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그와 나의 비밀 신호2020.11.25.
“폐하. 게스타 님께서 폐하를 뵙고 싶어 하십니다.”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셰이트는 레안과 나란히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레안은 “게스타?” 하고 중얼거리더니 곧 누군지 눈치채고서 셰이트에게 물었다.
“어떻게, 자리를 비켜 드릴까요?”
셰이트는 됐다고 말하려다가 ‘라틸 성격에 과연 친오빠를 옆에 두고 후궁과 희희낙락할까?’ 이 점을 생각하고서 마음을 바꾸었다.
“그래라.”
레안이 자리를 비키는 사이, 셰이트는 각 후궁의 성격과 라틸과의 인연 등에 관해 정리한 보고서를 서랍에서 꺼내 빠르게 훑었다.
“폐하.”
게스타가 방 안에 들어온 뒤에도 셰이트는 대범하게 보고서에 계속 눈길을 두고 물었다.
“그래, 무슨 일로 왔지?”
그러면서도 눈매가 시원하게 휘어져서, 상대를 무시한다기보다는 바빠서 이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괜찮다.”
셰이트는 보고서 한 구석에서 ‘폐하께서는 게스타 님에게 상냥하셨습니다’라는 구절을 발견한 뒤에야 눈길을 게스타 쪽으로 돌렸다. 주로 편안한 스웨터 차림이고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한다는 게스타는 오늘도 딱 보고서에 설명된 그대로의 차림새였다. 곁에서 책 냄새와 말린 햇볕 냄새가 날 것 같은 편안하고 소박한 분위기가 풍겨왔다. 그 로르드 재상의 아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명문 귀족가 영식들이 빠지기 쉬운 허례허식이 없는 청년.
‘괜찮은 남자 같긴 하네.’
하지만 국서 자리는 그저 소박하기만 해서 되는 자리가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누구보다도 화려한 옷을 입어야 하고 그 옷을 감당해야 한다. 국서는 황제와 함께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저 청순해 보이는 남자가 그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폐하?”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는 게 이상했는지 게스타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따라 혈색이 좋아 보이기에 보았다.”
“예?”
적당히 둘러댄 셰이트는 뒤늦게 보고서를 내려놓으면서 물었다.
“그래, 무슨 일로 왔지?”
“요즘 여러 가지 일로 바쁘시다 들어서요…….”
“그래. 신경 쓸 곳이 많아졌어. 자주 찾아가지 못해 미안하구나.”
“저, 실은 다음 제 생일이요…….”
셰이트는 미리 게스타의 생일과 라틸의 달력을 보아 두었기에 얼떨떨해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그래, 얼마 안 남았지? 잊지 않았으니 염려 마라.”
“아니, 그게 아니라. 일이 이렇게 복잡하게 돌아가는데 약속을 지킬 수 있으실지…….”
게스타가 우물거리면서 시선을 내리깔자, 셰이트는 라틸이 달력에 ‘책’이라고 써둔 걸 떠올리고서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당연하지. 잘 기억하고 있으니 염려 말라.”
* * * 게스타의 생일이 되었지만, 셰이트는 따로 축하 연회를 열진 않았다. 대신 생일 전날, 게스타에게 사람을 보내 원한다면 가족과 친구들을 하렘 안으로 초대해 마음대로 놀아도 좋단 허락만 전했다. 하지만 게스타가 ‘궁전 안이 혼란스러운데 떠들썩하게 놀고 싶진 않다’고 거절했으므로, 셰이트는 생일날 저녁 여섯 시 무렵 게스타를 직접 식당으로 불렀다. 그곳에서 함께 식사를 하다가 셰이트는 자신이 준비해 둔 귀한 책 몇 권을 선물했다. 그 책들은 모두 고서적이나 희귀본들로, 책을 좋아하는 게스타라면 기뻐하며 받을 만했다.
“자, 약속했던 책이다.”
