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독에는 독 수프에는 수프2020.10.07.
라틸은 게스타를 믿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약을 먹일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라틸은 사람의 본성은 믿지 않는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어도 분노를 모르진 않고, 아무리 착한 사람이어도 이해관계가 있는 법. 게스타는 클라인에게 몇 번이나 모욕을 당했으니, 순간 욱하는 마음가짐으로, 아니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이런 선택을 한 건지도 몰랐다.
‘어쩌면 게스타를 추종하는 누군가가 한 짓일지도 모르고, 어부지리를 얻고 싶은 다른 후궁이 저지른 짓일지도 모르지.’
생각하기에 따라 범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많았다.
‘어쩐다.’
고민 끝에 라틸은 자신의 주방장을 불러 은밀하게 지시했다.
“버섯 수프를 끓인 다음 식혀줘. 방금 막 만든 게 아니라, 며칠 전에 만든 것처럼.”
“그럼 맛도 약간 쉬게 할까요?”
“그러면 좋지. 진짜로 상하게 만들진 말고.”
“상하지 않고도 쉰 맛이 나도록 할 수 있습니다, 폐하.”
이윽고 주방장이 ‘만든 지 며칠 지난 듯한 버섯 수프’를 만들어 대령하자, 라틸은 한 입 맛을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쓰레기통 맛이 나네. 이러면 됐어.”
칭찬……해주신 거겠지? 주방장은 조금 떨떠름했지만, 감사하다 꾸벅 인사를 하고서 나갔다.
“그걸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
서넛은 라틸이 뭘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물었지만, 라틸은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씩 웃고서 숟가락만 흔들었다.
“뭐 좀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럽니다.”
* * *
“그거 들었어?”
“혹시 수프 얘기?”
“어. 클라인 님한테 갈 수프를 라나문 님이 먹었는데, 그 안에 뭐가 들어 있었나 봐.”
“독이었다며?”
“설사약 아니고?”
“몰라. 하여튼 라나문 님이 그걸 먹고 몸에 이상이 생겼는데, 음식에 탄 약이 많이 독했나 봐. 다행히 한두 모금 정도만 먹어서 수프는 거의 다 남아 있는데,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나서 그 수프를 도로 가져가셨대.”
하렘에서 일하는 궁인들은 조금이라도 쉴 틈이 생기면 자기들끼리 모여 서서 속닥거렸다. 그런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다 보니, 나중에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궁인들도 오가다 수프 이야기를 알게 될 정도로 소문이 퍼져나갔다.
“근데 폐하는 수프를 왜 가져가셨대?”
“뭘 탔는지 조사하려고 그런 게 아닐까? 그걸 알아야 라나문 님을 치료할 거 아냐.”
“수프를 조사하면 알 수 있나?”
게스타의 시종인 트리 역시 자연스럽게 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일에 호기심만 가지는 다른 이들과 달리 트리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라나문 님이 약을 먹었다고? 게다가 그걸 폐하께서 가져갔어?’
라나문은 공신인 아트락시 공작가의 장남이었고, 라트라실 황제는 후궁들에게 퍽 무른 듯 대하지만 모두가 아는 무서운 전적이 있었다. 그녀는 즉위하자마자 아버지가 가장 아끼던 후궁을 유폐시켜 버리고, 황위를 두고 다툰 이복형제는 즉시 처형시키지 않았던가. 라트라실 황제는 온화하게 굴 때가 많지만,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상대를 휙 잘라버리는 그런 성품이었다. 그런 사람이 화가 나서 약을 탄 수프 그릇을 챙겨 갔다 하니, 트리로서는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무슨 약을 탄 건지 알게 되더라도, 그냥 그뿐이야.’
* * *
“소문은? 다 냈어?”
“예. 하렘 전체가 떠들썩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라틸와 라나문, 버섯 수프 이야기를 떠드는 사람들은 아마 모를 것이다. 다들 목소리를 죽여 소곤거리는 그 소문의 출처가 바로 라틸 장본인이라는 것을.
“그냥 하나씩 불러다 심문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시종장은 라틸의 명령대로 소문을 퍼트리긴 했으나, 이게 좋은 방법 같진 않아서 조심스럽게 라틸에게 물어보았다. 어쩔 수 없었다. 라나문이 먹었던 그 ‘약’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약인지는 시종장도 몰랐기 때문이다. 시종장도 진실을 알았더라면 왜 라틸이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 드는지 이해했겠지만, 라틸은 라나문을 위해 시종장에게도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 일을 키울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이렇게 조용히 처리했다 또 같은 일이 반복될까 걱정됩니다.”
