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공개적으로 소문나게 생겼다2020.08.30.
“라나문한테서 사악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대신관이 가리켠 사람이 타시르나 칼라인이었다면 이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라나문이라니? 라나문은 아트락시 공작가의 장남이라 신분이 확실한데다 성장 과정 역시 투명했다. 그가 사교계에 잘 드나들지 않은 건 맞지만, 공작가를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얼핏얼핏 라나문이 커 가는 모습을 다 지켜보았다. 그런데 사악한 기운? 그런 걸 누구보다 혐오하면 혐오했지, 절대로 타락할 사람 같지는 않은데?
“확실하냐?”
라틸이 깜짝 놀라 작게 되묻자, 대신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기운은 맑고 깨끗합니다. 하지만 저 눈빛. 절 얼려죽일 것 같습니다.”
“…….”
라틸은 순간 대신관의 이마를 꽁 때릴 뻔했다.
“쟨 나한테도 그래.”
“그렇습니까?”
“그리고 헷갈리게 좀 하지 마. 놀랐잖아.”
“폐하께서는 저 청년을 많이 믿으시나 보군요.”
“믿을 수밖에 없는 신분이니까.”
라틸의 단호한 대답에 대신관의 눈매가 재밌다는 듯 휘어졌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할 걸 탐하기도 하지만, 더욱 많이 가지기 위해 탐하기도 합니다.”
어딘가 뉘앙스가 묘한 말이었다. 이에 라틸이 무슨 뜻이냐고 되물으려는 찰나. 이쪽에서 소란을 피워대자 라틸을 발견한 라나문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폐하.”
이어서 라나문은 대신관 쪽도 쳐다는 보았으나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라면 적당히 같이 무시하고 넘어갈 것을.
“아름다운 얼굴에 햇볕이 내려앉으니 참으로 반짝반짝해 보입니다, 라나문. 신께서 오늘 당신의 하루에 축복을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
속세에 찌든 대신관도 대신관은 대신관인지, 그는 자신을 무시하는 라나문에게 밝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대놓고 진짜 대신관처럼.
“…….”
그런 대신관을 라나문은 내리깔듯 내려다보다가 대답 대신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가버렸다. 두 번이나 무시당해도 대신관은 머쓱하게 웃으면서 “까칠한 분이네요.”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으나, 라틸은 라나문이 멀어지자마자 대신관을 꾸짖었다.
“제발 좀 신관 티를 안 내면 안 될까?”
“신관 티가 무엇입니까?”
“누가 널 무시하는데 거기에 대놓고 웃으면서 신이 어쩌구 축복이 어쩌구 하는 거.”
라틸이 단호하게 말하고 팔짱을 끼자 대신관은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휠체어 손잡이를 다시 잡았다.
“이동할게.”
그때. 저만치 가는가 싶던 라나문이 다시 이쪽으로 돌아왔다. 자이신과 오래 마주하기 싫어서 가버리려 했으나, 혼자 걸어가고 있자니 문득 ‘내가 왜 피하지?’ 하는 반발심에 불쾌해져서 돌아온 것이다. 게다가 걸어오면서 보니 라틸과 자이신이 사이가 꽤 좋아 보여서 더욱 기분이 나빠졌고, 다쳤단 핑계로 라틸과 단둘이 산책 중인 자이신이 아주 멀쩡해 보이기까지 하자 의심까지 들었다.
“진짜 아픈 게 맞나?”
결국 가까이로 온 라나문은 대놓고 대신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넌 또 그거 시비걸려 돌아왔냐…….’
라틸은 노골적인 라나문의 냉대에 한숨을 내쉬고서 대신관이 또 대신관 같은 말을 하기 전에 자신이 나서려 했다. 그러나 라틸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라틸에게 ‘신관 티를 내지마’란 말을 들은 대신관이 갑자기 푸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난데없는 우렁찬 웃음소리에 라틸은 움찔해서 대신관을 쳐다보았다. 라나문 역시 상대가 ‘꾀병 아니냐’는 질문에 난데없이 웃어대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신관은 신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그가 상대한 카지노 손님들이 장난삼아 상상해 들려주던, ‘사이 나쁜 후궁끼리 할 법한 대사’를 했다.