셰이트가 책을 내밀자, 게스타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걸 내려다보았다. 꽤 놀란 표정이었다. 권수가 너무 적은가? 이 책은 안 좋아하나? 셰이트가 잠시 생각하고 있자니, 게스타는 곧 눈가가 휘어지도록 웃었다. 활짝 웃는 얼굴은 별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게스타가 얇고 투명한 종이로 곱게 싼 책을 꼭 끌어안으면서 인사하자, 셰이트는 ‘이 정도면 됐겠지’ 생각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 생일엔 화려하게 연회를 열어주마. 이번엔 소박하게 넘어가지만,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도록 해라.”
“충분히 기쁩니다.”
꾸벅 인사를 올린 게스타가 물러나자, 셰이트는 그가 오기 전까지 내내 살피던 서류를 다시 꺼내 책상에 펼쳤다. 게스타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얼른 하렘으로 돌아갔고, 게스타가 몹시 감동해서 돌아갔단 보고까지 확실하게 받은 셰이트는 이제 그 일은 완전히 잊고서 틀라에 대한 사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셰이트도, 셰이트에게 게스타의 반응을 전한 사람도 몰랐다. 게스타가 하렘 안 자기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내내 얼굴에 짓고 있던 그 천진난만하고 맑은 미소를 뚝 멈추었다는 걸.
“도련님, 잘 다녀오셨어요?”
게스타의 시종 트리는, 공작부인이 아들에게 생일 선물로 보낸 사람의 허리만큼 올라오는 커다란 화병을 여기 놓았다 저기 놓길 반복하다가, 인기척이 느껴지자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있죠, 진짜인진 모르겠는데요. 칼라인 님이 어떤 하녀랑 눈이 맞아서 도망갔단 말이 있나 봐요. 출처가 클라인 님이라 다들 쉬쉬하고는 있는…… 도련님?”
하지만 게스타의 정색한 표정을 발견한 트리는 깜짝 놀라서 화병을 쓰러뜨릴 뻔했다.
“도련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트리는 화병을 그 자리에 잘 세워 놓고서 황급히 게스타에게 다가갔다. 게스타가 들고 있던 책들을 옮겨 받은 그는 책을 선반에 내려놓으면서도 연신 도련님의 눈치를 살폈다.
“폐하께서 도련님께 무어라 쓴소리를 하시던가요?”
“아니. 아무 소리도.”
“그런데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으세요. 무슨 일이 있긴 있으신 거죠?”
책을 다 내려놓은 트리는 게스타의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옆모습을 살폈다. 게스타는 대답 대신 윗옷을 벗어 트리에게 건네고 화장대 앞 의자에 앉았다. 그 표정이 자못 심각해서 트리는 게스타의 옷을 끌어안은 채 다른 데 가질 못하고 쩔쩔맸다.
“응.”
게스타는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다고요?”
트리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 일들이 무엇일지 떠올려 보았다. 게스타는 겁먹은 눈동자로 트리를 쳐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진 않았으나, 트리는 게스타의 표정 속에서 그가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눈치채고 그의 심약한 도련님이 가엾어졌다. 그러나 게스타의 입에서 나온 말은 트리가 예상해 본 적 없는 내용이었다.
“얼마 전에 가짜 황제가 나타났다가 쫓겨났다 했지?”
“예…… 그렇죠. 깜짝 놀랐잖아요. 설마 폐하를 흉내 낼 줄은 몰랐으니까요.”
“그분이 진짜야.”
“예?”
* * * 그즈음 라틸은 타리움을 벗어나 카리센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이신스는 내가 진짜란 걸 알아. 내가 궁전에서 몰래 빠져나왔을 때 우연히 만나서 동행도 했거든. 도움이 될 거야.”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줄 다른 사람 없이 하이신스만 데려가는 건 절대로 안 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이신스는 다른 나라의 황제이니까. 라틸이 하이신스 한 명만 증인으로 데려온다면 사람들은 ‘하이신스 황제가 흑마법사와 한패인가 보다’고 수군대면 수군댔지, 라틸을 진짜 황제라 믿어줄 리가 없다. 하지만 결백을 함께 주장해 줄 다른 증인들과 함께라면 하이신스는 누구보다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타시르도 불러야겠어.”
