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누구도 믿지 않겠다2020.08.12.
왜 죽은 연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거지? 그것도 바로 뒤에서? 아이니는 의자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 바람에 나무로 만든 의자에서 끼이익 하는 음산한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아야 하나? 아니면 돌아보지 않고 누구냐고 물어야 할까. 호위? 호위를 불러? 온갖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뒤를 돌아보자.’
더 이상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아이니는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서 느리게 몸을 뒤로 돌렸다. 그러나 높은 의자 등받이 때문에 바로 몸을 뒤로 해도 보이는 건 거의 없었다. 아이니는 마른침을 삼키고서 몸을 약간 기울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보이는 사람도 유령도 없었다. 아무도.
“후우…….”
그걸 본 아이니가 안심하는 찰나.
“아파, 아이니.”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놀란 아이니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늘 헤움의 목소리를 그리워했으나, 실제로 듣게 된 사자의 음성은 소름 돋기만 했다.
“황후 폐하! 황후 폐하!”
그 순간, 누군가 아이니의 팔에 손을 올리며 외쳤다. 아이니는 눈을 번쩍 뜨면서 숨을 훅 들이마셨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황후 폐하, 괜찮으세요?”
아이니는 눈을 부릅뜨다가, 시녀와 호위들이 겁먹은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팔을 건드린 건 시녀였다.
“폐하, 어디가 안 좋으신 건가요?”
시녀가 재차 묻자, 아이니는 주위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폐하?”
“헤, 헤움은?”
“예?”
“헤움은?”
헤움은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를 네 번이나 또렷하게 들었는데도. 아이니는 시녀를 보았다. 그러나 질문을 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헤움은 어디 갔지?”
아이니가 다시 묻자, 옆에 있던 다른 시녀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 황궁에는 귀가 많으니, 헤움 황자님의 이름은 꺼내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뭐?”
아이니는 시녀들이 자신의 말을 오해했단 걸 알아차리고서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다. 방금 헤움의 목소리를 들어서 그래. 못 보았어?”
시녀도 호위도 다들 ‘황후 폐하가 왜 저러시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젓기만 했다. 개중엔 아이니가 헤움이 그리워서 이런다 생각하고는 울상인 이들도 있었다. 정말 그런 게 아닌데. 아이니는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헤움이 그리운 건 맞았다. 목소리를 듣기 전에도 계속 그리워했고. 하지만 환청이라면…… 굳이 이렇게 무섭게 들릴 리가 없지 않을까?
“이쪽으로 들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황후 폐하.”
아이니가 속상한 얼굴로 있자 보다 못한 호위가 나서서 보고했다.
“저쪽은 벽이 높아 쉽게 드나들 수 없고, 드나들더라도 소리가 납니다. 다른 쪽 길은 모두 저희가 철통처럼 지키고 있었습니다. 졸았던 사람도 없고, 사각지대도 없고, 교대를 하느라 틈이 생기지도 않았습니다. 이곳에 온 사람은 정말로 아무도 없습니다, 황후 폐하.”
아이니는 의자 뒤쪽으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촉촉한 잔디가 눌려 있었다. 누군가 그곳에 서 있었던 것처럼.
‘역시. 누군가 여기에 왔어.’
아이니는 호위들에게도 이 자국을 좀 보라고 말하려다가 관두었다. 다들 자기들이 제대로 경비를 섰다 여기는 듯한데. 이 와중에 잔디가 눌린 자국을 보여봤자 믿지 않겠지. 그들은 아이니가 그 자리에 서 있어서 잔디가 눌린 거라 여길 게 분명했다.
“그래. 알았다.”
결국 아이니는 이 얘기를 더 하길 관두었다. 시녀의 말마따나 궁전 안엔 귀가 많으니까. 자신과 아버지가 하이신스에게 사람을 붙여 두었듯, 하이신스 역시 이쪽에 사람을 붙여두었을 테고. 그자들은 그녀가 헤움 이야기를 하면 온갖 과대망상을 할 터.
“가자.”
아이니는 차갑게 내뱉고서 돌아섰다. * * *
“저도 심문에 함께 들어갈까요?”
타시르가 물었으나, 라틸은 직접 할 테니 괜찮다 대답하고서 붙잡은 이들을 지하 감옥에 따로따로 넣어두라 지시했다. 이전에는 대신관이 이곳에 있단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으나, 이번에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 여우가면이 중얼거리고 간 꺼림칙한 말. 그 ‘로드’란 말 때문이었다.
‘일부러 그런 식으로 군 거다.’
라틸은 자신이 그 500년에 한 번 나타난다는 로드일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은 어머니가 배 아파 낳아주셨고, 유모가 기저귀 갈고 분유를 먹여 길러주었다. 라틸이 성장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 숫자만 수백 명. 당연히 로드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꺼림칙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겠지.’