“폐하는 내 거다. 반경 3m 내로 들어오지 마라. 폐하를 노리면 내가 죽인다.”
라틸은 ‘얘 진짜 아파, 라나문.’ 하고 말하려다가 당황해서 확 대신관을 쳐다보았다. 뭐라고?
“나는 독점욕의 화신이다. 감히 그 반짝거리는 얼굴로 폐하를 홀리려 하지 마라. 폐하는 너처럼 작은 근육엔 관심이 없으니까!”
‘아니, 아무리 대신관처럼 말하지 말랬다지만 이건 또 너무 나갔잖아?!’
라틸은 대신관의 입을 막아 버렸으나, 라나문은 이미 기분이 몹시 상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 괜찮습니다, 폐하. 저 카지노 딜러가 뭐라 말하는지 들어보고 싶으니까요.”
라틸이 한숨을 내쉬면서 손을 내리자, 라나문은 한 발자국 오히려 더 대신관 앞으로 다가오더니 차갑게 그를 내려다보며 빈정거렸다.
“아까는 신의 축복을 빌어주겠다더니. 10분도 안 되어 말이 바뀌는군, 자이신.”
“신의 축복은 신의 곁에 가야 받을 수 있는 법……. 지름길로 보내주겠다.”
이어 대신관이 고요하게 중얼거리며 휠체어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자, 라틸은 기겁해서 그의 어깨를 팍 내리쳤다.
“앉아!”
“아.”
자신이 환자 행세 중이란 걸 상기한 대신관은 얼른 도로 앉았으나, 이미 라나문은 아주 하찮아 죽겠다는 듯 대신관을 보고 있었다.
“폐하께선 백치미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라나문이 그 상태로 중얼거리자, 라틸은 라나문을 달래기 위해서 미소를 띠고서 라나문의 등을 두드렸다.
“술 못 마시는 남자도 좋아해.”
그 말에 라나문의 표정이 조금 풀리려는 찰나. 대신관이 눈치 없이 또 끼어들며 웃었다.
“그거 딱 저로군요, 폐하.”
‘가만히 좀 있어 자식아! 넌 진짜 후궁도 아니잖아!’
라틸이 황당해서 째려보았으나 대신관은 기쁜 얼굴로 좋아 외쳤다.
“제가 딱 폐하의 이상형인 모양입니다.”
라나문의 표정에서 약간 남아 있던 온기마저 빠져나갔다. 자이신을 연적이랍시고 상대하는 자체가 한심하게 여겨진 듯했다. 이어서 라틸을 보는 라나문의 시선은 ‘저런 놈이 취향이시라니.’에 가까웠다. 결국 라나문이 더 말 섞기도 싫은지 또 라틸에게만 작별 인사를 건네고 가버리자, 대신관이 웃으면서 라틸을 달랬다.
“저자에게선 사악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폐하.”
라틸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라나문이 완전히 멀어지기를, 그리고 주위에 사람이 없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대신관에게 다그쳤다.
“내가 대신관처럼 말하지 말랬지, 어디 뒷골목 깡패 두목처럼 말하랬어?”
“전 폐하에 대한 독점욕을 드러낸 겁니다, 폐하.”
“그러지 마. 사람들이 널 이상하게 보잖아!”
“전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너한테 반한 척해야 하는 내가 안 괜찮다고!”
* * * 라틸이 대신관의 부담스러운 독점욕을 두고서 잔소리를 퍼붓는 사이. 카리센의 황후인 아이니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있었다.
“레들러가 자살했다니?”
그녀의 친구이자 가장 소중한 시녀 레들러가 집에 쉬러 가고 싶다며 궁전을 나섰는데, 자살했단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아이니는 충격을 받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난데없어서.
“왜 갑자기? 잘 지냈잖아? 고민도 없었고?”
“고민을 말하지 않고 밝게 지내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다른 사람들도 아이니만큼 충격을 받았으나 장례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어서, 다음날에는 어느새 장례식을 진행하게 되었다. 장례식이라지만 정식 절차는 며칠 뒤이고, 3일 동안은 시신을 관 안에 넣어두고서 누구라도 꽃을 둘 수 있게 하는 기간이었다.
