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난 안 미안해요2020.11.18.
라틸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뒤통수가 다 얼얼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저기서 나와도 이 정도로 놀랍진 않을 거였다.
‘아니, 그건 아니구나. 그건 놀라운 일에 호러까지 겹쳐진 거잖아. 더 놀랐을 거야.’
하지만 이 역시도 감당이 어려워, 라틸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딸. 쓰러지겠다. 좀 앉을래?”
엄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언제나처럼 상냥한 목소리. 그 목소리마저도 지금 라틸에게는 달갑지 않았다. 가식적으로 들렸다. 혹은 친절을 위장한 비수나 독을 넣은 달콤한 과일주처럼 들렸다.
“목걸이 두 개 아니죠?”
목걸이 하나 더 벗으면 또다른 얼굴이 나온다거나…… 차라리 그게 낫겠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하나야.”
엄마가 웃는다. 이 와중에. 라틸은 눈썹 끝을 아래로 내렸다. 오빠에 이어서 엄마까지 배신이라니. 오른쪽 왼쪽 뺨을 연달아 맞고서 뒤통수까지 후려 맞아도 이 정도로 얼얼하진 않을 텐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다리 떨린다. 일단 앉는 게 낫겠는데?”
“왜 이런 거예요?”
“안 앉을 거야?”
“앉으면 바닥 뒤집어지면서 함정 나올 거 같아요. 지금 내 기분이 그래요. 내가 여기서 엄마 뭘 믿고 편히 앉겠어요.”
“…….”
엄마는 착잡한 표정이었다. 함께 살 때 라틸은 엄마가 저런 표정을 하면 늘 허둥댔다. 엄마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서 헛소리를 해댔다. 그러면 엄마는 라틸을 꼭 끌어안고서 쪽쪽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쁜 딸, 내 이쁜 딸, 노래를 부르면서. 그 생각이 나자 라틸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엄마는 나한테 하늘이자 땅인데. 엄마가 이러면 어떡해요. 내 세상이 무너지고 뒤집히잖아요.”
“네 세상에선 네가 하늘이고 네가 땅이야. 다른 사람한테 상처받았다고 해서 뒤집히진 마.”
“그게 생각처럼 쉬워요? 그 다른 사람이 엄만데?”
“안 쉬워도 그래야지. 네가 이렇게 쉽게 뒤집히면 너 하나 믿고 의지하는 국민들은 어떻게 하겠어.”
“그 국민들도 엄마가 다 뺏어 갔잖아요!”
“빌린 거야, 라틸. 뺏어간 게 아니라.”
라틸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서 엄마를 노려보았다.
“무슨 소리예요?”
칼라인은 라틸과 선대 황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감정을 확 드러내진 않지만 만만치 않게 곤란한 눈동자였다. 사소한 일로 아내와 장모님이 싸워도 나서기 난감할 텐데, 이런 어마어마한 일로 싸우고 있으니 입도 뻥긋하기 힘들 것이다. 엄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네 오빠도 둘 다 내 아이니까. 둘 다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라틸.”
“여기서 오빠는 왜 나와요? 오빠는 대현자 따라가서 잘 지내고 있었는데.”
물론 잠깐 국무를 봐 달라고 부르긴 했다. 하지만 며칠만 봐 달라 한 거고, 그건 전혀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설마 오빠가 며칠 국무 보면 과로사라도 할 거라 생각했어요?”
“심호흡해라 라틸.”
“네?”
“넌 뱀파이어 로드의 환생일 수도 있어.”
사이 좋은 엄마랑 오빠가 왜 자신을 배신한 건지, 왜 엄마가 이런 잔인한 짓을 자신에게 했는지, 슬프지만 현실적인 말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튀어 나온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라틸은 잠시 멍해졌다.
“네?”
라틸은 다시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뭐요?”
“로드.”
엄마가 또박또박 재차 알려주었다. 라틸은 눈을 부릅뜨고 입술은 올렸다. 이 와중에 웃으면 안 되는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사람이 너무 황당하면 이런 와중에도 웃음이 나오나보다.
“무슨 소리예요?”
엄마는 손가락으로 칼라인이 아까 벗겨낸 자신의 신발을 가리켰다. 칼라인이 그 신발을 가져다 주자, 엄마는 신발을 신으면서 라틸에게 말했다.
“너도 조사 중이었다면서. 흑마법사, 뱀파이어, 좀비, 500년 주기로 부활하는 로드 등.”
라틸은 얼굴을 구겼다.
“그 로드가 지금 나란 얘기예요?”
“확실한 건 아니란다. 가능성이 있는 거지. 정확히 말하자면, 너는 로드 후보 중 하나야.”
라틸은 기가 막혀서 빈정거렸다.
