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내가 누군지 알고 싶어?2020.11.15.
칼라인이 반사적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신발……말입니까? 안 벗겨지십니까?”
“내 신발 아니고.”
“그럼 누구의……?”
“가짜 황제. 내가 지금 얼굴을 바꾼 것처럼 그쪽도 얼굴을 바꿨잖아. 모습을 바꿔주는 효능이 있는 마법 신발을 신은 거 같아. 확실한 건 아니지만.”
“하필 신발이라니. 곤란하군요. 반지 같은 거라면 쉬울 텐데요.”
“반지가 쉬워?”
칼라인이 손을 내밀더니 자연스럽게 라틸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곧 맞잡은 손가락 사이로 아프진 않지만 단단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뭐 하는 거야?”
라틸이 묻자 칼라인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손을 위로 빼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빼면 되니까요.”
“그러면서 은근히 내 손 잡은 거야?”
“이런 기회에 잡아야지요.”
“네 손은 항상 차가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손이 차갑대. 그래서일까?”
“아닙니다. 전 수족냉증입니다.”
“너 무드가 없구나. 차가운 건 네 손이 아니라 낭만없는 네 성질인가 보다.”
라틸이 손을 쭉 빼면서 투덜거리자, 칼라인은 웃으면서 라틸의 두 뺨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댔다.
“이러면 따뜻합니다.”
“시끄러워. 내려. 낭만적인 분위기는 이미 물 건너갔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면…….”
“내려.”
“…….”
정색하고서 손을 내리는데, 그가 좀 시무룩해 보인다고 하면 착각일까? 라틸은 칼라인이 좀 귀여워 보인다고 생각하다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래, 지금 내가 나란 걸 알아주는 건 얘밖에 없는데 이렇게 구박할 때가 아니잖아. 아주 소중하게, 불면 날아갈세라 잘 대해줘야지.’
“소중한 나의 칼라인아. 수족냉증 걸린 그 연약한 손으로 신발을 잘 벗길 수 있겠어?”
“…….”
“뭐야 그 표정은.”
“그냥 하던 대로 하시지요, 주인. 소름이 돋습니다.”
“야.”
라틸이 정색하고서 째려보자. 칼라인이 팔짱을 끼고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어떻게 해야 신발을 벗길 수 있을까요.”
속 보이는 행동이었으나, 급한 건 자신이었기에 라틸은 순순히 넘어가 주었다.
“발 마사지 같은 걸 해주겠다고 하면…… 안 넘어가겠지?”
“정말로 신발이 마법 물품이라면 그 정도론 안 될 겁니다.”
“그치.”
“이 경우엔…… 그렇군요. 신발을 직접 벗도록 하기보단, 재운 다음에 벗겨야겠습니다.”
“할 수 있겠어?”
“해 봐야지요.”
“다른 건 하지 마. 신발만 벗겨야 해.”
라틸은 말을 해놓고서 후회했다. 다른 건 하지 말라니. 이 말은 하지 말걸. 낮에 칼라인이 가짜 황제의 이불을 덮어 주면서 세심히 챙겨 주던 게 괜히 마음에 남아서 지금 툭 튀어나온 탓이다. 하지만 이미 말은 뱉어버린 후이고 칼라인은 라틸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다른 건 하지 마’에서 ‘다른 건’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라틸은 칼라인의 질문을 무시하고서 횡설수설했다.
“난 이만 퇴근했다가 다시 돌아올 테니까 나중에 결과를 알려줘. 신발은 감춰놓고. 아니, 그러면 안 되나. 퇴근하지 말까? 나 여기 있을까? 신발은 없애버릴래? 어쩌지?”
칼라인은 손을 들어 올리더니, 차가운 손가락으로 라틸의 눈썹 부근을 당겼다. 라틸이 쳐다보자 그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재워드릴까요?”
“어?”
* * * 칼라인의 방이 일 층인 덕택에 안쪽에서 망을 잘 봐주자, 창문을 통해 그의 방 안에 들어가는 건 쉬웠다.
‘좀 어색한데.’
라틸은 방 안에 들어와서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칼라인의 시종은 라틸을 보고 잠시 놀랐지만, 칼라인이 “주인이시다.” 이 말을 하자 바로 “네.” 하고 수긍했다. 그걸로 끝이야? 오히려 라틸이 황당할 정도로 깔끔한 수긍이었다.
“네 부하는 네 말을 철석같이 믿네.”
“언제 죽고 죽일지 모르는 상황에선 서로를 신뢰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너희 용병단은 모두 그런 사이야?”
“네.”
“좋네……. 부럽다.”
“부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모두 폐하의 사람들입니다.”
“네 사람들이지 뭘.”
“폐하의 사람들입니다.”
