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서로를 지키는 각자 다른 방법2020.11.22.
이게 무슨 소리인가 생각할 사이도 없이 라틸은 곧장 엄마를 기절시켰다. 안고 있던 몸에서 힘이 빠지자, 라틸은 엄마를 침대에 눕혀 놓았다. 굳이 마법 물품을 이용하지 않아도 자신과 꼭 닮은 얼굴을 잠시 가슴 아프게 바라보다가, 라틸은 엄마가 벗어둔 목걸이를 챙기려 손을 뻗었다. 그러고서 엄마 쪽을 쳐다보는데…….
“!”
엄마는 어느새 다시 라틸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목걸이가 아니었다!’
라틸은 이를 악물었다. 마지막 패를 감춘 건 라틸만이 아니었다. 엄마 역시 똑같았던 것이다. 엄마는 목걸이가 마법 물품인 척 진짜 마법 물품을 잠시 뺐던 게 틀림없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폐하, 들어가겠습니다.”
들어가도 되냐고 묻는 게 아니라 ‘들어가겠다’고 말한다. 어느 시간이 지나면 허락을 구하지 않고 들어오라고 미리 명령을 해두었단 뜻. 라틸은 헛웃음을 뱉었다.
‘역시 엄마네.’
하긴. 가짜가 엄마란 걸 알기 전부터, 어떻게 이 정도로 자신과 생각하는 게 비슷한지 의아하긴 했다. 라틸은 이를 갈았다. 엄마가 자신의 얼굴을 흉내 내는 데 사용한 마법 물품. 그게 어떤 건지 여기서 찾아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미적대다간 황제를 습격한 범인으로 몰리거나, 엄마에게 붙들려 꼼짝없이 신전에 가게 생겼으니. 결국, 라틸은 망설임 없이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라틸이 사라지자마자, 칼라인은 침대에 누운 가짜 황제와 창밖으로 멀어지는 가짜 하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라틸에게 도움이 될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면서.
“폐하?”
그 사이, 근위기사가 방 안까지 들어왔다. 들어올 때부터 조금 긴장해 있던 근위기사는, 황제의 후궁은 창가에 서 있고 황제는 침대에 이불도 들추지 않고 누워 있는 걸 발견하자 미간이 굳었다.
“폐하?”
의심스럽게 중얼거린 근위기사가 누워 있는 가짜 황제 쪽으로 더 가까이 오려는 바로 그때.
“피곤하군. 쉬다 나갈 테니 나가 있으라.”
기절해 있는 줄 알았던 가짜 황제가 명령했다.
“예.”
근위기사가 안심해 나가자, 손을 뒤로 감춘 채 공격 준비를 하던 칼라인은 미묘한 눈길로 가짜 황제를 보았다.
“깨어 계셨습니까?”
가짜 황제는 침대를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칼라인은 가짜 황제가 화를 내거나, 딸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며 씁쓸해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가짜 황제는 오히려 칼라인을 보자마자 창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직도 뭘 하고 선 거지? 얼른 저 애를 쫓아가.”
그걸 추격해 잡아 오란 뜻으로 알아들은 칼라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뒷말은 예상과 달랐다.
“넌 용병왕이라지. 네 세력으로 저 애를 지켜라. 지금은 저 애가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이 없으니까.”
칼라인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건 또 의외였다.
“잡아 오라 하실 거라 여겼습니다만.”
가짜 황제는 쓸쓸하게 명령했다.
“그건 다른 이들이 할 일이니, 넌 그 애가 다치게 하지마라. 몸도, 마음도.”
“…….”
칼라인은 대답하는 대신 바로 돌아섰다. 커튼을 걷고 창밖으로 나가기 직전. 뒤에서 가짜 황제가 덧붙였다.
“네가 저 애를 완벽하게 지켜낸다면, 일이 정리된 후에. 국서를 뽑을 때, 내가 널 지지해주마.”
칼라인은 평민 출신이기 때문에 아무리 용병왕이란 명성을 떨쳐도 국서 자리에 오르긴 어려웠다. 하지만 황제의 친모이자 선대 황후가 적극적으로 밀어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가짜 황제는 지금 그걸 미끼로 들먹이는 거였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칼라인은 고개만 돌린 채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조건을 안 거셔도 당연히 제가 지킵니다.”
“그럼 조건은 도로 무를까?”
“그럴 필요까진 없지요.”
중얼거린 칼라인이 바로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자. 대기하던 칼라인의 용병 시종이 망설임 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 어느새 가짜 황제는 넓은 방 안에 홀로 남겨졌다. 적막한 방 안에는 시계 초침 소리만 들렸다. 가짜 황제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창틀을 손에 쥐고서 그녀는 어두운 구름에 잠긴 넓은 황궁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았다. * * * 사이 좋은 모자가 마주 앉아서 하는 식사 자리지만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싸운 건 아니지만, 두 사람 다 웃으면서 말을 나눌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였다. 방 안에는 달그락거리며 접시와 포크 부딪치는 소리만 났다. 그러다 레안이 물었다.