카리센의 국경을 통과하기 직전 마을에 도착했을 때. 하룻밤을 묵고 갈 여관을 고른 뒤 1층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라틸은 칼라인에게 작게 속삭였다. 칼라인은 냅킨을 접어 라틸의 앞에 놓아주다가 “타시르요?” 하고 되물었다. 여기서 갑자기 타시르 이름은 왜 나오냐는 투로.
“어.”
총총걸음으로 다가온 점원에게 라틸은 사람들이 많이 먹는 거로 적당히 가져다 달라 부탁하고는, 점원이 물러나자 허리를 숙여 칼라인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목소리는 최대한 낮추었다.
“타시르를 부를 수 있는 비밀 사인이 있거든.”
“비밀…… 사인 말입니까.”
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비밀스러운 신호가 있단 이야기에 칼라인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곧 그는 시선을 내리깔아 이를 감추면서 묻는다
“그게 무엇이지요?”
“여기서 보여주긴 좀 그래.”
“……제겐 알려주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사실 굳이 알려줄 방법도 아니긴 해.”
라틸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자 칼라인은 쓸쓸하게 포크와 숟가락을 정돈했다. 말이 정돈하는 거지, 이미 올라와 있는 포크를 혼자 만지작거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후 음식이 나왔지만, 라틸은 혼자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허공에 손가락으로 자꾸 이상한 기호를 그려댔다. 타시르와의 비밀 사인을 연습이라도 하는 모양이어서, 칼라인은 말을 걸지 못하고 수프만 숟가락으로 휘저었다. 그러기를 한 15분쯤. 라틸은 혼자 하던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들다가 칼라인의 앞에 놓인 접시를 발견하고는 눈살을 구겼다.
“배 아파?”
그 앞에 놓인 접시에 여전히 수프가 흥건해서. 이 여관은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건지 안 그래도 한 그릇에 담겨 있는 수프 양이 무척 많은데, 칼라인은 거기서 단 한 숟가락도 건드리지 않은 것 같았다. 게다가 둘이서 덜어 담은 샐러드도 마찬가지. 라틸이 가져간 샐러드는 이미 양배추 이파리 쪼가리 몇 개 남은 게 전부인데, 칼라인 앞의 샐러드는 안에 담긴 말라비틀어진 과일까지 그대로였다.
“맛없어서 그래?”
물론 맛이 없긴 해. 하지만 평생 황녀로 살아온 자신도 급한 와중엔 음식에 맛 따질 때가 아니란 걸 안다. 온갖 험한 지대를 돌아다니면서 위험을 헤쳐나왔을 칼라인이 수프는 싱겁고 샐러드 과일은 썩은 거 같다고 음식 투정을 하진 않을 것 같았다.
“배 아파? 정 못 먹겠다 싶으면 다른 거로 시켜줄까?”
평소라면 그냥 먹지 말라 하고 말겠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야영할 일이 많았고, 그때마다 둘은 쫄쫄 굶거나 버섯이나 과일을 따서 구워 먹어야 했다. 칼라인은 버섯을 딸 때마다 신중히 살핀 다음 독이 없다 말하고서 구워주었으나, 라틸은 매번 음식을 먹으면서 ‘이거 먹고 죽으면 난 가장 황당하게 죽은 황제로 기록될 거야. 아니 기록도 못 되려나.’ 하고 각오를 다져야 했다. 가장 마지막에 먹은 오색 버섯은 특히. 하여간 이런 상황이니, 저 탄탄한 근육을 지키려면 배를 채울 수 있을 때 가득 채워두어야 하지 않을까?
“아닙니다.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괜찮습니다.”
무슨 생각을 15분이나 했는데……? 라틸은 시계를 힐긋 보고 생각했으나, 칼라인은 이미 숟가락을 집어 수프에 밀어 넣고 있었다. 그가 꾸역꾸역, 아무리 봐도 ‘꾸역꾸역’으로 보일 만큼 맛없게 수프를 먹는 걸 보다가 라틸은 결국 그의 손목을 쥐었다.
“배부르면 그냥 먹지 마.”
