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하늘을 나는 새가 되어2020.08.26.
“제가 햇볕에 취해 발을 헛디뎠습니다.”
라틸은 고개를 기울이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발을 헛디뎠다고?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데, 대신관이라고 해서 절대로 계단에서 발을 헛디딜 일이 없단 뜻이 아니다. 그러나 대신관처럼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 사람이 발을 헛디뎌서 이렇게 크게 다쳤단 건 믿기 힘들었다. 2층이나 3층 높이 창문에서 준비 후 뛰어내리면 크게 다치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떠밀려 떨어지면 높이가 낮아도 크게 다칠 수 있지 않던가. 그 이치였다. 라틸은 대신관이 계단에서 굴러 이 정도로 다쳤단 건 분명 누군가가 밀쳐서일 거라 확신했다. 그러나 본인이 저렇게 말하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다그칠 수는 없었다.
“확실한가.”
한 번 슬쩍 더 물어볼 뿐.
“예.”
그래도 대신관이 말을 바꾸지 않자, 라틸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앞으론 좀 조심하거라. 많이 놀랬다.”
물론 그의 말을 정말로 믿는 건 아니었다. * * * 대신관의 말을 믿지 않는 건 라틸만이 아니었다. 대신관이 깨어나는 걸 확인하고서 돌아가는 길. 타시르는 일부러 게스타의 뒤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가 물었다.
“순둥이 도련님. 혹시 도련님 짓이야?”
게스타가 미간을 찌푸리고서 쳐다보자 타시르는 손가락으로 막내 후궁의 방을 가리켰다. 게스타에게 대놓고 자이신을 민 건가 질문하는 것이다.
“그럴 리가요.”
시비라면 시비라고도 할 수 있는 질문이었으나, 게스타는 조금도 휩쓸리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다음에 타시르 님을 누가 떠밀거든, 그땐 제가 민 거라 생각하세요.”
그러나 뒤따라온 말에는 솔직한 짜증이 스며 있어서, 타시르는 히죽 웃으면서 게스타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순둥이 도련님은 그렇게 까칠하게 안 굴어도 충분히 귀여워.”
대놓고 게스타를 짜증나게 하려고 작정히라도 한 모양새였다.
“누가 귀여워해 달랬습니까?”
그게 기가 막혀서 게스타가 되묻자, 타시르는 눈웃음까지 쳤다.
“너무 순하기만 하면 매력 없을까 봐 이러는 거 아냐?”
턱도 없는 말에 게스타가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들려와 그는 입을 다물었다. 모습을 드러낸 건 클라인이었다.
“둘이 잘 어울리네.”
타시르는 클라인과 게스타가 한바탕 싸움을 하려나 싶어서 눈을 빛내며 기대했으나, 거만하게 말한 클라인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게스타가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상냥한 목소리로 진심어린 악담을 퍼부었다.
“둘이 손 잡고 하렘을 떠나면 되겠어. 다음에 떠밀려서 목이 부러지는 건 너희 둘이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클라인은 곧 타시르 쪽을 쳐다보면서 인상을 구겼다. 타시르의 부하가 낸 소문 덕에, 그가 라틸에게 클라인을 두둔하는 말을 했더란 게 이제야 떠올라서. 결국 그는 머뭇거리다가 더욱 턱을 치켜들면서 말을 바꾸었다.
“이리와 타시르. 그러면 목이 안 부러져. 나랑 가자.”
애초에 타시르가 멋대로 게스타를 따라가며 종알거렸을 뿐, 두 사람은 일행이 아니었다. 그러나 클라인이 꼭 편먹기를 하는 것처럼 말하자 게스타는 괜히 기분이 나빠져 인상을 구겼다. 타시르가 저쪽으로 가버리면 왠지 자기가 가만히 있다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라. 이에 게스타는 타시르를 쳐다보면서 토끼처럼 눈을 뜨고 중얼거렸다.
“타시르 님, 저와 얘기하고 계시던 게 아니었어요……?”
이런 상황은 타시르에게는 그저 우습기만 할 뿐이어서, 그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게스타와 클라인을 번갈아 보다가 제안했다.
“그럼 셋이서 놀까요?”
그러고는 한쪽 팔은 클라인에게 한쪽 팔은 게스타에게 끼자, 두 사람의 표정이 거의 동시에 썩어 들어갔다. 게스타는 그나마 재빨리 표정 관리를 했지만, 클라인의 표정은 화난 페르시안 고양이와 구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뒤에서는 표정이 보이지 않는지라, 뒤늦게 대신관의 방에서 나온 라틸은 이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서넛 경, 의외로 저렇게 셋이 친한가 봅니다.”
과연? 서넛은 고개를 기웃했으나, 사실 셋이 싸우건 친하건 별 관심이 없었으므로 적당히 라틸의 말에 호응했다.
