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난 오빠를 믿어2020.10.21.
칼라인과 라틸, 게스타가 침묵하는 사이. 궁의는 슬그머니 라틸 쪽으로 다가가 몸 상태를 살폈다.
“…….”
한참을 그렇게 신중하게 살핀 궁의는 마침내 손을 내리며 안도해 말했다.
“몸은 괜찮으신 것 같습니다.”
라틸은 자신의 맨발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혹시 내가 몽유병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고?”
분명 침실에서 잠들었는데. 여기에 어떻게 온 건지도 모른 채 이동했다. 신발조차 신지 않고서. 그런데 몸이 괜찮다니. 아픈 곳은 없으나 이해는 가지 않았다. 아니, 사실 이상한 건 그것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맨발로 여기까지 오는데 잡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
황제가 정신없이 맨발로 좀비처럼 걸어가면 걱정이 되어서라도 잡지 않을까? 잡지 못하더라도 근처에서 따라오긴 할 텐데. 그런 사람이 없었단 점도 영 이상했다.
“이런 증세가 이전에도 나타난 적이 있으신지요?”
“아니. 처음인데.”
“그러면 아직 몽유병이라고 진단하긴 힘듭니다.”
“그런가.”
다친 데가 없다는데 더 치료하라 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자신이 궁 바깥에서 맨발로 계속 우물거리는 것도 이상하다.
“상태를 보고 나중에 다시 부르지.”
라틸은 어쩔 수 없이 우선 궁의를 돌려보내고 천천히 땅을 딛고 일어섰다. 그러자 게스타와 칼라인이 동시에 라틸의 오른팔과 왼팔을 잡았다. 됐어, 하고 말하려다가, 라틸은 자신의 맨발을 내려다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아니네. 이 상태로 침실에 돌아가면 난리가 나긴 하겠지. 소란은 질색이었다. 황제가 이상하단 소문이 도는 것도 사절이고.
“게스타. 칼라인. 여기서 둘 중 누구 방이 더 가깝지?”
먼저 나타난 게스타일 거라 여겼는데, 의외로 칼라인이 손을 들었다. 라틸은 그에게 두 팔을 내밀었다.
“나 좀 업어줘.”
* * *
“미안해.”
칼라인에게 업혀서 그의 방으로 가는 길. 라틸이 갑자기 사과하자, 묵묵히 걸어가던 칼라인이 고개를 아주 조금 옆으로 돌렸다.
“뭐가 미안하시단 겁니까?”
넌 사랑하는 여자가 따로 있는데 업어달라고 부탁한 거? 라틸은 속으로만 대답했다. 이 과거의 여자 이야기는 칼라인이 직접 말해 준 게 아니라, 자신이 그의 악몽을 통해 엿본 것이기에 아는 척할 수가 없어서. 그 기억을 칼라인이 잊으려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굳이 상처를 들쑤실 필요도 없었고. 라틸이 대답하지 않자, 칼라인도 더 묻지 않고서 다시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동안 라틸은 놀랍도록 안정적인 그의 등, 딱 달라붙어 기대기 좋은 넓은 그 등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반쯤 눈을 감고 거기에 머리를 기댔다. 이상하게 그의 등을 보자 눈꺼풀이 감기고 잠이 왔다.
‘등짝이 넓어서 그런가. 그보다 여우 가면. 그놈은 왜 날 두 번이나 구해준 거지? 처음엔 날 혼란스럽게 만들려고 구한 거라 생각했는데. 자기들 본거지에서까지 날 구해줄 필요가 있나? 그게 다 꿈이었다면, 난 왜 하필 그 여우 가면이 날 돕는 꿈을 꾼 거고?’
그렇게 곰곰이 아까 일을 생각하기를 잠시. 완전히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더니, 라틸은 저도 모르게 완전히 잠들고 말았다.
“주인?”
뒤에서 색색 숨소리가 들려오자, 칼라인은 라틸을 조심스럽게 불러보았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그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고서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작게 물었다.