“그건 그때 생각하죠.”
라틸은 걱정하는 시종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서 부탁했다.
“라나문을 제외한 후궁들을 축제의 방으로 불러줘요, 사블레 후작.”
“예, 폐하.”
“아. 그리고 하나 더.”
“?”
* * * 그로부터 30여 분 정도 후. 라틸은 자신이 카리센에 직접 찾아갈 명목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젠 후궁들이 다들 모였겠다 싶어서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 하렘으로 걸어갔다. 예상대로 방 안에는 후궁들과 그들의 시종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칼라인은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클라인은 하품을 하고 있었다. 게스타는 사람이 많은 게 불편한 듯했고, 대신관은 해맑게 웃는 얼굴로 타시르와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대신관이 타시르를 치료해 준 일로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방의 한쪽에 놓인 길쭉한 테이블 위에는 동그란 은색 뚜껑으로 덮어둔 ‘무언가’가 있었다. 라틸은 시종들의 표정까지 샅샅이 살핀 다음, 일부러 발소리를 내어 방 상석으로 걸어갔다.
“오셨습니까, 폐하.”
라틸을 발견하자, 후궁과 시종들이 동시에 라틸에게 인사했다. 라틸은 손을 가볍게 젓고서 인사를 생략시킨 뒤 좌중이 조용해지자 엄한 표정을 짓고 목소리를 딱딱하게 냈다.
“이미 들은 사람도 있겠지만, 누군가 라나문이 먹을 수프에 뭘 탔다.”
전에 게스타가 날아오는 돌멩이에 맞았을 때도 라틸은 후궁과 궁인들을 불러 놓고서 잔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미 후궁과 궁인들은 이곳으로 오면서, 라틸이 그 수프 사건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고 짐작을 했다. 하지만 막상 대놓고 라틸이 그 이야기를 꺼내자 다들 표정이 어두워졌다. 돌을 던지는 일도 아주 위험한 일이지만, 먹을거리에 독인지 뭔지 모를 약을 타는 건 정말로 끔찍한 일이니, 화가 날 때는 이복남매까지도 처형해 버리는 라틸이 어떻게 나올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타시르.”
라틸이 돌연 타시르를 부르자, 타시르가 의아한 듯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예, 폐하.”
“나와서 저 뚜껑을 열어보아라.”
타시르가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 뚜껑을 열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동시에 탄식했다. 거기엔 수프가 담긴 그릇이 있었다. 이미 한 차례 하렘 안을 수프에 대한 소문이 휩쓸고 갔기에, 이를 본 사람들은 저 수프가 분명 라나문이 먹다 남겼다던 그 수프일 거라 생각했다. 이건 라틸이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타시르는 한 손에 뚜껑을 든 채 라틸을 쳐다보았다. 이건 뭡니까, 하는 얼굴로. 왜 자기에게 뚜껑을 열라 한 건지 짐작이 가지 않는 눈치였다. 라틸이 알려주는 대신, 문밖에서 대기 중인 시종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신호를 받은 시종이 은색 숟가락들을 가져와 테이블에 주르륵 펼쳐놓았다. 숟가락은 다섯 개. 그걸 본 타시르가 ‘설마?’ 하는 눈으로 라틸을 보았다.
“차례로 두 숟가락씩 먹어라.”
라틸의 말에 사람들이 더욱 웅성댔다.
“폐하, 저 안에는……!”
지켜보던 궁인들 중 하나가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지만 라틸이 무표정하게 쳐다보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
“저 안에는?”
“그게…….”
“넌 저 안에 뭐가 있는지 아나보지? 난 모르겠던데.”
여기서 반박이라도 했다가는 저 수프 안에 뭘 넣은 범인이 될 분위기여서, 궁인은 결국 쭈그러져서 뒤로 물러났다. 라틸은 다시 타시르에게 명령했다.
“두 입만 먹어.”
그러고서 라틸은 경고하듯 방 안에 모인 이들을 주르륵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괜찮다. 라나문도 두 숟가락 먹었는데 죽진 않았거든.”
괜찮다고 하는 말인데 괜찮지 않은 말에, 사람의 표정이 두려움으로 새파래졌다. 현재 라나문의 상태를 모르기에, ‘죽진 않은 상태’가 무엇인지 쉽게 짐작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들 ‘라나문에게 독을 먹인 범인이 누군지 모르니, 황제가 화풀이 삼아 다른 이들에게도 다 같이 벌을 내리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
하지만 타시르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희미하게 웃고서 바로 두 숟가락을 먹었다. 그가 숟가락을 내려놓자 라틸은 바로 칼라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다음. 칼라인.”