말이라도 고맙구만. 라틸은 웃으면서 칼라인의 어깨를 두드리고서 몸을 숨기고 있을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두 사람이 세운 계획은 이랬다. 일단, 라틸이 방 안에 몸을 숨기고 있으면, 칼라인이 가짜 황제를 방에 데려와 재운 다음 신발을 벗긴다. 다음, 라틸은 그걸 지켜보다가 가짜 황제가 원래 모습을 되찾으면 당장 신발을 처리하거나 감춘다. 간단하지만 가짜 황제를 한 번에 무력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문제는…….
“근데 가짜가 여기에 오란다고 올까?”
바로 이 점. 가짜 스스로도 행동을 조심하고 조심할 텐데. 과연 여기에서 잠들려 할지, 그게 좀 회의적이었다. 하렘 안에서 잠들게 할 수도 있긴 하겠지. 경계를 풀게 할 수도 있긴 하겠지. 언젠가는. 하지만 그러려면 시간을 좀 길게 들여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가짜가 아직 궁전에 잠입한 지 오래되지 않았으니, 경계심이 최고조로 올라왔을 때가 아닐까?
“시험해 보아서 나쁠 건 없지요.”
그러나 칼라인은 쉽게 대답했고 라틸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칼라인의 말처럼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다. 이번에 안 된다면 다시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될 뿐이니.
“그리고 단호하게 거절하진 않을 겁니다. 그쪽도 폐하를 흉내 내야 하니까요. 후궁들을 갑자기 멀리하면 오히려 상대가 의심을 사게 될 테고요.”
* * * 그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치자 칼라인은 가짜 황제를 데려오겠다면서 방을 나섰다. 무슨 수로 데려올지는 모르겠지만. 라틸은 일단 두꺼운 커튼 뒤에 몸을 숨겼다.
‘데려올 수 있을까?’
하지만 칼라인을 기다리는 내내 라틸은 걱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칼라인은 첫날밤 보았듯 아주 짐승 적인 섹시함을 갖추고 있었다. 정말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거야 밤에 모든 게 세팅이 되었을 때 얘기지, 낮의 칼라인은 좀 무뚝뚝한 편 아닌가. 그렇다 보니 그 말주변에 과연 가짜를 설득해서 여기까지 데려올 수 있을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소리!’
그때. 문밖에서 소리가 났다. 라틸은 숨을 죽이고서 그림자조차 드러나지 않도록 몸을 잘 숨겼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주 조금 틈을 벌리고서 엿보니 칼라인과…… 가짜 황제였다. 정말로 칼라인이 가짜 황제를 데려온 것이다. 무슨 수로 데려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데려온 거야?’
신기해하고 있자니, 가짜 황제가 까르르 웃으면서 곧장 침대로 다가가 털썩 앉았다. 그 모습이 칼라인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하는 듯해서 라틸은 순간 울컥했다. 칼라인 저 자식, 진짜로 뭘 어떻게 해서 데려왔길래 가짜가 저렇게 함박웃음이야? 꼬리를 몇 개를 달고 가서 홀려 온 건데?
“얼른 보여줘 봐. 그래, 안에 뭐가 있단 거지?”
게다가 저게 무슨 말이야? 라틸은 도끼눈을 떴다. 뭘 보여 달라고? 저 가짜 자식이 지금 내 후궁한테 뭘 보여 달라 하는 거야? 라틸은 커튼을 뜯어낼 뻔했다.
“시간은 많습니다, 폐하. 밤도 길고…… 천천히 하시지요.”
“난 빠른 게 좋은데.”
“조급하시군요.”
대답 대신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라틸은 마른침을 삼켰다. 욕이 나올 뻔했다. 칼라인 이 자식, 너는 또 뭘 보여주고 있는 거야? 하지만 각도상 그것까진 보이지 않았다. 가짜가 “워후.” 하는 소리만 날 뿐. * * * 의미 불명의 대화가 오고 간 후. 라틸은 혹시라도 칼라인이 가짜와 몸이라도 겹칠까 봐 씩씩거렸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화가 날 법한 대화는 많이 오고 갔지만. 어쨌든 칼라인은 ‘며칠 전의 약속대로 재워달라’ 가짜에게 청했고, 가짜는 그런 약속이 있는지 없는지 알 리 없기에 칼라인과 한 침대에 누웠다. 이후 시간이 지나자 칼라인이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오는 소리가 났다. 칼라인이 약속한 신호를 보내자 라틸은 조금 더 커튼을 벌렸다. 그러자 가짜 황제가 곤히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칼라인은 침대 아래. 가짜 황제의 발치에 서서 신발을 벗기려 하고 있었고. 그의 커다란 손이 신발에 닿자 라틸은 심장이 졸리는 느낌에 숨을 멈추었다. 아까 가짜가 ‘워후’ 할 때의 분노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마침내 신발이 천천히 가짜의 발에서 벗겨지자 라틸은 숨을 느리게 뱉어냈다. 이제 네 정체를 볼 수 있겠구나! 커튼 사이에 모습을 감춘 채 라틸은 희열에 들떴다. 주먹을 꽉 쥐고 이를 내밀며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빌어먹을 가짜 새끼. 어떤 낯짝인지 얼굴 한번 보자. 어떤 새끼든 처형대에 그 목을 걸어놓고 말 거다. 그러다가 다 벗겨진 신발이 완전히 툭 발에서 떨어지는 순간. 됐다! 칼라인이 한쪽 신발을 완전히 들고 서자 라틸은 속으로 환호했다. 벌떡 일어나 만세를 할 뻔했다.
