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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61/367)

61화.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는다2020.09.27.

타시르가 다 나은 걸 본 뒤. 라틸은 그에게 천천히 돌아오라 말하고서 자신은 대신관만 데리고 궁전으로 돌아왔다. 애초에 라틸이 다친 타시르를 궁전에 바로 데려가지 않은 것도 내부에 있을 적들을 의식해서였다. 그자들이 타시르가 화상 입은 걸 보게 된다면 경매장 마차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눈치챌까. 그러니 마지막까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오빠가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일주일에서 이 주일 정도 궁전에 머물면서 사블레 후작을 도와줘. 이후 라틸은 오빠에게 편지를 쓴 다음, 다음 날 아침, 사람을 시켜 편지를 전하게 하고 자신은 고지도를 해석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 고지도가 발견되었다는 아도마르는, 과거에 부흥했으나 지금은 쇠퇴해 사라진 나라의 도시였다. 특이한 건 몇 개의 나라가 건국되고 멸망하길 반복하는 와중에도 아도마르가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있단 점이었다. 쇠퇴했으나 부지가 넓고 도시의 건축물은 여전히 화려하고 튼튼한데도. 이는 아도마르를 차지한 나라들이 연달아 내분으로 망하자, 도시 자체에 저주가 걸려 있단 소문이 돌면서 이를 불길하게 여긴 나라들이 아도마르를 점령하길 꺼린 탓이었다. 결국 아도마르는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고 사라진 나라의 도시로만 남게 되었으나, 이 때문인지 계속 온갖 유적과 던전들이 발견되어서, 현재는 고고학자들이 가장 숭배하는 땅이기도 했다. 이런 곳에서 나온 고지도라면 분명 뭐가 있긴 있을 터. 라틸은 업무 시간이 아닐 때마다 도서관을 찾아가 고고학 서적을 책상 한쪽에 쌓아 놓고 지도를 해석하기 위해 끙끙거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뜬금없이 이득을 본 사람이 하나 있었다.

16551083430017.png“폐하. 오늘도 오셨습니까.”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게스타였다.

16551083430023.png“어. 너도 오늘 여기 왔느냐?”

라틸이 도서관 안으로 들어서며 묻자, 게스타가 시집을 꼭 끌어안으면서 중얼거렸다.

16551083430017.png“네. 어제 보던 걸 마저 보려고요…….”

16551083430023.png“넌 진짜 성실하다. 여기 안 오는 날이 있긴 해?”

16551083430017.png“별로 친한 후궁들도 없고…… 하렘 안에선 할 일도 없고…….”

16551083430023.png“근데 넌 하렘 오기 전에도 여기 자주 왔잖아?”

게스타가 우물거리다가 쑥스럽단 듯이 웃자, 라틸은 아차 싶어서 덩달아 웃었다. 내가 너무 쟤를 민망하게 만들었구나. 그냥 이런 건 말하지 말걸. 라틸은 지금이라도 뭐라 더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그냥 게스타의 어깨를 두드리고서 고고학 서가로 걸어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어제는 약간 멀찍이 떨어진 채 창가에서 책을 읽었을 게스타가 오늘은 주춤주춤 라틸을 따라왔다. 라틸이 책꽂이에서 책을 빼다가 “왜?” 하고 묻자, 게스타는 자신없이 물었다.

16551083430017.png“보니까 폐하께서 계속 고고학 관련한 책을 보시던데요. 맞나요?”

16551083430023.png“어.”

라틸은 품 안에 잘 감춰둔 고지도를 떠올리고서 모른 척 웃었다.

16551083430023.png“요즘 이쪽에 관심이 많아서. 궁 안에서 안 좋은 일도 계속 일어나고 하니까.”

고지도를 어디에서도 꺼내놓지 않기 위해, 라틸은 알아내고 싶은 글자 몇 개만 따로 종이에 적어서 왔다. 그렇다 보니 게스타가 묻는 데도 모른 척한 것이다.

16551083430017.png“저…….”

그런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게스타는 계속 라틸 주변에서 우물거렸다.

16551083430023.png“왜?”

그게 갑갑해 라틸이 재차 캐묻자, 게스타는 쭈뼛거리면서 라틸의 앞으로 빠르게 다가오더니 손가락으로 고고학 책 중 한 권의 표지를 가리키며 빠르게 말했다.