타시르는 이번 일에 아주 믿음직했으나, 예전에 부황의 명령으로 라틸을 조사하기도 했으며, 황제시해범으로 의심하기도 했다. 그런데 습격자들이 라틸을 두고 이상한 말을 또 해대면? 그가 충성심을 부황에게 보일지 자신에게 보일지 알 수 없는 일 아니던가.
‘그 여우가면 자식. 틀라 부하가 분명해. 이간질 고자질 다 틀라 그 자식 특기잖아?’
“문을 열어라.”
옷을 갈아입고 온 라틸이 지시하자, 감옥 앞에 선 간수 둘이 닫힌 문을 열었다. 라틸은 횃불을 들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로 내려가자, 라틸을 습격하려 했던 적 열두 명, 타시르가 잡아온 범인 두 명이 각각 독방 안에 주르륵 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
그러나 개중 몇 명은 벽에 머리를 찍어 자결한 상태였다. 입에 재갈을 채워두고 손 역시 뒤로 돌려 묶어 두었는데, 그 상태로 머리를 박아 자결한 것이다.
‘젠장.’
라틸은 속으로 욕을 뱉고서, 자결하지 않은 습격자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 습격자 역시 재갈을 풀자마자 바로 혀를 깨물려고 했다.
“안 되지.”
라틸은 얼른 손가락을 집어넣어 그가 혀 깨무는 걸 막고서 음산하게 웃었다.
“시체 치워주려고 데려온 거 아니거든?”
* * *
“폐하. 괜찮으십니까?”
라틸이 감옥 밖으로 나오자, 서넛과 타시르가 서 있다가 얼른 다가왔다.
“…….”
시종장도 라틸을 기다리고 있긴 했으나, 서넛과 타시르가 라틸이 나오자마자 양옆에 착 붙어버려서 가까이 오지 못하고 인상만 구겼다.
“뭐. 난 괜찮긴 한데…….”
타시르가 손수건을 꺼내 라틸의 얼굴에서 핏자국을 꼼꼼하게 닦아주는 동안, 서넛은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타시르가 없었더라면 그가 나섰겠지만, 후궁인 타시르가 코앞에서 라틸을 챙기고 있는데 나서긴 애매해서. 쌤통이다 이놈아. 그 모습을 본 시종장은 아까 자신이 뒤로 밀린 게 떠올라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서넛이 먹먹하게 바닥만 보고 있자 괜히 기분이 이상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하지만 라틸은 아까 감옥에서의 일을 떠올리느라 세 사람 사이의 애매한 분위기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날 습격한 이들은 내가 황제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붙잡은 적들 중, 라틸과 여우가면을 습격한 이들은 ‘미행이 붙었으니 처리해라’는 명령을 받고 온 이들이었다. 그들은 지시를 받으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이라 아는 게 정말로 거의 없었다. 그러니 사실상 ‘뭔가를 아는’ 범인은 타시르가 잡아온 둘 뿐인데. 안타깝게도 폴이 접선하려던 쪽은 자결해 버려서 뭘 알아내고 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폴은…….
“1경비단에 있던 그 범인 말이다.”
내내 침묵하던 라틸이 입을 열자, 타시르는 얼른 손수건을 치웠고 서넛도 고개를 들었다. 시종장도 몇 걸음 더 가까이 붙었다.
“폴 말인가요?”
타시르가 묻자, 라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자. 막판에 이젠 안 되겠다 싶으니까, 눈이 돌아가서 날 비난하던데.”
서넛의 표정이 구겨졌다. 타시르는 인상을 쓰는 대신 눈을 빛내며 물었다.
“뭐라 하던가요?”
서넛은 타시르가 라틸의 최측근인 척 끼어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를 흘겨보았지만, 라틸이 가만히 있다 보니 자기가 나서서 가란 소리를 하지 못했다. 라틸은 자신의 궁전 쪽으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자기는 ‘황좌의 진짜 주인’을 위해 선황을 시해한 나한테 경고를 한 거라던데?”
그 말을 듣자마자 시종장은 기가 막혀서 “허.” 하는 소리를 냈고, 서넛 역시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타시르는 “예?” 하고 되물었다. 셋 다 이게 무슨 개소린가 하는 반응들이었다.
“이상하지? 근데 본인은 진짜 그렇게 믿고 있더라고. 자기가 정의고 내가 악인 것처럼.”
이후 라틸은 침궁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침실 앞에 도착하자 사람들을 물리고서 세 사람을 보며 물었다.
“그자가 말하는 ‘진짜 주인’이라는 거. ……틀라 얘기하는 거 같지?”
“그럼 무덤 건은 틀라 황자를 지지했던 세력이 꾸민 걸까요?”
“아니, 타시르. 난 살아서 움직이는 틀라를 말하는 거야.”
라틸이 정정해주자 타시르는 더욱 놀랐다.
“하지만 틀라 황자님은 죽었잖습니까?”
