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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속지 마라 (70/367)

70화. 속지 마라2020.10.28.

라틸이 지도를 보면서 산을 훌훌 올라가자, 기사가 뒤를 따라오며 감탄했다.

16551085962291.jpg“폐하께선 지도도 잘 보시고 산도 잘 타시는군요.”

넌 시류도 잘 읽고 아부도 잘하는구나. 라틸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손수건을 꺼내 축축해진 이마를 닦았다. 고개를 들자 구름이 한결 가까워져 있었다. 아래쪽을 보니 마을 사람들도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개미로 보일 만큼 작았다. 라틸은 지도를 한 번 더 살피고 방향을 점검한 다음,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16551085962298.png“가자. 최대한 빨리 도착해야 하니까.”

16551085962291.jpg“예, 폐하.”

산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는 하늘이 연한 푸른빛이었으나, 고지도가 가리키는 곳에 도착했을 땐 이미 연보라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산 자체가 가파르고 높기도 했지만, 그보다 동굴 입구가 아주 교묘하게 가려져 있던 탓에, 거의 다 도착하고서 시간을 잡아먹힌 탓이었다. 라틸은 자신들이 동굴 입구를 앞에 두고 그냥 지나간 횟수만도 대여섯 번은 될 거라고 확신했다.

16551085962298.png“야영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라틸은 위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하늘이 빠른 속도로 한 점의 빛마저 남기지 않고 다 빨아들이듯 어두워져갔다. 곧 밤이 찾아올 텐데. 어두워진 숲은 위험하다. 어디서 야생동물과 몬스터들이 나올지 몰랐다.

16551085962291.jpg“안은 더 안 보일 테니 불을 가지고 들어가는 게 낫겠습니다.”

기사가 등불을 켜서 라틸에게 내밀고, 자신은 횃불을 만들어 들었다. 혹시 안쪽에 야생동물이 있을지도 모르니 위급할 경우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라틸은 지도를 꼼꼼히 접어 잘 챙겨 넣고서, 한 손에는 등불을 받아 들고 동굴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밟을 때마다 화살이 나오는 함정, 점점 좁아지는 벽, 잘못 밟으면 훅 꺼지는 바닥, 보석 하나 잘못 건드리면 작동하는 살인 골렘들, 움직이는 미로……. 라틸은 동굴 안으로 들어가며 영웅 이야기에 나오는 온갖 위험한 던전들을 다 떠올렸다.

16551085962298.png‘내가 가진 건 경매장에 나오고, 멸망한 나라에서 만들었고, 악당들이 가지려 애를 쓰던 고지도니까 그런 던전들만큼 위험할지도 몰라.’

16551085962291.jpg“습기가 많긴 한데. 그 외엔 괜찮네요.”

16551085962298.png“그러게.”

하지만 험준했던 입구 찾기와 달리, 동굴 내부는 라틸이 예상한 위험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내부도 외부만큼 길이 험해서 잘못하면 미끄러져 넘어지기 쉽단 정도? 그 외에는 골렘도 함정도 몬스터도 없다. 마침내 동굴 끄트머리에 도착했을 때는, 라틸도 기사도 약간의 상처조차 입지 않은 상태였다. 다행이지 뭐. 라틸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동굴 끝자락에 놓인 상자를 쳐다보았다. 동굴 끝에는 바닥이 위로 훅 솟아 있었는데, 폭은 40cm 정도였고 높이는 라틸의 배 부근까지 올라왔다. 그 튀어나온 부분 위로 검은 칠을 한 아름다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세공 방식이 섬세하고 여기저기에 금박을 달아 치장한 값비싸 보이는 상자였다. 시간의 흔적 때문인지 낡은 건 어쩔 수 없었으나, 라틸은 오히려 이 상자가 낡은 걸 보고 안심했다. 이게 흠 하나 없는 새 상자였더라면 누군가 먼저 들어와서 상자를 바꿔치기한 건 아닐까 의심됐을 테니.

