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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적의 적은 아군인가 또 다른 적인가 (47/367)

47화. 적의 적은 아군인가 또 다른 적인가2020.08.09.

앙제스 상단주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그가 황제를 유혹하라며 아들에게 챙겨준 물품들은 모두 즉석에서 라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남장을 한데다 모자까지 푹 눌러쓴 라틸이 궁정인이라 철석같이 믿은 상단주가, 짐이란 짐을 죄다 라틸에게 맡긴 탓이었다.

16551079201643.png“달라고 하면 안 주시겠지요?”

적당히 시간이 되었다 싶을 즈음. 밖으로 나온 타시르는 라틸에게 힘없이 물었고, 라틸은 당연하다면서 상단주가 맡긴 짐을 죄다 꼭 끌어안았다.

1655107920165.png“응. 나한테 주셨잖아.”

16551079201643.png“주신 게 아니라 맡긴 걸 테지만…… 뭐 괜찮습니다. 물건이야 다시 사면 되니까요.”

1655107920165.png“그래?”

16551079201643.png“예. 게다가 욕심쟁이 같은 폐하의 모습도 사랑스럽군요.”

1655107920165.png“…….”

라틸이 힘없이 짐을 내려놓자, 타시르는 그럴 줄 알았단 듯 웃더니 짐을 도로 들고서 다시 상단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올 때는 그의 손이 홀가분하게 비어 있었다.

1655107920165.png“짐은?”

16551079201643.png“무거우니 나중에 히얼란을 통해 보내라 하였습니다.”

사실 일부러 타시르에게 이 짐이 다 내거란 식으로 말했을 뿐. 라틸도 그 짐덩이들을 주렁주렁 달고서 폴을 추적할 마음은 없었다. 두 손을 홀가분하게 하고 언제든 무기 꺼낼 준비를 해도 모자랄 판에, 그 풍성한 짐을 끌어안고 이동하다니.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렇게 잠깐의 휴식을 뒤로 하고서 라틸과 타시르는 다시 폴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미리 붙여둔 흑림의 다른 추적자가 위치를 알려주었으므로, 두 사람은 금세 폴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일부러 커다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시간을 때우고 온 게 효과가 있었던지, 폴은 아까처럼 뒤를 연신 쳐다보며 이동하지도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과가 나타났다. 식당에도 들르고 물건 사는 시늉도 하면서 평범한 척 굴던 폴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일부러 피해서 갈 만한 음침한 골목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선 것이다. 그 뒤를 쫓아가자, 폴이 누군가와 인사를 나누는 게 보였다. 다들 덩치가 크고 팔이 우락부락한 것이, 보통 사람이 아닌 듯했다.

1655107920165.png“이제 곧 누가 내 아버지 무덤에 낙서를 했나 알게 되겠네.”

하지만 라틸은 그 덩치들을 보면서도 무서워하는 대신 실실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그 표정 어디에도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도 두렵지 않았고. 이건 타시르 역시 마찬가지여서, 폴이 험악해 보이는 사람들과 접선하는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라틸에게 요청까지 했다.

16551079201643.png“범인을 잡으면 범인 얼굴에 흑림 표시를 거꾸로 그려도 될까요? 우리를 사칭했으니 거기 따른 규칙으로 보복하고 싶습니다.”

1655107920165.png“마음대로 해.”

그런데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면서 폴이 저 험악한 사람들과 어디에 가려나 고민한 그 순간.

1655107920165.png‘시선이?’

라틸은 이상한 시선을 느끼고서 확 고개를 들었다.

1655107920165.png“!”

시선을 보낸 이는 지붕 위에 서 있었다. 라틸은 그 지붕 위 사람을 보자마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자가 쓴 여우가면 때문에.

1655107920165.png‘여우가면.’

분명 대신관을 습격하려 한 자들이 여우가면에 대해 말하지 않았나? ‘여우님’이라고 불리던 자가 그들 중 한 명의 머리에 이상한 구슬을 넣어주었다는…… 같은 여우인가? 우연? 저자는 뭔가 알고 있나?

1655107920165.png“타시르.”

여우가면이 홱 돌아서서 다른 쪽으로 가버리자, 라틸은 조용히 옆에 있는 타시르를 불렀다.

16551079201643.png“예, 폐하.”

타시르도 시선을 감지하고 있었던지 폴과 지붕 위를 번갈아 살피는 중이었다. 라틸은 눈짓으로 여우가면이 사라진 지붕 위를 가리켰다.

