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더니2020.11.01.
여기에 내가 있는데 맞은편에도 내가 있다. 목소리, 얼굴, 자세, 말투까지 흡사한 사람. 심지어 그 사람은 방금 막 침실에서 나왔고, 호위와 시녀들은 모두 저자의 곁에 있다. 게다가 저쪽은 황제의 제복을 반듯하게 입고 있는 반면, 이쪽은 밖에 다녀오느라 그냥 귀족들이 걸치는 망토를 위에 두르고 있을 뿐이다. 라틸은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넌 뭐냐. 뭔데 거기서 나와.”
누군가 라틸 자신을 흉내 내고 있었다. 그것도 얼굴까지 똑같이 하고서. 라틸이 낮은 목소리로 서늘하게 중얼거리자, 맞은편에 선 이가 아주 조금 주춤했다. 하지만 그걸 알아차린 건 마주 보고 선 라틸 뿐. 주위에 선 시녀와 호위들은 오히려 더욱 경계해서 가짜 라틸을 보호하듯 둘러쌌다.
“크에리스. 에렌델. 루이다. 클라우, 쥘리.”
라틸은 더욱 불쾌해져서 시녀와 기사들의 지위를 무시한 채 이름만을 건조하게 나열했다. 그 화난 목소리에 몇몇의 눈동자가 흔들렸으나, 그들은 곧 더욱 다부진 표정을 하고서 라틸을 노려보았다.
“너희가 진짜 미쳤구나.”
라틸은 냉기가 뚝뚝 떨어질 정도로 차갑게 물었다.
“서넛 어디 갔어? 레안은? 둘 다 불러와라.”
시녀와 호위들의 뒤에 숨은 가짜 라틸은 라틸의 명령에 명령으로 대응했다.
“뭣들 하는 거야? 빨리 저자를 잡아서 감옥에 넣어!”
명령이 내려오자, 기사 두 명이 검을 허리춤에서 뽑았다. 검집에서 검이 나오며 ‘스릉’ 소리를 내자 시녀들이 가짜 라틸을 뒤로 밀며 말렸다.
“기사들이 잡을 동안 안에 들어가 계세요, 폐하.”
“혹시 저주라도 걸까 염려됩니다. 얼른 피하세요.”
라틸은 기가 차다 못해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가면을 가지러 동굴에 간 사이에 세상이 돌아버리기라도 한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게 말이나 되는가? 차라리 레안이 그 사이에 반란을 일으키거나, 살아 돌아온 틀라가 짧은 시간 안에 궁을 전복시켰다면 그게 더 믿을 만하겠다. 아니, 아낙차 후궁이 탑을 탈출해 틀라의 세력을 모아서 며칠 만에 반기를 일으킨 쪽이 더 말이 됐다. 그런데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자신처럼 행세하고 자신의 부하들에게 자신을 잡으라 명령하다니. 이건 대체…….
‘아니, 이럴 때가 아니야.’
아무리 어이없는 상황이라도 그저 우두커니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확실한 건 지금이 위급한 상황이란 것. 저 기사들은 가짜와 자신을 사이에 두고서 혼란스러워하는 게 아니라, 가짜를 진짜로, 진짜를 가짜로 믿고 있었다. 저들이 습격하기 전에 이쪽도 대응해야 했다. 라틸은 마음을 먹자마자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잡아!”
가짜 라틸이 외치는 것과 동시에 기사 둘이 동시에 라틸에게 달려들었고, 라틸은 재빨리 몸을 옆으로 꺾으면서 둘의 발목을 동시에 베어냈다. 지금은 몹시 화가 나지만 근위기사들은 라틸을 호위하는 이들이었고, 자주 얼굴을 보는 이들이었다. 가짜를 진짜로 알고 저러는 꼴은 열이 받지만 고의로 저러는 게 아니니 우선 한 발 정도 봐주는 것이었다. 그걸 모르는 기사들은 발목이 베인 채로도 라틸을 습격하려 했으나, 라틸은 대번에 상대의 몸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면서 턱을 머리로 박아 버렸다. 뒤이어 옆에 있는 놈까지 걷어차 기절시키고 보니, 이미 가짜는 시녀들을 데리고 방 안에 들어가 숨어 있었다.
“나와!”
라틸이 버럭 외치며 방문을 걷어차자 안에서 공포에 질린 비명이 왁자지껄 들려왔다. 혀를 찬 라틸이 다시 방문을 차는 순간. 문이 열리며 정말로 가짜가 나왔다.
“안 됩니다, 폐하!”
“위험해요!”
“서넛 경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시녀들이 외쳤으나 가짜 라틸은 라틸의 보검을 손에 든 채 빠르게 돌격해 들어왔다.
“!”
미치겠군. 라틸은 속으로 욕을 뱉으며 닥쳐드는 상대의 턱을 무릎으로 찍었다. 퍽 소리가 나며 상대가 휘청이자 시녀들의 비명이 거세졌다. 그러나 가짜는 개의치 않고서 벽을 한 발로 밟고 몸을 붕 띄우며 라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도대체 이 가짜가 어디서 나타난 건진 모르겠으나, 라틸만큼 검을 다루는 데 능숙해 보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더욱 몰려들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이대로 가다간 진짜 침입자로 몰리겠어.’
