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절망하는 라나문2020.09.30.
“…….”
라나문이 수프를 마시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자, 그의 유형제 겸 시종인 카르둔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러세요, 도련님? 음식이 마음에 안 드세요?”
“좀 이상해서.”
“냄새가요?”
카르둔은 가까이 오더니, 맛보기용 숟가락으로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냄새를 맡아보았다.
“괜찮은데요?”
이어서 카르둔은 한 입 수프를 먹어 보고는, 천장을 쳐다보면서 입을 우물거렸다. 라나문이 빤히 보자, 카르둔은 수프를 꿀꺽 다 넘긴 다음 웃으면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맛있어요, 도련님. 도련님은 버섯 수프 좋아하시잖아요.”
“어제도 나왔는데.”
같은 메뉴로 연달아 드시기 싫으신가? 카르둔은 맛있어 보이기만 하는 버섯 수프를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다른 걸로 바꿔달라 할까요?”
“먹기 싫은 게 아니다.”
“그럼요?”
“원래 같은 음식은 연달아 안 냈잖아.”
“아…… 그건 그렇죠. 그러네요. 듣고 보니 보통은 안 그러네요.”
“…….”
“하지만 완전히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에요, 도련님. 전에 주방장을 만났을 때, 도련님이 뭘 잘 드신다고 말했더니 삼일 내내 그 음식만 올렸던 적도 있잖아요.”
좋게 말을 해도 라나문의 표정이 변하지 않자, 카르둔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꺼림칙하시면 바꿔달라 할까요?”
라나문은 입을 꾹 다문 채 수프를 보다가 자신의 숟가락을 들어올렸다.
“되었다. 싫어하는 음식도 아니니.”
먹기 싫다고 말을 해 놓고서는, 막상 먹으니 맛이 있는지 라나문은 수프 한 그릇을 싹싹 비웠다. * * * 문제는 하루 해가 지나서야 터졌다.
‘……뭔가 이상한데.’
다음날 아침. 평소와 같은 시각에 눈을 뜬 라나문은 침대에 누운 채 생각했다. 평소와 느낌이 다르다고. 평소에는 일어나자마자 바로 일어서서 씻었을 라나문이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자, 카르둔은 오늘 라나문이 입을 의상을 빳빳하게 다려서 가지고 오다가 질문했다.
“왜 그러세요, 도련님?”
“내…….”
“네?”
라나문은 카르둔에게 어제 아침과 오늘 아침의 차이에 대해 말하려다가, 마음을 바꾸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말로 하자니 좀 민망한 느낌이기도 했고, 하루 좀 힘없는 느낌인데 무슨 소용이냐 싶어서였다. 결국 라나문은 말없이 몸을 일으키고서 늘 하던 대로 곧장 욕실로 들어갔고, 목욕을 마친 후에는 카르둔의 치장을 받으면서 하렘 내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들었다.
“요즘 폐하께서는 타시르 님이랑 대신관이 가장 마음에 드시나봐요. 두 번이나 타시르 님을 데리고 놀러 나가시고, 대신관 님을 보려고 막 갑자기 뛰어 오기도 하시고. 그렇대요.”
“…….”
“이상해요. 도련님을 두고 어떻게 그런 사람들과. 도련님은 너무 잘생겨서 인간미가 안 느껴지는 걸까요?”
“모르지.”
“몰라도 알아내야죠! 공부하신다더니! 공부한다고 책도 많이 보시더니! 뭘 보신 거예요!”
“카르둔.”
“……죄송해요. 너무 속상해서 흥분했어요.”
“책에 나온 건, 잠자리에 든 후의 일이다.”
“그, 그럼 잠자리까지 가는 건……?”
“나와 있지 않아.”
“그럴 수가! 그런 게 어딨어요!”
라나문이 덤덤하게 머리카락을 매만지자, 카르둔은 실망해서 어깨를 떨구다가 “아!” 소리를 내더니 다시 제안했다.
“대신관이나 타시르 님과 가깝게 지내는 건 어떨까요? 그 사람들이랑 있으면 폐하를 덩달아 볼 수 있잖아요. 게다가 옆에 대조군이 있으면 도련님 얼굴이 더 잘나 보이지 않을까요?”
카르둔은 진지하게 제안한 것이었지만, 라나문은 그 제안을 심사숙고할 여유가 없었다. 다음날에도 아침에 일어났을 때의 느낌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나문은 침대에 누운 채 명화가 그려진 화려한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무언가……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 * *
“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게스타에게 배운 고대어를 이용해 고지도를 해석한 라틸은 결과물이 나오자 자기도 모르게 욕을 뱉을 뻔했다.