“기억나십니까? 계단 양옆으로 온갖 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고, 계단 아래는 호수와 이어진 우리 집이요.”
“…….”
“주인은 거기에 발을 담그고서 물장난을 치고…….”
혼자 중얼거리던 칼라인은 곧 말을 멈추고서 쓸쓸하게 웃었다.
‘하긴. 당신이 기억할 리 없지요.’
* * * 냉기가 감도는 검고 어두운 성안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보송보송하고 뽀얀 토끼 가면을 뒤집어쓴 남자였다. 남자는 키가 몹시 크고 어깨가 넓은 데다 얼핏 드러난 가슴 근육은 커다랬으나, 얼굴 전체를 가린 커다란 토끼 가면 덕분에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여기 있었구나.”
한참을 돌아다니던 남자는 마침내 자신이 원하던 걸 발견하고서 멈춰 섰다. 그건 작은 굴 안에 쌓인 이불 더미였다.
“너지?”
토끼 가면이 가장 위의 이불 두 겹을 들추자, 그 안에서 또다른 사람이 드러났다. 윗옷을 머리에 덮고 있는 인물이었다.
“네가 드디어 미쳤나 보구나.”
황당해진 토끼 가면이 이번에는 두 손가락으로 윗옷을 들추자, 마침내 그 안에서 귀엽게 생긴 여우 가면이 드러났다. 여우 가면은 습한 공기가 들어오자 히죽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여기서 그분의 향이 나.”
목소리에서부터 여우 가면이 웃고 있단 티가 났다. 가면이 워낙 귀엽게 생긴 터라 그 모습은 진짜 여우처럼 사랑스러웠지만, 그 꼴을 본 토끼 가면은 오히려 팔에 소름이 돋아 혀를 찼다.
“그거 알아? 너 좀 변태 같아.”
“로드는 변태를 좋아하실까?”
그러나 토끼 가면이 뭐라고 타박하든 여우 가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정도 않는구나. 미친놈.”
토끼 가면은 결국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서, 들췄던 윗옷을 도로 얼굴에 내려주고 일어섰다.
“혼자 놀지 말고 와. 틀라 님이 널 찾아.”
“잔다고 해…….”
“탑에 갇힌 아낙차 님을 찾고 싶으신가 봐.”
“잔다고 하라니까.”
“난 말 전했으니까 간다.”
여우 가면이 손을 뻗어 발목을 잡으려 하자, 토끼 가면은 한쪽 발을 싹 치워 피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정하게 그곳을 떠나버렸다.
“너무해. 네가 그러고도 토끼냐. 토끼는 안 그래. 토끼는 순하다고.”
여우 가면이 뒤에서 무어라 해도 토끼 가면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결국 홀로 남겨진 여우 가면은 혼자 윗옷에 얼굴을 파묻고 왕뱀처럼 꿈틀거리다 마지못해 꾸역꾸역 일어섰다. * * *
“사블레 후작. 아낙차 후궁 감시 병력을 좀 더 늘렸으면 하는데.”
다음날. 라틸은 시종장을 불러서 아낙차가 유폐된 탑 주위에 더 많은 병사를 보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지금도 물샐 틈 없이 빼곡히 지키고 있는데, 여기서 더…… 말입니까?”
사블레 후작은 라틸이 뜬금없이 아낙차 이야기를 꺼내자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영 생뚱맞게 여겨지는 듯했다. 라틸은 차마 ‘찝찝한 꿈을 꿨다. 틀라가 자기 엄마를 구할 거라 다짐하는 꿈이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고 적당히 둘러댔다.
“느낌이 좀 안 좋아서요. 내부에서 계속 일이 터지기도 하고.”
시종장은 단순히 감이 좋지 않단 이유로 병력을 더 늘리란 말이 영 납득이 가지 않는 눈치였으나, 황제의 명령이기에 우선 알겠다고 순순히 대답했다.