16551083430017.png“마천루.”

마천루가 왜? 라틸은 왜 멀쩡한 책표지를 마천루라 부르지, 싶어서 인상을 찡그리다가 곧 게스타의 말을 이해하고 큰 소리로 물었다.

16551083430023.png“너 고대어를 읽을 수 있어?”

16551083430017.png“네. 예전에 잠시 푹 빠졌던 시기가 있어서요.”

게스타가 시선을 자기 발에 댄 채 웅얼거리자, 라틸은 잘됐다 싶어서 활짝 웃었다. 안 그래도 하나하나 글자 찾기 번거로웠는데. 여기에 자동으로 글자 말해주는 애가 있었구나. 이러면 속도가 훨씬 더 붙을 것 같았다.

16551083430023.png“그럼 나 좀 도와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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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그로부터 며칠 간, 라틸은 게스타를 만나 고문자를 배웠다. 물론 지도를 그대로 보여줄 수 없기에, 일부러 그 글자가 들어간 다른 책 페이지를 펼쳐서 그 바닥을 게스타가 다 읽게 하는 식으로 글자를 해석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속도가 빠르게 붙어서 큰 도움이 되었고, 마침내 예상보다 고지도를 더 빨리 해석하게 된 날. 라틸은 너무 기뻐서 게스타에게 물었다.

16551083430023.png“게스타.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16551083430017.png“가지고 싶은 거요?”

16551083430023.png“어. 네 덕에 시간을 확 줄여서. 선물하고 싶은데. 뭐 가지고 싶어? 보석? 목걸이? 옷? 귀한 서책?”

실제로 게스타가 뭘 요구하든 다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게스타는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그러면서도 라틸을 몇 번이나 쳐다보는 게, 뭔가 생각나는 게 있긴 한데 쉽게 말을 못 하는 눈치였다.

16551083430023.png“괜찮아. 뭐든 말해, 뭐든.”

이에 라틸이 웃으면서 분위기를 편하게 해주자, 게스타는 그제야 용기를 내어 부탁했다.

16551083430017.png“제 생일에 폐하와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어디든 상관없으니, 그냥 둘이서만…….”

16551083430023.png“생일?”

쟤 생일이 언젠데 저러지? 라틸은 잠시 당황하지만 곧 눈치껏 대답했다.

16551083430023.png“그래. 그러자.”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조만간이겠지. 설마 10개월 남았는데 벌써 저 얘기를 꺼내진 않을 테니.

16551083430023.png“네 생일 얼마 안 남았잖아.”

16551083430017.png“제 생일을 기억하십니까……?”

16551083430023.png“당연하지! 조만간이잖아.”

16551083430017.png“폐하…….”

게스타가 감동 받아서 라틸을 바라보자, 그 순수한 눈동자를 본 라틸은 양심이 몹시 찔려서 일부러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 * *

16551083430023.png“사블레 후작. 게스타 생일이 언젭니까?”

이후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집무실에 오자마자 라틸은 시종장에게 물었다

16551083496008.jpg“게스타 님이요?”

시종장은 ‘그건 왜 물으시지?’ 생각하는 듯 고개를 기웃하면서도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대답했다.

16551083496008.jpg“아마 5월 17일일 겁니다.”

16551083430023.png“얼마 안 남았네요?”

라틸은 깜짝 놀랐다. 진짜로 얼마 안 남았다. 얼마 안 남았을 거라 여겼지만 정말로 얼마 안 남은 날짜였다.

16551083430023.png“2주일 정도 밖에 안 남았잖아요?”

16551083496008.jpg“그렇지요.”

라틸은 혀를 차다가 괜히 시종장을 탓했다.

16551083430023.png“그럼 미리 좀 알려주지 그랬어요.”

16551083496008.jpg“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죄송합니다, 폐하.”

16551083430023.png“아니, 진짜로 시종장을 탓한 건 아닙니다.”

라틸은 손을 휘휘 젓고서, 이따가 고지도에 나온 곳과 자신이 그곳에 다녀오는 시간 등을 잘 계산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가까운 곳이면 게스타의 생일 전에 다녀올 수 있지만, 아니라면 생일 후에 다녀오는 게 자연스러울 테니까. 그러고 있자니, 시종장이 나중에 다른 말이 나올까 봐 대비하듯 미리 다른 후궁들의 생일까지 줄줄이 읊어주었다.

