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상처로 남은 입맞춤2020.10.14.
사랑이 물건처럼 감촉이 있다면 아마 몹시도 끈적거리고 불쾌하게 손 여기저기에 달라붙어서, 아무리 씻어도 잘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밤새 거의 자지 못한 라틸은 침대에 앉아 어제 하이신스와 주고 받은 날선 대화를 떠올렸다. 말이 좋아 대화지, 사실상 혀로 하는 싸움이었다. 둘 다 상처만 주고 받는 싸움. 그 상처는 결국 라틸의 기억에 움푹 패었고, 하루가 지난 지금까지도 피를 뿜었다.
“폐하, 씻으시겠습니까?”
그렇게 앉아 얼마나 오래도록 있었을까. 평소라면 딱딱 시간에 맞추어 행동하는 라틸이 하염없이 시간을 낭비하자, 결국 보다못한 시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
라틸은 대답하고서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로 얼굴과 머리카락을 흠뻑 적시자 훨씬 정신이 맑아졌다. 맑은 정신으로 분노가 새삼 솟아나는 부작용도 있었지만. 그래도 온종이 일에 매달리고, 대신들과 회의를 주고 받고, 아트락시 공작에게 ‘틀라와 손을 잡은 외세’에 대한 건은 아직도 조사 중인지 몇 번 쪼고 나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중간중간 하이신스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으나 아침보다는 나았다. 라틸은 보는 사람의 입맛조차 떨어질 정도로 텁텁하게 저녁 식사를 하면서 생각했다. 며칠 동안 이렇게 지내고 나면 다시 하이신스가 갑자기 나타나기 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체했나.’
하지만 내내 무거운 생각을 하면서 식사를 한 탓인가. 포크를 내려놓자마자 라틸은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울렁거려서 인상을 구겼다.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럽게 묻는 서넛에게 괜찮다고 손을 젓고서 라틸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괜찮긴 한데. 그래도 소화시킬 겸 좀 걸어야겠습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라틸은 그러라 대답하고서 궁전 밖으로 나가 정처 없이 그저 산책로를 쭉쭉 걸어갔다. 산책로에 깔아둔 하얀 돌이 구두와 부딪칠 때마다 나는 소리는 라틸의 마음처럼 다급했다. 얼마나 그렇게 걸어다녔을까. 라틸은 저녁놀을 받아 불그스름하게 변한 풀을 발견하고서 우뚝 멈추어섰다.
‘이 풀…….’
라틸은 멍하니 그 풀을 바라보다가 허리를 숙였다. 손으로 풀잎을 쓸자, 바람을 타고 향이 올라왔다. 라틸은 저도 모르게 풀입을 뜯어버릴 뻔했다.
“폐하?”
라틸이 허공에 대고 갑자기 주먹을 쥐었다 펴자, 뒤에서 지켜보던 서넛은 어리둥절해서 라틸을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이 풀이요.”
“네.”
“하이신스가 내게 풀반지로 만들어줬던 그 풀잎입니다.”
“!”
하이신스의 이름이 나오자 서넛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하지만 서넛은 라틸보다 뒤에 서 있었기에 라틸은 그 변화를 보지 못했다. 라틸은 손을 뻗어 풀 옆에 자신의 손을 대보았다. 손가락을 쫙 펼치자, 풀잎이 엉성한 반지처럼 라틸의 손가락 위로 드리워졌다. 라틸은 그 모양새를 내려다보다가 불안해졌다.
‘혹시 난 정말 하이신스를 못 잊고 있나? 그래서 후궁들을 멀리하는 건가?’
후궁 한쪽에게 권력을 몰아주지 않기 위해서, 대신들의 시선을 후궁들 쪽으로 돌리고 황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후궁들과 합방하지 않고 지내는데. 혹시 그 이면에는, 나 자신조차 모르던 하이신스를 향한 마음이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은 실체는 없으나 지독하게 두려운 법이라, 라틸은 고개를 젓고서 얼른 손을 풀잎에서 치웠다.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이 절대로 하이신스를 못 잊어서 후궁들과 합방하지 않는 게 아니란 걸 아는데. 알면서도 일단 불안한 마음을 품고 나자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화가 난 라틸은 벌떡 일어나 곧장 하렘 쪽으로 걸어갔다. 하이신스가 없으면 누구든 상관 없으니, 아무 후궁이나 하나 품어 버릴 셈이었다. 어차피 하렘 안의 후궁은 모두 자신의 남자들이고, 언제건 그들을 품기는 해야 하지 않던가. 한 번 뿐이라면 그 시기를 앞당겨도 되겠지. 하이신스가 자신의 합방 소식을 듣고서 자존심이 상할 수 있다면…….
“폐하, 오셨습니까.”
라틸이 발길을 멈춘 곳은 라나문의 방 앞이었다. 라나문의 호위는 라틸을 보자 놀라서 목소리를 높였다.
“라나문한테 내가 들어간다고 말해.”
