대답 대신 얼른 조각상에 천을 도로 덮어주며 중얼거렸다.

1655108853782.png“먼지가 붙으면 안 되니까.”

16551088569481.png‘고마워 하이신스. 안 그래도 턱이 빠지는 줄 알았어.’

라틸은 천 아래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16551088569481.png‘그래도 어찌어찌 통과는 한 모양이니 다행이네.’

  * * * 하인들이 조각상을, 정확히 말하자면 라틸이 서 있는 단을 들고 하이신스의 집무실로 가는 동안 라틸은 고꾸라지지 않기 위해 발가락에 힘을 꽉 주어야 했다. 떨어진다 해서 크게 다칠 높이는 아니었으나, 몸은 다치지 않아도 자존심은 아주 잘게 부서질 게 분명하니 온 힘을 다해 균형을 잡는 것이다. 다행히 집무실 안에 운반될 때까지 라틸은 넘어지지 않았다. 평생 열심히 수련한 결과가 아주 제대로 빛을 발한 거다.

16551088537811.jpg“조각상이 원래 이렇게 무거운가?”

16551088537811.jpg“조각상치곤 가벼운 거 아냐?”

16551088537811.jpg“몰라. 난 처음 들어 봤어. 근데 너무 무겁다. 손이 후들후들 떨리네.”

16551088537811.jpg“돌로 만들었으니 그렇지.”

하인들이 투덜거리면서 집무실 문을 닫고 나가자, 라틸은 슬그머니 하이신스가 덮어준 천을 들추고 밖을 빼꼼 보았다. 사람? 없고. 문? 제대로 닫혔고.

16551088569481.png‘좋아. 나가도 되겠어.’

최대한 편한 자세를 잡는다고 잡았는데도 조각상 시늉을 하는 건 연무장을 50바퀴 도는 일 이상으로 힘들었다. 라틸은 갑갑한 천을 얼른 옆으로 치우고 한숨을 내쉬면서 쪼그리고 앉아 집무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16551088569481.png‘집무실도 꼭 자기처럼 꾸며놨네. ……근데 하이신스는 대체 언제 와?’

그렇게 10분 정도 기다렸으려나. 마침내 문 열리는 소리가 나서 라틸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16551088569481.png‘누구야?’

깜짝 놀라서 그 상태로 조각상 흉내를 다시 냈다. 들어온 사람은 누군지 모르는 인물이었다.

16551088569481.png‘뭘 잔뜩 들고 있는 걸 보니 하이신스 비서인가?’

비서는 처음에는 조각상에 신경을 기울이지 않고 자기 일에 집중했으나, 나중에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라틸 앞으로 다가와서는 혀를 찼다.

16551088537811.jpg“세상에. 폐하는 이런 조각상을 집무실에 두라 하신 거야?”

16551088569481.png“…….”

16551088537811.jpg“왜 굳이 쪼그려 앉은 조각상을 책상 뒤에 두신 거지? 이러면 조각상 머리통밖에 안 보이지 않나?”

비서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나가자,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일어섰다. 하지만 3분도 지나지 않아 또 누군가 달칵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번엔 손에 정리 도구를 든 하녀였다.

16551088569481.png‘젠장, 하이신스!’

자기들끼리 조각상에 관해 무슨 얘기가 돌기라도 한 건가. 하녀도 책상 위를 정리하면서 라틸을 연신 쳐다보았다.

16551088537811.jpg“폐하가 첫눈에 반한 조각상이 이건가 보네.”

심지어 하녀는 호기심이 대단한지 조각상을 빤히 보기 위해 얼굴까지 들이밀었으므로, 라틸은 이번에는 숨까지 참아야 했다.

16551088537811.jpg“별로 특별한 것도 모르겠는데. 내 심미안이 모자란 거야, 폐하 심미안이 남다른 거야? 지난 계절에 놔뒀던 그 춤추는 상이 훨씬 낫지 않나? 얜 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고.”

어쨌든 이번에도 하녀가 나가고 상황을 무사히 넘기자, 라틸은 작게 하이신스를 욕하면서 이를 꽉 깨물었다. 다행히 이 다음에 들어온 사람은 하이신스였다. 이쪽은 연달아 두 번이나 위기를 넘겨서 심장이 말린 자두처럼 쪼글쪼글해져 있는데. 하이신스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들어올 때부터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16551088569481.png“방 안에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 하면 안 됐을까?”

그걸 본 라틸이 아니꼬워서 팔짱을 끼고 투덜거리자, 하이신스는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1655108853782.png“그러고 있으니 사람들이 유령 조각상이라 떠들어대지.”

16551088569481.png“내가 뭘.”

