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어쩌면 우리가 함께할 수 있던 마지막 순간2020.10.25.
카리센으로 떠나기로 한 날 밤. 라틸은 주위 사람들에게 몸이 좋지 않다고 슬쩍 언질을 건넨 다음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자신의 침실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게스타 생일이 2주 좀 안 되게 남았으니까……. 별일 없으면 다녀와서 챙겨줄 수 있겠네.’
달력에 게스타의 생일을 체크해 둔 라틸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쪽에 ‘책’ 하고 적어 넣었다. 게스타가 선물로 둘이서만 함께하는 시간을 원했지만, 그래도 역시 선물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좋아.’
이후 라틸은 황제 제복을 벗은 다음 편안한 검은 무복을 입고 그 위에 귀족들이 걸칠 법한 망토를 걸쳤다. 그러고서 미리 정해둔 시간에 슬그머리 방을 빠져나왔을 때, 응접실 안에는 시녀들이 아무도 없었다. 라틸이 머리가 너무 아파서 어떤 소음도 듣고 싶지 않으니 오늘은 다들 다른 곳에 가 있으라 한 덕이었다. 기사들을 물리는 건 조금 더 어려웠으나, 레안이 잠시 그들을 불러 시간을 끌어준 덕에 라틸은 호위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복도도 벗어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궁전 안을 헤집고 돌아다닌 덕에 사람 없는 곳만 골라서 이동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이후 높은 담벼락을 훌쩍 넘어 나가자, 대기 중인 검은 마차가 보였다. 마차 마부석에는 검은 모자를 푹 눌러써 얼굴을 가린 근위기사 한 명이 타고 있었다. 처음에는 서넛을 데려오려 했으나, 근위대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서넛을 데리고 나가면 다들 황제가 자리를 비웠단 걸 알게 된단 생각에 일부러 다른 기사를 데려온 것이었다.
“가자.”
라틸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며 지시하자, 근위기사는 얼른 고삐를 철썩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이럇!”
마차가 궁전에서 멀어지는 동안, 라틸은 작은 등불을 마차 천장 모서리에 매달아 놓고서, 품 안에 넣어온 고지도를 꺼내 꼼꼼히 한 번 더 살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아예 이 지도를 머릿속에 통째로 외워버릴 셈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라틸은 지도 모퉁이에 쓰인 ‘3’이란 숫자에서 눈길을 멈췄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지도 안에 있는 다른 글자는 전부 다 뜻을 알아냈는데. 모퉁이의 숫자 3은 왜 넣은 건지, 아직 그건 알아내지 못했다.
‘일단 물건부터 찾아낸 다음 알아보자.’
물건을 완전히 찾아내면 적들이 지도를 중간에 낚아챈 게 자신이란 걸 알아도 상관없으니, 학자들에게 지도를 맡겨 연구하게 할 수 있다. 아니면 대현자나 오빠에게 맡겨도 되고. 라틸은 지도를 잘 접어서 품 안에 넣고서 마차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 * * 깜빡 잠이 든 라틸은 마차가 심하게 덜컹거리는 바람에 정신이 돌아왔다.
‘뭐지?’
몸이 몇 번이나 앞으로 튕겨나갈 정도로 마차를 너무 험하게 모는 듯하자, 라틸은 팔짱을 풀고 자리를 이동해 마부석 칸막이를 톡톡 두드렸다.
“무슨 일이냐?”
“죄송합니다. 이쪽 길이 너무 험해서 그럽니다.”
이 정도로 험하면 바퀴가 나갈 것 같은데……. 라틸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으나, 조금 걱정이 되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기우뚱하더니, 작은 비명이 들려왔다.
“이봐?”
라틸이 재차 묻자 아예 마차가 멈추었다. 그러더니 곧 기사가 마차 문을 똑똑 두드린 다음 밖에서 열었다.