“클라인 님과 게스타 님은 내내 싸워대시더니. 싸우다가 정이 들었나 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잠시 생각하던 서넛은 라틸이 그들과 다른 방향으로 가도록 슬쩍 몸을 옆으로 틀어주면서 제안했다.
“셋이 이제 막 친해지려는데 괜히 끼어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쪽으로 가지요, 폐하.”
* * * 늦은 밤. 라틸은 미뤄두었던 업무를 끝낸 뒤 대신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조용히 하렘을 찾아갔다.
“폐하.”
대신관의 방 앞에 세워둔 호위는 라틸이 말없이 찾아오자 놀라서 안쪽에 라틸의 방문을 알리려 했다.
“되었다.”
하지만 라틸은 대신관이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서 고개를 저어 호위를 말렸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가자, 풀벌레 소리와 새소리만 들려오는 방 안에 조용히 문 여는 소리와 발소리가 울렸다. 침실과 복도 사이의 중간 복도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대신관의 수행사제는, 라틸이 들어오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떡 일어났다.
“폐, 폐하!”
“자이신은?”
“아마 지금쯤 주무시고 계실 텐데…….”
“몸은 어떠하냐?”
“아, 많이 괜찮아지셨을 겁니다.”
“그래.”
자고 있다니 깨우지 말자, 생각한 라틸이 다시 몸을 돌려 나가려 할 때였다.
“깨어 있습니다, 폐하.”
안쪽에서 대신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수행사제의 말처럼 대신관의 목소리는 낮에 들었을 때보다 한결 괜찮게 들렸다. 게다가 목소리가 잠겨 있지 않은 걸 보니 방금 막 깬 것도 아닌 듯해서, 라틸은 침실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이봐!”
그러나 막상 들어가 보니, 대신관은 많이 괜찮아진 정도가 아니었다. 대신관은 근력 운동 중이었다.
“뭐 하는 거야?!”
당황한 라틸이 달려가자, 한 팔로 물구나무를 선 채 팔굽혀펴기를 하던 대신관은 가뿐하게 땅을 딛고 서더니 천진하게 설명했다.
“운동하였습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 계단에서 떨어져 여기저기 박살난 사람이 그러고 있으니 물은 거지?”
라틸이 황당해하며 대신관의 팔다리를 감싼 근육을 보자, 그는 활짝 웃으면서 자랑했다.
“벌써 다 나았습니다!”
“뭐?”
그게 가능해? 라틸이 떨떠름하게 쳐다보자, 대신관은 일전에 자신이 대신관이란 걸 증명하기 위해 라틸에게 보여 주었던 빛을 다시 손 위에 띄워 보여주었다.
“즉사만 아니면 회복은 혼자 할 수 있어서요.”
“아아. 그걸로 부러진 뼈도 치료할 수 있어?”
“네.”
“그럼 진작 좀 하지!”
“계단에서 구르자마자 사람들이 몰려들어서요. 이후로는 다들 제 곁에서 떠나질 않으니, 치료할 틈이 없었습니다. 그후엔 바로 궁의가 왔고…….”
하긴. 그것도 그렇겠다. 라틸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자 대신관은 팔을 굽혀 단단한 근육을 보이며 자랑했다.
“그래도 바로 나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테니, 얼마간은 다친 척할 예정입니다.”
“그래.”
황당하긴 한데. 그래도 팔다리가 부러져서 끙끙 앓고 있는 것보단 낫기에, 라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서 침대를 가리켰다.
“그래도 무리해서 운동하지 말고 좀 누워 있어.”
하지만 이어진 건 공중부양이었다.
“이봐!”
자신이 다 나았단 걸 증명하기 위해 대신관이 라틸을 번쩍 들어올리더니 허공에서 빙빙 돌려준 것이다.
“하지마!”
-우리 황녀는 새보다 높이 나는구나!
고함을 치는 라틸의 기억 너머로, 아주 어릴 적 부황이 라틸을 높이 들어올리고서 외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휘이이잉! 라틸이 날아갑니다!
하지만 다 큰 후로 자신을 이렇게 들어올린 사람은 처음이었기에 라틸은 허우적거리며 “내려놔!” 하고 외쳤다. 다행스럽게도 대신관은 순순히 라틸을 침대 위에 포근히 내려주며 자랑했다.
“다 나았지요?”
라틸은 그의 자랑을 받아주는 대신 툴툴거리면서 타박했다.
“넌! 진짜! 낭만적인 분위기라고는 진짜 조금도 없어? 내가 이 나이에 새다! 라틸은 새다! 이거 해야겠냐고!”
두 손으로 감싸 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업어주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어느 누가 연인을 뭐 장작 패는 도끼 들듯 들어올린단 말인가. 물론 가짜 연인이긴 하지만. 그러나 낭만 없단 평가가 싫은지, 라틸의 타박을 듣자마자 대신관은 얼른 상의를 북 뜯으며 외쳤다.
“제 낭만은 이 안에 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 눈앞에 나타난 조각 같은 가슴 근육에 라틸은 머리를 한 손으로 감쌌다.
