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너였구나!2020.08.02.
아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클라인의 속마음이 들려오는 거지? 라틸은 놀라서 입을 벌리고 클라인을 쳐다보았다. 그 놀란 표정을 본 클라인은 덩달아 놀란 표정이 되더니, 곧 오만하게 웃으면서 턱을 세웠다.
“제가 오니까 그렇게 좋으십니까?”
자기가 쫓아온 걸 보고 라틸이 감격했다고 오인한 듯했다. 쫓아온 걸 보고 감격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라틸은 감격한 건 맞았으므로 고개를 순순히 끄덕였다.
“응.”
라틸이 바로 수긍할 줄 몰랐던지, 클라인은 자기가 물어 놓고는 자기가 당황해서 괜히 헛기침을 해댔다. 하지만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올라가는 걸 보니 좋은 모양이었다. 아주 많이.
“네가 와서 좋다.”
라틸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정말이다. 그렇게 몇 군데를 돌아다녀도 들리지 않던 속마음이 갑자기 들리다니. 많이 기뻤다. 물론 클라인의 속마음을 들으면서도 아직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사례가 몇 개 쌓이면, 그것만으로 추측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같이 산책할까?”
그래도 혹시 자신이 들은 속마음이 진짜가 아니라 환청일지도 모른단 걱정에 라틸이 슬며시 물어보자, 클라인은 안색이 금세 환해져서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
[난 개가 아닙니다!]
“손!”
자기는 개가 아니란 마음속 반항과 손이 동시에 나오자, 클라인은 반사적인 자신의 행동에 충격을 받아 눈이 동그래졌다. 라틸은 입술을 꽉 깨물고서 클라인의 손을 꼭 깍지 껴 잡았다.
‘이거 귀엽네.’
[폐하는 손이 작네. 커 보였는데 직접 잡으니까 나보다 작아. 손에 굳은살…… 검을 잡아서 그런가. 검 휘두르는 거 보고 싶네. 대련하자 해볼까? 호위기사랑 매일 대련하시던데, 나랑도 하자 할까? 땀 흘린 척 대련하고서 옷을 벗어버릴까? 폐하는 근육을 좋아하시지. 나도 근육 많은데. 젠장, 내 근육을 보셔야지 그 딜러 근육은 그냥 덩치만 큰 풍선이란 걸 아실 텐데. 아. 그런데 폐하 손 진짜 좋다. 단단한데 말랑해. 근데 손이 차갑네. 괜찮아, 내 손은 뜨거우니까. 폐하는 내 손을 잡고 따뜻하다 생각하시려나? 아주 좋으시겠지. 손이 따뜻하면 마음이 따뜻하다던데, 어쩌면 그걸 생각하고 계실지도. 아아 손 진짜 좋다. 더 만져봐도 되나? 너무 쉬운 남자처럼 보이려나? 그럼 뭐 어때, 우린 어차피 부부이고……. 젠장, 부부라니. 아주 좋군!]
하지만 이어서 들려오는 클라인의 속마음 폭탄에 라틸은 얼굴이 화끈거려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니, 하나도 안 귀여워. 속으로 그만 쫑알거려! 민망하잖아!’
* * *
“클라인은…….”
라틸이 서류를 보다가 갑자기 멍하니 중얼거리자, 맞은편에서 보고서를 함께 정리하던 시종장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예?”
“아니, 아닙니다. 그냥. 첩자로 온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예?”
라틸의 말이 영 뜬금없다 여기는 듯했다. 그럴 것이다. 라틸이 보고 있던 건 서쪽 영지의 궁내관과 영주의 서출 자식 간에 일어난 충돌 관련 보고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클라인 얘기라니. 이상해할 만도 했다. 라틸은 고개를 젓고서 얼른 보고서를 도로 움켜잡았다. 그런데 한참 이와 관련된 얘기를 나누던 도중이었다.
“폐하.”
다른 비서 하나가 공개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소곤소곤 보고했다.
“대현자님과 레안 황자님께서 오셨습니다.”
“오빠가 빨리 와 줬구나.”
라틸은 레안이 왔단 이야기에 활짝 웃고서 얼른 벌떡 일어났다.
“사블레 후작. 이건 급한 건이 아니니 나중에 봅시다.”
“예, 폐하.”
대관식 날 오빠와 의견이 달라 조금 충돌하긴 했으나, 라틸은 하나뿐인 동복오빠를 아주 많이 좋아했다. 게다가 어차피 형제자매 간의 싸움은 크게 번지지 않는 한 곧 풀리기 마련. 라틸은 오빠를 볼 생각에 신이 나서 달려갔다.
“라틸!”
대기실에서 라틸을 기다리던 레안도, 동생이 오자 라틸이 즉위하기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두 팔을 벌려 동생을 꽉 끌어안았다. 황제 자리에 오른 라틸을 이렇게 대할 수 있는 건 어머니와 오빠가 유일했다. 라틸은 히히 웃으면서 오빠와 서로의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헤집다가, 뒤늦게 대현자 쪽에도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현자님.”
“두 분은 늘 사이가 좋으십니다.”
대현자는 라틸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라틸의 오빠인 레안이 그의 자식 같은 제자인데다, 라틸 쪽도 어릴 때부터 보아 왔기에, 사이좋은 남매의 모습이 보기 좋다 여기며 인자하게 웃었다. 라틸은 몇 마디 더 오빠와 대현자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다가, 두 사람에게 식사 대접부터 풍족하게 한 다음에야 여기에 와 달라 부탁한 사연을 이야기했다.