칼라인도 망설임 없이 다가와 그릇에서 수프 두 숟가락을 떠먹고 물러났다.
“클라인.”
클라인은 ‘소문이 사실이라면 나도 피해자가 될 뻔했는데 왜?’ 하고 억울해하는 얼굴이었으나, 일단 시키는 대로 먹긴 먹었다. 먹는 내내 라틸을 항의하듯 보긴 했지만. 클라인이 물러나자 다음으로는 대신관이 수프를 먹었고, 대신관이 물러나자 마지막으로 게스타 순서가 되었다. 게스타 역시 다른 후궁들처럼 별 반응 없이 다가와 숟가락을 들었다. 라틸은 게스타가 수프를 뜨는 동안 게스타의 시종과 다른 하인들 쪽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 * * 그리고 라틸의 그 차가운 시선을 트리는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다. 진짜로 황제가 자신을 쳐다보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도둑이 제 발 저려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트리는 옆에 선 사람이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까 봐 제대로 숨도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정말일까. 정말로 저기 있는 수프가 자신이 약을 섞은 그 수프일까. 하지만 소문으로 도는 정황을 들으면 범인은 자신이었다. 클라인에게 가려 했으나, 중간에 하인들끼리 메뉴를 바꾸는 바람에 라나문에게 가게 된 수프 접시. 트리는 주먹을 꽉 쥐고서 일이 이렇게 꼬여버린 걸 자책했다. 만약 원래 계획대로 클라인이 약을 먹었더라면 일이 이렇게 흘러가진 않았을 텐데. 라나문에게 바뀐 접시가 가는 바람에, 수프에 약을 탔다는 게 바로 들통이 나 버렸다.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있을까.
‘젠장. 어쩌지…….’
손톱이 자꾸만 입가로 올라가려는 걸 억지로 의식해 막으며, 트리는 게스타가 숟가락 가득 뜬 수프를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는 걸 바라보았다. 아니, 실제로는 평범한 속도였지만, 트리의 눈에는 그 속도가 너무나도 느리게 보였다. 자신의 시각을 제외한 모든 게 천천히 흘러서 공기 중을 떠다니는 먼지와 바람조차 보일 정도로.
‘아, 안 되는데. 어쩌지. 도련님이 저걸 드시면 안 되는데.’
그러다 게스타가 수프를 입안에 넣고 턱을 닫는 순간. 트리는 더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 * * 며칠 전. 성기사단 백화랑술의 단장 백화는 교통편이 좋지 않은 어느 작은 마을에 흑마법사로 추정되는 이가 붙잡혔단 보고를 들었다. 하지만 그 보고를 들었을 당시 라트라실 황제가 자리를 비운 터라, 그는 이 일을 황제에게 보고하진 못하고 궁을 떠나야 했다. 필요하다면 황제에게는 나중에 보고해도 되기에, 우선은 붙잡았단 흑마법사 쪽부터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옛날에는 흑마법사가 희귀하진 않았으나, 지금 흑마법사들은 대부분 사라지거나 숨어 지내서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그들을 한 번도 못 보고 죽으며, 흑마법사가 나타났다고 소동이 벌어져도 대부분은 그냥 누군가가 고약한 장난질을 친 것이거나 억울하게 누명을 써서 흑마법사로 몰린 일이 대다수였다. 그렇기에 백화는 작은 마을까지 직접 내려왔으면서도 그곳에 나타났단 흑마법사가 진짜일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그러나 마을 입구에서부터 백화는 이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으리란 걸 깨달았다. 그곳에서부터 느껴지는 기묘할 정도로 무거운 정적 때문에. 백화가 데려온 성기사 두 명 역시 눈살을 찌푸리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무 조용한데요.”
“작은 마을이라지만…… 이건 좀.”
아무리 조용한 마을이라고 해도 일상적인 소음은 있기 마련이다. 사람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아니더라도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소리, 풀숲 사이에서 나야 할 풀벌레 소리 등도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곳에선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게다가 돌아다니는 사람조차 없었다. 시골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한낮에도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진 않을 텐데도.
“들어가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기사 하나가 작게 중얼거리자, 백화 역시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좀 꺼림칙하군.”
“일단 흑마법사를 붙잡았단 대원들을 찾아야겠습니다. 위험한 일이 생겼다면 표식을 그려놓았을 겁니다.”
“우선 마을 근처를 둘러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