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너무 서러운 대신관2020.08.23.
문을 벌컥 연 아이니는 피아노 뒤에 누군가 앉아 있단 걸 알아차렸다. 밖도 방도 어두워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누군가의 까만 실루엣이 보였다.
“……누구야?”
노랫소리는 멈추었고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아이니는 가까스로 입을 열어 물었다. 너무 긴장한 탓에 그녀의 목소리는 자다 일어난 사람처럼 잠겨 있었다.
“누구냐 물었어.”
아이니는 돌아오는 대답이 없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게 헤움의 목소리이길 원했고, 헤움이 아니길 원했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아이니. 나야.”
그러나 돌아온 목소리는 헤움의 목소리였다. 다리에 힘이 쭉 빠져서 아이니는 벽을 짚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이니.”
그리운 목소리가 다시 그녀를 불렀다. 옛날 그대로의 목소리로. 아이니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넌 죽었잖아.”
아무리 그리웠던 목소리라지만 그는 분명 죽었다. 한두 사람이 본 게 아니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어떻게……?
“네가 그리워서 ‘좀 더 일찍’ 왔어.”
“네가 너란 증거가 있어?”
“네가 열 살 때 신전에서 널 데려가려 했는데 내가 막아줬잖아. 내 열세 번째 생일날에 네가 유리로 만든 검날을 앞으로 해서 줬다가 네 아버지한테 혼이 났고.”
그건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아는 이야기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싶더니 눈물이 왈칵 나와서 아이니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넌 죽었잖아.”
두려운데. 아주 두려운데 발걸음은 헤움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헤움이 피아노 건반을 꽝 누르는 바람에, 아이니는 놀라서 제자리에 멈춰섰다. 이어 어둠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 오지 말아줘. 널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이미 놀랐어.”
“아직은 널 가까이에서 볼 수 없어. 너무 일찍 와 버려서.”
“무슨 소리야……?”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아이니는 질문을 던져 놓고 얼른 두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러나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까만 그림자는 사라져 있었고, 방 안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피아노 앞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헤움?”
아이니가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헤움은 보이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이니는 벽에 기대어 섰다. 그러나 그 몸조차 곧 주르륵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헤움…….”
아이니는 벽에 기대어 쪼그려 앉은 채 다리를 감싸안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역시 그가 살아 있었다. 그가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대체 죽은 사람이 무슨 수로? * * *
‘칼라인이 부르던 이름. 도미스인가 하는 그 이름이 그 붉은머리 여자인가?’
다음날 아침.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칼라인을 두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라틸은, 환상 속에서 본 붉은머리 여자와 칼라인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펑펑 울던 둘의 모습이 뾰족한 돌멩이처럼 심장이 콕 박히더니, 안으로 쏙 들어가 찾을 수도 없게 숨어버린 느낌이었다. 까끌까끌하게 계속 떠올라 거슬렸다.
‘어쩐지. 너무 능숙하게 돌진해온다 싶었어. 아주 절절한 천년의 사랑을 하셨구만.’
그 여자와 함께 죽겠다고 울던 칼라인을 떠올리다가, 라틸은 ‘에잉 에잉’ 소리를 내면서 세숫대야에 담긴 물을 괜히 철벅거렸다. 하지만 업무를 보면서도 내내 그 일이 떠올라서, 라틸은 결국 공식 일정을 전부 다 앞당겨서 해버리고, 오늘의 개인 업무는 내일로 미뤄둔 다음 이른 저녁에 라나문을 찾아갔다. 열렬하게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후궁은 얼른 잊어버리고, 라나문과 술을 마시면서 그의 속마음이나 들어볼 생각이었다.
“후궁들을 하나하나 돌아다니시면서 술을 먹이신다고, 궁정인들이 계속 수군대고 있습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다행이 아니라 해야 할지, 라나문은 라틸을 보자마자 차갑게 쏘아붙였고, 라틸은 변명을 하느라 칼라인에 대한 일을 잊을 수 있었다.
“한 사람만 챙기면 그렇잖아. 다 챙겨야지.”
“타고난 바람둥이시군요.”
“그럼 도로 갈까? 여섯 명 챙기는 바람둥이 보다는 다섯 명 챙기는 바람둥이가 낫지?”
라틸이 지지 않고 따박따박 말을 이어가자, 라나문은 라틸을 차갑게 흘기면서도 앞서 걸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여섯 명 챙기는 바람둥이가 낫단 뜻이구나? 그대는 나쁜 여자를 좋아하나 봐?”
그걸 본 라틸이 헤실헤실 웃으면서 놀려대자, 라나문은 표정이 더욱 차가워졌다. 곁으로 가면 냉기가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술 마시자. 화내지 말고.”
라틸은 단단히 골이 난 그의 팔을 잡아 당겨 의자에 앉혀 놓고서, 직접 그의 잔에 술을 콸콸 따라 코앞까지 대령해주었다. 이렇게 안 하면 안 먹을 것 같아서.
