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아버님, 뒤를 돌아보세요2020.08.05.
비교적 평범한 인상. 묻혀가기 좋은 분위기. 딱히 눈에 띄지 않고 성실해 보인다. 바꿔 말하자면 스파이가 되기 제일 좋은 조건이었다. 라틸은 홀로 수상한 생각을 하는 자를 단단히 기억해 두었지만, 굳이 그 자리에서 바로 골라내진 않았다.
‘혼자서 그런 행동을 하진 않았을 거다.’
라틸이 원하는 건 피라미가 아니라 그 너머에서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을 배후였다. 감히 아버지의 무덤을 훼손하고 이상한 편지를 떨어트리고 간 배후.
‘틀라. 네가 아니길 빈다. 그럼 넌 진짜 쓰레기거든.’
“폐하. 괜찮습니까?”
라틸의 표정이 서늘해지자 서넛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뜬금없이 경비병들에게 기합을 내리더니, 난데없이 첩자 이야기를 하며 무서운 표정을 짓자 당황스러운 듯했다.
“그럼요. 아주 기분 좋습니다.”
“수상한 자를 찾으신 겁니까?”
“그런 거 같습니다.”
“누굽니까?”
라틸은 순순히 대답해주는 대신 손가락을 입술 앞에 가져다댔다. 쉿, 하는 제스처로.
“이런 건 비밀로 하는 겁니다. 나중에 말해줄 테니 지금은 참습니다.”
“!”
서넛은 라틸이 자신에게도 이야기를 해주지 않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라틸과 서넛 사이의 끈끈한 신뢰를 생각하면 충분히 나올 만한 반응이었다. 게다가 라틸이 서넛에게 맡긴 일만 해도 몇 개던가.
“혹시나 싶어서요. 확실해지면 말해주겠습니다.”
사실 라틸이 첩자에 대해 서넛에게 알려주지 않은 건, 그에게 ‘뭘 근거로’ 첩자를 알아낸 건지 알려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다른 사람에겐 대충 둘러댈 수 있지만, 늘 옆에 찰떡처럼 붙어 있는 서넛에겐 대충 둘러대봤자 전혀 통하지 않을테니까. 물론 솔직하게 말하면 해결될 일이지만…… 그건 싫었다. 라틸은 자신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알릴 마음이 없었다. 속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니. 수상한 놈이나 미래의 반역자 등을 잡아내기 딱 좋은 능력이지만, 상대를 꺼림칙하게 만드는 능력이지 않은가.
“지금 몹시 섭섭해지고 있습니다. 폐하의 최측근에서 밀려난 기분입니다.”
라틸은 웃으면서 서넛의 등을 두드리고 돌아섰다.
“서넛 경도 전에 오빠랑 나 사이에서 망설였으니 비긴 겁니다.”
* * * 라틸이 서넛 대신 이번 일을 도울 사람으로 선택한 건 타시르였다.
“타시르.”
라틸이 불쑥 찾아오자, 타시르는 방 안에서 자기 시종과 이상한 도안을 그리다 말고 얼른 웃으면서 허리를 들었다.
“폐하. 이렇게 또 뵙다니. 아주 기쁩니다.”
“그건 뭐야?”
“디자인 중이었습니다.”
“디자인?”
“폐하의 손짓 한 번에 팔랑,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릴 의상 디자인이요.”
그딴 거 만들지 마. 라틸이 눈과 입이 네모꼴이 되어 쳐다보았으나, 타시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서 의자를 빼어 라틸에게 앉으라 권했다.
“한번 살펴보시겠습니까? 폐하의 취향도 반영해 드리겠습니다. 어느 쪽 노출을 좋아하실지? 힌트를 드리자면 전 어깨가 아주 멋지답니다.”
라틸은 쓸데없을 정도로 전문적으로 그려진 도안을 내려다보다가 진심으로 물었다.
“이런 건 하더라도 좀 몰래 하면 안 될까?”
안될 건 없다면서 타시르가 도안을 접자, 내내 얼굴이 붉어져 있던 타시르의 시종이 황급히 도안을 챙겨 밖으로 달아났다. 뻔뻔한 타시르와 달리 시종 쪽은 황제에게 이 계략을 들킨 게 아주 부끄러운 듯했다. 하지만 시종에게 자기 몫의 수치심까지 넘겨버린 타시르는, 눈웃음을 짓더니 라틸에게 슬쩍 몸을 기대며 물었다.
“차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커피? 아니면…… 저를?”
“커피.”
“바로 대답하시네. 차가우십니다.”
“어, 차가운 거 좋아해. 말 나온 김에 아이스 커피로.”
“아이스 타시르는 안 됩니까?”
“됐어. 아, 크림도 넣어줘.”
“아이스 타시르에도 크림 얹어 드릴 수 있는데요.”
“커피로 부탁합니다.”