“죄송합니다. 지름길로 이동했는데, 길이……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바퀴가 고장 났어?”
“예.”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마차 밖으로 내렸다.
“어디가?”
바퀴는 마차의 구조나 원리에 대해 잘 아는 편이 아닌 라틸이 보기에도 심각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라틸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고칠 수는 있어?”
“예비 바퀴가 있으니 바꾸면 됩니다.”
근위기사가 바퀴를 교체할 동안 라틸은 바위에 걸터앉아 하늘을 살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생각처럼 잘되지 않는지 근위기사가 계속 끙끙거리는데, 저 멀리서부터 빠른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부딪칠 지도 모르니 물러나 있어.”
라틸은 길 가운데를 막고 선 근위기사에게 명령하고서 자신도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섰다.
“예.”
말발굽 소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는데, 소리가 가까워질 수록 다가오는 이가 두 명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적은 아니겠지?’
라틸은 말을 탄 이들이 지나가길 기다리면서도, 만약을 대비해 검 손잡이 위에 슬쩍 손을 올려두었다. 근위기사 역시 같은 생각인지 라틸의 앞쪽에 서서 무기를 반쯤 뺐다.
“만약 적이 아니라면 도움을 청해 볼까요?”
“되었다. 이런 밤중에 저렇게 급하게 말을 몰잖아. 저쪽도 급한 사정이 있을걸. 우리를 습격하려고 온 게 아니라면, 아마 말을 멈추지도 않고서 가버릴 거야.”
그러나 예상과 달리 말을 타고 온 두 사람은 근처에서 예의 바르게 속도를 늦추는가 싶더니, 부서진 마차 부근에 오자 완전히 멈추어 섰다.
‘적?’
그걸 본 근위기사와 라틸은 진짜 습격자인가 싶어 경계했으나, 그중 한 명이 먼저 허공에 대고 손을 저어 무기를 들고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었다. 그러고서 나온 질문은 제법 친절하기까지 했다.
“곤란한 상황인 모양인데. 혹시 우리가 도와줄 건 없나?”
이에 근위기사는 안도해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으나, 라틸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하이신스……?”
저 목소리의 주인. 하이신스여서.
“!”
아주 작게 중얼거린 소리인데, 남자 쪽도 라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흠칫해서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라틸은 검에 닿았던 손을 내려놓고서 설마설마하는 눈으로 망토를 눌러쓴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말 위에서 라틸을 내려다보다가 한 손으로 망토 모자 끝을 잡더니 천천히 뒤로 넘겼다. 드러난 얼굴은 역시 하이신스가 맞았다. 경악한 얼굴을 한 하이신스가.
“라틸?”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근위기사는 어리둥절해서 라틸과 하이신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이신스는 입을 벌리고 라틸을 쳐다보다가, 곧 화난 얼굴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화를 냈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위험하게 기사 하나 데리고?”
“마찬가지거든. 너도 기사 한 명 데리고 여기 있잖아.”
그 모순적인 걱정에 라틸이 황당해서 되묻자, 하이신스는 할 말이 없는지 바로 입을 닫았다. 그 모습을 보다가, 하이신스가 데려온 기사도 어색하게 말에서 내려와 라틸에게 인사했다.
“라트라실 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그래.”
그러자 라틸이 데려온 근위기사도 얼른 하이신스에게 인사했다.
“하이신스 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근위기사 둘의 표정은 상당히 흡사했다. 라틸은 난감해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작게 툴툴댔다. 하필 만나도 이런 와중에 쟤랑……. 그런 라틸의 옆모습을 쳐다보다가 하이신스는 최대한 감정을 꾹 누르고서 자신의 근위대장을 불렀다.
“로즈타 경.”
“예, 폐하.”
“저 기사가 마차 수리하는 걸 도와주지.”
“예.”