1655107920165.png“저쪽으론 내가 간다. 너는 폴을 쫓아가 봐.”

16551079201643.png“나누어져도 괜찮을까요?”

1655107920165.png“어느 쪽이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잖아.”

16551079201643.png“그건 그렇죠.”

1655107920165.png“그러니 넌 폴을 쫓아가. 넌 은신술이 나보다 뛰어날 테니 여럿을 상대하기 낫겠지. 저 가면은 내가 쫓을게.”

타시르는 그래도 될지 망설이는 얼굴이었으나, 라틸의 말에 허점이 없자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라틸은 타시르의 등을 툭 두드리고서 여우가면을 쫓아 빠르게 지붕 위로 올라갔다. 이후는 미끄러지지도 않고 쭉쭉 앞으로 나아가서, 빠르게 여우가면을 거의 다 따라잡았다. 여우가면은 빠른 속도로 훅훅 잘도 달아났는데, 아무래도 라틸이 자신을 따라올 줄은 몰랐던 눈치였다. 한참을 달리다가 슬쩍 돌아보는가 싶더니, 라틸이 자신을 바짝 추격하는 걸 발견하자 좀 당황한 듯 휘청였다.

1655107920165.png‘잡았다!’

라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완전히 가까이 가려 했으나, 한 발 앞서 여우가면이 쏙 더 앞으로 치고 갔다. 여우가면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자 라틸은 혀를 내둘렀다.

1655107920165.png‘보통 솜씨가 아니잖아?’

아까도 달아나는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빠르더니. 실제로는 더 빠른 모양이었다. 여우가면 역시 속으로 ‘검술은 취미로 배운 황제인 줄 알았는데.’라며 속으로 감탄했으나, 이 소리는 이번엔 라틸에겐 들려오지 못했다. 들었다 하더라도 별 차이는 없었겠지만. 그렇게 한참의 추격전 후. 마침내 라틸은 여우가면을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손끝에 무언가 잡히는 느낌이 들자마자, 라틸은 그걸 끌어당기면서 자신은 앞으로 나아가 재빨리 상대를 패대기쳤다.

16551079258835.jpg“윽.”

효과가 있어서 여우가면은 짧게 신음하며 나동그라졌다. 곧장 벌떡 일어나긴 했지만. 그 모습을 라틸이 차갑게 바라보았다.

1655107920165.png‘속마음을 들어보면 배후에 관해 줄줄이 알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속마음을 듣기 위해서는 상대의 정신력을 약하게 만들어야 했다. 라틸은 여우가면을 깔고 앉아 가면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러나 가면을 벗기려던 바로 그 순간. 흉악한 무기를 든 사람들이 동시에 이쪽으로 다가오면서 라틸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1655107920165.png‘이건 또 뭐래?’

라틸은 여우가면을 깔고 앉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핏 본 숫자만 해도 십여 명. 다들 검이나 철퇴, 창 같은 커다란 무기를 들었다.

1655107920165.png‘곤란하네.’

그걸 본 라틸은 속으로 탄식했다.

1655107920165.png‘내가 다쳐서 나타나면 다음엔 궁에서 몰래 빠져나오기 어려울 텐데.’

보통은 여기서 죽을까 봐 걱정하겠지만, 라틸은 이자들에게서 자신이 무사할 거란 확신이 든 상태이기에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1655107920165.png‘어이쿠.’

그때. 가장 정면에 있던 검을 든 사람이 라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누구냐 묻는다거나 협박을 한다거나 왜 따라 왔냐거나 뭐 그런 것도 일절 없었다.

1655107920165.png‘뒤쫓아 온 사람은 무작정 죽이라 명령을 한 건가?’

라틸은 허리를 숙여서 검을 피하고는 주먹을 쥐어 상대의 옆구리를 내리쳤다. 합공이 능숙한 건지 그 짧은 찰나 다른 이가 커다란 철퇴를 흔들었으나, 라틸은 몸을 옆으로 움직여 철퇴를 피했다. 그러고는 습격자가 무거운 철퇴를 흔드느라 방어가 약해진 틈에, 그자의 몸 안쪽으로 확 달려가 팔꿈치로 턱을 찍어버렸다. 철저하게 급소 위주의 공격을 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기사 대 기사의 대련이라면 비겁하단 소리를 들을 방식이었으나, 지금은 일 대 다수 아닌가. 라틸은 지금은 자신이 무슨 수를 써도 전혀 비겁하지는 않다고 생각해서, 거리낌 없이 치졸한 방법으로 상대를 잡아내려 노력했다.

