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정면에서 마주하다2020.11.04.
가면이 만들어줄 수 있는 가짜 얼굴은 하나뿐인가? 라틸은 가면을 썼다 벗길 반복하면서 가면의 정확한 사용법을 찾으려 애썼다.
“안 되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다른 기능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다른 용도가 생각나진 않았다.
‘괜찮아. 일단은 이 정도만으로도 쓸모는 충분해.’
아주 잠시 실망했지만, 라틸은 고개를 젓고서 그런 마음을 얼른 뿌리쳤다. 이 가면의 용도는 대단했다. 적들이 그 난리를 부려가면서까지 얻으려 할 만했다. 당장 그 이상의 가치가 없다고 실망하는 건 욕심이다. 그때였다. 창밖에서 시끄럽고 요란스러운 소란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외쳐대고, 발소리와 말소리가 마구 뒤섞인 소리. 라틸은 혹시 몰라 가면을 착용한 다음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들추자 한 무리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는 게 보였다. 그들은 순순히 응하는 사람은 그냥 얼굴만 확인하고 보내주었으나, 거절하는 사람은 다소 거칠게 붙잡기도 했다. 나와 소스란 경을 찾는 거구나. 라틸은 대번에 그 병사들이 왜 저러는지 이해했다. 라틸이 다녀갔단 사실을 들은 레안이 지시를 내린 게 분명했다. 가짜 황제가 지시를 내렸을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 가짜야 보나 마나 레안의 사람일 테니까.
‘소스란 경은 무사히 나갔겠지?’
병사 하나가 눈길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라틸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쳤으나, 라틸은 일부러 피하는 대신 빤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병사는 그냥 구경 중인 사람이라 생각했는지, 곧 고개를 내리고 아까처럼 지나가던 사람들을 붙들어댔다. 라틸은 커튼을 치고서 방 안으로 돌아와 침대에 앉았다.
‘레안을 쉽게 만날 수 있진 않겠네. 그럼 어떤 식으로 궁전에 잠입해야 할까.’
몰래 궁전 안에 숨어 들어가서 레안을 만난다?
‘기각. 분명 들켜.’
숨어 들어갔다가 숨어 나오는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라틸은 궁 안 지리며 호위병들의 교대 시간까지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들어갈 경우에는 레안을 만나기가 힘들었다. 단순한 황자여도 만나기 어려울 텐데. 지금 레안은 아주 나라가 뒤집어질 비밀스러운 반역을 저질렀다. 유일한 동복 오빠답게, 그는 라틸이 절대로 착한 성품이 아니란 것도 알았다. 그러니 아마 자기 주위에 호위들을 쫙 깔아두지 않았을까?
‘상인 같은 거로 위장해서 들어가면 어떨까.’
궁전에는 매일 같이 상인들이 드나든다. 궁전에서는 늘 많은 양의 음식이며 생필품이 필요하니, 상인으로 위장한다면…….
‘오빠가 알겠지.’
라틸은 다시 고개를 젓고서 그 방안도 버렸다. 상인으로 변장해 들어가는 건 너무 무난했다. 최대한 무난하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게. 그냥 이 가짜 얼굴을 한 채 돌아다녀도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을…….
‘아!’
마침내 라틸의 머릿속에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하녀로 들어가야겠다.’
* * * 라틸은 궁전에서 언제 하녀를 고용하는지, 무슨 일로 고용하는지, 하녀를 고용할 때 어떤 어떤 점을 중점적으로 보는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보수가 좋은 데다 근무 환경이 좋으므로 궁전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막상 그토록 바라던 궁전에 고용되어도 여러 가지 사유로 스스로 그만두는 사람도 많았다. 이유야 다양했다. 권력자에게 밉보여서, 생각보다 업무가 쉽지 않아서, 사방이 귀족과 황족이니 그들에게 거슬릴까 조심하는 게 힘들어서, 보아서는 안 될 걸 보아버려서, 줄을 잘못 서서……. 그런 이유로 궁전에서는 석 달에 한 번씩 계속 사람을 뽑는데, 라틸이 알기로는 그날이 거의 다가오고 있었다. 마음을 먹자마자 라틸은 단기간에 하녀로 들어갔다 나올 만반의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하녀를 뽑는 담당 관리자가 딱 좋아할 만한 내용으로 이력서를 만들었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을 돌아다니면서 ‘지인’이라고 할 만한 이들을 만들었다. 신분증은 위조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잠행 용도로 만든 여러 종류의 신분증이 있었으니까. 개중 하나를 고르기만 하면 됐다. 당연히 라틸은 서류 심사에 통과했고, 이틀 후에 면접을 보러 오란 합격장도 받았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난 뒤. 라틸은 옷차림 역시 최대한 깔끔하고 무난하게 사 입고서, 면접을 보기 위해 궁전 외곽에 붙은 면접장으로 걸어갔다. * * *
“흑마법사는?”