하이신스의 근위기사가 라틸의 근위기사에게 눈짓하자, 라틸의 근위기사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서 부서진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기사 두 사람이 모두 그쪽으로 가자, 하이신스와 라틸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조금 떨어져 섰다. 작게 말하면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떨어지자, 하이신스는 평소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긴 왜 있는 거야? 혼자 돌아다니면 위험한 거 몰라? 황녀일 때도 제멋대로 돌아다니더니, 황제가 돼도 제멋대로 돌아다녀?”
“그 주둥이는 여전히 모순적이구나. 누가 누구한테 할 말이야? 여긴 적어도 우리나라 영토거든? 넌 다른 나라까지 제멋대로 기사 하나 챙겨 들어왔잖아?”
“어디 가는 길인데?”
“너희 나라.”
대답을 한 라틸이 민망해서 입을 다물자, 하이신스는 눈을 질끈 감고서 자신의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래. 네 말대로 내가 너한테 할 말은 아니네. 나랑 똑같은 짓을 하는 중이니.”
라틸은 짜증이 나서 인상을 구기고 괜히 신발 앞코로 바닥을 툭툭 차서 흙을 튀기다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넌 왜 지금 가? 아직 너희 나라 사절단 우리나라에 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사절단은 어쩌고?”
“사절단 역할을 하고 오겠지.”
“…….”
“넌? 우리나라엔 왜 이렇게 몰래 가는데?”
하이신스의 눈이 점점 가늘어지더니, 나중에는 거의 눈동자가 반만 보일 정도로 얇아졌다.
“내가 여기 있으니 날 보러 가는 건 아닐 테고.”
“무슨 상관이래.”
“남의 나라 황제가 우리나라에 몰래 들어온다는데 상관이 없을까, 과연?”
“옛날 여자친구 행동에는 신경 끄는 거라고 안 배웠어?”
“그런 말 하는 사람치고 옛날 연인 확실하게 잊은 사람 없을걸. 자기들이 못 하니 말로만 잊자 잊자 하는 거 아닌가? 꼭 누구처럼.”
“그 누구가 혹시 네 얘기야?”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인다지. 네 얘기라 다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닐까, 라틸?”
“그래서, 네가 돼지라고?”
라틸과 하이신스가 이를 악물고 말다툼을 하는 사이. 두 제국의 근위기사는 서로를 동병상련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사를 두는 건 어느 나라 사람에게나 같은 고초이지 않던가. 어쨌든 한참을 더 유치하게 말다툼을 주고받은 두 황제는 마차 수리가 끝날 즈음에야 이러다간 끝도 없겠단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둘이 이런 거로 싸워보아야 뭘 어떻게 하겠는가. 하이신스는 라틸을 돌려보낼 수 없었고, 라틸도 하이신스를 돌려보낼 수 없었다. 심지어 둘 다 카리센으로 급히 가야 하기에 같은 지름길을 달려야 한다.
“…….”
“…….”
서로 눈치를 보다가 결국 라틸과 하이신스는 마지못해 한 마차에 올라탔다. * * * 한동안 마차는 계속해서 덜컹거렸으나, 라틸은 마음이 더 덜컹거려서 마차가 흔들리는 건지 자신의 머리가 흔들리는 건지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하이신스 역시 그렇게 잘 시비를 걸어대더니, 막상 마차에 마주 보고 앉자 입을 꾹 다물고 침묵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후 마차가 덜 흔들리게 되고 동이 조금씩 터 오자, 하이신스는 그제야 입을 먼저 열었다.
“카리센에 왜 가는지는 정말 말 안 해 줄 건가?”
“넌 타리움에 왜 온 거였는데? 먼저 말하던가.”
“널 보려고.”
“!”
이게 어디서 약을 팔아? 라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하이신스는 눈동자가 휘어지도록 웃었다.
“그렇군. 너도 같은 이유구나?”
“아니거든?”
그 노골적인 놀림에 라틸은 발끈했으나, 하이신스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먼저 말하면 대답한다면서. 안 하는 건 같은 이유라 그런 거 아닌가?”