진짜로 먹고 싶지 않았던 듯 칼라인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거의 비우다시피 한 라틸 앞의 접시를 물끄러미 보다가, 분위기를 돌리려는지 희미하게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카리센 안으로 들어가면 오리 꼬치구이를 먹을까요? 아가씨는 오리고기를 늘 좋아하셨지 않습니까.”
라틸은 자신이라도 배를 마저 채우기 위해 숟가락을 마저 들다가 “엉?” 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내가? 난 오리 안 먹는데?”
어느 아가씨랑 날 착각한 거냐. 오리 좋아하는 아가씨가 어느 집 아가씨야. 라틸은 입 밖으로 꾹 올라온 소리를 묻고서 노란 수프를 담은 숟가락을 입안으로 넣었다.
“……안 좋아하십니까?”
하지만 칼라인은 정말로 라틸이 오리고기를 좋아한다고 믿었던지 조금 당황해서 물었다.
“내가 왜 그걸 좋아할 거라 생각한 거야?”
그 표정에 라틸 역시 황당해서 되물었다.
“굳이 좋다 싫다로 따지자면 싫어하는 쪽에 가까워.”
“!”
* * * 대체 누구랑 착각했기에……. 다음날. 카리센의 국경 마을을 통과하면서도 칼라인의 표정이 굳어 있는 바람에 라틸은 덩달아 찝찝해졌다. 혹시 저 녀석, 자기 첫사랑이 좋아하는 거랑 내가 좋아하는 걸 헷갈리기라도 했나? 하지만 대놓고 물을 수는 없어서, 라틸은 타시르에게 보낼 비밀 사인을 그리기 적당한 장소를 찾아다니면서도 계속 칼라인을 곁눈질했다. 그러기를 두어 시간 정도. 칼라인이 표정을 푸는 것보다 타시르를 불러내기 적당한 땅을 찾는 게 더 빨랐다.
“이쯤이면 되겠네.”
그곳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지만, 그래도 가끔은 누군가 지나다닐 것 같은 길목의 땅이었다. 주위에는 무덤 몇 개가 반은 멀쩡한 채로 반은 반쯤 패인 채로 있었다.
“비밀 사인을 여기에 해 두시려고요?”
혼자 뭔 충격에 잠긴 건지 라틸을 말없이 따라오던 칼라인은 그 장소를 보자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물었다.
“응.”
라틸은 대답한 뒤 갑자기 땅을 파기 시작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영문 모른 채 칼라인은 땅 파는 걸 도왔다.
“어, 그 정도면 돼.”
그렇게 모든 작업이 끝나자, 라틸이 웃으면서 다시 지시했다.
“이제 그거 다시 메꾸면 돼.”
“여기를…… 그대로 말입니까?”
왜 굳이? 칼라인이 황당해서 물었으나, 라틸은 그렇다 대답하고서 땅을 정말로 도로 메꾸기 시작했다. 이게 타시르를 부르는 비밀 사인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건가. 칼라인은 영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일단 라틸에게 자신이 하겠다 나서서 판 땅에 흙도 메꾸었다. 모든 작업이 끝나자 땅은 방금 막 안에 무언가를 묻고는 급히 덮은 모양새가 되었다.
“완벽해.”
라틸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더니, 이번에는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미리 챙겨온 까만 분필로 뭔가를 삭삭 그리기 시작했다. 그걸 본 칼라인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거…… 폐하. 그건……?”
라틸이 그린 건 자신의 후궁과 주고 받는 로맨틱한 비밀 암호가 아니었다. 흑림이 암살을 한 뒤 그려 넣는 그 암살자 집단의 사인이었다. 즉, 라틸은 지금 흑림을 사칭한 것이다.
“이거야. 우리의 비밀 사인.”
칼라인이 ‘그럴 리가 없는데’ 하는 표정으로 라틸을 쳐다보자, 라틸은 흐뭇하게 웃으면서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이거 보면 바로 오겠지.”
“사칭범을 죽이겠다고 칼 들고서요.”
“괜찮아. 잡아서 타시르한테 다시 심부름 보내면 될 거 아냐. 안 그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