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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얽히고설킨 (59/367)

59화. 얽히고설킨2020.09.20.

16551082843072.jpg“재미있군.”

마차에 탄 사람은 라틸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흥미로운 물건을 보듯 라틸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시선은 사람을 보는 시선이 아니어서, 타시르는 만약의 경우 자신이 언제라도 난입할 수 있도록 경계했다. 상단을 운영하면서 저런 자들은 많이 보아 왔기에 알 수 있었다. 저런 자들. 저런 눈으로 남을 보는 자들은 아주 위험하단 걸.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관자놀이에 칼이 닿았는데도 웃고 있던 가면 남자가 손가락으로 라틸을 가리키더니 물었다.

16551082843072.jpg“내 목숨값이 이 지도라면 네 목숨값은 얼마지?”

타시르는 라틸이 화를 낼 거라 여겼으나, 라틸은 필요 없는 데는 화를 내지도 않는지 덤덤하게 다시 요구할 뿐이었다.

16551082843086.png“지도 내놔.”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히려 더욱 짙게 웃더니, 자기 입술을 엄지로 쓸며 중얼거렸다.

16551082843072.jpg“오만하게 날뛰는 짐승은 잡아서 길들이는 재미가 있지.”

그러나 가면을 쓴 남자가 헛소리를 뱉는 순간. 라틸이 손에 쥔 단도를 휙 돌려 잡더니 눈 깜짝할 사이 단도 끝으로 남자의 머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머리에서 딱 소리가 나자, 거만하게 웃고 있던 남자의 입매가 굳었다. 방금 뭐가 지나갔지, 하는 얼굴로. 타시르는 기겁해서 라틸에게 작게 소리쳤다.

16551082843102.png“왜 말보다 손이 자꾸 먼저 나갑니까!”

불법 경매장에서는 멋대로 날뛰어도 된다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절대로 아니었다. 이렇게 큰 규모의 불법 경매장일수록 그 경매장을 지배하는 조직의 세력이 강해서, 누군가 자기 관할에서 멋대로 구는 걸 절대로 그냥 두고보지 않았다. 그런데 라틸이 대놓고 폭력을 써대니, 이 경매장의 주인이 나타날까 봐 겁이 났다. 무서워서는 아니다. 하지만 라틸은 감추어야 할 게 많지 않은가.

16551082843086.png“어쩔 수 없어. 내 인내심은 합법적인 이들에게만 발휘되니까.”

타시르는 ‘그 양심이랑 인내심이 실존하긴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우선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라틸은 한 번 더 남자의 머리를 쳐버렸다. 그래도 남자가 기절하지 않고 일어서려 하자, 라틸은 이번엔 더 큰 힘을 실어 남자의 머리를 빡 쳐버렸다. 손에 쥔 단도는 조금 거들었을 뿐, 사실상 주먹뼈로 내려친 거나 다름없었다. 현직 황제 전직 황녀라 여유롭게 성장했을텐데. 지독할 정도의 집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가면 쓴 남자가 기절하자, 남자의 지시 때문인지 근처에 조금 거리를 둔 채 상황을 지켜보던 부하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대체 무슨 명령을 들었기에 제 주인이 몇 대나 맞을 동안 보고만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16551082843086.png“다 쫓아내.”

그러나 라틸은 간단하고 깔끔하게 타시르에게 지시하더니, 남자의 자켓 안으로 손을 넣어 지도를 찾기 시작했다. 몇이 달려들던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태도. 하지만 그 안에는 타시르에 대한 신뢰감이 가득했다. 저렇게 나오면 뜻을 따를 수밖에. 결국 타시르는 한숨을 내쉬고서 최대한 빠른 속도로 부하들을 처리해 나갔다. 이자들이 문제가 아닌데. 진짜 문제는 이 소란을 듣고 올 경매장 관리들인데. 어쩔 수 없었다. 저 마차 안 남자와 라틸이 둘이서 티격태격하는 거야 적당히 넘어가 준다지만, 이 정도로 싸워대면 분명 관리들이 올 텐데. 이 와중에 안 싸우고 있을 수도 없지 않는가.

