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칼라인의 과거2020.08.19.
“주인.”
그러나 라틸이 궁의를 부르자마자, 칼라인이 눈을 뜨고서 라틸을 붙잡았다.
“안 됩니다.”
“안 되기는!”
라틸은 버럭 외쳤다. 얼굴이 완전히 새하얀데 궁의를 부르지 말라니. 미친 건가 싶었다.
“아기도 아니고 의사가 무서워?”
라틸은 일부러 놀리듯 말하고서 칼라인을 침대에 눕혔다. 사랑해서 들인 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후궁이라서인가. 입술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 걸 보자 안쓰러웠다.
“주사 안 놔.”
‘아마도.’
“그러니 진료 좀 받아봐. 얼굴이 말이 아냐. 생기가 하나도 없어.”
“…….”
라틸이 칼라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고 있자니, 문 밖에서 칼라인의 시종이 궁의가 왔다고 알렸다.
“들어오라 해라.”
궁의는 커다란 진찰 가방을 가지고 와서 공손히 라틸에게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칼라인이 갑자기 쓰러졌다. 얼굴도 창백하고. 괜찮으지 살펴보아라.”
라틸이 옆으로 비켜서자, 궁의는 다시 한 번 인사하고서 칼라인이 누운 침대의 머리맡으로 갔다. 칼라인은 반쯤 눈을 떴으나 궁의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괜찮아야 할 텐데.’
궁의가 진찰 가방에서 청진기를 꺼내 칼라인을 살피는 동안, 라틸은 걱정스럽게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
궁의는 한참 동안 말없이 칼라인을 진찰한 후에야 청진기를 벗었다. 하지만 그 표정이 너무 착잡하고 낯빛이 어두워서, 라틸은 몹시 불안해졌다.
“왜 그러지? 많이 안 좋으냐?”
라틸이 다급하게 묻자, 궁의는 라틸과 눈을 맞추지도 못하고 보고했다.
“심장이 느리게 뛰고, 뛰는 힘도 약합니다. 몸이 약하신 것 같습니다.”
“뭐? 몸이 약하다고? 용병왕인데?”
대신관이 적의 목을 ‘우득’ 꺾어버리고 땅에 처박는 모습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충격이다. 라틸은 황당해서 칼라인을 쳐다보았다. 혈색이 없는 얼굴이긴 하지만 그래도 몸은 여지저기 다 탄탄해 보이는데…….
“그럼 용병일을 너무 험하게 하셔서 후천적으로 몸이 약해지셨나 봅니다.”
그러나 궁의는 칼라인이 용병왕이란 걸 수긍하면서도, 그가 몸이 약하단 주장만은 굽히지 않았다. 라틸은 칼라인이 이불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쥔 채 묘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걸 곁눈질하며 물었다.
“그럼 약이나 주사나 뭐 처방 같은 건?”
“심장에 도움이 되는 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하지만 몸이 약하시니, 절대로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알았다.”
“…….”
“왜? 더 할 말이 있느냐?”
“그게…….”
“말해. 괜찮으니.”
“침대에서도요.”
“!”
뭐야 그 말은. 평소엔 내가 무리시켰단 말이야? 라틸이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자, 궁의는 깜짝 놀라 고개를 푹 숙이고는 허겁지겁 변명했다.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단 뜻이 아니라, 그래도 너무 무리시키지 않으셨으면…… 하는 뜻입니다. 물론 칼라인 님은 폐하의 후궁이시니 폐하께서 마음대로 하실 수 있으시지만, 그래도 건강을 위해서 조금만 자제해주시는 게 나을 거고…… 그런…… 그런 의도로…….”
‘저놈이? 내가 뭐 아픈 사람 건드리는 호색한인 줄 아나?’
라틸은 기가 막혀서 입을 벌렸으나, 궁의는 라틸이 화난 표정을 지을수록 ‘칼라인을 취할 수 없게 된 황제가 심통을 부린다’로 해석하는 듯 점점 더 사색이 되어갔다.
“나가.”
결국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하게 된 라틸이 정색하고 명령하자, 궁의는 꾸벅꾸벅 인사하고서 허겁지겁 도망쳤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지자, 내내 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칼라인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서 라틸을 놀렸다.
“절대 무리하면 안 된다니 신경을 꼭 써 주십시오.”
“어, 조금도 무리시키지 않을 테니 누워서 쉬기나 해.”
“조금은 무리해도 됩니다.”
“안 돼. 또 쓰러지면 궁의가 날 파렴치하게 볼 거 아냐.”
칼라인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지만, 이번에는 라틸을 놀리지 않았다. 라틸은 이불을 끌어다 칼라인의 턱 아래까지 덮어주고서 가슴 위를 토닥토닥 해주었다.
“쉬어라. 네 시종에게 말해둘테니, 깨어나면 약 먹고.”
“갈 겁니까, 주인?”
“가야지.”
