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헤어진 연인은 서로를 향해 칼을 갈고2020.10.11.
‘아니야. 지금 내가 잘못 나섰다간 오히려 더 큰일이 벌어진다.’
게스타가 수프를 먹으려 하자, 트리는 이를 말리기 위해 입을 열려다가 곧 생각을 바꾸어 목구멍 밖으로 튀어 나가려던 말을 꽉 삼켰다.
‘지금 내가 자백하면, 나 혼자 벌을 받고 끝나는 게 아니라 도련님한테까지 불똥이 튈지도 몰라.’
이 일을 트리 선에서 끝내고 접을지, 아니면 게스타까지 끌어들일지는 어디까지나 라트라실 황제의 마음이었다. 게다가 라트라실 황제가 이 일을 트리의 독단적인 잘못으로 처리하더라도 문제였다. 라나문은 아트락시 공작의 장남이었고, 게스타는 로르드 재상의 아들이었다. 안 그래도 사이가 나쁜 두 가문인데, 로르드 재상가의 사람이 아트락시 공작의 자식에게 약 섞인 수프를 먹였다? 이 일이 불거지는 순간, 두 가문이 어떤 식으로 충돌할지는 상상만 해도 무서웠다. 게다가 로르드 재상가의 하인 중 누구도, 트리 자신만큼 게스타를 소중히 여기고 위하진 않았다. 다른 하인들의 충성심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가 어린 시절부터 게스타만을 위해 키워진 호위 겸 소꿉친구였기 때문이다. 또 오랜 시간을 들여 그런 사람을 만들어내지 않는 한, 절대로 트리는 자신 같은 호위는 나올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자신이 이 일에 얽혀 게스타의 곁에서 억지로 떠나게 된다면? 안 그래도 심약하고 조용한 게스타가 과연 하렘 안에서 버틸 수 있을까? 미친개 같은 클라인 황자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여기를 지켜보고 있고, 라나문 역시 이 일로 게스타를 미워하게 될 텐데? 그러니 안 된다.
‘난 절대 도련님 곁을 떠나선 안 돼.’
어차피 저 수프를 먹어 불능이 되더라도 기한은 일 년. 목숨이 위태롭거나 영구히 불능이 되는 건 아니다. 트리는 자신이 범인임을 자백했을 때 벌어지는 일보단, 게스타가 일 년 간 불능인 쪽이 그나마 더 나을 거라고 계산을 하고서, 고개를 숙여 신발 끝만 내려다보았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 * * 후궁들이 차례로 수프를 두 모금씩 먹은 후. 그래도 양이 남자, 라틸은 시종과 다른 궁인들까지 싹 불러서 수프를 먹으라 지시했다. 다들 먹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수프를 먹고, 차마 삼키진 못하고서 눈물만 글썽였다.
[이거 먹고 내가 죽으면 어쩌지? 아냐, 라나문 님도 죽진 않았잖아. 안 죽을 거야.]
[XX, 어느 XXX가 그런 짓을 해서 왜 우리까지……. 내 손에 걸리기만 해봐라.]
[아. 맛없어. 쉰 맛 나. 썩은 거 아냐? 뭐 탄 게 아니라 썩은 거 같은데.]
개중 유달리 억울해하는 정신력 약한 몇 명에게서는 아예 속마음이 들리기도 했다. 라틸은 그런 이들은 범인에서 자연스럽게 제외시켰다.
‘진범이 누구인지 독하네.’
하지만 결국 모든 이들이 수프를 먹었기에 진범이 누구인지는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이건 확실해. 수프에 탄 약이 영구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건 아냐. 그러니 자기도 직접 먹었겠지.’
어쨌든 진범이 자신이 고자가 되어서라도 이 일을 묻고자 하고, 라나문 역시 적극적으로 진범을 잡고 싶어 하지 않기에, 라틸도 이 이상 일을 들춰내긴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라틸은 뒤를 기약하고서 후궁과 궁인들에게 그만 물러가라 손을 휘저었다. 사람들이 모두 물러가자 방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폐하.”
서넛이 조용하게 라틸을 불렀으나, 라틸은 혼자 있고 싶어서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얘기합시다, 서넛 경.”
서넛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예.”
서넛이 자리를 비켜주자, 라틸은 방 안에 홀로 남아서 휑하니 남은 테이블 위 빈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그걸 보자 문득 휑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 그러니까 아버지가 살아계시고 하이신스가 배신하기 전. 오빠가 탄탄한 후계자 자리에 있고, 자신은 하이신스만 바라보면 되던 그때. 라틸은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라틸은 언제나 미래를 기대했다. 공기는 늘 보송한 솜털처럼 포근했고, 인생은 부드러운 노란색과 분홍색이 섞여 있었다. 쭉 깔린 레드카펫 위를 하이신스와 걸어가는 것. 그게 라틸의 인생이었다. 그래서 라틸은 헷갈렸다. 지금 자신이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게, 그 마음고생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인지, 하이신스에 대한 그리움인지.