“!”
그러나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상대는 라틸의 얼굴이었다.
‘신발이 아니었어?’
라틸은 심장이 철렁했다. 그러면 그땐 왜 신발을 벗어보라 했던 거지? 함정? 함정이었나? 칼라인 역시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목을 주춤주춤했다. 라틸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고서 ‘어쩌지요?’ 묻고 싶은 눈치였다. 그러다가 혹시 두 쪽 다 벗겨야 하는 건가 싶은지, 칼라인은 결국 남은 한쪽 신발도 마저 벗겼다. 제발…… 제발! 라틸은 커튼을 꽉 쥐고서 그 광경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남은 한쪽을 다 벗겼는데도 여전히 가짜 라틸은 라틸의 모습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참담하기만 할 뿐. 그때.
“왜 이렇게 과도하게 아양을 부리나 했더니.”
가짜 황제가 누운 채 웃음을 터트렸다. 라틸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잠든 줄 알았던 가짜가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러다 가짜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더니 한쪽 팔에 몸을 기댄 채 칼라인을 보며 물었다.
“라틸을 만나기라도 한 모양이지, 칼라인?”
가짜의 질문은 정곡을 찔렀다. 칼라인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가짜는 이미 자기가 한 질문에 확신이 있는 듯했다.
“라틸은 어디 있지?”
가짜가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아마 여기 있을 거야. 그렇지?”
“…….”
“신발 벗기란 말을 누가 해줬겠어. 안 그래?”
그제야 칼라인이 덤덤하게, 정말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대답했다.
“갑갑하실 듯해 벗겨드렸을 뿐입니다.”
“암살이라도 하듯 그렇게 조용히?”
“깨실까 염려되어.”
“난 바보가 아니야, 칼라인. 넌 라틸에게 들었던 거야. 내 신발을 벗기면, 무언가 ‘일’이 벌어질 거라고.”
칼라인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으나, 가짜 황제는 빙그레 웃더니 이윽고 정확히 라틸이 숨은 장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칼라인은 몸을 움직여 그 손끝을 막아섰다.
“됐다.”
그러나 라틸은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여기고서 그냥 커튼을 확 들추고 앞으로 나서버렸다. 이쪽이 가진 마법 물품이 가면이란 걸 저 가짜가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저 가짜는 처음부터 신발로 함정을 판 거였다. 그 증거가 저 표정이었다. 그러니 나설 수밖에. 가짜 황제는 침대에 나른하게 앉은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가, 라틸이 모습을 드러내자 위에서 내려다보듯 턱을 들어 올리고 웃었다. 그 표정이 승리감에 차 있는 듯해서 라틸은 자존심이 상했다. 라틸은 가짜 황제를 제압해 묶은 다음 마법 물품을 찾아 온몸을 뒤지는 것, 가짜 황제가 비명을 질러 사람들을 부르는 것. 어느 게 더 빠를지를 비교했다. 역시 비명이 빠르겠지? 바로 문 앞에만 해도 가짜 황제가 데려온 호위가 가득할 테고. 그러나 가짜는 웬일로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대신 라틸의 표정을 보더니, 가엾다는 듯 질문했다.
“내가 누군지 궁금해?”
“네가 가짜란 건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 테니까.”
라틸이 이를 갈면서 대답하자 가짜 황제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잔웃음은 피아노 낮은 건반 소리 같았다. 불현듯 라틸은 가짜가 승리감에 찬 표정이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가짜가 득의양양한 표정이라는 건 라틸 자신의 생각일 뿐이었다. 가짜의 표정은 무척이나 애매했다. 그렇기에 더욱 이상했다. 저 기묘한 표정이라니. 라틸이 인상을 구기고 보고 있자, 마침내 빠르게 어깨를 떨던 가짜가 갑자기 손을 올렸다. 무기를 꺼내는 건가 싶어서 라틸은 허리춤에 손을 댔다. 그러나 공격은 아니었다. 가짜 황제가 손을 올린 건 자신의 목 뒤였다. 그 상태로 가짜 황제는 손을 뒤적거렸다. 목걸이? 목걸이를 푸는 건가?
‘왜 여기서 뜬금없이 목걸이를?’
그 상태로 손을 움직이던 가짜 황제가 마침내 일을 다 끝냈는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 한 손에는 반짝이는 줄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라틸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리도 입도 생각도 막혀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을 커다란 돌덩이가 틀어막은 기분이었다. 한참 만에야 가까스로 라틸은 부식된 쇠 같은 목소리를 쥐어짰다.
“엄,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