“레들러한테 마지막 선물을 주고 싶다.”
아이니는 너무 슬픈데다 배신감까지 들어서 장례식에 가고 싶지 않았으나, 친구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야 한단 각오를 다지고서 레들러가 평소 좋아했던 자신의 거울을 선물하기 위해 시신이 누워 있는 관쪽으로 갔다. 관 주위에는 이미 사람들이 놓고 간 수많은 꽃들이 있었다.
“레들러…….”
아이니는 그 모습을 슬픈 눈으로 보다가, 퉁퉁 부은 눈으로 관을 지키고 선 레들러의 호위에게 부탁했다.
“관을 열어다오. 레들러가 이걸 가지고 가도록 함께 넣어주고 싶으니.”
아이니가 가져온 거울은 주위를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해서 몹시 고가인 귀한 물품이었다.
“예, 황후 폐하.”
호위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뚜껑 위 꽃을 치우고 관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관을 열자마자 아이니와 호위 모두 작게 비명을 질렀다.
“레들러!”
“아가씨!”
관 안이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이후로 사람들은 누군가 시신을 훔쳐갔다며 난리를 부렸으나, 관을 넣어둔 차가운 홀 주위는 수많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어서, 커다란 성인의 시체를 훔쳐갈 만한 틈도 시간도 없었다.
“황후 폐하. 괜찮으신가요?”
몇 시간 뒤 아이니가 충격을 받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자, 다른 시녀는 울먹이면서 얼른 따뜻한 차를 가져다주었다. 아이니는 쿠션을 안고서 차를 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르겠어.”
헤움이 돌아온 것, 갑자기 레들러가 자살한 것, 시체가 사라진 것. 모두 다 감당하기 어렵고 속상했다. 아이니는 레들러에게 주려던 거울을 꽉 쥐고 어깨를 떨었다. 그때. 차를 가져다 준 시녀가 아이니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사실 황후 폐하. 폐하께서 자책하실까 봐 말하지 않은 게 있습니다.”
아이니는 레들러가 자주 앉곤 하던 소파를 멍하니 보다가 눈동자를 확 돌리며 물었다.
“말하지 않은 거라니? 뭐지? 빨리 말해!”
“레들러 양이요. 요즘 황후 폐하께서 많이 힘들어 하신다고, 며칠 동안 떨어져 있으면 더 걱정이 될 것 같다고, 부모님 얼굴만 뵌 다음 바로 돌아올 거라 했습니다.”
“뭐? 그걸 왜 이제 말해?!”
“도중에 사고라도 당한 거라면 혹시 폐하께서 마음 상하실까 봐…….”
시녀가 말끝을 흐리자 아이니는 더욱 눈물을 펑펑 흘렸다. 헤움의 목소리를 들은 후, 레들러는 아이니가 잠들기 전까지 내내 손을 꼭 쥐어 주었다. 레들러라면 충분히 저런 걱정을 할 만 했다.
“그럼 어쨌든 자살일 리가 없잖아?”
“하지만 목격자가 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
아이니는 입술을 깨물었다. 시녀의 말이 맞았다. 난데없는 자살인데다 유서가 없는데도 바로 자살로 처리되고 장례식이 진행된 건 레들러가 자살하는 장면을 본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살하려는 사람이 과연 저런 말을 남길까?
“황후 폐하, 어디 가십니까?”
“후작 부부한테!”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 아이니는 곧장 성을 나가 마차에 올라타고 수도 변방에 있는 레들러의 저택까지 찾아갔다. 이상한 게 있다면 바로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후작 부부는 딸의 시체가 사라진 일로 궁전에 가 있었기에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저택의 하인과 하녀들만이 정신 없는 와중에 갑자기 황후가 나타나자 더욱 황망해하며 허둥거릴 뿐. 결국 아이니는 별다른 소득을 보지 못하고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나 마차가 출발하기 전.
“저…… 황후 폐하.”
한 하녀가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창문 너머로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무엇이냐.”