라틸이 명령하자, 호위는 얼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중간방에 머무는 라나문의 시종에게 알렸다.
“이봐. 폐하께서 오셨다. 빨리 일어나.”
카르둔은 옆으로 누워 자다가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누가 와?”
“폐하께서.”
호위가 바깥문 쪽을 살피며 다급하게 알리자, 카르둔은 황급히 일어서려나 침대에 무릎까지 찧었다.
“세상에!”
“오늘은 또 왜 이렇게 빨리 자고 있는 거야?”
카르둔은 ‘우리 도련님은 원래 빨리 잔다’고 반박하는 대신 얼른 라나문의 방문을 노크하고 대답도 듣기 전에 안으로 들어갔다.
“도련님!”
잠시 뒤. 드디어 방문이 활짝 열렸고, 라틸은 라나문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방 안에는 라나문이 평소보다 좀 더 헐벗은 차림으로 방 중앙에 서 있었다.
“미리 사람을 보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라틸이 걸어오자 라나문이 평소처럼 차갑게 중얼거렸다. 미리 황제가 방문할 거란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좀 더 공들여서 씻고 잠옷도 불편하지만 더욱 아름다운 걸로 입고 머리카락도 잘 꾸며 두었을 텐데. 갑자기 오는 바람에 이 모든 걸 하지 못한 게 싫은 모양이었다.
“네가 보고 싶어서.”
라틸은 평소처럼 라나문을 놀리거나 농담하는 대신 곧장 다가가 라나문의 목 뒤를 잡고 끌어당겼다.
“!”
라나문은 잠시 놀랐으나 순순히 눈을 감고 라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 바람에 아직 닫히지 않은 방문 사이로 이 광경을 본 카르둔은, 민망해서 시선을 돌리고 얼른 문을 닫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우리 도련님이 폐하와 진짜 합방을 하시는구나! 이건 경사 중의 경사였다. 라나문이 다른 건 몰라도 밤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았던가. 그게 전부 다 이론 뿐이라 불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공부 안 한 것보단 낫겠지. 일단 도련님을 취하고 나면 폐하께서도 바로 마음을 주실 거라고, 카르둔은 희망에 차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라나문이 얼굴만 잘난 줄 아는데, 카르둔은 그게 아니란 걸 알았기에 더욱 자신만만했다.
‘우리 도련님은 다른 데도 다 잘생겼으니까!’
하지만 카드룬의 기대와 달리 라나문은 지금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태어나서 한 번도 누군가와 입을 맞추어 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 이론으로는 열심히 익혔으나 그러면 뭘 하나. 눈 깜짝할 사이 혀가 저기 가 있고, 눈 깜짝할 사이 입술이 목에 가 있고, 눈 깜짝할 사이 눈앞이 번쩍거리다보니 이론을 떠올릴 겨를조차 없었다.
“폐하.”
가끔 숨 가쁘게 라틸을 부르는 게 다였다. 긴 입맞춤이 끝나고 잠시 숨을 쉴 틈을 찾자, 라나문은 가슴을 헐떡이며 라틸을 바라보았다. 색색 들려오는 숨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간지럽게 들려왔다. 잘게 떨리는 속눈썹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감추어진 눈동자조차도 사랑스러워서, 라나문은 자기도 모르게 라틸의 목덜미와 귀를 한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조금 부풀어 오른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한 손에 잡힌 말랑거리는 귀와 연한 살 안의 뼈까지 신기했다. 그러나 이번엔 라나문 쪽에서 입을 맞추려는 순간. 반쯤 내리깔았던 라틸의 눈동자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그것은 볼을 타고 빠르게 내려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라나문은 라틸의 뺨을 쓸다가 시선을 내렸다. 카펫 위로 작은 물자국이 보였다.
“!”
라나문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우는 라틸이 보였다. 입술은 발갛게 부어 있었으나 얼굴엔 흥분한 기색도 없었고, 뺨은 오히려 창백했다. 그걸 본 라나문의 심장에서도 핏기가 함께 사라졌다. 자신도 모르게 라나문은 팔을 떨구었다. 생각할 틈도 없이 입이 열렸다.
“저와는…… 입도 맞추기 싫으십니까.”
라틸은 아무 생각도 없이 서 있다가 “어?” 하고 되물었다. 눈이 마주치자 가시로 온몸을 덮은 라나문이 보였다. 차가운 눈동자도. 라틸은 순간 황당해졌다. 저런 표정을 하고서 누가 누굴 싫어한단 거야?
“내가 뭘 어쨌단 거야. 지금 뒤로 간 게 누군데 그래?”
“제 잘못이란 얘기십니까?”
“아니, 네 잘못이란 얘기가 아니라. 입 맞추다 왜 갑자기 신경질을 내는지 이해가 안 가서 그러잖아.”
라틸이 한숨을 섞어 이야기하자, 라나문의 표정에 잘게 금이 갔다.