“예. 더 늘리도록 할 테니 염려 마시지요.”
“그리고 시노르 왕국에서 내분 문제로 우리한테 도움을 요청했는데.”
“예.”
“오늘 국무회의에서 그 일을 얘기할 거니 다들 자료를 준비하라 하고…….”
그런데 라틸이 아낙차 외 다른 업무에 대해서도 시종장에게 지시하는 도중이었다. 비서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라틸에게 알렸다.
“폐하. 레안 황자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적들에게서 지도를 빼앗은 후, 라틸은 그 지도를 탐색하러 가기 위해 오빠에게 잠시 궁전에 와 달라 편지를 보냈는데, 이제야 레안이 도착한 것이다.
“어디 있어?”
“지금은 응접실에 계십니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의자에서 일어섰다. * * *
“며칠만 나 대신 국무를 봐줄 수 있어?”
레안이 머무는 응접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라틸은 질문부터 했다.
“인사는 생략하는 거야?
레안은 웃으면서 그래도 봐줄 수는 있다고 대답하다가, 라틸이 “난 카리센에 다녀올 거야.”라고 하자마자 정색했다.
“어딜 간다고?”
“카리센에.”
레안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했다.
“혹시 하이신스…….”
“아니야.”
라틸이 재빨리 대답했으나 레안의 표정은 돌아오지 않았다.
“갑자기 카리센에는 왜? 거기에 가야 할 이유가 있어? 나는 별일 없다고 알고 있는데.”
“별일이야 없지.”
“그런데 왜 네가 굳이 카리센에 가야 한단 거지?”
레안이 질문을 마구 퍼부어대자, 라틸은 내부의 적과 고지도 이야기를 할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혹시나 싶어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라틸은 하나 뿐인 동복오빠를 믿었지만, 그래도 만약을 위해 비밀로 두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사정이 있어. 설명하긴 어려운 사정.”
“그게 무슨 사정인진 말하기 싫은가 보구나.”
라틸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안은 한숨을 내쉬면서 소파에 앉았다.
“카리센에는 어떻게 갈 생각인데?”
“사절단을 따라갈 생각이야. 뭐, 국가 간 친선을 위해서라거나, 그런 걸 이유로 들면 되겠지.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이유야 만들기 나름이니까, 라틸은 중얼거리면서 레안의 맞은편에 앉아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눈치 좋게 미리 여러 종류의 차를 만들어두고 대기하던 시종이 응접실 안으로 웨건을 끌고 들어왔다. 레안이 마음에 드는 찻잔 하나를 고르자, 라틸은 아무거나 가까운 찻잔을 고르고서 시종에게 나가라고 눈짓했다. 시종이 나간 뒤에도 레안은 말없이 차를 마시며 라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기다리다 못한 라틸이 결국 히죽 웃으면서 먼저 묻자, 레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곳도 아니고 카리센이라는데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잖아.”
“걱정할 건 또 뭐야.”
라틸은 입을 삐죽이고서 괜히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걔가 날 배신하긴 했지만, 나한테 물리적으로 타격을 준 건 아니잖아.”
처음 하이신스에게 배신당했을 때. 라틸은 너무 화가 나서 하이신스가 하는 모든 말을 변명으로만 여겼다. 물론 지금이라고 해서 화가 풀린 건 아니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하이신스가 라틸에게 연락할 방법을 찾았지만 누군가 중간에서 훼방을 놓았단 걸 인정했고, 하이신스 나름대로는 치열하게 살아남기 위해 한 선택이었단 것도 인정했다. 이 때문인지, 여전히 하이신스가 자신과 다시 맺어질 수는 없다 여겼으나, 라틸은 하이신스가 자신에게 해를 끼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중에 나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면 몰라도, 그는 지금 당장 라틸에게 해를 입힐 사람은 아니었다.