“만약 라틸이 로드가 맞는데 신전에 갇혀 지내길 거부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가짜 황제, 라틸의 엄마 셰이트는 덩어리진 고기를 칼로 짓이기듯 자르다가 눈길을 들어 올렸다. 그 눈동자에는 온갖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레안은 포도주를 마시면서 생각했다. 자신도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슬프지만, 역시 어머니가 가장 슬플 거라고. 레안도 하나뿐인 동복동생을 아주 사랑했지만, 형제자매 간의 사랑과 부모자식 간의 사랑은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지 않던가.
“어머니는 해야 할 일을 하신 겁니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반대로 제가 라틸과 같은 입장이어도 이렇게 하셨을 거잖아요.”
셰이트는 자르다 만 고깃덩어리 옆에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탐스러워 보이는 짙은 갈색 덩어리 안쪽에서 주륵 붉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셰이트는 이끼 무늬가 그려진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면서 눅눅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같이 가야지. 혼자 보낼 순 없으니까.”
* * *
“왜 도망 나오신 겁니까?”
검은 구름에 달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 칼라인과 라틸은 동굴 가장자리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곁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최대한 궁전에서 먼 곳으로 오다 보니, 수도를 나와 길에서 벗어난 산에까지 올라오게 된 것이다. 이 산을 통해 도주의 흔적을 완전히 감추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궁리할 예정이었다. 칼라인은 불을 나뭇가지로 쑤시며 말을 이었다.
“주인께선 로드가 아니시니까, 신전에서 기다리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요.”
라틸은 무릎을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알아. 엄마를 끌어안을 때 나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야.”
“바로 기절시키시기에 그 생각은 전혀 안 하신 줄 알았습니다.”
“빨리했지.”
라틸은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서 칼라인의 발끝을 자신의 발끝으로 툭 쳤다. 하지만 커다랗고 단단한 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근데 생각해 봐. 로드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시간이 오래 걸리면? 그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신전에서 놀고먹으면서 지낸 내게 황제 자리를 돌려주려 할까?”
“…….”
“또 생각해 봐. 로드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전에 틀라가 먼저 힘을 길러서 나라를 차지하면? 틀라는 내가 신전에 잡혀 있던 걸 알아내겠지. 그 새낀 잘됐다 싶어서 내가 뱀파이어 로드라고 공표한 다음 죽여 버리고 일을 마무리 지으려 할걸? 증거도 아주 뚜렷하게 나와 있겠다, 뭐 걸릴 게 있겠어. 안 그래? 엄마랑 오빠랑 나 자신이 로드란 걸 인정하고 신전에 처박혀 지냈는데, 그게 제일 뚜렷한 증거지.”
“그렇군요.”
“그리고…… 물론 이건 진짜로 제일 가능성이 적긴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내가 로드라면 어떻게 될 거 같아?”
“선황후께선 그런 경우엔 주인이 계속 신전에서 지내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냐. 엄만 날 죽이려 할 거야.”
타닥타닥 소리가 나며 불똥이 하늘로 튀었다. 칼라인은 불을 들쑤시길 멈추고 라틸을 쳐다보았다. 라틸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라틸은 칼라인의 창백한 피부가 불의 불그스름한 빛에 물들어 반짝이는 걸 보았다. 초록색 눈동자 가운데에서 넘실거리는 불의 형상은 사람을 홀리는 악마가 그에게 깃들어 뛰어노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칼라인은 평소 이상으로 배로 아름다웠다.
“너 진짜 잘생겼구나.”
라틸이 중얼거린 말에 칼라인이 멈칫하더니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었다.
“이 와중에 제 칭찬입니까.”
라틸은 큼큼 목을 가다듬고서 다시 무릎을 끌어안고 불을 쳐다보았다.
“처음엔 신전에 두고 누르려 하시겠지. 하지만 아마 안 될 거거든.”
칼라인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 될지 될지, 주인이 어떻게 알고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그야 신관들이 기운을 누르느니 어쩌니 하는 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니까.”
“!”
“그게 가능한 거라면 왜 이전 로드들은 안 그랬대? 뱀파이어 로드가 날 때부터 악마같은 존재가 아니라 정말로 환생을 통해서 사람으로 부활하는 거라면, 그 사람들도 다 자기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 소중한 사람이 있었을 거 아냐. 누를 방법이 있으면 누르고 살았겠지. 모조리 몰살당한 게 아니라.”
“…….”
칼라인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왜 저러나 싶어 쳐다보자, 그는 불길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그러더니 윗옷을 벗어 라틸에게 덮어주었다. 라틸은 칼라인의 커다란 옷에 완전히 푹 덮이고 말았다.
“이걸 날 주면 넌 어떡해.”
“전 춥지 않습니다.”
“넌 수족냉증이잖아.”
“마음은 따뜻해서요.”
전에 라틸이 한 말을 칼라인이 기억해내고 그대로 따라 하자, 라틸도 그 말을 떠올리고서 웃었다. 칼라인은 라틸의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꼭 붙어 앉았다. 그러더니 팔을 뻗어서 라틸의 어깨를 감싸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대게 했다. 라틸이 고개를 올려 쳐다보자, 칼라인은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리고 있었다.