라틸이 정색하고 말하자, 타시르는 시무룩하게 일어나 방 한쪽에 놓인 간이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가 커피 가루를 고르느라 바스락바스락 듣기 좋은 소리를 내는 사이. 라틸은 타시르가 모르도록 소리를 죽여 웃었다. 하지만 타시르가 커피에 얼음을 넣어 왔을 때는 이미 라틸의 입가엔 함박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고마워.”
“마음이 변하면 언제라도 말씀하시길. 아이스 타시르부터 핫 타시르는 물론, 크림, 꿀, 설탕까지 모든 옵션 추가가 가능하니까요.”
“커피 맛있네.”
“그냥 절 무시하기로 하신 건가요?”
라틸은 픽 웃으면서 “그건 아니야.” 하고 대답하고서, 타시르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길 기다렸다가 물었다.
“실은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시던데.”
“실은 명령할 게 있어서 왔어.”
“……하시지요.”
“흑림 애들, 은신술 다 잘하지?”
“전문이죠.”
“누구한테 좀 붙여뒀음 하는데.”
라틸이 수상하던 경비병의 인상착의며 얼굴 생김새를 세세하게 설명하자, 타시르는 바로 알아듣고서 웃었다.
“1경비단이라면 폴 말씀하시는 거군요.”
“이름은 몰라.”
손가락으로 짚기만 해도 이름이야 알아낼 수 있었겠지만, 그랬다간 라틸이 그자를 눈여겨본단 걸 모두가 알게 된다. 그자 역시 포함해서. 이를 원치 않았기에 라틸은 그 수상쩍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해두고, 일부러 이름을 묻지 않은 것이었다.
“폴이 맞을 겁니다.”
“그래, 그럼 그 폴한테 사람을 붙여두고 계속 감시하라 그래.”
“언제까지 시킬까요? 장기전으로 간다면 두 명이나 세 명쯤 붙여두는 게 낫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곧 제 머리한테 찾아갈테니.”
“?”
“지켜보다가 경비병 숙소 밖으로 이동하면 내게 알려줘.”
“잡으실 겁니까?”
“아니.”
라틸은 단호하게 말하고서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들이키고서 웃었다.
“직접 추적할거야.”
“!”
* * * 무덤을 그 꼴로 만든 건 그 폴이란 경비병 한 명만이 아닐 것이다. 무덤에 접근하는 게 쉬운 위치라 한들, 다른 이들의 시선까지 저절로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작은 건물이라지만 건물의 한 면을 완전히 뒤덮고 있던 그 커다란 낙서. 그걸 교대 시간 사이에 혼자서 그린다?
‘말도 안 되지.’
하지만 그자 외의 다른 경비병들은 라틸이 슬쩍 흔들어 보아도 다들 누가 범인인가 불안해하기만 할 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범인은 경비병이 아니거나 다른 내부인일 가능성도 있을 터. 이 때문에 라틸은 직접 범인을 추적해보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선 그냥 직접 나서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서. 문제는…….
“우리 데이트하는 걸까요?”
“아니.”
어쩌다보니 타시르까지 데리고 나왔단 거지만. 라틸은 옆에서 팔짱을 낀 채 눈을 반짝거리는 타시르를 보지 않기 위해, 일부러 다른 방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타시르는 선황제 무덤에 대한 건도 알았고, 수상쩍은 편지에 대한 건도 알았고, 틀라 황자에 대해서도 알았다. 대신관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그래도 손꼽힐 정도로 많은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악명 높은 암살 집단의 수장이니 은신술은 기가 막힐 터. 라틸이 타시르를 챙겨온 건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도움 좀 되라고.
‘진짜 시끄럽네.’
하지만 추적하는 내내 타시르가 옆에서 말을 걸어대니 이쪽까지 집중력이 흩어졌다. 라틸은 타시르를 데려온 걸 조금 후회했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면서 이동하는 게 더 수상하지 않거든요. 게다가 딱 달라붙어서 먼저 추적 중인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타시르가 말하는 ‘먼저 추적 중인 사람’은 흑림의 암살자로, 라틸이 폴에게 붙여두라 한 그자였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그자는 계속 은신해서 추적하고, 라틸과 타시르는 평복 차림으로 행인인 척 추적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타시르가 말을 마친 지 5분도 안 되었을 때.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던 폴이 갑자기 우뚝 멈춰서더니 확 뒤를 돌아보았다. 라틸과 타시르는 거의 동시에 몸을 옆으로 피했다. 이후 숨을 고르다가 고개를 내밀어 보니, 풀은 다시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연신 뒤를 힐끔거리는 걸 보니, 누군가 자기를 뒤따르고 있단 짐작을 한 듯했다.
“당장 쫓으면 바로 티가 나겠네요.”
그걸 본 타시르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라틸도 그 말에 동의했다.
“여기서 좀 시간을 보내다 갈까? 아니면 지름길로 앞서 갈까?”
은신술은 타시르가 더 전문가일 거란 생각에 라틸이 묻자, 그는 잠시 생각하는 척 하다가 엄지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쪽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떨까요? 그 편이 더 자연스러울 겁니다.”