“헛소리.”
“설마 황제씩이나 돼서 남의 나라를 염탐하러 오는 건 아닐 거잖아.”
“염탐은 네가 우리나라에 와서 한 거지.”
“내가 관심 있던 건 너희 나라가 아니라 너야, 라틸.”
“!”
“너도 그래?”
“아, 아니라고!”
라틸이 인상을 찡그리고서 그의 발끝을 툭 아프지 않게 치자, 하이신스는 한 손으로 턱을 짚고서 웃었다. 라틸의 예전 버릇이 그대로 나오자 이런 상황이지만 괜히 반가워서. 라틸도 하이신스의 그 미소를 보자 심장이 욱신거렸으나, 일부러 더욱 정색하고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후 국경선 부근에 갈 때까지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국경선을 지나 어느 마을을 지나갈 즈음. 이번에는 라틸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난 여기서 내릴 거야.”
하이신스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다가 그 말에 놀라서 번쩍 눈을 떴다.
“여기?”
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이곳은 국경선 근처의 작은 마을로, 여행객들조차 자주 들르는 곳이 아니었다.
“네가 여기서 볼 일이 있나? 난 네가 수도, 최소한 부수도에는 갈 줄 알았는데.”
“여기야.”
라틸은 단호하게 대답하고서 몸을 앞으로 빼 마부석 칸막이를 똑똑 두드렸다. 그러자 천천히 마차가 속도를 늦추더니 곧 마을 한편에 완전히 멈추어 섰다. 라틸은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하이신스에게 물었다.
“마차 빌려줘? 타고 갈래?”
어차피 이 마차는 황궁 마차가 아니었고, 기사가 최대한 평범해 보이는 마차로 사 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라틸이 올라가야 할 곳은 산이었기에 마차를 타고 갈 수 없다. 하지만 산에 올라가는 사이 마차를 팔거나 어디 맡겨두기도 여의치 않으니, 거기에 조금 더 배려심을 보태 하이신스에게 제안한 것이었다. 돌아갈 때 탈 말은 다시 사면 되니까.
“산에 올라가는군.”
하이신스는 라틸의 제안을 듣자마자 바로 목적지를 유추해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내가 타고 가지. 고마워, 라틸.”
“바퀴 고치는 거 도와줘서. 빚지기 싫을 뿐이야.”
“여기까지 몰래 오도록 눈감아준 빚은?”
“내가 먼저 감아줬잖아.”
툭 쏘아붙인 라틸이 마차 밖으로 내리자, 하이신스는 자연스럽게 따라 내리려다가 곧 마음을 바꾸고 창문만 활짝 열었다. 무슨 목적인진 모르겠지만 자신이 따라 내리면 라틸이 불안해할까 봐 일부러 내리지 않은 것이었다. 라틸 역시 하이신스가 왜 저러는지 알기에 입술을 꽉 다물고서 돌아섰다.
‘우리가 또 이렇게 한 마차를 타고서 여행할 일이 있을까? 방금 그건 우리가 마주 보고 여행할 수 있던, 우리 인생에 남은 단 하나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마음이 괴로워졌으나, 라틸은 약해지려는 마음은 얼른 쫓아냈다. 대신,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길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쪽지를 창문 너머로 하이신스에게 건넸다.
“뭐지?”
“가는 길에 읽어 봐.”
편지에는 아이니가 하는 헤움 이야기에 대해 자신도 짐작 가는 바가 있으니, 사태가 심상치 않다면 힘을 합치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건 하이신스에 대한 사감을 버리고 황제로서 적은 쪽지이기도 했다.
“그래.”
하이신스는 라틸이 꼼꼼히 접어 건넨 쪽지를 착잡하게 바라보다가, 품 안에 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가라고 인사할까 말까. 잠시 머뭇거리다 라틸은 말없이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