16551082843102.png“멀었습니까?”

그래도 좀 조급한 마음이 들긴 해서, 검을 들고 휘둘러 오는 상대의 손목을 걷어차며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16551082843102.png“여보?”

이 와중에 폐하라 부를 순 없으니 은근슬쩍 남편이 아내 부르듯 황제를 불러본 타시르는, 은근슬쩍 여보라 부르고는 자기가 좋아서 히죽 웃다가,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돌려차기로 다른 적을 눕히며 확 마차 쪽을 돌아보았다.

16551082843102.png“!”

폐하가 왜 거기 들어가 계십니까! 그러나 몸을 돌리자마자 입 밖으로 폐하 소리가 절로 나올 뻔했다. 창문 너머로 손만 넣어서 가면 남자의 옷을 뒤적거리던 라틸이, 어느새 다리를 버둥거리며 창문을 넘어가고 있어서. 심지어 깔끔하게 넘어가지도 못하고 창문에 걸려서 발이 붕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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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082843086.png“밀어줘!”

이쪽의 놀란 속도 모른 채 라틸이 요구하자, 타시르는 일단 등으로 라틸의 다리를 밀어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은 핑핑 돌았다. 이게 뭐지? 왜 폐하가 저 안에 타는 거지?

16551082843102.png“흐아압!”

창을 든 적에게서 창을 빼앗아, 그 창의 손잡이 부분으로 적의 폐를 찌른 다음 다시 창을 빼앗아 건너편의 적을 내려친 타시르는, 잠시 주위가 빈 틈에 재빨리 마차 창문을 붙잡고 라틸을 살폈다. 대체 왜 저 안까지 들어간 건진 모르겠지만…….

16551082843102.png“여보! 가야 합니다!”

라틸은 아까는 여보 소리를 못 들었는지, 이제야 ‘여보’ 소리에 확 고개를 들며 부리부리하게 타시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비명을 지른 건 라틸이 아니라 타시르였다.

16551082843102.png“으악! 뭐 합니까!”

16551082843086.png“바지 벗기고 있어!”

16551082843102.png“그걸 왜 벗겨요!”

16551082843086.png“상의에 없어! 바지 안에 숨긴 거 같아!”

16551082843102.png“아니, 왜 벗겨도 좋단 제 바지는 안 벗기시고 외간 남자 바지를 벗깁니까!”

16551082843086.png“네 바지 안엔 내가 찾는 게 없잖아!”

16551082843102.png“아직 안 보셨는데 왜 단정하십니까!”

16551082843086.png“네 거기에 보물지도라도 있단 거야?!”

16551082843102.png“지도는 없지만 보물은, 아니, 젠장!”

뒤에서 내려치려는 적의 복부를 팔꿈치로 내려친 타시르는 한 번 더 짧게 욕설을 뱉었다.

16551082843086.png“마약아! 나한테 욕했느냐?”

16551082843102.png“여보한테 한 게 아니라 저쪽에…… 제기랄!”

16551082843086.png“나한테 한 거 같은데?!”

16551082843102.png“경매장 관리들이 옵니다!”

타시르는 동시에 달려드는 적 두 명을 빠르게 처리하고서, 얼른 마부석으로 뛰어들어 고삐를 잡았다.

16551082843102.png“이럇!”

고삐를 찰싹 내려치자, 멍하게 서 있던 말들이 놀라 달리기 시작했다. 라틸은 가면 쓴 남자의 바지에서 고지도를 찾다가, 갑자기 마차가 앞으로 움직이자 몸이 한쪽으로 쏠리며 칸막이에 머리를 박았다.

16551082843086.png“타시르!”

16551082843102.png“경매장 관리들이 옵니다. 걸리면 좋지 않으니 우선 자리를 피하겠습니다.”

경매장 관리가 온다고? 라틸은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가, 말을 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쫓아오는 걸 발견했다. 그중 누군가가 활을 쏘았는지 날카로운 게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16551082843086.png“이크.”