“후.”
무슨 상관일까. 라틸은 눈가를 비비고서 방 밖을 나가 하렘을 빠져나갔다. 자신이 한바탕 난리를 쳐 놓았으니, 진범이 누구든 당분간은 움츠려 있겠지. 그런데 막 하렘을 빠져나와 본궁으로 돌아가려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 낯익은 형체가 어른거렸다. 눈에 힘을 주고서 자세히 보니, 정원 수풀 사이에 타시르가 서 있었다. 그리고 타시르의 곁에 선 이는…….
‘하이신스?’
카리센의 사절단처럼 차려입었지만, 망토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 쓴 꼴이 보나 마나 하이신스였다. 라틸은 눈살을 찌푸리고서 그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타시르가 하이신스랑 만나서 뭘 하고 있지? * * *
“어휴, 너무 무거워서 어쩌나 했는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타시르는 하이신스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중이었다.
“카리센 사절단분들은 정말 친절하시네요.”
엉덩이 뒤로 커다란 여우 꼬리를 붙이고서. 상대가 하이신스 황제인 걸 알면서도 타시르가 모른 척 인사하자, 얼굴 가린 하이신스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라틸이 생각에 잠긴 채 하렘 내부에 있는 축제의 방에 혼자 머무르는 사이. 이번 수프 사건에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은 타시르는, 하이신스가 카리센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의 성품을 조사해보기로 하고서 얼른 외국 사절단이 머무는 구역으로 찾아갔다. 그러고서 일부러 얼굴 가린 카리센 사절을 딱 집어 지목한 다음, 무거운 물건이 있는데 함께 들어 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물론 일부러 그를 지목했단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교묘하게 타이밍도 맞추었고. 하이신스는 의외로 순순히 그러겠다 대답했고, 실제로 하렘 근처에까지 물건을 들어다 주었다. 라틸이 두 사람을 목격한 건, 타시르가 이에 대해 하이신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카리센 황제는 거만한 것 같더니. 의외로 인내심이 강한데?’
타시르는 연적의 후궁이 물건을 들어 달라는데도 기분 나쁜 내색 없이 도움을 준 하이신스를 훔쳐보면서, 카리센의 황제가 생각보다 침착한 걸 알았다. 실제 속마음이야 어쨌든, 하이신스는 사절단이 할 법한 예의를 보여주었다. 황태자로 태어나 황제로 군림하는 이가. 1.폐하의 첫사랑은 연기를 잘함. 과묵한 척해서 대사를 잘 읊는지는 모르겠음. 2.의외로 침착. 인내심이 강함. 나중에 방에 돌아가자마자 적어둬야지. 타시르는 속으로 하이신스의 특징을 체크하면서도, 하이신스를 좀 더 붙잡아 둘 빌미가 없나 고민했다. 곧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왕 여기까지 도움을 주셨으니, 잠시 제 방에 들러서 커피라도 마시고 가는 건 어떨까요? 커피가 싫다면 차도 좋고. 차가 싫다면 술도 가능한데.”
물건을 들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젠 고맙단 핑계로 잡아두면 될 일이지.
“죄송하지만 제가 말없이 사라져서 일행이 걱정할 것 같군요.”
그러나 짐 옮기는 걸 도와준 하이신스는, 같이 커피를 마시자는 부탁은 불쾌하지 않게 거절했다. 평소라면 타시르는, 상대가 싫다 하면 알겠다고 흔쾌히 작별 인사를 건넸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하이신스의 성품을 캐내기 위해 부른 것이기에, 타시르는 알겠다고 작별 인사를 하는 대신 일부러 하이신스의 팔을 잡고서 졸랐다.
“에이, 커피 한잔 마시는데 시간 얼마나 걸린다고요. 잠깐 쉬다 가시죠.”
“주기적으로 인원 점검을 합니다. 상황이 급하니 나중을 기약하지요.”
그래도 하이신스가 넘어가지 않자, 타시르는 일부러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그에게 매달렸다.
“아니, 왜에에요. 같이 한 잔만 하고 갑시다. 내가 너무 고마워서 그래. 응?”
하이신스가 어쩔 수 없이 제안을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나름대로 분석할 거리가 생길 걸 알기에 하는 짓이었다. 게다가 지금 같은 때가 아니면 과연 언제 타국 황제를 이렇게 졸라 보겠는가. 그런 타시르를, 하이신스는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말없이 타시르를 내려다보던 하이신스가 갑자기 영 뜬금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건 검정과 적색이지만, 상대는 흰색이나 연한 노란색, 은색 등으로 입히는 걸 좋아합니다.”