라틸은 가짜의 목을 향해 위협적으로 검을 휘둘러 거리를 벌린 다음, 뒤돌아 계단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올라오던 이들이 잠시 혼란에 찬 틈을 타, 라틸은 난간을 밟고 주욱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가며 부하들에게 경고했다.
“무슨 일인지 알아내면 전부 다 이대로 안 넘어갈 테니, 각오들 해둬라.”
빠르게 몸을 숨긴 라틸은 품 안에 넣어 두었던 가면을 쓴 다음, 망토를 벗어 돌 밑에 감춰두었다. 그 후 궁전 밖을 빠져나온 라틸은 수도로 돌아온 뒤 근위기사와 둘이서 들렀던 여관에 방을 잡았다. 함께 이동했던 근위기사는 자신과 내내 붙어 다녔으니, 무언가 지금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단 걸 알아차릴 터. 분명 라틸을 찾기 위해 마지막에 함께 들른 이곳으로 올 거란 계산이었다. 기사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라틸은 가면을 벗고 창틀에 앉아 생각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보통 똑같은 사람이 둘이 나타난다면 다들 혼란스러워하지, 이렇게 확신에 차서 한쪽을 가짜라 몰진 못할 텐데.’
그런데도 라틸을 본 궁정인들은 모두 다 당연하단 듯이 가짜를 편드는 건 물론, 이런 상황을 대비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 * * 두어 시간이 지나자, 예상한 대로 함께 카리센에 다녀온 근위기사가 나타났다.
“폐하!”
근위기사는 라틸을 보자마자 울먹이며 부르더니, 제풀에 놀라 목소리를 낮추고는 얼른 문을 닫고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라틸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내 방에 갔는데 나랑 똑같이 생긴 애가 내 흉내를 내고 있었다. 다들 그자를 보면서 황제 대하듯 하고. 너는?”
“휴가를 마치고 복귀했단 보고를 하러 갔는데, 서넛 경이 없지 뭡니까. 지금 영지에 내려갔다고 합니다.”
“여기 없대?”
“예. 그래서 부단장에게 알리려 기다리는데, 다른 동료가 오더니 제가 없는 사이에 난리가 났다면서…….”
기사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뻐끔거렸다.
“괜찮아.”
방금 몸소 다 체험하고 왔는걸. 라틸이 한숨을 섞어 중얼거리자 기사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레안 황태자님이 미리 경고했던 대로 정말 흑마법사가 나타났다면서, 행동하는 거나 말하는 거나 얼굴이 폐하와 완전히 똑같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라틸은 기사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달래주다가 ‘레안’ 이름에 우뚝 멈췄다.
“누구? 레안?”
라틸이 조용히 되묻자, 기사는 하염없이 전해 들은 이야기를 하다가 입을 다물고 라틸의 눈치를 살폈다. ‘아차’ 하는 얼굴이었다.
“다시 말해봐. 누가 경고를 했다고?”
그러나 라틸은 아까처럼 기사를 달래줄 여력이 없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나타나고 부하들에게 가짜 취급을 받으며 쫓겼을 때도 어이가 없었으나, 방금 들은 이야기에는 그야말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오빠 이름이 왜 나와?
“그게…….”
“말해봐. 이 일에 오빠가 관련이 있단 거야?”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폐하. 그냥 그렇게 전해 들은-.”
“그러니까. 어떻게 전해 들었는지 묻는 거다.”
라틸이 더욱 낮아진 목소리로 재차 묻자, 기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곰곰이 되짚어가며 설명했다.
“폐하께서 궁전을 떠나신 후 그날 하루는 다들 폐하가 편찮으시다고 알고 있었다 합니다. 그런데 꼭 폐하를 뵈어야 할 급한 일이 생겨서, 다음날에 레안 황자님께서 폐하와 따로 얘기를 하러 방에 들어가셨답니다. 이후 나오시더니, 지금 폐하께서 몸이 좋지 않은 게 흑마법사 때문인 것 같다고…… 흑마법사가 폐하의 외양을 훔치느라 이렇게 아프신 거라 하셨답니다.”
라틸은 침대 위에 앉아 주먹을 꽉 쥐고 기사의 말을 한 자 한 자 거듭 씹었다. 저절로 욕이 나왔다. 오빠가 여기 관련되어 있단 것도 지금 입이 안 다물어지는데. 심지어 가짜가 나타나 ‘내가 진짜다’ 한 게 아니라, 오빠가 먼저 가짜 얘기를 꺼냈다……?
“사람들이 그 말을 믿었어? 난데없이 흑마법사 어쩌구 하는데?”
“이전에 저주에 걸린 시체가 나타나기도 했고, 또…….”