얼른 창문 안으로 머리를 쏙 집어넣은 라틸은 좀 더 속도를 내어서 가면 쓴 남자의 옷을 여기저기 다시 뒤졌다.

16551082843086.png“젠장. 어디다 숨겨둔 거야?”

그 순간. 기절해 있는 줄 알았던 남자가 라틸의 손목을 콱 움켜쥐었다. 놀라 고개를 들자, 그가 라틸을 ‘이건 뭐지?’ 하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당황스러워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어색하게 당황스러워하는 눈빛으로.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라틸이 들고 있는 그의 바지로 향했다.

16551082843072.jpg“!”

  * * *

16551082936287.png“그래. 폐하께서 급하게 달려간 상대가 대신관이었다고.”

게스타가 힘없이 중얼거리자, 그의 시종 겸 호위인 트리는 자기가 다 울적해졌다.

16551082843072.jpg“너무 심려치 마세요, 도련님.”

하지만 게스타의 표정에서 울적한 기미는 가시지 않았다. 트리는 괜히 자기가 다 마음이 아파와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힘없이 나무 앞에 쪼그려 앉아 시든 풀잎 꽁다리를 손톱으로 뜯었다.

16551082843072.jpg“폐하도 너무하세요. 다른 후궁들은 다 권력이나 부나 가문 때문에 온 거라고요. 순수하게 폐하를 사랑해서 온 건 우리 도련님 밖에 없는데. 어떻게 도련님을 이렇게 방치하실 수가 있죠?”

16551082936287.png“바쁘시잖아.”

16551082843072.jpg“바쁘시긴요! 오늘도 타시르 님이랑 둘이서 놀러 나가셨다던데요!”

저도 모르게 버럭 외친 트리는 게스타의 표정을 확인하고서 고개를 푸욱 숙였다.

16551082843072.jpg“죄송해요. 도련님이야말로 제일 속상하실 텐데.”

이윽고 트리는 표정이 험악해져서 씩씩거렸다.

16551082843072.jpg“타시르 그놈은 간사하고 교활한 여우처럼 생겼는데, 대체 어디가 그리 이쁘다고 끼고 다니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다가 트리는 게스타가 계속 손 안에서 굴리는 약병을 보고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16551082843072.jpg“그게 뭐예요, 도련님?”

16551082936287.png“어?”

게스타는 트리의 질문에 어깨를 움찔하더니 얼굴이 벌게져서 “아버지가…….” 하고 중얼거렸다.

16551082843072.jpg“재상님이 왜요?”

트리가 재차 묻자, 게스타는 괜히 입술을 혼자 잘근잘근 씹었다.

16551082843072.jpg“도련님? 혹시 어제 재상님이 보내주신 물품 중에 있던 거예요?”

어제, 재상과 아트락시 공작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나란히 거대한 상자 다섯 개를 꽉꽉 채워서 물품들을 들여왔다. 게스타가 천천히 정리하자고 해서 아직 그 중 두 개 밖에 정리하지 못했는데. 혹시 거기 어디에 있던 걸까? 게스타는 시선을 내리깔고서 머뭇거리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16551082936287.png“남자를 불능으로 만드는 약이래.”

트리는 멀뚱히 대답을 기다리다가 화들짝 놀라서 손을 허공에 대고 휘저었다.

16551082843072.jpg“으악, 그런 위험한 걸 왜 손에 꽁꽁 쥐고 계세요! 저기 치워두세요!”

16551082936287.png“병 안에 있잖아.”

16551082843072.jpg“그래도요! 위험해요!”

황급히 게스타의 손에서 약병을 뺏어간 트리는 그걸 저만치 놓아두더니, 얼른 손수건을 꺼내 게스타의 손을 박박 닦아주었다. 하지만 놀란 마음이 진정되고 나자, 저 무시무시한 물건에 대해 호기심이 슬며시 올라왔다.

16551082843072.jpg“영구적인 거예요 아니면 일시적인 거예요?”

16551082936287.png“일시적. 한 1년 정도 효과가 간다고 들었어.”

16551082843072.jpg“씨를 말리는 건가요? 아니면 아예…….”