황제의 질문에 기사가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황제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서 중얼거렸다.
“그래? 생각보다 잘 도망 다니는군.”
기사는 그 말에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흑마법사들은 내내 숨어 살았으니까요.”
황제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지. 흑마법사들은 내내 숨어 살았으니 잘 도망 다닐 수 있지. 하지만 지금 그들이 찾고자 하는 건 흑마법사가 아니라 ‘진짜’ 황제였다. 황후의 딸로 태어나 궁전 안에서 곱게 곱게 큰 그 온실 속 화초 황제 말이다.
‘그렇지만 오래 도망 다니진 못하겠지.’
사방이 병사였고, 타리움은 강력한 나라였다. 수많은 이들이 찾아다니면 결국 찾아낼 수밖에 없다.
“서넛 경은?”
“사람을 보냈으니 곧 올라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 가짜와 만나기 전에 먼저 찾아야 할 텐데.”
‘가짜 황제’ 셰이트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음?”
그러다가 셰이트는 고개를 돌렸다.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끌시끌하고 밝고 경쾌한 목소리. 그 한 무리의 목소리들은 잠깐 확 피어났다가 뭉쳐서 다시 멀어졌다.
“무슨 소리지?”
셰이트가 창가로 다가가 내려다보자, 하녀들이 몇몇씩 모여서 웃으며 이동하고 있었다.
“오늘 하녀를 새로 뽑는 날이라 그럴 겁니다. 하녀를 뽑는 날부터 뽑고 일주일 정도는 내내 이렇게 시끄러우니까요.”
셰이트는 고개를 기웃했다.
“하녀?”
“예.”
셰이트는 다시 창가로 시선을 돌리며 나지막하게 “하녀…….” 하고 중얼거렸다. 곧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군. 그쪽으로 올 수도.”
“예?”
셰이트는 긴 설명을 하는 대신 집무실을 나가 면접장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 * * 그 시각. 라틸의 명령을 받고서 쉬지 않고 이동한 끝에 빠르게 멜로시 영지에 도착한 근위기사는 곧장 영주의 성을 찾아갔다.
“영주님. 서넛 경이 어디에 있습니까? 폐하께서 급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다행히 아직 ‘가짜 황제’가 보낸 사람이나 소문은 여기까지 내려오지 않은 상태였다. 근위기사는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며 영주를 만나 인사를 올리자마자 서넛을 찾았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불운했다.
“서넛이라면 이미 여기서 나갔는데. 무슨 일인가? 많이 급한 일인가?”
근위기사는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서넛이 이미 영지를 떠났다고? 길이 엇갈린 건가? 그런 모양이었다.
“언, 언제 떠난 겁니까?”
“어제 출발했지.”
대답을 한 멜로시 영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많이 급한 거라면 내가 사람을 풀어줄까? 여기서 궁전까지 가는 길이 많으니, 그 애가 어디로 갔을지 난 짐작이 가지 않는다네.”
어제. 말을 타고 하루 동안 바쁘게 달렸다면 이미 거리가 꽤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안 되는데. 근위기사는 초조하게 발을 구르다가 얼른 꾸벅 인사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주님. 하지만 괜찮습니다. 전 서넛 경을 찾아야 하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대로라면 가짜 황제 쪽 사람들이 서넛을 먼저 만날 확률이 높아진다. 절대,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 * * 면접장 안으로 들어가자 대략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저희끼리 소곤거리고 있었다. 다들 옷차림이 단정하고 머리카락은 한 올도 내려오지 않게 틀어서 묶은 깔끔한 모양새였다. 라틸이 들어오자 하녀 지원자들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으나, 곧 별말 없이 다시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었다. 여기까지 올라온 이들은 모두 다 서류 심사에서 통과한 사람들이었다. 이중 몇 명이 궁정에 고용될지 모르니, 다들 서로를 라이벌이라고 여길 터. 그래서 아는 사람들끼리만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라틸은 말을 섞지 않고 벽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두고 조용히 면접관이 오길 기다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담당 관리가 조수 두 명을 데리고서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들어오자 지원자들은 동시에 조용해졌다. 라틸은 관리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리란 걸 알면서도 괜히 초조해져서 발가락을 꿈지럭거렸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담당 관리는 지원자들을 한 번 주룩 훑어보았지만, 라틸 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고서 입을 열었다.