라틸은 입술을 깨물었다. 힛라 노신관이라거나 가짜 자백범, 흑마법사들을 붙들어 오라던 자신의 명령, 후궁이 된 대신관, 그의 호위를 자처해 모여든 성기사단. 즉위 후부터 내내 흑마법과 관련해 여러 가지로 일이 터졌다. 물론 이것들은 측근들 외에는 거의 모르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그 측근들이, 레안에게 가짜 흑마법사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그 말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이들이란 것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바로 그쪽을 진짜로 여긴다고?”
너무하다 싶어서 라틸이 헛웃음을 터트리자 기사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실은 백랑화술의 백화가 성기사 몇을 데리고 어느 마을로 내려갔는데, 그 마을이 기묘하게 변해 있었답니다.”
“변하다니?”
“살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시체들은 모두 다 뜯어 먹힌 흔적이 있었다고…….”
“!”
“제가 아까, 레안 황자님이 폐하를 꼭 뵈어야 한다고 침실에 들어가셨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 일이 이 일이랍니다. 백화가 그 일을 보고하러 온 시점이 레안 황자님이 가짜 폐하 이야기를 한 시기다 보니 사람들이 황자님의 말을 바로 믿은 듯했습니다.”
“…….”
“이틀 뒤에는 폐하가, 아니, 폐하를 흉내 낸 가짜가 모습을 드러낸 다음, 폐하를 닮은 가짜가 나타날지도 모르니 다들 주의하라 했답니다. 그게 흑마법사의 재주라고요.”
라틸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떻게 오빠가…….”
가짜가 자신을 흉내 낸단 것 이상으로 오빠가 자신의 뒤통수를 쳤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폐하…….”
“외교 사절단을 꾸려서 카리센에 가겠다는 걸 말린 게 오빠다.”
“그럼 처음부터……?”
“그래. 그런 모양이야.”
라틸은 이를 아득 물고서 주먹을 꽉 쥐었다. 기사는 그 모습을 안타까워 보다가 황급히 제안했다.
“폐하, 제가 사람들에게 증인을 설까요? 제가 폐하와 계속 함께 있었단 걸 알리면-.”
“증인은 무슨. 너도 위험해.”
“예?”
“오빠, 아니, 그건 오빠도 아니야. 레안 그 자식이 이 일을 꾸미려고 아무래도 단단히 준비한 모양인데. 오빠가 널 가만히 둘 거 같아? 네가 나랑 같이 카리센에 다녀온 걸 알고 있을 텐데?”
“그, 그렇군요.”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는지 기사가 눈동자를 떨었다.
“네가 사정을 듣고 갔단 보고를 받았으니, 아마 오빠는 나는 물론 너까지 잡으려 들 거다. 네가 유일한 증인이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
라틸은 두 손을 꽉 모아 쥐고서 분노에 차 창밖 궁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오빠도 몰랐겠지. 하이신스가 몰래 궁전에 왔다가 나랑 같이 카리센으로 돌아갔던 사실은.”
“아! 그럼 하이신스 폐하께 도움을 청하면 되겠군요!”
“그래. 하지만 신중히 해야 돼. 잘못하면 ‘가짜 흑마법사’가 카리센 황제와 손을 잡고서 타리움을 먹으려 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
라틸은 벌떡 일어나 방안을 뱅글뱅글 맴돌았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터져 나올 것 같았고 눈알이 욱신거렸다. 예상하지 못한 오빠의 배반에 너무 화가 나서 견디기 어려웠다. 어떻게 그렇게 쏙 닮은 가짜를 구했는지는 둘째 치고라도, 어디서부터가 오빠의 계략인지, 오빠가 왜 이런 짓을 한 건지 짐작되는 바가 없어 더욱 힘들었다.
‘오빠가 틀라와 손을 잡았을 리는 없어. 오빠도 틀라를 싫어했잖아. 아니. 아니야. 그런 식으로 치면 오빠가 날 배반한 것부터가 말이 안 되지. 지금은 그 어떤 것도 확신해선 안 돼.’
라틸은 잠시 생각하다가 기사에게 지시했다.
“넌 멜로시 영지로 가서 서넛 경을 만나보아라.”
“저 혼자 말입니까?”
“내가 돌아온 걸 알았으니 오빠는 널 죽이든 잡든 입을 막으려 할 거다. 흑마법사와 한패라고 사람을 풀지도 모르니, 얼른 떠나. 지금 당장.”
“폐하, 그러면 폐하께서는…….”
“서넛을 다른 데 보내두고 일을 꾸민 걸 보면, 이 일에 서넛은 관련이 없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먼저 가서 선수를 쳐야 돼. 내가 카리센에서 돌아온 걸 알았으니, 오빠도 서넛을 만나려 할 거야. 가짜나 오빠가 서넛을 찾기 전에, 내가 서넛과 먼저 만나야 한다. 반드시.”
“폐하께서는요? 같이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난 따로 할 일이 있어.”
품 안에 넣어둔 가면. 지금은 이 가면을 사용할 때였다. 이 가면이 있으면 레안이나 가짜가 사람들을 풀어 라틸을 찾더라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출발해라. 빨리. 서둘러!”
‘나는 빌어먹을 오빠를 만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