라틸은 타시르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거의 3층에 가까운 높이에 앞에는 은색 간판이 번쩍번쩍 박혀 있는 호화로운 건물이었다. 그리고 간판에 써진 이름은…….
“앙제스 상단?”
타시르가 후계자로 있는 상단이었다. * * * 라틸은 황태녀일 때 알현실에서 앙제스 상단주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타시르가 후궁으로 들어올 때 서약식에서도 보았고, 이후 식사 자리에서도 보았다. 하지만 라틸의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앙제스 상단주는 감히 황제를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이 탓에 그는 모자를 푹 눌러쓴 라틸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아들아!”
타시르를 보자 반갑게 달려온 앙제스 상단주는 라틸 쪽으로는 아예 시선도 주지 않고서 웬일이냐, 말이라도 하고 오지, 근데 그냥 나와도 되는 건 맞냐, 사고 치고 온 건 아니냐 등등 재잘재잘 온갖 질문을 퍼부었다. 그러는 동안 라틸은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쓰고서 상단 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번쩍번쩍하네.’
과연 나라에서 제일 잘 나간단 상단이라고 할 만한 내부였다. 라틸은 새삼 타시르가 상단 후계자란 걸 떠올렸다, 물론 안 떠올려도 알고 있긴 했는데. 흑립 수장이란 걸 알게 된 후로부터 웬지 타시르 하면 상단 후계자보다는 암살집단 수장 이미지가 강했던 것이다. 원체 얼굴 자체가 마약상 분위기이도 하지만. 상단주는 거의 30분가량을 서서 타시르와 이야기 한 후에야, 뒤늦게 라틸 쪽을 눈짓하며 아들에게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구니?”
“폐하께서 제게 붙여주신 시종입니다, 아버지.”
“히얼란은 어쩌고?”
“히얼란 혼자서 일을 다 할 순 없죠.”
“그건 그렇지.”
상단주가 라틸에게 보낸 관심은 그게 전부였다. 이후 상단주는 타시르에게 온 김에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식사를 하고 가라며 커다란 식당 안으로 이끌었는데, 라틸도 데려가주긴 하였으나 눈길조차 주지 않고 다시 타시르에게만 온갖 이야기를 퍼부었다. 그래도 음식까지 주지 않은 건 아니어서, 라틸은 탱탱한 청사과 푸딩과 계란 과자를 먹으며 상단주가 퍼붓는 이야기를 즐겁게 감상했다.
“타시르. 너 폐하와 동침한 적이 한 번도 없다면서.”
“아니, 아버지가 그걸 어찌 아세요?”
“히얼란에게 들었다.”
“그 입 가벼운…….”
“대체 그 얼굴은 어디에 쓰는 거냐. 내가 서약식 때 보니 너만큼 잘생긴 사람은 하나도 없던데.”
“그거야 아버지가 제 아버지니까 그러시는 거죠.”
“그럴 리가! 네 어머니도 내 말에 동의할 거다.”
“그거야 어머니도 제 어머니니까 그러시는 거고요.”
“어쨌든 넌 잘생겼어. 게다가 넌 아주 독특하게 잘생겼단 말이다. 이 얼굴을 가지고서 폐하와 한 이불조차 못 덮다니…… 정말 한심해.”
라틸은 오독오독 과자를 까먹으면서 타시르가 아버지에게 잔소리 듣는 모습에 소리 죽여 웃었다.
‘내 앞에선 맨날 능글대더니. 아버지 앞에선 꼼짝도 못 하네.’
“하지만 전 폐하와 자주 둘만의 데이트를 합니다, 아버지.”
‘어디서 저런 거짓부렁을.’
“데이트? 정말이냐?”
“그럼요. 아주 최근에도 했는걸요.”
타시르가 사과즙을 마시는 척하며 라틸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 최근의 데이트가 지금 상황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아버지 말에 꼼짝도 못 한다는 거 취소다. 라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서 다시 과자를 입 안에 넣었다.
“그러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걱정이다, 타시르.”
“염려마세요. 불같은 사랑은 빨리 꺼지기 마련입니다. 폐하와 저는 차근차근 애정을 쌓아가고 있으니, 곧 승은을 내려주시겠지요.”
“온 김에 내가 좋은 물건들을 챙겨주마. 가져가.”
“물건이요?”
“피부를 진주처럼 만들어준단 분가루가 있다. 히얼란한테 삼일에 한 번씩 발라 달라고 그래.”
“예.”
“벗는 것보다 더 야하게 보일 수 있는 옷도 있다. 몇 벌 챙겨줄 테니, 슬쩍 입고 폐하를 찾아가 봐.”
“예에.”
타시르가 애매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라틸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서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이고 아버님…….
“아, 그렇지! 옷 실밥을 뜯어뒀다가, 적당할 때 흘러내린 척 하면 어떨까?”
“글쎄요…….”
타시르가 다시 라틸의 눈치를 살피자, 라틸은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서 식당 밖으로 나와 쪼그려 앉았다. 안 웃고 싶은데 어깨가 마구잡이로 떨렸다.
‘상단주는 타시르랑 생각하는 게 똑같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