1655107920165.png‘여우가면 부하일 거야. 미리 상황을 지켜보다가 나왔겠지.’

라틸은 틈을 보아서 자신의 무기를 꺼내 검 휘두르는 사람의 등을 그대로 그어버렸다.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게. 그 습격에 검을 휘두르던 습격자는 기세등등해 등장한 사람답지 않게 스르륵 쓰러졌다. 그러나 습격 받은 이가 비틀거리다 쿵 쓰러지는 그 순간.

1655107920165.png“!”

라틸은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습격자1이 쓰러지자. 그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여우가면이 습격자2를 기절시키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1655107920165.png‘저자가 왜?’

라틸에게 가면이 벗겨질 뻔한 후 달아났던 여우가면이, 그와 한 패일 거라 짐작했던 습격자2를 먼저 공격하는 장면은 지금이 얼마나 급한 상황인지조차 잊을 정도로 황당했다.

1655107920165.png‘다 한 패 아니었어? 여우 부하 아니었나?’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여우가면의 부하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걸 시작으로 여우가면이 습격자들을 빠르게 제압해 나가는 걸 보면.

1655107920165.png‘뭐야. 나 저 새끼랑 합공해야 돼?’

라틸은 여우가면의 발에 얻어맞자 방향을 바꿔 이쪽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상대를, 검집으로 이마를 쳐 기절시키며 툴툴댔다.

1655107920165.png‘확실하네. 아까는 여우가면이 기절해 있다 생각해서 공격을 안 한 건가 보네.’

습격자들이 여우가면에게도 살수를 펼치자, 라틸은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이지만 빠르게 파악했다. 그렇게 난데없이 여우가면이 습격자들의 적이 되면서 잠깐 동안 더 소란스러웠으나, 라틸과 여우가면은 결국 습격자들을 거의 다 기절시키는 데 성공했다.

1655107920165.png‘적의 적은 잠깐은 아군이 되지만 적의 적이란 이유만으로 온전히 내 편이 되는 건 아니다.’

습격자들이 기절하자 라틸은 다시 여우가면 쪽을 경계하며 무기를 손 안에서 빠르게 한 바퀴 돌렸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여우가면은 라틸을 향해 돌진하지 않았다.

1655107920165.png‘뭐 하는……?’

오히려 여우가면은 주머니에서 리본을 꺼내더니, 기절한 습격자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묶었다. 거의 포장하는 수준으로.

1655107920165.png‘대신관을 습격한 자들이 말한 그 여우가면이랑 다른 여우인가? 틀라랑 관련 있는 놈이 아닌가?’

그걸 본 라틸은 혼란에 빠져서 여우가면을 불렀다.

1655107920165.png“이봐. 너 누구야. 너 누군데 그걸 묶어?”

여우가면은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을 던지긴 했으나 사실 대답이 돌아오리란 기대를 한 건 아니어서, 라틸은 실망하는 대신 무기를 거꾸로 돌려 잡았다. 여우가면의 정신을 흐리게 해서 저자가 무슨 꿍꿍이인지, 누구인데 수상쩍게 쳐다보다 갑자기 도와준 건지 속마음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가 아주 잠깐 한 배를 탔다 한들 봐줄 마음은 여전히 없었다. 그러나 라틸이 검을 채 휘두르기도 전. 눈 깜짝할 사이 여우가면은 기절한 습격자들을 놓고 라틸의 곁으로 다가왔다.

1655107920165.png“!”

코앞으로 다가온 여우가면은 자신의 무기를 꺼내지 않았다. 라틸이 반사적으로 뒤집은 검을 휘둘렀으나, 가면은 오히려 그 공격을 몸으로 그냥 받아내기까지 했다.

1655107920165.png‘뭐야 이건?’

그 대담한 행동에 더욱 혼란스러워진 라틸에게, 여우가면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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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079258835.jpg“스스로를 보호하셔야 합니다.”

1655107920165.png“!”

1655107920165.png‘충고? 이 와중에? 갑자기?’

16551079258835.jpg“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위험한 일에는 아직 당신이 직접 나설 때가 아닙니다.”

1655107920165.png“너…….”

16551079258835.jpg“로드.”

1655107920165.png“!”