여기서 뭐 하겠냐고 말하려는데, 칼라인이 이불 밖으로 손을 빼내더니 라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픈데. 함께 있어 주십시오.”
원래 라틸은 칼라인과 술을 마실 수 없게 됐으니, 이번에는 라나문이나 타시르를 찾아가 술을 마시게 한 후 속마음을 들어보려 했다. 하지만 아픈 칼라인이 라틸을 빤히 바라보며 매달리자, 차마 뿌리치고 갈 수가 없었다.
“알았어.”
라틸은 칼라인의 손을 한 번 꽉 쥐었다 놓은 뒤,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의자에 걸어 두고서 칼라인의 옆자리로 들어가 누웠다.
“이러고 자자. 됐지?”
라틸이 옆에서 칼라인의 배와 가슴 사이를 토닥토닥 해주며 묻자, 칼라인은 자기도 라틸 쪽으로 돌아눕더니 고개를 끄덕이고서 눈을 감았다.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칼라인을 토닥거려주면서 자신도 꾸벅꾸벅 졸다가, 라틸은 한 번 크게 머리를 휘청하고서 눈을 부릅떴다.
‘아. 같이 졸아버렸네.’
라틸은 칼라인의 가슴에서 손을 떼고 눈을 비볐다. 그 사이 칼라인은 완전히 잠들어 있었다.
‘얘는 눈을 감고 있어도 섹시하네.’
라틸은 칼라인의 섬세하고 화려한 이목구비를 구경하다가, 편하게 정면 쪽으로 돌아누웠다.
‘얘한텐 술 먹이면 안 되겠지? 몸이 안 좋으니까.’
그 순간이었다.
[도미스…….]
칼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확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칼라인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방금 그거. 칼라인의 속마음이었나? 잠결에 정신력이 약해져서 속마음이 들린 거?’
한 번 더 들으면 확실할 텐데. 더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다. 괜히 애가 탄 라틸은 칼라인의 머리카락을 조금 잡아당겼다. 그때 라틸의 앞에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 * * 그 시각. 아이니는 침대에 누운 채 이불을 끌어안았다 놓길 반복하고 있었다. 오늘 낮, 그녀는 아버지에게 헤움이 자신을 찾아왔었단 이야기를 했으나 아버지는 전혀 믿지 않았다.
-네가 힘들어서 헛것을 본 모양이다.
아버지는 아이니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해주고는, 잠시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꼭 끌어안으며 다짐했다.
-네가 힘든 만큼 나중엔 하이신스 그놈도 아파할 거다. 지금 이 순간만 잘 견디면, 넌 모든 것을 가지게 될 거야.
헛것을 본 게 아니라고, 잔디에 누군가 서 있던 자국이 있었다고 설명했지만 아버지는 그저 슬픈 눈으로 딸을 바라보기만 했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시녀인 레들러에게 이 이야기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폐하, 제가 계속 폐하의 곁에 있었는걸요? 정말로 온 사람이 없었어요.
아이니는 갑갑했으나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더욱 이상하게 볼 뿐이었다. 결국 아이니는 밤이 되자 완전히 지쳐서 침대에 누웠다.
-폐하께서 잠들 때까지 제가 곁에 있어드릴게요.
헤움에 대한 이야기를 믿진 않았지만 아이니가 걱정이 되긴 했는지, 레들러는 이렇게 말하고서 그녀가 잠들 때까지 옆에서 손을 잡아 주었다. 덕택에 아이니는 헤움에 대한 일을 잠시 잊고 잠들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디선가 낯익은 노랫소리가 들려와 잠에서 깨고 말았다. 레들러는 아이니가 잠든 후 침실에서 나갔기에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아이니는 레들러를 부르지도 못하고서, 이불을 움켜쥐고서 떨었다.
‘헤움의 목소리야.’
이 노래는 헤움이 아이니에게 불러주던 노래였다. 죽은 사람이 부르는 노래. 다행이라 해야 할지, 방 안에서 들려오진 않는다. 계속 이불만 만지작거리기를 한참. 아이니는 결국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고서 복도로 나가보았다. 방문 앞에는 호위 두 명이 철통같이 서 있다가, 아이니가 나오자 얼른 예의바르게 물었다.
“산책 가십니까, 황후 폐하?”
“함께 가겠습니다.”
아이니는 대답 대신 노래가 들려오는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 소리가 들리는가?”
호위들은 “예?” 하고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노랫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아이니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호위들은 더욱 의아한 표정으로 변했다. 둘 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 그들은 아이니가 복도 너머를 바라보며 두려운 표정을 짓자, 오히려 그 모습을 보고 오싹해져서 서로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나에게만 들리는구나.’
아이니는 그들에게 노랫소리에 대해 말하는 대신, 그냥 산책을 갈 테니 호위 한 명만 따라오라 지시했다. 저들이 못 듣더라도 자신이 들을 수 있으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 볼 생각이었다.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아이니의 부탁에 호위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아 노랫소리는 바로 끊어져 버렸다. 제자리에 서서 좀 더 기다려보았지만 노랫소리는 더 들려오지 않았다.