“궁전에서 일한다는 건 굉장한 영예이지요. 하지만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일하기 위해선 그만한 각오와 재능도 필요합니다.”
“…….”
“한 명씩 안쪽 방으로 들어오면 면접을 보지요. 전원 다 고용할 수도 있고, 전원 다 떨어트릴 수도 있으니 옆에 있는 상대가 라이벌이라 생각하지 말고 자기의 기량만 펼치면 될 겁니다.”
담당 관리가 대기실 안쪽에 난 문 안으로 들어가고, 조수도 그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하지만 조수 한 명은 따라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멈추어 서서 안쪽 상황을 계속 살피다가, 담당 관리가 신호를 하자 수첩을 꺼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에머 양.”
그러자 화려한 금발을 돌돌 말아 올린, 겉으로 보아서는 잘사는 집 영애 같은 여자가 일어나 위풍당당하게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여자는 3분도 지나지 않아 사색이 되어 나왔다.
“무슨 일이야? 뭐라고 질문해?”
그 여자와 내내 붙어서 대화를 나누던 친구가 물었지만, 에머는 입만 뻐끔거리다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말해주면 안 된대. 미안. 직접 들어가서 보는 게 낫겠어.”
혼자서만 면접에 붙기 위해 그러는 건 아닌 듯했다. 저 안에서 무슨 질문을 하기에? 근처에 있는 다른 지원자들은 덩달아 표정이 굳어서 갑작스럽게 긴장해 덜덜 떨기 시작했다. 반면 라틸은 담당 관리에게 어떤 식으로 지원자들을 추리는지 들었기에, 긴장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라틸의 이름은 아홉 번째로 불렸다.
“바네사 양.”
라틸은 너무 자신만만해 보이지도 않고 너무 기죽어 보이지도 않을 태도로 일어나 적당한 속도로 문으로 다가갔다. 조수는 의심 없이 문을 열어주었고, 라틸은 약간 긴장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라틸은 면접실 안에 들어가자마자 상황이 자신의 예상에서 완전히 빗나갔단 걸 알아차렸다. 면접관이 앉아 있어야 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건 관리가 아닌 가짜 황제였다. 귀족 영애처럼 차려입은 가짜 황제. 면접관은 그 옆자리에 불편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조수는 아예 벽 구석에 박혀 서 있었다. 라틸은 놀란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얼굴 근육을 통제했다. 가짜 라틸은 상석에 있긴 했으나 일부러 평이한 귀족 옷차림을 하고 왔다. 관리는 상대가 황제란 것도 알려주지 않았고, 옆에 가만히 있을 뿐이다. 즉, 가짜 라틸은 자신이 황제란 걸 숨긴 채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내가 하녀로 잠입해 들어올 거라 예상했구나.’
라틸은 가짜가 검술 실력뿐만이 아니라, 머리를 쓰는 방식도 자신과 꽤 흡사하단 걸 깨달았다. 이 정도쯤 되자, 대체 어디서 저런 여자를 데려온 건지 오빠의 멱살을 잡고서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얼굴은…… 닮은 정도가 아니야. 혹시 저쪽도 나처럼 얼굴을 바꾸는 그런 가면이 있는 걸까? 고지도에 3번이란 숫자가 쓰여 있었지. 그래. 어쩌면 그런 가면이 여러 개가 있을지도 몰라.’
어쨌든 여기서 자신이 저 가짜 황제를 보고 반응을 보인다면, 가짜 황제는 라틸이 가짜 지원자란 걸 알아차릴 터. 조심해야 했다. 귀족들은 황제의 얼굴을 알 확률이 높지만, 보통의 평민이라면 황제를 본 적 없을 확률이 높으니까.
“여기로 앉으시지요, 바네사 양.”
그러고 있자니, 담당 관리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작은 의자를 눈으로 가리키며 지시했다. 라틸은 딱 면접하는 사람들만큼만 긴장한 표시를 내면서 얼른 그 자리에 앉았다. 그곳에 앉자 바로 맞은편에 가짜 황제의 얼굴이 보였다. 내내 말없이 있던 가짜 라틸의 시선이 라틸에게 똑바로 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