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그대가 왜 여기에2020.09.06.
“얼른 옷 입어.” 하고 말하려는데, 목소리가 기도 어디에서 콱 막혔다.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네.’
라틸은 클라인의 매끄러워 보이는 피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촉감이 궁금해졌다. 만져보면 손이 살을 타고 주르륵 내려갈 것 같은데. 아니, 저렇게 대놓고 확인해 보라니 확인해도 될 것 같긴 한데. 만지는 순간 뭔가 ‘황권을 안정시킬 때까진 절대로 동침하지 않는다’는 선이 깨질 것 같아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폐하.”
하지만 클라인은 아예 작정을 하고서 부른 건지, 몸을 야하게 뒤척이다가 상체를 일으켜면서 라틸의 이름까지 축축하게 불렀다.
‘이런 건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끈적이면서도 뇌쇄적인 미소에 라틸은 눈을 감고 한숨을 뱉으며 명령했다.
“옷 입어, 클라인.”
그러나 클라인은 이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사실은 마음 하나 얻어보자고 바닥에 이 꼴로 누울 때부터 그는 이미 자존심이 많이 상한 상태였다. 그런데 라틸이 한심하다는 듯 눈까지 감고서 지시하자, 클라인은 가슴 어딘가가 왈칵 구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라틸은 그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눈을 감은 것이지만, 클라인은 거기까진 알아채지 못했다. 결국 그는 냉랭한 표정을 하고서 얼른 바닥에서 일어났다.
‘뭐야?’
누워서 꿈틀대던 클라인이, 일어나라곤 했지만 정말로 1초 컷으로 벌떡 일어나자 오히려 라틸도 눈살을 찌푸렸다. 게다가 아까는 한껏 풀어져 있던 클라인의 표정이 그 사이에 라나문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심지어 평소와 달리 아무 수다도 떨지 않고 조용히 단추만 착착착 채운다. 그러고는 라틸을 힐긋 보다가 말없이 밖으로 나가 버리자, 라틸은 순식간에 남의 방에 혼자 남게 되었다.
‘왜 저래?’
홀로 남겨진 라틸은 어이가 없어서 닫힌 방문을 보았으나, 이미 클라인은 사라져버린 뒤였다.
* * * 카지노 딜러의 정체가 대신관으로 밝혀지고, 성기사단 백화랑술이 하렘으로 들어와 대신관의 호위를 서게 되고, 꾀병을 부려 라틸을 유혹하는 데 실패한 클라인은 삐져서 라틸을 피하게 되었지만, 이후로는 며칠 내내 아무 사건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과 귀족들이 라틸의 국혼 정책을 두고 좀 대단하신 분이라 오해를 하긴 했으나, 굳이 풀 필요 없는 오해라 여겨 라틸은 그들의 착각을 방치했다. 다행히 흑마법사들에 관련된 일도 더 터지진 않아서, 라틸은 국무에만 충실할 수 있었다.
“대신관님. 원래 폐하께선 이렇게 하렘에 잘 안 오십니까?”
“뭔가 계책을 세워서 폐하를 모셔와야 하는 게 아닐까요?”
치열한 속세의 전투를 각오하고 온 성기사들에게는 몹시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폐하는 때가 되면 오시겠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폐하께서 언제 오셔도 부푼 근육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운동하는 것이다. 자, 여러분, 운동하자.”
하지만 대신관은 대신관 다운 자애로운 모습으로 성기사들을 다독여 하렘 내부 정원을 아침 저녁으로 50바퀴씩 뛰어다녔다. 그러기를 보름가량. 클라인이 아직까지도 라틸을 피해 다니자, 클라인을 싫어하는 시종장조차 라틸이 황자를 좀 달래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걱정될 즈음.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대신관을 후궁으로 받아들인 부작용이 나타났다.
“윌랑에서 사절단을?”
“예, 폐하. 폐하께서 대신관을 맞았단 이야기를 들은 모양입니다.”
라틸이 대신관을 맞이했단 소문을 듣자마자 옆나라 윌랑에서 사절단을 보내온 것이다.
“곤란한데.”
윌랑은 대대로 우호적인 국가였으나, 철저하게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나라였다. 즉, 윌랑이 우호적인 국가일 수 있던 건 타리움이 강력하기 때문이었다. 윌랑은 타리움과 몇 세대를 친하게 지내면서도 늘 뒤통수를 칠 틈을 엿보았기에, 라틸은 이 시기에 윌랑에서 사절단을 보내오자 좀 신경이 쓰였다.
“폐하께서는 무사히 즉위해 좋은 치세를 보여주고 계시고, 국민들 역시 폐하의 통치를 마음에 들어합니다. 타리움은 강력하고요. 두려울 게 무엇입니까.”
서넛은 태평하게 말했으나, 라틸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내가 대신관을 후궁으로 둔 일 때문에, 다른 나라들이 다같이 우리를 적대할까 봐 그러는 겁니다, 서넛 경.”
“다같이 적대한다 해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죠. 틀라가 어디선가 몸을 웅크리고 있지 않다면.”
“!”
라틸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사흘 전에 들었던 보고를 떠올리고서 시종장에게 물었다.