“그치. 죽었지. 근데 죽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 이야기가 자꾸 들려와. 이유가 뭘까.”
라틸이 며칠 전 습격자들에 관해 얘기해주자 타시르는 더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고, 서넛은 이런 중요한 얘기를 타시르까지 알게 되는 게 싫어서 낯빛이 어두워졌다. 비밀 얘기는 서넛과 시종장에게만 하던 라틸이 타시르에게는 제법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듯하자, 타시르가 자연스럽게 라틸의 최측근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타시르는 라틸과 한 번도 합방하지 않은 유일한 후궁이었으나, 서넛이 보기엔 모든 후궁 중 라틸에게 가장 신뢰받고 있었다. 자기를 향한 구애의 눈빛을 읽긴 어려워도 적대적인 눈빛은 읽기 쉬운 법이다. 타시르는 라틸에게 집중하면서도, 서넛이 자신을 차갑게 보는 걸 느끼고서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뭐야, 타시르. 틀라 살아 있다는데 왜 그렇게 좋아해?”
“아. 그거 때문이 아닙니다.”
“입꼬리가 이만큼 올라갔는데 뭐가 아냐.”
“폐하께서 이토록 영민하셔서 기쁜 거지요.”
타시르가 보란 듯 라틸의 옆에 착 달라붙으며 머리를 비비자, 서넛은 한층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는 타시르에게 무어라 하는 대신 라틸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폐하. 그자가 말한 ‘황좌의 진짜 주인’이 다른 사람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라틸은 귀찮게 구는 타시르를 대충 토닥거려주면서 물었다.
“다른 사람이라니?”
서넛은 라틸의 말에 대놓고 이름을 말하진 않았다. 그저 무거운 눈으로 라틸을 보기만 할 뿐. 그러나 그 눈빛만으로도 라틸은 서넛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고는 황당해서 입을 벌렸다. 서넛이 말하는 ‘다른 사람’은 라틸의 동복오빠인 레안이었다.
“서넛 경. 오빠는 나랑 싸워서 물러난 게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면 편하게 황위에 오를 걸, 자기가 싫다고 물러난 거라고요. 오빠 지지자들도 다 그걸 알고.”
레안과 사이가 좋다 보니 라틸의 목소리는 자연스레 날카로워졌다.
“실언하였습니다.”
서넛은 순순히 사과했지만, 라틸은 굳은 표정으로 타시르까지 떼놓으면서 손을 휘저었다.
“됐습니다. 다들 피곤할 텐데 가서 쉬어요. 타시르, 그대도.”
* * * 세 사람을 물리고 방 안에 홀로 들어온 라틸은 옷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 안에 잠겨 있자 범인들을 심문하며 쌓인 긴장이 조금이지만 풀리는 듯했다. 그러나 라틸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라틸은 오빠를 아주 좋아했으나, 서넛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레안이 뒤늦게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레안의 마음은 변치 않았지만 지지자 중에 라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가능성은 낮지만, 방심하고 있다 당하는 것보다는 미리미리 경계하고 대비하는 게 낫지.’
라틸은 욕조 안을 둥둥 떠다니는 말린 꽃잎들을 손가락으로 밀어내다가, 그중 하나를 꽉 움켜잡았다.
‘일이 해결되기 전까진 그 누구도 믿지 말아야겠어.’
* * * ‘아무도 믿지 말아야지’ 다짐은 했으나 정말로 모든 일을 혼자 할 수는 없었다. 미스터리한 일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 역시 라틸의 일이었고, 국무는 하루 종일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도 모자랄 정도로 많았다. 게다가 황녀일 때처럼 자유롭게 사방을 오갈 수도 없는 위치이기에, 라틸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골라 속마음을 들어보고 그들에게 일을 맡기기로 결심했다. 그 첫 번째 대상은, 라틸과 제일 많이 붙어 다니는 근위기사단장이자 어릴 때부터 신뢰했던 사이이고, 라틸이 이미 여러 기밀을 맡기기도 한 서넛이었다.
‘잘 알아봐야 돼. 서넛은 믿을 수 있지만, 오빠와도 우정이 깊으니.’
그렇다고 서넛을 범죄자들처럼 다뤄서 정신력을 약하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라, 라틸은 술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술을 마시면 정신력이 약해져서 속마음이 술술 나오겠지.’
마음을 먹은 그날 밤. 라틸은 술을 몇 병이나 가져다두고 서넛을 방으로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들어온 서넛은 테이블 위를 빼곡히 채운 술병을 보고 놀라서 라틸을 쳐다보았다.
“폐하? 왜 갑자기 술을…….”
“지금 좀 마음이 힘들어서. 술 상대 좀 해주겠습니까, 서넛 경?”
라틸이 그중 하나를 들고 슬쩍 흔들자, 서넛은 잠시 망설이다가 맞은편으로 와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