1655108853782.png“우리 궁정인들이 여기 둔 조각상 얘기하다가 기겁하더라. 한 명은 쪼그린 조각상이 좀 이상하지 않냐 하고, 한 명은 우두커니 선 조각상이 이상하다 하고. 운반한 사람은 ‘그거 웃는 조각상인데요?’ 옆에서 말하고. 이러다 밤중에 뛰어다니는 조각상 괴담까지 생기면 어떡할래?”

16551088569481.png“네가 늦게 와서 그래.”

1655108853782.png“넌 항상 내 탓이지?”

16551088569481.png“주기적으로 네 탓이니까.”

1655108853782.png“예 예. 지나가는 사람 백 명 붙잡고 물어봐. 전 애인이 조각상으로 위장해서 들어오는 경우 있나.”

말을 마친 하이신스는 의자를 들고 방 중앙으로 가 앉더니, 다리를 꼬고 앉아 라틸을 거만하게 보며 또 놀렸다.

1655108853782.png“내가 사절단으로 위장한 건 정말 무난한 거였네.”

16551088569481.png“자꾸 빈정거리지 좀 마.”

1655108853782.png“사랑해, 보고 싶었어. 네가 와서 기뻐.”

16551088569481.png“빈정거리는 게 낫겠다.”

1655108853782.png“원래 조각상은 어디로 갔어? 위치 알려주고 가. 돈은 상인한테 이미 냈어.”

16551088569481.png“너 진짜 중간이 없구나?”

라틸이 툴툴거리자 하이신스는 웃더니 “손수건?” 하고 물었다.

16551088569481.png‘손수건으로 되겠냐…….’

하지만 이제는 더 말다툼할 겨를도 없어서 라틸은 힘없이 대답했다.

16551088569481.png“아주 커다란 손수건으로.”

여기까지 오는 내내 온몸이 긴장된 터라 아주 괴로웠다. 어깨가 뻐근하고 다리엔 쥐가 난 것 같고 팔은 진짜 조각상이라도 된 느낌. 게다가 심장은 몇 번이나 철렁댔는지. 그러나 하이신스는 손수건을 주는 대신, 자기 망토를 벗어서 라틸에게 덮어주고 모자를 씌웠다.

16551088569481.png“이건 왜?”

라틸이 쳐다보자, 하이신스는 턱도 없단 듯이 웃고서 문을 가리켰다.

1655108853782.png“네게 필요한 건 욕조 같아서. 수건은 욕조 다음에.”

  * * * 가장 가까운 욕실로 간 라틸은 하이신스가 늦게 온 게 목욕할 준비를 하느라 그랬단 걸 알아차렸다. 게다가 욕실 안에는 머릿수건과 목욕 가운까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라틸은 따뜻한 물 안에 들어가 뭉친 근육을 꾹꾹 눌러 풀고, 피부에 달라 붙은 하얀 칠을 벗겨내기 위해 거칠거칠한 천으로 몸과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16551088569481.png‘아야…….’

거의 40분을 그러고 나서 거울을 보니, 머리카락은 흰색에 가까운 회색이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더이상 조각상처럼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완전히 하얀 칠이 벗겨진 건 아니어서, 잘 보면 여기저기에 하얀 얼룩이 보였다. 그렇지만 이 이상 시간을 끄는 건 하이신스에게 미안한 일이어서, 라틸은 얼른 목욕 가운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머리카락을 머릿수건으로 싸면서 나가보니, 하이신스는 아예 책까지 가져와 읽는 중이었다. 그러다 문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표정이 기묘해졌다.

1655108853782.png“조각상으로 분장해서 얼굴이 다르게 보이는 줄 알았는데. 분장을 지워도 다른 사람처럼 보여.”

16551088569481.png“마법으로 바꾼 거라 그래.”

1655108853782.png“마법? 네가 마법까지 쓰던가?”

16551088569481.png“난 아니지만 누군가는 쓰잖아.”

라틸은 머릿수건으로 감싼 머리카락의 물기를 꽉꽉 짜면서 하이신스의 맞은편 의자에 몸을 푹 기대고 앉았다. 머리를 의자 등받이에 완전히 내려놓고서 보니, 저 너머로 하이신스가 미리 준비해 둔 연한 보라색의 편안한 의상까지 보였다.

1655108853782.png“그보다 무슨 일로 이렇게 나타난 거지? 이건 꽤 위험한 방법이었어, 라틸. 알지? 네 체면이 완전히 구겨질 뻔했다고.”

라틸은 다시 무거운 머리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하이신스는 책을 덮어 옆 탁상에 내려놓고 이쪽을 빤히 보고 있었다. 주로 변한 얼굴 위주로.

16551088569481.png“알아. 하지만 지금 위급한 상황이어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1655108853782.png“위급하다니?”

라틸은 볼을 깊게 빨아들인 채 붕어처럼 입술을 뻐끔거리면서 손가락으로 수건을 초조하게 계속 눌러댔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얘기해야 하나 감이 잡히지 않아서.