“아. 카리센에서도 사절단이 오고 있다 했죠?”
“예, 폐하.”
“그러면 두 나라 사절단이 비슷하게 도착하도록 조금 손을 써 봐요.”
“예?”
“두 나라 사절단을 알현실에서 함께 맞이해야겠습니다. 거기에 클라인을 데리고 나가면, 카리센과 우리나라가 사이가 좋아 보일 테고. 윌랑에선 주위 다른 나라들을 흔들어봤자 소용없단 생각을 하게 되겠죠. 그쪽은 틀라 관련된 일에 대해 모를 테니.”
“좋은 생각이십니다!”
라틸의 말에 시종장은 감탄하면서 라틸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얼른 밖으로 나갔다. 라틸은 다른 비서에게도 지시했다.
“넌 클라인 황자를 찾아가서, 카리센의 사절단이 올 테니 잘 차려입고 이쪽으로 오라 전해라.”
“예, 폐하.”
그러나 잠시 후. 비서는 침울한 얼굴을 하고서 홀로 돌아와 보고했다.
“폐하. 황자님께서 몸이 안 좋아 알현에 함께할 수 없다 하십니다.”
* * * 라틸은 다른 사람을 보내는 대신, 사절단들이 언제쯤 도착할지 확인을 한 다음 자신이 직접 하렘으로 찾아갔다.
“클라인은?”
“방 안에 계십니다.”
라틸이 방 안에 나타나자, 호위가 깜짝 놀라 안쪽에 대고 작게 소리쳤다.
“황자님.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안에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호위는 얼굴이 파래져서 라틸의 눈치를 살폈다.
“황자님.”
호위가 거듭 방문에 대고 외치자, 라틸은 손을 들어 올려서 그를 말렸다.
“됐다.”
그러고는 호위가 무어라 할 틈도 없이 그냥 문을 잡고 열어버린 다음, 중간 복도를 지나 침실까지 한 번에 들어갔다. 아치문에 달린 커튼을 확 열어 젖히고서 팔짱을 끼고 쳐다보자, 클라인이 창가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함부로 방 안에 불쑥불쑥. 그러시는 거 아닙니다.”
클라인은 창틀에 이마를 대고 있었는데, 라틸이 들어오자 벌떡 일어나며 항의했다. 라틸은 클라인의 이마에 빨갛게 자국이 난 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얼마나 오래 저러고 있던 거야?’
말을 라틸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것처럼 하는데. 사실은 방 안에서 계속 창밖을 보고 있던 듯했다. 그렇다면 라틸이 오는 것도 다 지켜보고 있었을 터. 클라인도 라틸이 자기 이마를 쳐다보자. 들켰단 생각에 고개를 돌리며 괜히 이마를 문질렀다.
“클라인.”
보름 내내 라틸을 피해다닌 것치고는 클라인이 화가 많이 난 것 같지 않자,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그에게 다가가 팔을 잡았다.
“왜 이렇게 치졸해?”
“치졸…… 와. 지금 제게 치졸하다 하셨습니까?”
“너네 나라 사절단이 와서 인사 좀 하라는데 그게 싫어?”
“제가 왜 싫다 하는진 아실 텐데요.”
“모르겠어. 난 치졸했던 적이 없어서, 소인배의 마음은 짐작이 안 가.”
“소인배……!”
클라인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자, 라틸은 턱을 눌러 그의 입을 닫아주며 일부로 또 살살 자존심을 긁었다.
“며칠 전에 네가 바닥에 누워있을 때. 내가 그냥 가버려서 그래?”
“!”
“어쩔 수 없었어. 아프단 소리에 걱정돼서 달려갔는데, 아프긴커녕 그러고 있었잖아. 화가 날 수밖에 없지. 얼마나 걱정했는데.”
“오죽하면 제가 그러고 있었겠습니까!”
“뭐가 오죽했는데?”
“그야……!”
라틸이 ‘난 아무것도 몰라’ 하는 주특기 표정으로 바라보자, 클라인은 입을 뻐끔거렸다. 클라인은 라틸이 자신을 연모한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카지노 딜러가 나타나면서 좀 기가 죽었지만, 알고 보니 그자는 대신관이라서 라틸이 챙겨준 거였지 않나. 그래서 다시 자신감이 좀 붙었는데, 그날 라틸이 매혹적으로 누워있던 자신을 보고 쌩 가버리자 자존심이 아주 조각조각 박살이 났다. 하지만 라틸에게 이런 걸 따지자니, 자신이 라틸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자존심이 상했다.
“말을 해, 클라인. 말을 안 하면 난 못 알아들어.”
라틸이 다시 한 번 더 ‘난 아무것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웃자, 클라인은 어물어물거리다가 결국 입을 꾹 다물고 라틸의 어깨에 자기 이마를 기댔다. 어, 이제 다 풀렸나보네. 하지만 라틸은 그런 클라인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계산적으로 생각하고는 친절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자, 더 긴 얘기는 나중에 둘이서 여유롭게 하고. 일단 좀 꾸미자. 번쩍번쩍하게.”
“꾸며서 뭐 하실 건데요.”
