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누군지 몰라도 똑같이 해줘야2020.10.04.
민망하지만 누군가는 분명 확인을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아내나 마찬가지인 자신이 확인하는 게 그나마 조금이라도 덜 민망하지 않을까? 라틸의 제안에 라나문의 귓가가 붉어졌으나,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둘 다 서로 손만 잡고 자 봤지, 진짜 부부로서 뭐 해본 게 하나도 없는데. 이런 상황에 처하자 곤혹스러운 듯했다.
“싫으면 다른 사람 불러줄게. 네 시종은 어때?”
“제일 싫습니다.”
“아. 하긴. 매일 얼굴 봐야 하니까 좀 그렇겠다.”
자신이 생각해도 별수가 없는지, 라나문은 결국 눈을 시선을 아래로 떨구면서 중얼거렸다.
“폐하께서 확인해 주십시오.”
라틸은 괜히 목이 막혀와서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근데 날이 좀 덥다?”
“곧 여름이니까요.”
“그러게.”
만약 아트락시 공작이 지금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아들의 등짝을 찰싹찰싹 때리고서, 밤공부는 헛으로 했냐고 호통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평범하게 신혼 첫날밤을 앞둔 상황이라면 그나마 낫지, 이런 애매한 입장은 라나문으로서도 정말 곤혹스러웠다.
“아 더워.”
라틸이 괜히 손부채질을 파닥파닥 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라나문은 달팽이가 기어가는 속도로 느리게 다리를 조금 벌렸다. * * * 안에서는 미묘하고 간지러운 분위기가 흘러갔지만, 문앞에 선 카르둔은 그저 걱정되고 걱정될 뿐이었다. 라나문은 라틸과 두텁게 정을 쌓지도 않았다. 거기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동안 쌓인 정이 있다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라나문은 황제에게 별로 예쁨 받지 못한 후궁이 아닌가. 황후나 국서의 역할은 황제에게 총애 받는 게 아니지만, 후궁의 역할은 누가 뭐라 하든 황후나 국서와는 전혀 다르니까.
“도련님…… 괜찮으셔야 할 텐데.”
대체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긴 건지. 늘 건강하고 잔병치레도 없던 분이신데. 카르둔은 문가에서 괜히 혼자 훌쩍거리다가, 궁인 하나가 이상하단 듯이 쳐다보자 괜히 두 손을 마구 털며 저리 가라 신호했다. * * *
‘느, 느낌이 좀 이상해.’
라틸은 창가에 친 커튼을, 라나문은 라틸의 어깨 너머 문을 쳐다본 채 조심스러운 확인 절차를 얼마나 걸쳤을까. 이리저리 건드려 보아도 정말 아무 반응이 없자, 라틸은 천천히 손을 떼고서 괜히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진짜 반응이 없네.”
“그렇다고 했잖습니까.”
“…….”
“…….”
“저기.”
“네.”
“나한테 감정이 없어서 반응이 없는 건 아니지?”
“절대 아닙니다.”
라나문이 즉시 대답하자, 라틸은 괜히 머쓱해져서 “그래?” 하고 웅얼거렸다. 라틸은 어색하게 두 손을 모으고서 괜히 손가락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아까 라나문이 한 말. 감정이 있는데 반응이 없단 건가, 아니면 감정과 별개로 반응은 있을 수밖에 없단 건가. 무슨 소리지? 괜히 쓸데없는 것만 궁금해졌다. 그때. 라나문이 망설이다가 라틸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 위로 가져갔다.
“라나문?”
놀라서 확 고개를 들자, 손바닥에 닿은 탄탄한 근육에서 쿵 쿵 무겁게 심장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은 제대로 반응하고 있습니다.”
“으응. 그러네.”
라틸은 반사적으로 손을 오므리려다가 라나문이 아찔한 표정을 짓자 다시 손가락을 쫙 폈다. 라나문은 조심조심 라틸의 손을 다시 놓아주고는 아까 라틸이 했던 것처럼 괜히 자기도 손부채질을 했다. 라틸은 라나문의 그 그림 같은 옆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기, 라나문. 평소엔 안 이랬던 거 확실해?”
“물론입니다. 그러니까 변화도 바로 알아차린 거지요.”
“그렇구나.”
근데 그게 어떤 원리로? 라틸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거기까지는 굳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라나문이 어떻게 변화를 바로 알아차렸나’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라나문의 몸 상태를 원래대로 되돌리나’니까.
“일단. 내가 방법을 알아볼게.”
“폐하.”
“너무 염려하지 마. 잠깐 피곤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잖아. 응?”
* * * 라나문을 진정시킨 뒤, 라틸은 곧장 대신관을 찾아갔다. 궁의를 불러도 될 테지만, 그래도 치료 솜씨가 가장 좋은 건 대신관 아니던가. 대신관이 이런 쪽 치료도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폐하!”
라틸이 왜 찾아온 건지도 모르고, 대신관은 라틸이 자신의 방에 오자 그저 기뻐하면서 해맑게 웃었다.