“무슨 소리예요. 난 엄마가 낳았잖아요. 혹시 내 아빠가 로드 후손이예요?”
“핏줄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환생을 하는 거래.”
“아니에요!”
라틸은 버럭 소리질렀다. 난데없이 자신의 모든 게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너무 화가 나서 숨이 가빠졌다. 소리를 지르고서야, 지금 자신이 언성을 높일 때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방 앞에 엄마가 데려온 자신의 근위기사들이 있을 터. 조심해야 했다.
“난 엄마 딸이에요!”
하지만 이 와중에 아무 말도 안 할 수는 없었다. 라틸은 목소리를 낮춰서 흐느끼듯 작게 소리쳤다.
“알아, 라틸. 네가 누구의 환생이건, 너는 내가 배 아파 낳은 내 딸이지. 그 부분은 나도 신경쓰지 않아.”
“그런데 왜요!”
“뱀파이어 로드는 그 존재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악을 깨우게 돼. 너도 조사했다며.”
어느새 라틸은 엄마의 근처까지 이동해 있었다. 칼라인은 창틀에 앉아서 이 당혹스러운 대치를 지켜보았다.
“그러면 왜 내가 황태녀가 되게 두셨어요!”
“난 그때 신전에 있었어.”
“아, 하긴. 그러네요. 엄만 애초에 내 옆에 있지도 않았죠.”
라틸은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 뜯다가 물었다.
“도대체 내가 로드란 헛소리는 누가 한 거예요? 오빠예요? 그럼 오빠는 왜 내가 황태녀가 되게 뒀대요? 아니, 애초에 내가 황태녀가 되도록 밀어준 것도 오빠잖아요! 그때부터 이런 짓을 꾸몄어요?”
“그건 아니야, 라틸.”
“못 믿겠어요. 엄마랑 오빠 얘긴 하나도 못 믿겠어요.”
“네가 황태녀 자리에 오르기 전엔 후보라고 확신하지 못했대.”
“지금도 로드라 확신하지 못한다면서, 후보라 확신하지 못하는 건 또 뭔대요!”
“레안도 대현자의 제자가 되어서 신전에 간 다음에야 로드의 전조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듣고, 네가 로드일 가능성이 높다 생각하게 된 거래.”
라틸은 씩씩거리면서 엄마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엄마가 이 상황을 설명해 주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엄마가 제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 거짓말이라고 해주었으면 싶기도 했다. 반대로 그냥 이 방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다 부수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내가 황태녀일 때 그럴 가능성을 알았다면서, 왜 그땐 안 말렸는데요?”
“그래도 딸이고 동생인데, 로드의 환생일 수도 있단 걸 알게 되자마자 어떻게 내치겠니. 네가 얼마나 맑은 아이인지 아니까. 환생이어도 넌 다를 거라고 믿었지.”
“근데 아니었다?”
라틸은 모아두었던 숨을 ‘하’ 뱉어냈다. 엄마가 아무리 좋게 말을 해주어도 그게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예언대로 네가 피를 부르며 황좌에 올랐으니까.”
라틸은 자신의 즉위식 날을 떠올렸다. 자신만큼 틀라를 싫어했던 레안이, 그래도 이복형제를 죽이는 건 너무했다고 비난했단 것도. 혹시 그것도 이것과 관련되어서일까?
“넌 제대로 통치를 하고 국무도 잘 보는데, 네가 아무리 좋은 황제가 되려 해도 어두운 기운은 점점 몰려오고 있어, 라틸. 변방의 마을 사람들이 다 사라지는 등 이미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내 탓이 아니에요! 난 로드가 아니니까요!”
“이대로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선 거야.”
라틸은 발끈해서 외쳤다.
“그럼 나한테 얘길 해 줬으면 되잖아요!”
“뭐라고. 너 때문에 세상이 망해간다고? 그러니 황좌에서 내려오는 게 낫겠다고? 네가 이렇게 말하면 믿으려 할까? 아니, 오히려 나와 레안이 미쳤다 믿고서 아예 접근도 못 하게 막았겠지.”
“!”
“엄마, 나중에 내가 아닌 거 알고 후회하면 어쩌려고 이래요? 내가 조사한 바로 로드는 틀라였거든요. 거의 확실하게.”
“말했잖아. 후보라고. 틀라가 맞을 수도 있지.”
라틸은 차갑게 코웃음쳤다.
“맞을 수도 있는 게 아니라 확실하게 틀라예요. 황좌에 오를 때 피를 본 거? 틀라도 해당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흑마법이고 뭐고 그런 거 아무것도 몰라요. 반면에 틀라는 죽었는데 부활했고 온갖 이상한 짓들을 하고 있어요.”
그러나 라틸이 구구절절 설명해도 엄마는 오히려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확실해? 틀라가 부활한 거?”