16551083496008.jpg“게스타 님 다음 생일은 클라인 님이십니다. 6월 1일이지요.”

16551083430023.png“걔도 얼마 안 남았네요.”

16551083496008.jpg“네. 그리고 다음이…….”

그런데 말을 하던 시종장이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51083430023.png“왜요?”

그게 이상하게 여겨져 라틸이 묻자, 시종장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16551083496008.jpg“아아, 별건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라나문 님의 생일은 폐하의 생일과 날짜가 같아서요.”

16551083430023.png“8월 26일?”

16551083496008.jpg“네. 이 날짜가 아주 좋은 날짜인가 봅니다.”

이어서 시종장은 라나문을 지지하는 이 답게 슬쩍 자기 의견도 끼워넣었다.

16551083496008.jpg“라나문 님이 국서가 되신다면 황제 폐하 부부가 같은 날에 태어난 것이니, 사람들이 다들 대단한 인연이라면서 좋아하겠습니다.”

16551083430023.png“좋아하는 건 사블레 후작이겠죠.”

16551083496008.jpg“…….”

시종장은 정곡을 찔리자 큼큼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굳이 부정하진 않았는데, 그게 꼭 라나문과 라틸을 운명처럼 엮는 것 같아 불쾌해진 서넛은 일부러 자신도 슬쩍 말을 보탰다.

16551083551321.png“카리센의 아이니 황후도 이날이 생일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라나문과 라틸이 인연이라면 아이니와 라틸도 인연이란 뜻이었다. 이에 시종장이 슬쩍 째려보았으나, 서넛은 덤덤하게 무표정을 고수했다.

16551083430023.png“뭐? 진짜야?”

라틸이 신기해하며 묻자 서넛이 고개를 끄덕였다.

16551083551321.png“예.”

여기서 끝낼 만도 하건만. 시종장은 그래도 포기하지 못하고서 또 박수를 치면서 슬쩍 라틸과 라나문을 운명으로 엮으려 시도했다.

16551083496008.jpg“이 날짜가 아주 운이 좋은 날짜인가 봅니다, 폐하. 두 개 제국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생일이 다 같은 날짜라니. 여기에…….”

그러나 시종장이 ‘라나문 님이 국서가 된다면 더욱 좋겠네요’라고 뒷말을 마치려는 순간. 서넛이 또 초를 치려 했으나, 이번에는 라틸이 그보다 먼저 손을 휘저으며 치를 떨었다.

16551083430023.png“의미 부여할 거 없습니다. 틀라 생일도 그날이니까요. 으.”

시종장은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이건 알고 있었으나 굳이 말하지 않던 내용이어서. 라틸과 틀라가 황녀와 황자이던 시절. 레안이 황태자 자리에서 굳건하게 버티던 시절. 안 그래도 이 부분 때문에 황후와 아낙차 후궁은 물론 그들의 지지자들, 그리고 결국 자식인 라틸과 틀라까지도 이 문제로 몇 번 속앓이를 했으니까. 시종장을 불편하게 만들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기에, 라틸은 시종장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억지로 밝게 물었다.

16551083430023.png“그래, 그래서. 칼라인, 대신관, 타시르는 생일이 언젠데요?”

  * * * 그 시각. 트리는 팔짱을 낀 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머리를 팽팽 굴리고 있었다.

16551083496008.jpg‘이걸 어쩌지.’

그의 품 안에는 작은 약병이 들어 있었다. 며칠 전 게스타가 로르드 재상에게 받아서 그에게 넘겨준 그 약병이었다. 먹게 된다면 1년 동안 불능이 되어 버린다는 무시무시한 약병.

16551083496008.jpg‘이걸 누구한테 먹이지.’

트리는 머릿속으로 게스타와 시비가 붙은 이들을 차례로 정리해보았다. 사실 게스타가 지금 제일 신경 쓰는 인물은 대신관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트리는 대신관에겐 약을 먹이고 싶지 않았다. 천벌 받을까 봐. 물론 그는 착실한 신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륙인들이 그렇듯 트리 역시도 신전과 신, 대신관에 대해서는 형체 없는 존중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16551083496008.jpg‘클라인. 역시 그 미친개한테 먹여야지.’