“카리센에서 사절단이 온대. 네가 잘 지내고 있단 걸 보여줘야 할 거 아냐. 고향 사람들인데 안 보고 싶어?”
* * * 어찌어찌 클라인을 달랜 라틸은 그를 반듯하게 꾸며서 알현실에 데리고 가는 데 성공했다. 클라인은 라틸이 자신을 챙겨주자 그새 또 기분이 풀려서 좋아하고, 라틸과 손을 잡고서 어깨를 당당하게 폈다. 그걸 본 라틸은 덩달아 웃으면서 생각했다.
‘얘는 몸은 황궁에 두고 정신은 저기 깊은 산골에서 맑은 물만 보며 자랐나…….’
하지만 솔직한 모습이 귀엽긴 해서, 라틸은 몇 번이나 다짐했다가 까먹은 내용을 이번에도 한 번 더 다짐했다.
‘순수한 구석이 있는 애니까 잘 대해 줘야지. 후궁 중에선 제일 믿을 만하잖아.’
어쨌든 라틸의 계획은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다. 알현실에서 카리센의 사절단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윌랑의 사절단은, 라틸이 클라인을 데리고 나타나고, 카리센의 사절단은 그 모습을 보고 반가워하자 표정들이 다 떨떠름해진 것이다.
‘그러게 왜들 머리를 굴리고 그래?’
그걸 본 라틸은 속으로 낄낄 웃으면서 괜히 더 클라인을 잘 챙기는 척했다. 그러나 라틸의 입장에서 일이 잘 풀려갈 즈음.
“국혼을 이용한 정책은 당장 폐하의 대에선 편리하지만, 그 아래 대로 내려가면 부작용이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윌랑의 사절단 하나가 돌연 입을 열었다.
“카리센의 황자며 대신관, 공신의 아들까지. 괜찮은 이들을 죄다 데려가셨다가 나중에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 목소리는 심지어 조금 조롱조여서,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순식간에 알현실 안의 분위기가 싸해질 정도였다.
“그렇군. 윌랑에서도 그 비슷한 일로 트러블이 난 적이 있었지. 걱정해주어서 고맙군. 윌랑에서의 일을 반면교사로 삼도록 하지.”
하지만 그 말에 라틸이 웃으면서 공격을 돌려주자, 이번에는 윌랑의 사절단 쪽이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러나 이쯤해서 넘어가면 좋을 것을. 라틸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던 그 사신은 더욱 아슬아슬한 질문을 던졌다.
“혼인을 이용해 정치를 펼칠 분이라면, 그냥 직접 어디 다른 나라의 황후 자리나 왕비 자리로 가셨으면 가장 좋았을 것을요. 그러면 직접 폐하의 손으로 형제를 죽이지 않으셔도 됐을 텐데, 아쉽습니다.”
그 말에는 윌랑에서 온 사신들도 다들 깜짝 놀라 어깨를 흠칫 떨었다. 미리 준비된 도발이 아닌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들 그 사신을 말리지 못하는 게 구도가 좀 이상했다.
‘사절단 책임자라고 나선 백작보다, 저 말 재수없게 하는 사신이 실제로는 더 지위가 높은가본데?’
어쨌든 저 거만하기 짝이 없는 사절단에게 사절단으로 숨어들어 왔으면 실제 지위가 어떻든 공손히 굴라고 돌려 말하려는 순간. 지금까지 내내 뒤쪽에서 조용히 있던 카리센의 사신 하나가 푹 웃음을 터트렸다. 큰 웃음소리는 아니었으나, 원체 주위가 싸늘하고 조용하다 보니 모두가 들을 수 있는 크기였다. 덕택에 재수없는 말을 한 윌랑의 사신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눈살을 구기고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자, 내내 조용히 있던 카리센의 사신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아, 실례했습니다. 그대의 모습이 꼭 신 포도를 두고 악담을 퍼붓는 망아지 같아서.”
그 말에 윌랑의 사신이 표정을 굳혔으나, 카리센의 사신은 거기서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하렘에 재능 있는 청년들을 모아두는 국혼도 나라에 힘이 있어야 가능한 거지요. 윌랑은 하렘에 사람 하나 보내는 것조차 받아달라 사정사정 해야 하는 나라이니. 감히 라트라실 폐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지도.”
그 노골적인 조롱에 카리센의 사신들까지 히죽히죽 웃어대자, 윌랑의 사신들은 모욕감에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카리센의 황자가 후궁으로 가 있다지만 후궁 출신 황자일 뿐이니, 카리센에서 대놓고 타리움을 두둔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한 눈치였다. 얼굴을 가린 말단 사신의 말에, 타리움의 대신들도 같이 피식피식 웃으면서 윌랑의 사신들을 아래위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라틸은 다른 이들처럼 웃을 수 없었다. 아니, 라틸의 표정은 오히려 윌랑의 사절단과 비슷했다. 그럴 수밖에.
‘저 목소리…….’
라틸은 마른침을 삼키고서 망토에 달린 모자를 깊게 눌러써 하관만 드러낸 카리센의 말단 사신을 흔들리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저 사신.
‘하이신스다.’
하이신스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