“네!”
“어떻게 그렇게 확실하니?”
“내가 봤으니까요!”
라틸은 단호하게 외쳤다. 그러나 엄마는 여전히 이전과 같은 어조였다.
“라틸. 죽은 사람이 부활한 거야, 네가 죽은 사람을 본 거야? 어느 쪽인지…… 정말로 확신할 수 있어?”
그 말에 오히려 라틸이 주춤했다. 정곡이었다. 라틸이 틀라를 본 건 애매한 상황이었고, 라틸은 그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을 못 했다. 그때의 일은 감각을 떠올리면 현실 같았지만, 상황을 떠올리면 꿈일 가능성이 높았다. 틀라가 부활한 거라면 그쪽이 로드일 가능성이 높지만, 라틸이 죽은 사람을 어둠의 힘으로 본 거라면 라틸이 로드일 가능성이 높았다. 엄마는 그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 뭘 원하는 거예요. 내가 로드일 수 있으니, 날 죽여야겠다? 날 죽이고 엄마가 평생 내 시늉을 하면서 황제로 살겠다?”
“네가 로드가 아니란 게 확실해질 때까지 신전에 들어가 있거라.”
“신전이요?”
“신관들을 준비시켜 두었어. 그들의 기운을 받으면서 네 기운을 누르고 지내.”
“준비까지 해 두셨어요? 신전에 마음을 다스리러 가신다더니, 날 다스리러 가신 거였네요?”
“네 말처럼 네가 로드가 아니란 게 확실해지면 그땐 다시 네가 돌아오면 돼. 그러라고 일부러 내가 네 흉내를 내는 거니까.”
라틸은 손을 빠르게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묻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이 말을 물었다가 어떤 대답일 돌아올지 몰라 무서웠다. 하지만 이 와중에 무슨 대답이 돌아오든 뭐가 더 나쁘겠어. 결국 라틸은 멈추어서서 물었다.
“아니지만, 만약 내가 로드면요? 그럼…… 날 죽이기라도 할 거예요?”
내내 앉아 있던 엄마가 처음으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럴 일은 없어, 라틸.”
“못 믿겠어요.”
“네가 세상에 해를 입히지 못하게는 막아야 하니까.”
라틸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요? 오빠가 위험해질까 봐 날 누르려는 거라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라틸. 네 오빠가 없었다면, 네가 로드건 세상이 위험하건 무슨 상관이겠니. 난 너만 지키면 되는데.”
“!”
“하지만 내 자식은 둘이니, 나는 너도 네 오빠도 지켜야 해.”
라틸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억울하고 슬프고 괴롭고…… 그냥 하염없이 무언가가 콸콸 눈가에서 쏟아지려 했다. 거기에는 어떤 부정적인 감정의 이름을 붙여도 옳았다. 다 들어맞는 이름일 테니까.
“좀 더 솔직하게 말해볼까, 라틸? 다른 사람이 로드 후보였다면, 난 그냥 후보들을 다 죽이게 했을 거다. 그편이 가장 확실하게 안전하니까.”
“!”
“네가 후보니까. 내 딸이 로드 후보니까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꼰 거야. 널 지키고 싶어서.”
가까이 다가온 엄마가 두 손으로 라틸의 뺨을 감쌌다. 하지만 라틸은 엄마의 손이 닿기 전에 뒤로 물러났다.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단 걸 떠올렸기 때문에. 자신의 얼굴을 바꿔준 마법 물품이 가면이란 걸 엄마가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궁지에 몰린 지금, 라틸은 자신에게 남은 몇 안 되는 패를 모두 공개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엄마는 라틸에게 거부당했단 생각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본 라틸은 이 와중에도 마음이 아팠다. 엄마가 원망스러우면서도 엄마가 아픈 게 싫단 이중적인 마음이 들었다.
“라틸. 제발 순순히 신전으로 가자. 네가 그 과정에서 다치는 걸 보고 싶진 않아. 일이 진정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어. 어떤 식으로 국무가 진행되는지도 일주일에 한 번씩 늘 전해줄 거고, 매일매일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네게 전해줄 거야. 잠깐 휴식을 취한다 생각하면 돼. 응?”
라틸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그러고서 라틸은 두 팔을 벌렸다.
“아직 엄마가 이렇게까지 한 걸 용서할 수 없어요. 하지만 엄마가 날 위해 이런 행동을 한 건 아니까…… 일단 엄마 말을 받아들일게요. 나도 오빠가 안전하길 원하니까요.”
라틸의 말에 엄마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어릴 때 해주듯 라틸을 꼭 끌어안았다.
“널 위한 거지만 미안해, 라틸.”
라틸은 힘주어서 엄마를 같이 꽉 안은 다음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거짓말한 거지만 난 안 미안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