“글쎄. 한 번 배신한 사람은 언제든 어떤 면으로든 배신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러나 레안은 하이신스가 라틸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게 아직도 분한지 평소답지 않게 차갑게 중얼거렸다. 인자하고 다정한 오빠답지 않은 말에, 라틸은 웃으면서 괜히 맞은편에 앉은 레안의 발끝을 톡 자기 발로 두드렸다.
“오빠는 맨날 좋은 말만 하는 줄 알았는데. 웬일이래?”
“널 다치게 한 사람을 어떻게 좋게 보겠어.”
“날 죽이려 한 틀라는 용서하라 했잖아.”
“……용서하라 한 게 아니야, 라틸. 굳이 죽일 필요는 없다 한 거지.”
라틸은 소리 없이 웃었다. 오빠의 말에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누군가 자신을 진심으로 염려해주는 느낌이 좋았다. 시종장이나 유모, 서넛 등도 자신을 소중하게 대해주지만 그래도 레안은 가족이니까. 친오빠인 레안은 다른 사람들이 다 이런저런 이유로 배신을 하더라도 절대로 자신을 저버리지 않을 사람이기도 했다
“이럴 땐 엄마랑 오빠랑 같이 살고 싶어.”
오랜만에 느낀 가족의 애정이 좋아서 라틸이 중얼거리자, 레안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손을 뻗어 동생의 손을 꽉 잡았다.
“나중에. 어머니 마음이 괜찮아지시면 이곳에서 같이 살자고 말씀드려 보자.”
라틸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안은 몇 번 라틸의 손등을 토닥이다가 놓아주었다. 그러더니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해보다 물었다.
“카리센에 가야 하는 게, 하이신스때문이라거나 외교 문제와 관련이 있진 않은 거지?”
“어.”
“오래 걸리는 일이야?”
라틸은 해석한 고지도를 떠올리고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고지도를 찾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좀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 거기에 표시된 물건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고지도에 적힌 바에 따르면. 라틸은 고개를 기웃했다.
“근데 그건 왜? 오빠도 빨리 돌아가야 해서 그래?”
만약 그런 거라면 오빠한테 사블레 후작을 도와서 며칠 간 국무를 보아달라 맡기는 게 너무 이기적인 부탁이 아닐까, 라틸은 조금 후회가 되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바쁜 거면 도와주지 않아도 돼. 그냥 집권 초라 내가 없는 사이에 혹시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 봐 그러는 거지, 꼭 오빠가 여기 있어야 하는 건 아니어서.”
라틸이 말한 ‘무슨 일’은 잊을 만하면 여기저기서 슬금슬금 터지는 흑마법 관련한 내부 문제였다. 레안에게 한 말처럼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블레 후작이 시종장의 위치에서 처리하기 어려운 일도 있을 수 있기에 황태자로서 오랜 교육을 받았던 오빠를 부른 거지, 정말로 레안이 꼭 여기에 있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시간을 내기 어려워서 그런 건 아니야.”
“진짜야?”
“어. 사실 음.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라면, 네가 비밀리에 다녀오는 게 어떨까 싶어서 물어본 거였어.”
그러나 레안이 한 말은 전혀 예상 외였다. 라틸은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비밀리에?”
지금 하이신스가 여기에 온 것처럼?
‘아니, 완전히 같진 않겠구나. 하이신스는 사절단인 척 위장해 온 거니까.’
그래도 그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데…….
“좀 그렇지 않아?”
라틸이 떨떠름해서 묻자, 레안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 생각엔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황제가 직접 사절단에 섞여 외국까지 가는 건 좀 무게감이 없어 보여서.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아…….”
“게다가 틀라의 잔당 세력이라거나, 그런 사람들한테 네가 자리를 비운단 걸 공개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오빠를 부른 건데.”
“물론 나도 널 돕겠지만, 그래도 네가 자리를 비운다는 걸 비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며칠 만에 다녀올 수 있다면 잠시 몸이 안 좋다 하고 다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