아이니가 힘없이 묻자 하녀는 봉투를 열더니 안에서 작은 부적을 꺼냈다.
“마님의 친척 중에 신관이 있으신데, 그 신관께서 일전에 대신관에게 부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는 아가씨 방 서랍에 넣어 두셨는데, 이번에 찾아오셨을 때 이걸 황후 폐하께 드릴 거라면서, 부적을 넣어둘 만한 목걸이 메달을 고르셨어요.”
그럼 저걸 가지려고 갑자기 집에 돌아가겠다 한 건가. 역시 자살은 아니지 않을까. 아이니는 슬픈 눈으로 목걸이를 보았다. 그러고는 받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곧 마음을 바꾸고서 고개를 저었다.
“난 됐으니 후작부인께 드리거라. 나보다 더 괴로우실 테니까.”
* * * 황후 최측근 시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사라진 시체 때문에 카리센은 난리가 났으나, 상대적으로 타리움은 대신관의 부상 이후 조용했다. 대신관은 자신을 떠민 이가 누구인지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으나, 범인은 그 사이에 꽁꽁 숨어버려서 찾아낼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대신관이 발을 헛디뎌 넘어진 거라 여겼기에, 그가 계단을 구른 일을 처음부터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덕택에 아슬아슬하고 조용한 평화가 지속되던 어느 날. 타리움에도 작은 사건이 터졌다.
“백화랑술? 날 찾아와?”
성기사 집단인 백화랑술에서 정식으로 라틸을 찾아온 것이다. 라틸은 대신관을 후궁으로 받아들인 그날. 그에게 백화랑술이란 집단에 대해 들은 바가 있기에, 소식을 전한 비서에게 놀라서 되물었다.
“그자들이 나를 왜?”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일이라며, 폐하를 꼭 뵙고 싶다 청합니다.”
‘흑마법 때문인가? 힛라 노신관이 죽은 일 때문?’
의아했지만 굳이 거절할 일은 아닌지라 라틸은 그들의 알현 요청을 받아들이고서 홀로 나갔다. 그곳에는 새하얀 망토를 두르고 그 아래로 하얀 제복을 세트로 갖추어 입은 성기사들이 대열을 맞추어 서 있었고, 그 주위로 다른 관리와 귀족 몇이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래. 무슨 일로 날 보고자 하였나.”
속으로는 그들이 찾아왔을 이유 몇 가지를 빠르게 짚어보면서도, 라틸은 겉으로는 무심하게 옥좌로 걸어가며 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생각 이상으로 엄청났다. 하얀 제복 차림 기사들이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이다. 몇 년이나 연습한 것처럼 절도 있는 행동에 주위에 선 관리들이 왜 저러는 거냐, 나도 모른다 하면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라틸도 옥좌에 앉으면서 의아해 재차 요구했다.
“말을 하라.”
그러자 가장 앞자리 중앙에 있던 기사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큰 소리로 외쳤다.
“폐하, 저희가 대신관님을 보호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자 다른 기사들이 동시에 입을 모아 똑같이 되풀이했다.
“허락해 주십시오!”
라틸은 의미 없이 웃고 있다가 순간 정색했다. 대신관? 자이신? 여기 대신관이 있는 걸 알고 찾아온 건가? 힛라 노신관이나 흑마법 때문에 온 게 아니야?
“대신관이라니?”
그래도 일단 모른 척 묻자, 앞으로 나선 기사가 일어서며 대답했다.
“대신관님이 폐하를 연모하게 된 건 인력으로 어쩔 수 없지만, 후궁들의 암투에 휩쓸려 그분께 해가 가선 안 됩니다. 그러니 저희가 그분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
라틸은 라틸대로 놀랐고 주위 관리들은 주위 관리들대로 놀라 수군거렸다.
“대신관이 폐하한테 반했다고?”
“폐하가 대신관을 하렘에 넣으려 하시나 봐.”
“그게 가능한 거요?”
이어서 그들의 머릿속에 한 가지 그림이 떠올랐다.
‘폐하께서 종교를 폐하의 권력 아래에 넣으려 하시는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