“그 낭만 도로 넣어.”
“멋있지 않습니까?”
라틸이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옷장을 가리키자, 대신관은 어깨를 늘어뜨리고서 옷장으로 걸어갔다. 그가 상의를 갈아입는 걸 보며 라틸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관은 참 특이한 사람이었다. 성직자이면서도 VVIP를 상대하는 카지노 딜러일 만큼 속세에 찌들긴 했는데, 동시에 어느 면에서는 세속과 뚝 떨어져 산 사람의 순수함이 보이긴 했다. 게스타처럼 쑥스러움과 부끄러움이 많은 게 아니라, 세속에 익숙하지 않아서 드러나는 그런 순수함이.
“다 입었습니다.”
그 사이. 대신관은 옷을 다 입고서 라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저건 안 치워?”
라틸이 눈으로 그가 찢어둔 상의를 가리키며 묻자 대신관은 태연히 대답했다.
“나중에 구벨이 치울 겁니다.”
구벨이 중간복도에서 졸고 있던 그 수행사제인가?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여기에 오기 전 궁금했던 질문을 다시 했다.
“맞아. 낮에 말이야. 혼자 넘어졌다 했잖느냐. 사실이냐?”
“못 믿으시겠습니까?”
“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거든.”
라틸이 대신관의 튼튼하다 못해 터질 듯한 팔 근육을 쳐다보자 대신관은 히죽 웃더니, 아까와 다른 말을 했다.
“사실은 누가 절 민 게 맞습니다.”
“그렇지?”
“예.”
라틸은 대신관이 솔직하게 고백하자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찼다. 역시. 저 정도로 몸이 날래고 튼튼한데, 혼자 발을 헛디뎠다고 저렇게 다칠 리가 있나. 계단이 어마어마하게 길고 가파른 것도 아닌데.
“누가 절 밀었어요.”
“그런데 아깐 왜 거짓말했어?”
“누가 밀었는지 제대로 보지 못해서요.”
라틸은 대신관이 한 의외의 대답에 입을 벌렸다.
“누가 범인인지도 모른 채 이런 이야기를 하면, 괜한 사람이 의심을 받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안 돼죠. 억울할 테니까요.”
라틸은 입술을 뻐끔거렸다. 뭐야 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착한 발언은?
“너…… 진짜 대신관이구나?”
“그새 또 안 믿고 계셨습니까?”
“아니, 믿고는 있었는데. 새삼 놀랍네.”
대신관이 가볍게 웃었다. 라틸은 청량하기까지 한 그 미소를 신기해서 쳐다보다가 따라 웃었다. 오만하고 거만하고 재수 없는데 솔직하고 귀여운 클라인과는 또 다른 의미로 특이한 남자였다. 그러나 대신관의 표정이 갑자기 촛불을 끈 양 훅 어두워지자, 라틸은 덩달아 표정을 굳혔다.
“왜? 갑자기 아파?”
“아니, 그게 아니라. 절 밀친 사람 말입니다.”
“누군지 알 것 같아?”
“아니요. 하지만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겠지. 널 밀칠 정도면 아주 세겠지.”
아마 보통 사람이 대신관을 떠민다면 그가 밀리는 게 아니라, 민 사람이 오히려 튕겨나갈 테니 말이다. 그러나 대신관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럼?”
“절 민 사람…… 순간이지만 굉장히 사악한 기운을 뿜었습니다.”
“사악?”
“네. 게다가 그 기운. 사람이라 하기엔 너무 어두웠습니다.”
라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내부에 적들이 숨어 있을 거란 생각은 했는데. 그 적이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단 건가? 아니면 흑마법사?’
* * * 대신관과 라틸은 그 사악한 기운을 뿜은 자가 누구든, 일단 식시귀나 뱀파이어는 아닐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좀비는 태양 아래에 활동할 수 있지만 외양에서부터 사람이 아닌 티가 났고, 식시귀와 뱀파이어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태양 아래에서 활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궐에서 지내는 사람 중에는 밤에만 일하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관 역시 태양이 쨍쨍하게 내리쬘 때 습격을 받았고.
“만약 사악한 자라면 흑마법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결론을 낸 후 다음날. 라틸은 대신관을 휠체어에 태워 직접 밀어주면서 하렘 정원을 샅샅이 돌아다녔다. 그를 떠민 사람이 뿜었다는 그 사악한 느낌, 정확히 그 느낌이 아니라도 그 비슷한 느낌을 뿜는 사람이라도 찾기 위해서.
“새소리가 참 듣기 좋지 않습니까, 폐하? 이러고 있으니 우리가 진짜 부부 같습니다.”
“수상한 사람부터 찾아.”
그런데 얼마나 그러고 다녔을까.
“어?”
갑자기 대신관이 어딘가를 쳐다보더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폐하, 저 사람!”
범인인가? 라틸은 놀라서 대신관이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가 더욱 놀랐다. 그 방향에 있는 건…… 라나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