‘어이쿠.’
라틸은 방 안에 들어갔다가, 백화랑술의 성기사들이 방 전체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카드 놀이 중인 걸 보고 순간 주춤 뒤로 물러났다. 성기사들은 라틸을 보자 자기들끼리 서로 눈치를 보다가 얼굴이 벌게지더니, 이동하는 오리처럼 줄지어 방 안을 빠져나갔다.
‘성기사들은 다들 상상력이 풍부한가 보네.’
“절 품으려 오셨습니까, 폐하?”
‘얘 포함해서.’
라틸은 천진하게도 묻는 대신관에게 아니라 말하고는, 방문을 단단히 닫았다.
“음? 비밀스럽게 해야 할 말씀이 있나 보군요.”
대신관은 의외로 이럴 때는 눈치가 좋은지, 자신도 바로 일어나 창문을 닫아 잠그고 커튼을 쳤다. 준비가 다 끝나자 라틸은 소파에 앉으며 말문을 열었다.
“저기, 사실은 좀 봐주었으면 하는 게 있어서 왔어.”
“무엇을요? 무엇이든 봐 드리겠습니다.”
“음…… 그럼 라나문의 소중한…… 거기를 좀 봐 줄래?”
하지만 무엇이든 봐주겠다던 대신관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뒤로 황급히 상체를 뺐다.
“제가 거길 왜요?!”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전 알아보고 싶은 게 없는데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성능에 문제가 생겨서 그래.”
대신관이 치를 떨자 라틸은 쩔쩔매면서 손을 저었다. 그러나 대신관은 더욱 펄쩍 뛰었다.
“고잔가보죠!”
“!”
“저더러 어쩌라고요.”
“아니야, 라나문 고자 아니야. 고자 아니라 그랬어.”
“원래 초기엔 다 부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 아니래. 어쨌든 일단 확인이라도 좀 해줘.”
하지만 라틸이 아무리 좋게 말해도 대신관은 질색팔색할 뿐이었다.
“싫습니다! 보고 싶지 않아요!”
“좋아. 그럼 안 보고. 눈 감고 확인하면 되잖아?”
“더 싫습니다!”
“그럼 뜨던가!”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요!”
평소라면 인자하게 웃으면서 나섰을 대신관이 유난히 기겁하자, 결국 라틸은 인상을 구기면서 물었다.
“뭐가 문제야. 너 대신관 아니야? 병자를 봐주는 건데 그렇게 싫어? 라나문은 말이야, 지금 시든 콩나물이 됐다고!”
“…….”
“아, 혹시나 싶어 말하는 건데. 이건 전체적인 분위기를 비유한 거야. 거기가 아니라. 부위가 좀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병이잖아.”
라틸이 드러내놓고 ‘실망이야.’ 하는 내색을 보이자, 대신관은 억울해서 입을 뻐끔거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솔직하게 외쳤다.
“치료하려면 상처 부근에 손을 대야 한다고요!”
“아.”
그랬어? 라틸이 한 손으로 자기 입가를 가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대신관은 시무룩하게 어깨를 떨구었다. * * * 몹시 꺼려하긴 했으나, 결국 대신관은 라틸과 함께 라나문을 보러 찾아갔다. 라나문은 라틸이 다시 찾아오자 얼른 문을 열어 주었다가, 라틸이 질질 끌 듯이 데려온 대신관을 보고는 다리에 힘이 빠져 넘어질 뻔했다. 라나문이 배신자를 보듯 라틸을 쳐다보자, 라틸은 억울해졌다. 아니, 나는 병 고쳐주려고 대신관을 열심히 설득해서 데려왔는데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내가 병을 준 건가? 병 확인하고 약 찾으러 다니는 건데. 결국 라틸은 일부러 차갑게 정색하고서 손가락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 둘 다.”
라나문과 대신관이 바닥에 발이 붙은 사람처럼 비척비척 걸어오자, 라틸은 둘을 나란히 앉게 한 다음 또 지시했다.
“고쳐봐.”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라나문과 대신관의 안색이 2주일간 잠도 못 잔 사람처럼 퀭해졌다.
“…….”
“…….”
라나문과 대신관이 둘 다 가만히 있기만 하자, 결국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그들을 재차 설득했다.
“라나문. 넌 병이 생겨서 그걸 고치려는 거야. 대신관. 너도 대신관으로서 환자를 봐주는 것 뿐이야. 지금은 둘 다 내 후궁이 아니라, 환자와 대신관이란 것만 생각해.”
라틸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결국 대신관은 마지못해 한 손에서 소맷자락을 잡아 올리며 중얼거렸다.
“폐하의 말씀처럼 라나문 님은 환자이니, 어색해도 치료하겠습니다.”
라나문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잘 부탁합니다.”라고 말하자, 라틸은 자기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이 터질 뻔했다. 하지만 여기서 웃어버리면 둘 다 도망갈 게 뻔하기에, 라틸은 가까스로 혓바닥을 깨물어 웃음을 참아내고 어느 때보다 무섭게 정색했다.