“왜요?”
타시르가 옆에서 물었지만 대답할 수도 없었다. 라틸은 말없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럴 수밖에. 고지도는 한 물건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는데, 하필 그 물건 위치가 카리센 내에 있었던 것이다. 카리센. 전 남자친구가 황제로 있는 곳에. 심지어 수도 근처다. 미쳤다. 이건 진짜 미쳤다고밖에 볼 수가 없었다.
“지도 제작자 새끼들 미친 거 아냐?”
“네?”
“카리센을 가리키는 지도를 왜 아도마르에 파묻냐고.”
“뭐…… 이 지도가 만들어졌을 때쯤이면, 국경이라던가 나라 간 관계라던가, 하여튼 여러모로 지금과는 다르지 않았을까요?”
“나도 알아.”
“그렇군요. 모르시는 것처럼 화를 내시기에.”
라틸이 가자미눈을 하고 쳐다보자, 타시르는 과장되게 반한 시늉을 하면서 두 손을 모으고 몸을 꼬았다.
“연인 간엔 애칭이 있어야지요, 앞으로 폐하의 별명을 가자미로 할까요? 폐하께서 저의 사랑스러운 가자미가 되어 주신다면, 저는 폐하의…….”
“망둥어.”
“……전 망둥어랑 닮은 구석이 없습니다, 폐하.”
“약장수 망둥어.”
“……너무해요.”
타시르가 시무룩한 척 한숨을 내쉬자, 라틸은 코웃음을 치고서 다시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타시르는 라틸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떠나자 그 모습을 빙그레 웃으면서 바라보았다. 라틸은 모르고 있겠지만, 이미 그는 라틸과 카리센 황제의 사이를 알기에, 라틸이 왜 저렇게 심란해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아는 척할 수도 없는 문제이기에, 타시르는 라틸이 무어라 결정을 내릴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마침내 라틸은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결심했다.
“어쩔 수 없지. 가보는 수밖에.”
“카리센에요? 직접 가시려고요? 위험합니다. 그자들이 또 몰려올 수도 있는데요.”
“지도를 내가 가지고 있는데 그놈들이 어떻게 와?”
“그건 그렇군요. 하지만 내부에 적이 있다면 폐하를 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일은 은밀하게 처리해야 해. 직접 해버리는 게 보안에는 제일 좋지.”
라틸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이참에 아이니 황후를 보는 것도 괜찮겠고.”
아이니 황후는 헤움 황자가 살아 돌아왔다 주장한다 했지. 그녀와 대화를 나누어 본다면 무언가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외교 문제를 핑계 삼아 공식적으로 가시겠군요?”
“그래야겠지. 그리고…….”
그런데 라틸이 무어라 더 말하려는 찰나. 누군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냐.”
라틸이 방 안에 들어오란 표시로 종을 흔들자, 곧 복도에서 비서 한 명이 손을 모으고 들어와 알렸다.
“폐하. 라나문 님께서 폐하를 꼭 뵙고 싶어하십니다.”
“라나문? 지금은 좀 바쁜데.”
“꼭 모셔오라 당부하셔서요…….”
* * * 바쁘다고 돌려보낼 수도 있겠지만, 라틸은 라나문이 별일 아닌 문제로 자신을 부를 사람이 아니라 걸 알기에 일거리를 잠시 옆으로 치워두고 복도로 나갔다. 긴 회랑을 지나 하렘 안으로 들어선 라틸은 라나문의 방으로 걸어가면서 속으로 아차 싶었다.
‘그간 일 있는 후궁들 위주로 챙기느라 라나문을 많이 못 챙겼네.’
그래도 공신의 아들인데다, 라나문은 아트락시 공작이 억지로 밀어 넣은 건데. 새삼 생각하니 너무 라나문을 방치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로 그럴 성격 같진 않지만…… 혹시 이걸 따지려고 와달라 한 건가? 하지만 이게 급한 일 같진 않은데.’
라나문의 방 앞에 도착하자, 라틸은 미리 나와 있는 카르둔을 발견하고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부른 거냐?”
방 안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카르둔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폐하.”
눈썹이며 눈꼬리가 다 아래로 처진 모양새가, 울음을 꾹 참는 듯해서 라틸은 깜짝 놀랐다.
“왜 그래? 라나문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게…….”
“왜? 왜 그러는데?”