네가 뭔데 나한테 충고하느냐고 물으려 했으나, 여우가면은 라틸의 곁에 다가왔을 때처럼 눈 깜빡할 사이 뒤로 물러나 벽과 벽 사이 그늘로 들어갔다. 아까 라틸과 추격적을 벌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였다. 라틸이 바로 뒤따라갔지만, 여우가면은 그 사이 이미 사라져 있었다.

1655107920165.png‘뭐야 그건? 진짜 틀라네 여우랑 다른 여우야?’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아까 라틸과 헤어져 폴 쪽을 쫓아갔던 타시르가 양쪽 어깨에 사람을 하나씩 들쳐 메고서 나타났다. 그중 한 명은 폴이었는데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었고, 다른 쪽 사람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16551079201643.png“괜찮으십니까?”

1655107920165.png“난 괜찮은데. 너는? 그자는 뭐냐?”

16551079201643.png“누군진 폐하께서 알아보셔야지요. 폴이 만나려던 사람입니다. 최종 배후인진 모르겠으나 일단 들고 와봤습니다.”

1655107920165.png“!”

엄청난 이야기를 손쉽게 한 타시르는, 자신이 잡아온 두 사람을 바닥에 내려놓다가 잘 포장된 습격자들을 보고는 라틸에게 엄지를 내밀었다.

16551079201643.png“저보다 더 많이 잡으셨군요. 과연 영민하십니다.”

1655107920165.png“영민한 거랑은 상관없어 보이는데. 그리고 이게 무슨 낚시냐…….”

16551079201643.png“그래도 많이 잡으면 좋지요. 게다가 폐하께서는 포장까지 해두셨지 않습니까. 대단하십니다. 전 포장은 못 했는데요.”

1655107920165.png“포장은 내가 한 거 아냐.”

타시르가 ‘그럼 누가 했는데요?’ 하는 눈으로 라틸을 보았다. 라틸은 여우가면을 쓴 그 괴상한 자가 자신에게 무척 친한 척 말을 걸더란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16551079201643.png“폐하?”

그러다 타시르가 다시 묻자, 라틸은 우선 습격자들부터 추궁하기로 하고서 말을 돌렸다.

1655107920165.png“이자들은 다 감옥에 넣어놔. 내가 절대로 거짓말 따위 못하게 추궁할 수 있으니까.”

  * * *

16551079375512.png‘황후 자리에 올랐으나 이는 이름뿐이다.’

카리센의 황후이자 대단한 다가 가문의 적녀. 다가 공작이 가장 총애하는 자식. 공신의 딸이자, 국민들이 사랑하는 황후. 늦은 밤. 아이니는 정원에 놓아둔 어두컴컴한 의자에서 자신에게 따라오는 수식어들을 떠올리다 허망하게 웃었다. 이렇게 많은 칭찬을 들으면 무얼 하나. 남편이란 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해 매일 갈증에 허덕이고, 그녀와는 손가락 하나 스치려 들지 않는다. 차라리 그뿐이면 낫다. 정략결혼을 한 부부 중엔 이렇게 남처럼 지내는 이들이 많으니. 하지만 하이신스가 그녀를 내칠 준비를 한단 걸 알면서도 이를 지켜보아야만 하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이 자리는 너무나 위태로웠다.

16551079375512.png‘헤움.’

아이니는 죽어버린 연인을 떠올리고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그가 승리했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그를 떠올릴 때마다 아이니는 하이신스는 물론 아버지인 다가 공작까지도 증오스러웠다. 아버지가 헤움을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그때였다.

16551079375521.jpg“아이니.”

어둠 속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니는 눈가를 닦다가 흠칫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16551079375512.png‘이 목소리……?’

16551079375521.jpg“아이니.”

목소리가 아까보다 더욱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자, 아이니는 손을 천천히 아래로 떨구었다. 헤움. 헤움의 목소리였다. 늘 그리워했던 그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를 오랜만에 들었으나, 아이니는 반갑기보다는 두려웠다. 이 목소리를 낼 사람, 그녀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던 사람이 이미 죽어버린 걸 알기에. 그런데 왜? 이 목소리가 왜 여기서 들려오는 거지?

16551079375521.jpg“아이니.”

아이니는 다리 위에 손을 올리고서 마른침을 삼켰다.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세 번째 목소리가 들려온 곳. 그곳은 의자 바로 뒤였다. 의자 등받이에 가려 보이지 않는 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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