“하지만 폐하, 라나문 님. 이 증상이 고의적인 공격으로 인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생긴 몸의 변화라면 저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생긴 몸의 변화라니?”
“예를 들어서, 누가 독약을 먹여서 몸이 약해진 거라면 치료할 수 있지만, 그런 게 없이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거라면 치료할 수 없다고요.”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라틸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신관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 * * 잠시 뒤. 라틸은 라나문에게 생긴 변화가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대신관이 치료를 하자 바로 증상이 나아진 것이다.
“즉, 그럼 이건 그거네. 누군가 라나문을 공격해서 이렇게 된 거야. 독이나 그런 걸 먹인 건가?”
라틸이 차갑게 중얼거리자, 라나문 역시 평소보다 더욱 차가워져서 말했다.
“반드시 범인을 잡아야 합니다.”
대신관도 평소의 인자함은 어디로 갔는지 씩씩거리며 동의했다.
“잡아서 똑같이 벌을 줘야 합니다. 물론 그자는 치료해주지 않을 겁니다.”
치료를 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좀 억울한 듯했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라나문에게 물었다.
“그래야지. 라나문. 정확히 증상은 언제부터 시작됐어?”
“이틀 전부터입니다.”
“그 전엔 수상하거나 이상한 점은 없었어?”
“그다지 수상한 건…….”
없었다고 말하려다가, 라나문은 두 번 연달아 나온 버섯 수프를 떠올리고는 “아.” 하고 탄식했다.
“왜? 생각나는 게 있어?”
“네. 아침 식사로 버섯 수프가 연달아 나온 적이 있습니다.”
대신관은 ‘그게 뭐?’ 하는 표정이었으나, 라틸은 라나문의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같은 메뉴가 연달아 두 번 나왔다고?”
“네.”
“그거 놀라운데? 수상해.”
대신관은 여전히 ‘그게 왜?’ 하는 표정으로 라틸과 라나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신전에 있을 때 일주일 내내 같은 메뉴를 먹은 적도 있기에 라틸과 라나문이 왜 이러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쨌든 두 사람끼리는 말이 통하는 것 같으니 가만히 있을 뿐.
“그러면 궁인들을 모아 놓고서 너한테 약 섞인 수프를 준 사람이 누군지 자백하라 해볼까, 라나문?”
하지만 라틸이 라나문의 자존심을 배려하지 않은 의견을 꺼내자, 대신관은 이건 아니다 싶어서 황급히 끼어들어 안 된다고 만류했다.
“그래도 라나문 님 체면이 있는데,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폐하.”
“체면은 약을 탄 놈이 상하는 거지. 라나문은 왜.”
“궁인들에게 뭐라 하시려고요?”
“누구야! 누가 감히 라나문에게 고자약을 먹였어!”
라틸이 예시로 들려준 말에, 이번에는 라나문이 낯빛이 해쓱해져서 얼른 대신관을 편들었다.
“전 대신관 의견에 동의합니다. 몰래 잡았으면 합니다.”
라틸은 사람들을 단체로 불러 놓고서 훈계하면 누군가 속마음을 털어놓으리란 걸 알기에, 공개적으로 라나문에게 고자약을 먹인 범인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라나문이 낯빛이 창백해져서 싫다고 하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러면 조용히 찾아보자. 일단…… 그래. 주방장을 찾아가 봐야겠네.”
* * * 조리실로 가 주방장을 만난 라틸은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완두콩 수프를 준비했다고?”
“네, 폐하.”
주방장은 아예 라나문에게 버섯 수프를 준비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뭐야. 범인이 중간에 아예 수프를 바꾸어버린 건가? 그러면서 약을 탔고?’
라틸은 활짝 웃었다. 그러면 오히려 일이 더 쉬워지지.
“수프를 운반한 사람들을 추궁해 봐야겠네.”
그 후에도 일은 일사천리로 풀려서, 라틸은 원래 완두콩 수프가 라나문의 방에, 버섯 수프가 클라인의 방에 갔어야 했단 걸 알아차렸다. 그들은 라나문이 완두콩을 싫어하기 때문에 수프를 바꾸었다고 했다. 하인들은 편식 심한 주인을 위해 재량껏 수프를 바꾸는 게 가능하니까.
‘그러면 범인이 노린 게 사실은 클라인이었던 건가?’
수프를 바꾸어 달라고 한 건 라나문의 하인이고, 수프를 바꾸지 않았다면 그 수프는 클라인이 먹었을 터. 라나문의 하인이 수프를 바꾸어 달라고 할지 말지 클라인이 미리 알 리 없으니, 이 일은 클라인의 자작극일 수도 없었다.
‘그럼 누군가 클라인을 노리고 약을 먹인 건데. 누가 그랬을까? 클라인과 가장 많이 다툰 사람이라면…… 게스타이긴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