16551085962291.jpg“그걸 찾으러 오신 겁니까?”

라틸이 상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기사가 고개를 옆으로 빼며 물었다. 레안 황자를 불러 국무까지 맡겨 놓고 몰래 빠져나오시기에 뭘 하려는 건가 싶었더니. 그냥 작은 상자 하나 가지러 오신 거였나, 어리둥절해 하는 기색이었다.

16551085962298.png“글쎄.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라틸은 중얼거리면서 상자 앞부분에 달린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틱’ 못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상자 뚜껑이 조금 위로 올라갔다. 라틸이 상자 뚜껑을 완전히 올리자 이번에는 ‘끼이이익’ 하는 소리가 났다.

16551085962298.png‘뭐지?’

라틸은 상자 안에 든 물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음산한 소리와 함께 나타난 건 가면이었다. 얼굴 반쪽을 가리는 가면. 특이한 건 상자는 화려한 반면 이 가면은 아무 무늬가 없었고, 상자는 세월의 흐름이 보였던 반면 가면은 방금 막 만든 새것처럼 보인단 것이었다.

16551085962291.jpg“귀한 물건인가요?”

기사가 다시 물었다. 하나도 안 귀해 보이는데요, 하는 투로.

16551085962298.png“그러길 바라곤 있는데…….”

라틸은 가면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내 눈에도 하나도 안 귀해 보이네. 혹시 적들이 다른 지도로 먼저 와서 상자 안에 있던 ‘진짜 내용물’을 가져가고 이걸 가져다 둔 건 아니겠지? 기사가 가면을 보면서 ‘폐하는 이걸 왜 찾으러 오신 거지?’ 의아해하는 게 이해가 갈 정도로, 라틸 역시 가면이 영 밍밍해 보였다. 기사는 라틸 본인도 가면에 대해 확신이 없는 듯하자 횃불을 내려놓고서 물었다.

16551085962291.jpg“괜찮으시다면 제가 한 번 살펴볼까요?”

16551085962298.png“그럴래?”

라틸이 가면을 내밀자 기사가 그걸 받아들었다. 어차피 밤 동안 동굴에 있어야 하기에 라틸은 기사가 가면을 살피는 사이, 야영을 할 만한 장소를 찾아 동굴 안을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16551085962298.png‘뭐 거기서 다 거기네. 아니면 입구 부근까지 가서 자는 게 나으려나? 그런데 입구 부근에 있다가 괜히 야생동물이라도 들어오면 그것도 좀.’

그런데 한참 주위를 둘러보다가 기사 쪽을 쳐다보니,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기사가 없었다. 아니, 있긴 한데 그 기사는 라틸이 아는 기사의 얼굴이 아니었다. 옷차림이나 짐은 데려온 그대로인데, 얼굴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다. 그걸 본 라틸이 당황해서 쳐다보자, 그 처음 보는 사람이 라틸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하하’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댔다. 그러고서 무언가를 얼굴에서 벗겨내는 시늉을 했는데, 놀랍게도 그런 동작을 하자, 아무것도 없던 손에서 아까의 그 하얀 가면이 생겨났다.

16551085962291.jpg“죄송합니다, 폐하. 아무리 봐도 그냥 가면 같기에 한 번 써 보았습니다.”

기사는 라틸이 함부로 가면을 쓴 걸 질책한다 생각했는지 멋쩍어하며 사과했다.

16551085962291.jpg“하지만 가면을 써봐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네요. 가면 안쪽에도 별 내용이 없고요.”

라틸은 눈치 빠르게 알아차렸다. 저 기사, 방금 가면을 썼을 때 자기 얼굴이 바뀌었단 걸 모르는구나! 그럼 사람 얼굴을 바꿔주는 게 저 가면의 능력인가? 고대에 남겨진 마법 물품 중 하나인가? 라틸은 마른침을 삼켰다. 얼굴을 바꾸어주는 가면. 그렇다면 고지도에 위치까지 표시해 숨겨둘 만한 가치가 있다. 저런 건 정말……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굉장히 위험할 수도 유용할 수도 있는 거니까.