“그렇군요. 제 잘못이군요.”
“라나문.”
“하긴. 폐하께선 앞으로 온 적도 없으니 뒤로 갈 일도 없겠지요. 생각해보니 제 잘못이 맞는 것 같습니다.”
“라나문.”
라틸이 인상을 구기며 이름을 재차 부르자 라나문은 입술을 꽉 닫더니 다시 뒤로 물러났다. 이대로 저 멀리까지 도망가버릴 사람처럼. 그걸 본 라틸의 마음도 썰물처럼 밀려났다. 그렇지. 생각해보니 라나문은 아트락시 공작이 강제로 후궁으로 보낸 사람이다. 자신은 나름대로 그가 공신의 아들인 걸 염두해 찾아왔지만, 어쩌면 라나문은 라틸이 그렇게 찾아오는 것조차 싫어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것 정도가, 라나문이 자기 자존심을 챙기면서 황제의 총애를 얻는 최대 선이 아닐까?
“그래.”
판단을 마친 라틸은 자신도 뒤로 반 보 물러났다. 그걸 본 라나문의 표정이 흔들렸으나 라틸은 몸을 바로 돌렸기에 보지 못했다.
“싫다면 됐어. 갈게.”
“!”
라틸은 라나문이 붙잡을 틈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닫고 나갔다.
“폐, 폐하? 벌써 가시나요?”
중간 복도에 있던 카르둔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황제를 불렀다. 라틸은 잠시 주춤했으나 결국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며 당부했다.
“네 주인이나 달래주어라.”
싫어하는 사람과 입을 맞춘 게 끔찍이도 싫은 듯하니 시종인 그가 잘 달래주란 충고였다. 탁 소리가 나며 바깥문까지 닫히자, 카르둔은 얼른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라나문은 침대 가에 앉아 기둥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도련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분명 문을 닫기 전에 두 분이 키스하는 걸 봤는데! 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이 짧은 사이에……? 라나문은 이마를 여전히 기둥에 기대고서 눈동자만 돌려 카르둔을 보았다.
“폐하는?”
“도련님을 잘 달래주라 당부하시고 나가셨어요.”
카르둔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라나문이 똑바로 앉도록 도와주었다.
“대체 무슨 일이세요? 아깐 분위기가 좋았잖아요.”
“분위기가 좋았다?”
라나문이 희한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카르둔의 표현을 따라 하자, 이 충실한 유형제는 라나문의 기분이 많이 상했단 걸 알아차리고 얼른 그를 위로할 만한 말을 마구 퍼부었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폐하께서는 도련님을 무척 걱정하면서 나가셨어요. 그러니 뭔가 어…… 하여튼 오해할 일이 있더라도 다 오해일 거예요. 기운 내세요, 도련님.”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라나문은 입술을 꽉 깨물며 무릎 위에 주먹만 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그의 분노를 보여주었다.
“나와 입 맞추는 게 싫어서 눈물까지 보인 분이 날 걱정한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카르둔.”
눈물까지 보이셨다고? 우리 도련님이 싫어서? 카르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 하지만 분명 도련님을 달래주라고 말씀을…….”
“도중에 날 팽개치고 가셨으니 당연히 달래주라 하셨겠지.”
* * * 자기가 키스하기 싫어서 뒤로 싹 가 놓고서는. 그렇게 ‘내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마’ 하는 시선으로 봐 놓고서는.
“웃겨 진짜.”
라나문의 서늘한 눈빛을 떠올린 라틸은 생각하면 할수록 열이 올라 씩씩거렸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키스하기 싫다고 하던가! 왜 키스를 한 다음 그렇게 나오냐고!
‘하기 전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들었나? 근데 막상 입술을 부딪어 보니까 못하겠다 싶었나?’
자신을 사랑해서 모인 이들이 아니란 건 알지만…… 그래도 가끔 질투하는 모습도 보이고 애정을 갈구하는 것처럼 굴었잖아. 어떤 목적으로 왔던 자신의 남자가 될 거라고 자원해서 온 이들이니, 지금이야 서로 어색한 부분이 있더라도 결국 내 남자란 생각을 했는데. 역시 애정 한 조각 없이 불러들인 게 문제일까, 아니면 라나문은 아트락시 공작이 반쯤 억지로 들여보내서 그런 걸까?
‘칼라인을 보면 후자 같기도 하고. 칼라인은 끈끈한 첫사랑이 있는데도 자기가 원해서 여기에 와서 그런가, 잘 달라붙잖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라나문에 대한 분노로 하이신스에 대한 분노를 좀 눌렀단 거? 문제는 그래봐야 분노에서 분노로 흘러갔을 뿐이란 거지만. 그런데 한참 씩씩거리면서 걸어가는 도중이었다. 회랑을 지나가고 있는데,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라틸은 확 고개를 돌렸다. 하이신스다. 얼굴을 가렸지만 분명 하이신스였다. 그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껏 그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