“혼자 걷고 싶네.”
아이니는 혹시나 싶어서 호위를 돌려보내고 자신 혼자 이동해보았다. 그러자 노랫소리는 다시 이어졌다.
‘나 혼자 오란 건가.’
아이니는 더욱 두려워졌으나,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이게 헤움의 짓이라면 그가 나한테 위협이 되진 않을 거야. 내게 해로운 일을 할 리 없어.’
늘 그녀에게 다정하던 헤움을 떠올리고서, 아이니는 용기를 내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가보았다. 그곳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빈방이었는데,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마치 이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아이니는 심호흡을 하고서 문에 손을 올려 밀었다. * * * 검은 하늘이 움직이고 있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날갯짓 소리…… 바람 소리…… 하늘은 계속해서 여러 방향으로 꿀렁꿀렁 움직였다.
‘까마귀.’
라틸은 그 검은 하늘이 까마귀 떼란 걸 알아차렸다. 까마귀가 온 하늘을 뒤덮어서 사방이 까맣게 보이는 것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초록색 들풀로 파릇해야 할 들판에는 시체들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이상한 시체들로, 그 시체들은 막 죽은 시체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주위를 하얀 제복 차림의 사람 수백 명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
‘처음 보는 제복인데.’
라틸은 그들을 경계했지만, 그 사람들은 라틸 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았다.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면 당연히 시선이 집중될 텐데, 마치 라틸이 없는 것처럼.
‘환상인가? 혹시…… 칼라인의 꿈?’
마지막으로 들었던 게 칼라인이 속마음이었으니 가능한 이야기지 않나, 생각하자마자 라틸의 눈에 한 쌍의 남녀가 들어왔다.
‘칼라인!’
라틸은 그중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놀랐다. 남자는 칼라인이었다. 지금과 머리 길이가 조금 다른 칼라인. 얼굴은 그대로인데 머리카락이 더 길었다.
‘그럼 최근인가?’
울면서 칼라인을 끌어안고 있는 여자는 처음 보는 여자였다. 머리카락은 붉고 눈은 초록색인, 굉장히 아름다운 여자. 너무 아름다워서 오히려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그런 여자. 그런 여자와 칼라인이 붙어 있으니 두 사람은 한 쌍의 그림처럼 보였다.
“너는 살아야 한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않은 듯, 여자는 칼라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슬프게 말했고, 칼라인은 고개를 저으며 여자를 마주 안았다.
“절 데려가셔야 합니다. 저는 죽음까지도 당신과 함께할 겁니다. 데려가주십시오.”
‘칼라인이 울기도 하는구나…….’
거의 표정 변화가 없던 그가 온 얼굴이 젖도록 우는 걸 보자 라틸은 이상하게 심장이 욱신거렸다. 저 붉은머리 여자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칼라인의 부탁을 들어주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살아라. 살아서 나를 찾아. 난 ‘다음에도’ 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때 당신의 곁엔 다른 기사가 있을 겁니다. 당신은 절 기억하지도 못할 겁니다.”
“내겐 너뿐이야.”
여자가 칼라인과 입을 맞추자, 칼라인은 울면서 고개를 마구 저었다. 하지만 여자의 힘이 엄청난지 칼라인이 꽤 거세게 고개를 젓는데도 두 사람은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여자의 입맞춤에 묘한 힘이 깃든 듯, 칼라인은 여자를 붙잡기 위해 두 손을 허우적거렸지만 그 손에는 점점 힘이 빠져갔다. 강제로 잠드는 것처럼 보였다. 칼라인이 완전히 잠이 들자, 여자는 그를 내려놓고 이마에 입을 맞추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어난 여자의 표정엔 아까 같은 슬픔도 참담함도 없었다. 그러자 그녀의 작별을 잠시 기다려주었던 듯, 제복 차림 기사 중 혼자만 옷 무늬가 약간 다른 여자 기사 한 명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그걸 신호로 수백 명의 기사들이 그녀를 뒤따라 동시에 검을 뺐다. 스르릉 소리가 사방에서 소름 끼치게 들려왔다. * * * 그 순간 라틸의 눈에 보인 건 기사들과 붉은 머리 여자의 싸움이 아니라, 칼라인의 눈물이었다.
‘역시 네 꿈이었구나.’
정신력이 강한 칼라인이 몸이 아픈데다 잠들어 악몽까지 꾸자, 라틸이 그 악몽을 잠시 엿본 모양이었다. 라틸은 천천히 손을 뻗어서 그의 눈가를 쓸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먹먹했다.
‘좋아하던 여자가 죽은 건가. ……어차피 좋아하는 사람은 죽었으니까, 속세에서 도망치듯이 하렘으로 들어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