16551085962298.png‘적들 손에 넘어갔다면 큰일 났겠어. 얼굴을 외워 둬도 누가 적인지 알 수 없단 거잖아.’

16551085962291.jpg“폐하?”

라틸이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자, 기사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16551085962291.jpg“왜 그러십니까?”

라틸은 얼른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16551085962298.png“아니, 열심히 온 것 치고는 별로 그럴듯한 수확물이 없어서.”

16551085962291.jpg“그렇지요…….”

라틸은 성큼성큼 다가가 기사에게서 가면을 다시 받고서 일부러 상자 안에 도로 넣어두었다.

16551085962298.png“그래도 혹시 모르니 궁전에 돌아가면 학자들한테 살펴보라 해야겠어.”

16551085962291.jpg“예. 그게 낫겠습니다.”

  * * * 새벽이 되고 시야가 구분될 정도로 사위가 밝아지자마자, 라틸과 기사는 말린 육포를 씹으면서 산에서 내려왔다. 아프단 핑계를 대고서 몰래 빠져나온 것이기에 얼른 궁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오빠가 어련히 알아서 잘 사람들을 막고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황제가 얼굴을 보이지 않고 너무 오래 지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16551085962291.jpg“제가 마차를 구해 오겠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뒤, 라틸이 여관을 잡고 몸을 씻는 사이에도 기사는 마차를 구하기 위해 밖을 계속 돌아다녔다. 라틸은 대충 몸에 물 칠을 하고 머리를 감고서, 상자에서 가면을 꺼내 옷 안쪽에 숨겨두었다. 기사에게는 ‘학자들에게 이걸 연구해보라 해야겠다’고 말했지만, 당장은 그렇게 할 마음이 없었다. 이렇게 재미난 물건을 굳이 왜? 라틸은 이걸 연구하기보다는 유용하게 사용하고 싶었다. 특히 내부에 어떤 적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 아니던가.

16551085962298.png‘이걸로 적들을 가려낼 수 있을지도.’

잠시 뒤 기사가 마차와 말을 사서 돌아오자, 라틸은 그에게도 씻으라 한 다음 먹을거리를 사서 먼저 마차 안에 들어가 기사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16551085962291.jpg“출발하겠습니다. 폐하.”

카리센을 벗어나 타리움으로 돌아가는 내내 라틸은 가면을 만지작거리면서 어떤 식으로 가면이 효과를 발동하는지 시험했다. 작은 손거울을 통해 보니 확실히. 일단 가면을 쓰면 얼굴이 바뀌는 게 맞았다. 그리고 이건 정확한 건 아니지만, 가면이 만들어주는 얼굴은 놀랍도록 존재감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냥 얼핏 스쳐 지나가면 아예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단순히 이목구비의 문제가 아니라, 분위기가 그랬다.

16551085962298.png‘이것도 가면의 효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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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쉬지 않고 이동한 덕에 라틸과 기사는 빠른 시일 안에 수도에 다시 도착했다.

16551085962291.jpg“말과 마차는 다시 팔겠습니다, 폐하.”

16551085962298.png“그러도록 해라.”

라틸은 근처에 여관을 잡고 쉬면서 혹시 ‘황제가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돌지는 않나 귀를 기울였으나, 다행히 그런 말은 없었다. 라틸은 안심하고서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기사와 함께 정문을 통과해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16551085962298.png“고생 많았다. 수고했어.”

16551085962291.jpg“아닙니다. 폐하와 함께 갈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16551085962298.png“오늘은 들어가서 쉬어라. 며칠 간 힘들었을 텐데.”

16551085962291.jpg“예. 폐하께서도 편히 쉬십시오.”