“…….”
하지만 라나문은 의심이 많은 성품인지, 라틸이 대놓고 술을 권하자 찝찝해하며 마시지 않았다.
“왜 후궁들에게 다 술을 마시게 하십니까?”
오히려 술잔을 쥐고서 이렇게 묻기까지 했다.
‘역시 연달아 다섯 명에게 술 먹이는 건 좀 이상한가.’
라나문이 이 정도로 의심한다면 다음 차례인 타시르는 얼마나 의심할까. 라틸은 속으로 혀를 찼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변명했다.
“술 마시면 친해지기 쉽다잖아. 속내도 더 잘 털어놓고. 내가 아직 즉위 초라 바빠서 자주 못 오니까. 이렇게라도 친해지고 싶어서.”
친해지려고 먹이는 건 아니지만 속내를 털어놓으라 먹이는 건 맞으니, 반은 사실인 변명이었다. 라나문도 라틸이 그럴듯하게 둘러대자 결국 미적거리다가 술을 한 모금 찔끔 마셨다.
‘이게 무슨 병아리 오줌인가.’
너무 찔끔 마셔서 라틸은 황당하게 여겼지만, 억지로 많이 마시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안주를 집어 라나문의 입에 넣어주었다.
“자, 안주도 먹고.”
라나문은 라틸이 내민 과자가 입술에 닿자 멈칫했지만, 곧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라틸은 아무 생각 없이 안주를 내밀었다가, 라나문이 라틸과 눈을 마주한 채 입술을 열어 긴 과자를 받아먹자 괜히 어색해져서 팔을 삐걱거리며 내렸다. 라나문은 그런 라틸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면서 오독오독 과자를 천천히 씹다가, 라틸의 귓가가 좀 붉은 걸 보자 그제야 만족해서 웃었다.
‘하여튼 얼굴 하나는…….’
라틸은 라나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이슬 어린 장미꽃 같다고 생각하다가, 얼른 술을 또 마시라고 권했다.
“그러고보니 라나문. 넌 어릴 때 잠깐 신전에서 살았다 했지?”
그냥 술만 내밀면 그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일부러 라나문의 후궁 지원서에 써 있던 짧은 특이사항까지 떠올리며 물었다.
“네.”
하지만 라나문은 그걸 화제로 긴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는지 짧게 대답했고,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너랑 진짜 안 어울려. 네가 신관으로 있으면 사람들이 안식을 찾으러 왔다가 열 받아서 나갈걸?”
이에 발끈한 라틸이 시비를 걸었지만, 라나문은 코웃음을 치면서 술만 받아 마셨다. 그리고는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
“!”
그가 도로 입을 닫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침대로 걸어갔다.
“라나문? 어디가?”
갑자기 술을 마시다 말고 걸어가는 게 이상해서 불러보았지만, 라나문은 돌아보지도 않고 침대로 가 그 위에 반듯하게 누웠다.
“라나문?”
여전히 라틸은 그가 뭘 하는지 몰랐으나, 라나문은 대답 대신 이불까지 덮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들었어?’
1초도 안 됐는데 잠들어 버렸다.
“라나문? 라나무운?”
라틸이 황당해서 불러보았지만 고개조차 까딱하지 않았다. 라나문은 차갑긴 해도 모든 후궁 중 예의범절은 가장 완벽했다. 라틸의 말을 일부러 무시할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진짜 잠든 거야?’
라틸은 가까이 다가가 곤히 눈을 감고 있는 라나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뱉었다.
‘와. 얘는 또 왜 이렇게 술이 약해? 정신력이 약해지고 뭐고 할 틈도 없잖아?’
* * *
“하늘이 밝고 햇빛은 따스하고 몸에선 힘이 솟는구나! 이게 다 신의 은혜 덕분이다!”
운동을 마친 대신관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밝게 외치자, 지나가던 궁인들이 그를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시종으로 위장해 들어온 수행사제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렸다.
“그런 건 작게 말해 주세요, 자이신 님.”
그러나 대신관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꿋꿋하게 두 팔의 근육을 드러냈다.
“신은 드러내는 걸 좋아하신단다, 구벨! 근육! 근육!”
‘아니에요…….’
“근육을 보이며 우렁차게 외쳐야 소리를 들으시지!”
“신이 가는귀를 먹진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게다가 근육은 왜 드러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신에게 기도하면 소리가 섞이지 않느냐! 그러니 크게 크게 외쳐야 가장 크게 들리는 법이지! 이렇게!”
두 팔을 벌린 대신관이 하늘을 향해 “신이여! 야호오오오!” 하고 외치자, 수행사제의 얼굴은 익은 딸기처럼 변했다.
‘그건 어디서 나온 논립니까…….’