뜬금없이 왜 자기가 좋아하는 색깔 이야기? 밑도 끝도 없이 나온 이야기에는 아무런 맥락이 없었다. 순간 타시르는 ‘내가 너무 매달렸나? 혹시 내가 자기가 좋아서 매달린다 생각하나?’ 싶어서 얼른 하이신스의 팔에서 손을 뗐다. 그러나 하이신스는 여전히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좋아하는 보석은 블루 토파즈. 추운 날씨보단 더운 날씨를 좋아합니다.”
“?”
“검술이 뛰어나지만, 가끔 화가 나면 두 손으로 검을 쥐고 마구잡이로 휘두르기도 합니다. 그게 더 무서우니, 두 손으로 뭔가를 쥐면 달아나는 게 좋겠지요.”
“…….”
“필요하다면 남들 앞에서 약한 모습도 보이지만, 그러고 나면 혼자 있을 때 더 씩씩거립니다.”
하이신스가 말을 멈추자, 타시르는 표정을 굳혔다. 이제야 하이신스가 갑자기 저런 말을 왜 했는지 이해가 간 것이다. 지금 하이신스가 읊는 내용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라틸에 대해서였다. 라틸이 좋아하는 색, 라틸이 상대에게 바라는 색, 좋아하는 보석, 날씨, 성격, 언제 약해지는지까지. 즉, 하이신스는 타시르가 자신에게 일부러 달라붙고 있단 것도, 자신의 정체를 눈치채고 있단 것도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진 알 수 없지만.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하이신스가 쓰고 있던 모자를 뒤로 밀어내자, 자줏빛 천으로 가려두었던 수려한 외모가 드러났다. 타시르와 눈이 마주치자 하이신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입을 맞출 땐 이마, 입술, 뺨 순서로.”
“!”
조롱하는 건지 진실인지 거짓인지조차 알 수 없는 말을 뱉은 하이신스는, 무례함을 꾸짖는 대신 다시 모자를 쥐면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쪽을 보고 있던 라틸과 눈이 마주쳤다. 잠시 서로를 쳐다보기를 수 초. 라틸이 턱으로 어딘가를 가리키자, 하이신스는 모자를 마저 써 얼굴을 가리고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순식간에 아예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던 타시르는, 홀로 남겨진 채 멀뚱히 눈을 깜빡이다가 “아아.” 소리를 내면서 눈썹을 들어 올렸다.
“별로 재밌지 않네.”
* * * 라틸은 저벅저벅 무작정 앞으로만 걸어갔고, 하이신스는 다섯 걸음 뒤에서 조용히 따라갔다. 둘 다 입을 열지 않았다. 며칠 전 하이신스가 라틸에게 ‘내 동생과도 키스했냐’고 물은 뒤. 두 사람이 이렇게 또 둘이서만 걷는 건 처음이었다. 라틸은 당시의 일을 떠올리면서, 하이신스도 그날의 일을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해했다. 하지만 굳이 그 말을 꺼내는 대신, 앞으로 쭉 뻗어 있던 산책로가 끊기자마자 확 돌아서면서 물었다.
“제일 중요한 건 왜 안 알려줬어?”
“제일 중요한 거라니.”
“내가 배신자를 싫어한다는 거.”
라틸은 하이신스를 공격하기 위해 한 말이었으나, 그는 며칠 전처럼 상처받은 표정을 하진 않았다. 대신 가볍게 웃으면서 되물었다.
“배신자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라틸은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없지. 근데 왜 알짱거려.”
“알짱거린 건 네 후궁이야, 라틸.”
“라틸이라 부르지 마.”
“네가 부정해도 날 부른 건 네 후궁이야, 라틸.”
“부르지 말라고.”
“가엾게도. 네 사랑을 받아보려 머리를 팽팽 굴리는 게 눈에 훤히 보이더군. 상단의 후계자라 했나? 사랑도 잘 계산하고 주판을 두드리면 나올 거라 믿는가봐.”
“야.”
“하긴. 사랑받고 싶은 짐승을 탓할 필요는 없지. 거두어들이고서 애정을 주지 않는 주인이 나쁜 거지, 안 그래?”
“야.”
“잘난 하렘이 생각보단 잘 돌아가지 않는가 봐, 라틸? 남자들을 모아 놓으면 뭐 해. 애정 한 조각 주지 못하는데. 왜 그러지? 날 닮은 회색 눈동자에 갈색 머리가 없어서 그런가?”
“!”
하이신스에게 사절단을 통해 전했던 말을 그가 다시 돌려주자, 라틸은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라틸은 곧 빙그레 웃고서 하이신스가 싫어할 말을 같이 골라 해주었다.
“타시르를 함부로 말하지 마. 걘 날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애야. 사랑을 얻으려 노력이라도 하는 애라고. 사랑이 당연히 네 뒤를 졸래졸래 쫓아오는 줄 알고 이용해 먹으려던 너랑은 수준부터 다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