라틸은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기사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서, 자신의 침실이 있는 궁전 회랑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침실로 돌아가고 있자니 가장 먼저 서넛 생각이 났다.

16551085962298.png‘서넛 경이 뭐라고 할까.’

나올 때는 말하지 않고 나왔는데, 돌아온 다음 말을 안 할 수는 없겠지. 서넛은 라틸이 레안과 짜고서 몰래 카리센에 다녀온 걸 알면 완전히 정색해서 입만 벌리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좀 화를 낼지도 몰랐다.

16551085962298.png‘그러고보니 서넛 경이 화내는 건 본 적이 없네. 매일 능글맞기만 하니.’

라틸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얼굴을 가렸던 망토를 뒤로 넘겨 벗었다. 계단 몇 개를 올라가자 마침내 복도 끝에 있는 침실 문이 보였다. 그런데 복도를 걸어가고 있자니, 얼굴에 와 닿는 시선이 따가웠다.

16551085962298.png‘뭐지?’

아프다 했던 황제가 침실이 아니라 멀쩡히 복도를 걸어다녀서 그런가? 지나가는 궁정인들이 다들 인사를 올리는데, 인사를 하면서도 좀 경악한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라틸이 고개를 기웃하며 돌아보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멀어졌다.

16551085962298.png‘왜 저래?’

절대로 황제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어서 라틸은 뭔가 찝찝한 느낌을 받았다.

16551085962298.png‘무슨 일이 있었나? 있었는데 궁전 밖으로는 말이 안 새어 나갔던 건가?’

초조한 기분에 심장이 간지러워지고 괜히 배가 아파왔다. 라틸은 발걸음을 빠르게 해서 침실로 달려갔다. 그러나 침실 앞에 도착한 순간. 한 시녀가 문을 열고 나오다가 라틸을 보더니,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트리면서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비명을 질렀다.

16551085962291.jpg“아악! 나타났어요! 나타났어!”

라틸은 당황했다. 나타나다니? 뭐가? 뭐가 나타났는데?

16551085962298.png“무슨 말이야?”

라틸이 질문을 던지면서 앞으로 가자, 시녀는 ‘악! 악! 악!’ 비명을 더욱 크게 지르면서 문을 열고 도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도망치듯이. 쾅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자 라틸은 황당해졌다.

16551085962298.png‘왜 저래?’

그러나 황당할 사이도 없이. 이번에는 문 양옆에 서 있던 근위기사들이 검을 빼 들고 라틸을 경계해 쳐다보기 시작했다.

16551085962298.png“뭣들 하는 거냐?”

그걸 본 라틸이 화가 나서 짜증스럽게 묻자, 기사들이 흠칫해서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라틸은 더욱 어이가 없어서 손으로 벽을 ‘통통통’ 두드렸다.

16551085962298.png“뭐 하는 짓들이냐고. 며칠 사이에 눈이 썩기라도 한 거야? 감히 누구에게 검을 내미는 거지?”

말을 하다 보니 저절로 목소리가 낮고 차갑게 변해갔다. 처음엔 어이가 없었는데. 생각하니 화가 나서.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은 혼란스러운 듯 자기들끼리 시선을 계속 주고받았다.

16551086085988.jpg“속지 마라.”

그때. 문 안쪽에서 낯익으면서도 낯선, 이상한 목소리가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건 굉장히 기묘한 목소리였다. 목소리 자체가 특이하다기보다는, 그냥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라틸의 느낌이 그랬다. 그럴 수밖에. 라틸은 그 이유를, 목소리를 낸 사람을 보자 알 수 있었다.

16551085962298.png“!”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의 얼굴. 기사들에게 ‘속지 마라’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나온 그 얼굴.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머리를 하나로 높게 올려 묶은 그 얼굴은 바로 라틸 자신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목소리까지 라틸 자신과 같은.

16551085962298.png‘이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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