16551088569481.png‘엄마랑 오빠 얘기를 해야 하나? 내가 뱀파이어 로드로 의심받았단 걸 얘기해야 하나? 혹시 그런 말 했다가 하이신스까지 날 신전에 가두려 하면 어쩌지? 이 얘기를 뺄까? 그럼 어디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해?’

1655108853782.png“라틸?”

16551088569481.png“내가 너랑 같이 카리센 국경 마을에 같이 갔던 거 생각 나?”

1655108853782.png“또렷하게.”

16551088569481.png“그때 볼일을 보고 돌아가보니 나랑 똑같이 생긴 가짜가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어.”

하이신스는 두 손을 깍지끼고서 라틸의 대화를 차분하게 듣다가, 가짜 이야기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이마를 찌푸리더니 상체를 세웠다.

1655108853782.png“가짜라니?”

16551088569481.png“말 그대로. 전에 내가 아이니 황후한테 전해 달라고 준 쪽지 기억나지?”

1655108853782.png“헤움 관련해서 짐작가는 바가 있단 그 쪽지?”

16551088569481.png“맞아. 실은 우리 쪽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어. 죽은 줄 알았던 틀라가 살아 있단 정황이 몇 가지 발견됐거든.”

1655108853782.png“그런!”

16551088569481.png“흑마법에 걸린 시체가 나타나기도 했어.”

라틸은 500년 주기로 나타난다는 ‘로드’란 존재, ‘로드’가 깨어날 때 흑마법사들이 같이 부흥한단 이야기 등을 추가로 설명하고서 무겁고 둔탁한 한숨을 내쉬었다.

16551088569481.png“그래서 우리 쪽에선 흑마법사 관련해서 이미 바짝 경계하고 있었거든. 근데 오히려 거기에 내가 당해 버렸어. 가짜가 내 모습과 내 자리를 훔쳤고, 나는 졸지에 사악한 힘으로 황제 흉내를 내려 한 흑마법사가 돼버렸지”

1655108853782.png“가짜는 네 모습을 어떻게 훔친 건데?”

16551088569481.png“내가 얼굴을 바꾸는 데 사용한 마법 물품이 있거든. 비슷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더라. 근데 그게 어떤 물건인지 모르겠어.”

하이신스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눈썹을 치켜 올리고 상체를 다시 의자 깊숙이 묻으면서 물었다.

1655108853782.png“아무리 가짜라도 성격이라거나 그런 건 다를 텐데. 사람들이 그걸 다 믿는다고?”

16551088569481.png“……오빠가 가짜를 돕고 있어서.”

하이신스의 표정이 한순간에 공격 직전의 사자처럼 험악하게 변했다.

1655108853782.png“레안이?”

타리움에서 유학생활을 했기에 하이신스도 레안과 가끔 어울린 적이 있었다. 당연히 그는 라틸이 자기 오빠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도 알았다. 그런데 그 레안이 라틸을 배신했다고?

1655108853782.png“비겁한 자식. 어떻게 널 배신할 수가. 그 욕심 없는 얼굴을 해가지고서는!”

16551088569481.png“……오빠랑 둘이서 네 욕 한 게 바로 어제 일 같은데. 반대가 됐네.”

하이신스는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라틸에게 다가왔다. 그는 라틸 곁에서 두 팔을 벌리고 어색하게 손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결국 라틸을 포옹해주지 못한 그는 힘없이 팔을 떨구고 돌아서서 다시 제자리로 걸어가 애꿎은 소파 가죽만 쥐어 뜯었다.

16551088569481.png“가짜가 가짜란 걸 밝히더라도 타이밍이 중요해. 아니면 오빠가 ‘저 흑마법사가 진짜를 가짜로 가짜를 진짜로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몰아갈 수도 있으니까. 내 지지세력 상당수는 오빠 지지자들을 그대로 데려온 거라, 완벽한 증거가 없으면 오빠 말을 믿을 거거든.”

하이신스는 라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눈을 맞추었다.

1655108853782.png“내가 어떻게 도와줄까 라틸.”

16551088569481.png“도와줄거야?”

하이신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면서 그의 한쪽 입술 끝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1655108853782.png“왜 이래. 너도 다 알고 온 거잖아, 라틸. 내가 아직도 너한테 매여 있단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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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1088537811.jpg“황후 폐하, 황후 폐하! 큰일, 큰일 났어요!”

응접실에서부터 들려온 요란스러운 소리에 아이니는 이마부터 눈까지 가린 물수건을 치우고 옆을 보았다. 시녀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먹을 바르르 떨면서 숨을 가쁘게 고르고 있었다.

16551088742138.png“무슨 일이지?”

16551088537811.jpg“폐하께서 웬 이상한 여자를 몰래 데려오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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