후보 중 대신관을 지우자마자 대번에 떠오르는 건 클라인이었다. 트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역시 이런 걸 먹일 상대는 클라인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다른 후궁들과는 아직 이렇다 할 충돌이 없으나, 클라인 그 미친개는 노골적으로 게스타를 괴롭혔다. 볼 때마다 무말랭이라 모욕하는 건 물론이고 늘 시비를 걸지 않던가.

16551083496008.jpg‘우리 도련님이 속은 무말랭이가 맞지만 겉으론 얼마나 탄탄하신데! 겉은 무라고! 무말랭이가 아니야!’

트리는 게스타의 넓은 어깨와 탄탄한 팔다리를 떠올리고서 콧김을 흥흥 뿜었다. 어쨌든 결정을 했으니 행동을 개시해야 하는 법. 트리는 약병을 클라인에게 먹일 방도를 찾아 일부러 식당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저녁 식사 시간 즈음이 되자, 하인들이 하나씩 웨건을 끌고 조리실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16551083496008.jpg‘미친개한테 가는 음식은…… 저거다!’

하이에나처럼 그곳을 맴돌던 트리는, 클라인의 방 주변에서 몇 번 보았던 하인을 알아보자마자 그쪽으로 슬며시 다가갔다. 어린 시절에 로르드 재상이 재능만을 보고 데려온 기재답게 트리는 몸을 쓰는 데 있어 천부적으로 뛰어났다. 게다가 재상이 아들을 위해 트리에게 온갖 몸에 좋은 것들을 다 먹이고 최고의 검술 스승을 붙여 두었기에, 비록 이름을 드날리진 못해도 그는 웬만한 기사들보다도 강했다. 하인 몇 명 속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16551083496008.jpg‘됐다.’

트리는 약병 코르크를 따고서 대기하다가, 조리실에서 나온 주방장이 하인들을 잠시 부르는 순간. 얼른 클라인에게 보내질 그릇 중 수프 그릇에 약을 부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나무 뒤에 몸을 숨긴 그는 이윽고 약병 뚜껑을 닫고서 약간의 죄책감을 꾹 눌렀다.

16551083496008.jpg‘괜찮아. 그놈은 우리 도련님한테 더 심한 짓도 많이 했잖아.’

어차피 길어봐야 1년밖에 효과가 안 가고 평생 불임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1년 정도 세울 수 없을 뿐이지. 이 정도라면 통쾌한 복수 아닌가? 황제를 모실 수 없게 되면 저 미친개도 1년 동안 좀 얌전해 질지도 모르지. 트리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트리가 사라진 후. 클라인의 처소에 음식이 담긴 웨건을 끌고 갈 하인은 이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 채 휘파람을 불며 회랑을 걸어갔다. 그때.

16551083496008.jpg“잠시만!”

누군가 그를 부르더니 달려왔다. 하인이 멈춰서서 보니, 라나문의 방에 웨건을 가져가야 할 동료 하인이었다.

16551083496008.jpg“왜 그러나?”

하인이 묻자, 동료 하인은 정말로 미안해하며 부탁했다.

16551083496008.jpg“저기, 음식 한 종류만 바꿔주면 안 될까? 거기 수프랑 이 수프랑.”

16551083496008.jpg“아니 왜?”

클라인에게 갈 하인이 황당해하며 묻자 라나문에게 갈 하인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16551083496008.jpg“라나문 님은 편식이 엄청 심하셔서. 완두콩을 싫어해. 근데 이거 완두콩 수프야. 덱스 자식, 내가 라나문 님은 완두콩 안 드신다고 했는데 또 완두콩 수프로 끓였어. 분명 그놈 다른 후궁들 중 누구한테 돈 받고서 저러는 게 분명해.”

클라인에게 갈 하인은 쯔쯔 혀를 차고서 자신의 웨건에 놓인 송이버섯 수프를 라나문 그릇에 놓아주었다.

16551083496008.jpg“알았어. 윗사람들이 성질부려봐야 우리만 고생이니, 우리끼린 도와야지.”

16551083496008.jpg“고마워. 진짜 고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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