16551082936287.png“아예 기능을 못 한대.”

짧게 설명을 마친 게스타는 겁먹은 듯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16551082936287.png“왜 이런 걸 보내신 건지 모르겠어. 하지만 어떻게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잘못 버렸다가 괜한 사람이 먹으면 어쩌지?”

트리는 속으로 로르드 재상이 너무 무심한 행동을 저질렀다고 탓했다. 궁중 암투를 위해 보낸 물품 같은데. 저런 걸 저 순둥이 도련님한테 보내면 어떡한단 말인가. 차라리 자신에게 주었더라면 적당히 들고 다니다가 쓸모를 찾을 수 있을 텐데…….

16551082843072.jpg‘그래, 그러면 되겠네!’

생각을 하자마자 트리는 얼른 저만치 놓아둔 그 약병을 손수건으로 돌돌 싸 들고 게스타에게 물었다.

16551082843072.jpg“도련님. 이거 저 주실래요?”

16551082936287.png“네가 그걸 왜?”

게스타가 놀라 묻자 트리는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16551082843072.jpg“도련님 말씀처럼 이런 건 함부로 버리면 안 되잖아요. 제가 잘 가지고 다니다가 적당한 곳에 ‘버릴’게요.”

예를 들어 대신관의 입 속이라거나 클라인 황자의 배 속이라거나. 트리는 뒷말은 굳이 내뱉지 않았다. 마음 여린 그의 도련님은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기겁해서 말릴 테니. 다행히 게스타는 트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듯 환하게 웃으면서 안도했다.

16551082936287.png“그러면 되겠다. 계속 걱정했거든. 누가 먹으면 안 되니까.”

16551082843072.jpg“그럼요.”

트리는 덩달아 웃고서 돌돌 싼 약을 얼른 옷 안 주머니에 넣었다. * * * 그 시각. 성기사단 백화랑술의 단장 백화는 교통편이 좋지 않은 어느 작은 마을에 흑마법사로 추정되는 이가 잡혔단 이야기를 듣고 생각에 잠겨 하렘 안을 서성거렸다. 라트라실 황제는 궁전에 흑마법사 무리가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눈치던데. 이 이야기를 전해야 할지 자기 선에서 해결해야 할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아서였다. 그러던 중 백화는 누군가를 발견하고서 우뚝 멈추어섰다.

16551082843072.jpg‘저 사람?’

그곳에 있는 건 화려하게 아름다운 남자였다. 복장을 보니 후궁 같은. 하지만 백화가 멈추어 선건 남자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16551082843072.jpg‘예전에 분명 신전에서……?’

진짜인지 아닌지 진위여부조차 불분명해 졌으나, 500년 주기로 어둠의 세력들을 끌고 부활하는 로드를 막기 위해 같은 시기에 태어나는 대적자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대적자가 태어나는 날과 시간이 예언으로 남아 있어서, 신전에서 그 시각에 태어난 여아와 남아를 모두 다 신전에 보내라 한 적이 한 번 있었다. 그러나 막상 아이들을 불러 모으고 나니 문제가 생겼다. 데려오긴 했는데, 대체 누가 대적자인 건지 알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신전의 힘이 강했더라면 어찌어찌 알 방법을 찾을 때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있을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 예언이 생겨날 때와 지금은 신전의 위상이 전혀 달랐기에, 신전에서는 그 아이들의 대다수를 3개월 이상 붙잡아두지 못하고 모두 돌려보내야만 했다. 저 남자는 그때 신전에 왔던 그 아이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남들은 3개월을 채우고 나갔던 신전을 혼자만 한 달 있다가 나갔던 소년이기도 했다.

16551082843072.jpg‘성격이 진짜 재수 없었지.’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저 얼굴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때. 마치 자기 얘기인 걸 듣기라도 한 듯 그 아름다운 후궁이 힐긋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16551082843072.jpg‘이름도 꼭 자기 같았…… 아아. 그래.’

백화는 저 후궁의 이름을 떠올렸다. 라나문. 아트락시 가문의 장남 라나문.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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