“이러면 저도 따뜻할 것 같습니다.”
“사심이 가득한데.”
“선황후께서 주인을 무사히 지켜준다면 절 국서로 밀어주겠다 하시더군요.”
“엄마가?”
라틸이 헛웃음을 짓자, 칼라인은 자랑스러운 척 턱을 조금 들어 올렸다.
“일이 무사히 마무리되면, 함께 국서용 방에 앉아 이 일을 떠올리면서 놀 수도 있습니다.”
“너…… 안 그런 거 같은데 야망이 있구나.”
칼라인이 웃음을 터트리자 그의 몸이 흔들렸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있던 라틸도 덩달아 몸이 흔들렸다. 그가 덮어준 옷이 흘러내리려 해서, 라틸은 한 손으로 옷을 도로 올리면서 칼라인의 턱선을 바라보았다. 새삼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야망이 있니 어쩌니 놀리긴 했지만, 이 와중에 모든 걸 다 버리고 자신을 따라와 준 칼라인이 정말 고마워서. 게다가 칼라인은 사랑하는 여자가 따로 있는데, 그 여자가 죽자 너무 괴로워서 하렘에 숨듯이 들어온 남자 아니던가. 그러면 황제가 누구든 상관없으니 그저 모른 척 조용히 지내고 싶어 할 수도 있는데…….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라틸은 문득 충동이 올라왔다. ‘있지, 도미스가 누구야?’ 하고 묻고 싶었다. 칼라인의 악몽 속에서 그가 함께 죽겠다고 흐느끼던 그 여자.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당시 상황으로 추측건대 이미 죽은 여자 같지만 그래도 궁금해졌다. 칼라인이, 이 남자가 온 마음과 진심을 다해 사랑한 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왜 그러십니까?”
시선을 느낀 건지 칼라인이 라틸을 보며 물었다.
“으응.”
라틸은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질문을 삼키고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미래를 다짐했어.”
“그 미래에 당연히 저는 함께하겠지요?”
“그럼. 널 버리면 내가 사람이냐. 짐승이지.”
“……전에도 그러셨습니다. 하지만 짐승이셨지요.”
“뭐? 내가 언제?”
라틸이 발끈해서 반박하자 칼라인은 픽 웃고서 고개를 저었다.
“제 꿈에서요. 최근에 꾼 꿈 내용입니다.”
“내가 그랬어? 나빴네.”
“네. 그러니 이젠 그러지 마십시오.”
항상 그 여자 꿈만 꾸는 건 아닌가 보네. 내 꿈도 꾸긴 꾸나 보구나. 근데 그 여자랑은 왜 아련한 꿈이고 나랑은 왜 배반하는 꿈을 꾸냐. 배반이란 말에 트라우마 걸리기 직전인데. 라틸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 칼라인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무척 신기했다. 칼라인은 라틸이 자신의 손을 잡자 덩달아 그 손을 잡고서 꾹꾹 눌러댔다. 그 손짓이 마치 커다란 대왕 호랑이가 해주는 꾹꾹이 같아서 라틸은 순간 빵 터졌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니야. 근데 어깨 좀 펼 수 있겠어?”
“어깨를 펴라고요?”
칼라인이 어리둥절해서 허리를 세우고 어깨를 펴자, 라틸은 그의 가슴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의 다리 사이에 앉아 가슴에 머리를 대자, 얇은 옷 사이로 그의 근육이 꽉 긴장해 굳는 게 느껴졌다.
“주인……?”
“옆에서 기대고 있으려니 목이 아파서.”
“이건…….”
“이러고 있으니까 너 꼭 의자 같아.”
“!”
“품이 커서 그런가.”
바로 코앞에 보이는 목울대가 꿈틀했지만, 라틸은 모른 척 눈을 감고서 편하게 칼라인에게 몸을 완전히 기대고 물었다.
“자세 불편해?”
“자세는 괜찮지만…….”
“옥좌에 있는 게 내가 아닌 가짜란 걸 밝혀낼 거야. 상대가 엄마랑 오빠라고 해서 가만히 있다 죽어줄 수는 없어.”
내내 굳어 있던 칼라인이 두 팔로 라틸을 꽉 끌어안았다. 라틸은 눈을 감고서 몇 시간이나 가까스로 참고 참았던 눈물을 결국 터뜨렸다. 그 상태로 한참이나 어깨를 떤 후에야 라틸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나중에는 완전히 잠이 든 건지 숨소리가 고르게 변했고, 오르락내리락하는 몸도 진정되었다. 내내 제대로 자지 못했던 몸이 이제야 조금씩 안정을 찾은 것이다. 칼라인도 몇 시간 동안 말없이 라틸의 등을 토닥이던 걸 그제야 멈추고서, 라틸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었다. 그 위로 가볍게 입을 가져다 대고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거의 들리지 않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미스. 나의 주인. 이번에는 반드시 당신을 지킬 겁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