그러나 카르둔은 감히 황제가 질문하는데도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라틸은 답답해서 방 안으로 쾅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라나문이 방 중앙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게 보였다.
“라나문!”
라틸이 이름을 부르자 천천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라틸은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이 너무 창백해서. 지금 얼굴은 거의 칼라인에 비견할 정도로 창백했다.
“왜 그래? 너 어디 아파?”
라틸이 황급히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자, 라나문의 표정이 처연하게 변해서 라틸은 선뜩해졌다. 아픈 게…… 머리?
반사적으로 그의 이마에 손을 올리지만, 다행히 열이 나진 않았다.
“라나문.”
“폐하.”
“그래, 여기 있어. 말해봐. 무슨 일인데?”
라틸은 라나문의 손을 잡고 침대로 데려간 뒤, 그를 앉힌 다음 맞은편에 서서 허리를 조금 굽혔다. 눈을 마주 보면서 빤히 살피자, 늘 날이 서 있던 라나문의 입가에 차가운 한숨이 어렸다.
“괜찮아. 난 네 편이니까 말해봐, 라나문. 어디가 안 좋아? 아니면 고민이라도 있어? 아트락시 공작가 일이야?”
라나문은 라틸을 가만히 바라보며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평소 시원하다 못해 날선 얼음 같은 인간이, 오늘따라 미적대는 모습은 갑갑할 정도였다. 그래도 라틸은 그를 다그치는 대신 차분하게 스스로 입을 열 동안 기다려주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마침내 라나문이 평소와 그리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병이 생긴 것 같습니다.”
“뭐?”
진짜 아픈 거야? 얘 이러는 거 보니 죽을병 아냐? 라틸은 기겁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죽을…… 병이야?”
그런 게 아니라면 이렇게 꾸물꾸물 말하지 않을 텐데. 반응이 심상치 않은 걸 보니, 분명 어마어마한 중병에 걸린 게 분명했다. 라나문이 중병에 걸렸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궁의들을 모아서 간호를 해야 하나? 아니면 아트락시 공작가로 보내 거기서 요양을 하게 해야 하나? 어느 쪽이 회복에 좋지? 라나문에게 물어보고 정해야 하나? 아니, 근데 대신관이 병도 치료할 수 있나?
“제가 죽는 병은 아닙니다.”
그러나 라나문의 대답은 좀 묘했다.
“네가 죽는 병이 아니라니?”
설마 아트락시 공작? 공작부인? 어느 쪽이든 라나문에겐 몹시 슬플 이야기여서, 라틸은 바짝 긴장했다.
“그럼 누가 죽는데?”
“……제 미래의 아기들이.”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슬프다기 보다는 황당했다.
“뭐?”
누가 죽어? 아기가 죽는 건 무척 슬프고 괴롭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게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아기라는 데는 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타시르가 이 말을 했다면 라틸은 또 농담하냐고 타박했겠지만, 말을 꺼낸 게 라나문이다 보니, 이게 농담 같지가 않았다. 근데 말은 너무 어이가 없고…….
“혹시…… 미래에 다녀왔어? 지금이 몇 년도인지 알려줄까?”
라틸이 결연에 차 묻자, 라나문은 ‘무슨 소리신지’ 하는 듯 눈살을 구기더니 한숨을 내쉬고서 털어놓았다.
“물건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습니다.”
“물건? 무슨 물건?”
‘물건이랑 아기가 무슨 상관인데?’
라나문이 눈으로 자신의 다리 사이를 가리키자, 라틸은 덩달아 시선을 내렸다가 황급히 고개를 들면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 어쩌다가?”
“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확실해? 확실한 거 맞아? 확인해 봤어?”
라틸이 다급하게 묻자, 라나문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라틸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왜, 왜 날 그렇게 쳐다봐? 내가 한 거 아냐!”
그 표정에 깃든 원한이 당혹스러워서 라틸이 손을 내젓자, 라나문은 얼음을 하나하나 얇게 긁어내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제가 무슨 수로 확인을 했겠습니까.”
“그럼 아닐 수도 있는 거잖아?”
“아닙니다. 분명하게 느낌이 옵니다. 오늘 하루 그런 것도 아니고요.”
이를 어쩌지. 아니, 세상에 얘는 하필 아파도 저기가 아파서 사람을 곤란하게. 라틸은 머뭇거리면서 라나문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말없이 눈만 마주하고 있었다. 뭔가 대처 방안이 필요한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둘 다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다가, 라틸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단 내가…… 좀 확인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