이걸 본 궁인들이 자기들끼리 소곤대면서 키득키득 비웃어서, 수행사제는 어깨까지 시무룩하게 떨어트렸다. 우리 대신관님이 좀 어설퍼 보이는 건 맞지만, 그래도 저런 어설픈 모습을 신이 가장 사랑하니까 된 거 아니냐고, 부글부글 하고 싶은 말이 마구 끓어오르는데. 이 말을 다 삼켜야만 하니 너무 답답했다.
“구벨!”
“네, 자이신 님.”
“가서 아이스크림을 가져오너라. 햇볕을 받으며 먹어야겠다.”
“네에…….”
“구벨!”
“네?”
“두 개! 두 개 가져와라!”
구벨은 알겠다 웅얼거리고서 조리실로 뛰어갔다. 그 사이, 대신관은 아까의 흥분을 좀 가라앉히고서 햇살처럼 웃으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놀랍게도 입을 다물자마자 그의 모습은 정말 반짝거리는 바닷물처럼 아름다워서, 내내 그를 훔쳐보며 놀리던 궁인들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하지만 곧 그들은 자신들이 멍청해 보이는 저 막내후궁에게 감동받았다는 게 자존심이 상해서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 바람에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부근에 서 있는 건 대신관 하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대신관은 홀로 맑은 공기를 느끼며 즐거워했다. 그때였다.
‘음?’
순간, 뒤쪽에 오싹한 감각이 느껴졌다. 몹시 위험하면서도 소름돋는 느낌이었다. 대신관이 빠르게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등을 엄청난 힘으로 떠밀었다.
“!”
* * * 라나문에게 술을 먹인 다음날 타시르를 시험해 보았지만, 그쪽도 알코올을 자체적으로 분해하는 간을 가지고 있는 듯 아무리 마셔도 절대 취하지 않았다. 결국 라틸은 후궁들의 정신력을 약하게 할 다른 계략을 찾기 위해 그날 하루 머릿속이 분주해졌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라틸의 머릿속은 더욱 바빠졌다. 라틸이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데, 5경비단장이 헐레벌떡 뛰어와 라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외친 탓이었다.
“폐하, 폐하, 지금 자이신 님이, 자이신 님이!”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그는 제대로 말도 못하고 헐떡이다가 마저 외쳤다.
“자이신 님이 계단에서 떨어져 크게 다치셨습니다!”
5경비단은 하렘의 경비를 맡은 경비단이었다. 라틸은 그의 보고에 정말로 깜짝 놀랐다.
“자이신이?”
라틸이 본 자이신은 맨손으로 적의 목을 꺾고, 적을 흙바닥에 메다꽂아 버리고, 머리를 쳐 대번에 사람을 기절시킬 정도로 강인했다. 계단에서 실수로 굴러도 계단이 부러질 사람 같은데, 크게 다쳤다고? 잠깐 발이 삐끗한 거라도 바로 균형을 잡을 사람 같았는데?
‘자이신이 대신관이란 걸 안 자의 소행인가?’
라틸은 황급히 하렘으로 달려가며 물었다.
“자기가 실수한 거냐 누가 민 거냐?”
“모르겠습니다. 자이신 님의 시종은 자이신 님의 명령으로 아이스크림을 가지러 조리실로 갔을 때였고,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근방에 경비는?”
“멀지 않은 곳에 경비가 있었지만 수상한 사람은 아무도 드나들지 않았다 했습니다.”
“자이신은? 자이신은 뭐라던데?”
“아직 깨어나지 못하셨습니다…….”
5경비단장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보고하자, 라틸은 우뚝 멈춰서서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뭐야?”
5경비단장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다시 무릎을 꿇었다. 라틸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켜고서 입을 뻐끔거리다가, 일단 자이신이 먼저란 생각에 호통치는 대신 뛰어가는 속도를 높였다. 라틸은 황급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이미 궁의가 먼저 도착해 자이신의 몸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다른 후궁들 모두 방 안에 모여 자이신의 침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자이신!”
라틸이 얼른 달려가 그의 손을 꼭 붙잡자마자 놀랍게도 내내 정신을 차리지 않던 자이신이 번쩍 눈을 떴다.
“자이신! 괜찮으냐?”
놀란 라틸이 그의 얼굴을 쥐고서 묻자, 자이신이 아프다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차 싶어서 라틸이 손을 놓아주자, 자이신은 끙끙거리면서 몸을 뒤척였다.
“자이신 님이 폐하를 정말 많이 사모하시나 봅니다. 시종이 울고 불고 해도 전혀 정신을 못 차리시더니.”
그걸 본 궁의는 감탄하듯 말했지만, 라틸은 웃을 수 없었다. 라틸은 말없이 자이신이 진정하길 기다렸다가, 그가 갈비뼈랑 다리뼈가 죄다 부러진 것 같다고 하소연을 하자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 갑자기 계단에서 떨어지다니?”
자이신은 라틸의 손을 잡고 훌쩍이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