“실은 대현자님. 이번에 대현자님을 뵙고 싶다고 한 건 좀 심각한 일 때문입니다.”
“그러리라 생각했습니다. 어떤 일이신지요?”
“대현자님은 혹시 구마 방법에 대해 아십니까?”
라틸의 질문에 대현자가 커피를 마시다 말고 손을 멈칫했다. 이윽고 그는 당혹스러운 듯 라틸에게 되물었다.
“구마 방법이요?”
요즘 세상에 뜬금없이 구마 방법 얘기를 꺼내자 좀 황당해하는 눈치였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기에, 라틸은 차근차근 그간의 일을 꺼냈다. 물론 기밀로 해야 하는 몇 가지는 제외하고. 대현자는 라틸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렸으나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그리 신통치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저도 그 부분에 관심이 많아서 늘 자료를 찾아보고 있습니다. 진짜 옛날에 있던 일인지, 전해지면서 옛날에 일어난 전쟁이나 돌림병 같은 게 그런 형태의 전설로 바뀐 건 아닌지, 그런 식으로 접근하고 있었지요.”
“어떻던가요?”
“500년을 주기로 흑마법사들이 부흥한단 걸 알아냈습니다.”
힛라 노신관도 500년 주기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라틸은 아는 척 나서는 대신 처음 듣는 얘기인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대현자가 얘기한 건 힛라 노신관이 한 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몇 가지 더 보태진 이야기도 있었다. 오염된 땅에서 시체가 변한 좀비, 시체를 먹는 식시귀, 산 자의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 사람이면서도 이들과 힘을 합치고 이들에게서 힘과 권력을 얻어내는 흑마법사 등이 500년 주기로 부활하는 대표적인 이들이란 것. 좀비는 이성이 없지만 그 수가 많은데다 감염성이 높아서 위험하고, 식시귀와 뱀파이어는 감염성이 낮고 숫자도 적지만 사람으로 흉내를 낼 수 있단 것. 이 모든 이들의 구심점이 되는 인물이 ‘로드’란 존재란 것 등이었다.
“로드…….”
“예. 그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거의 알지 못하지만, 그자의 존재와 500년 주기의 부활이 관계된 건 확실합니다.”
로드 단어를 들은 라틸은 가짜 황제시해범의 죽음을 떠올리며, 아까 대현자에게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나 더 꺼냈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가짜 황제시해범이요. 사실 틀라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로드’란 말을 뱉으면서 죽었습니다.”
“!”
라틸의 말에 대현자와 레안이 둘 다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정말입니까?”
“틀라를 로드라 불렀다고?”
“어. 그리고 며칠 전에 내 즉위 연회 때. 습격자가 나타난 적이 있는데, 그자들을 추궁하니까 그러더라고. 자기들은 틀라의 명령으로 온 거라고.”
레안은 대현자를 힐긋거리며 물었다.
“하지만 틀라는 죽었잖아? 분명 처형 당했다고…….”
“그러니까.”
대현자는 아까보다 훨씬 심각한 표정이 되어 연신 무릎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라틸의 말을 더이상 황당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듯했다.
“만약 틀라 황자님이 살아 있고 전설의 ‘로드’라면, 궁극적으론 틀라 황자님을 죽여야 할 겁니다.”
한참을 그런 후에야 대현자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마치 자기가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단 투로. 확실히. 대현자의 입장으로서는 선황이 총애하던 황자이자 황제의 이복형제를 죽여야 한단 말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미 죽은 사람을 무슨 수로 또 죽이는지는 둘째 치고라도.
“그 외엔 방법이 없어요? 틀라를 찾기 전에 좀비가 먼저 떼로 발생하면요?”
“죄송합니다, 폐하.”
“미치겠네.”
“……좀비는 모르겠지만, 식시귀와 뱀파이어는 햇빛 아래에서 활동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햇빛?”
라틸은 전설처럼 전해지는 뱀파이어 얘기를 떠올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무서운 얘기라 여겼는데, 진짜이긴 하구나.
“예.”
“다른 건요?”
“더 알아보겠습니다.”
“…….”
“그리고 틀라 황자님의 위치도 제 정보력을 다 동원해 알아보고, 관련된 이야기를 폐하께 계속 전하겠습니다. 다른 구마 방법이나 약점이 있는지도요.”
* * * 라틸은 대현자와 레안에게 며칠 황궁에서 머물면서 쉬다 가라 제안했지만, 두 사람은 찾아야 할 게 너무 많다면서 그날 저녁 바로 돌아가버렸다. 라틸은 대현자의 눈이 반짝거리는 걸 보고서, 자신이 그들에게 의논한 이 새롭고 오싹한 화제가 대현자의 학구욕을 제대로 자극했단 걸 깨달았다. 대현자는 이 일을 심각하게 여기면서도 자신의 다음 연구 대상으로 여기는 게 분명했다. 레안은 그래도 동생에 관련된 일이다보니 좀 더 진지하게 이 일을 고민하는 듯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구마 방법에 대해 알게 된 거라곤 햇빛 외엔 없는 상태로 며칠이 훌쩍 지나갔고, 서서히 사람들도 카지노 딜러가 여섯 번째 후궁으로 들어온 충격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 즈음. 라틸은 얼음물을 마시다가 뜻밖의 가설을 떠올렸다.
‘내 능력!’
지난 며칠 간 평화롭게 지내는 내내 라틸은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듣지 못했다. 혹시나 싶어 클라인에게 연달아 가 보았으나, 이번에는 그의 마음이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 몰라 다른 사람들을 주욱 둘러보아도 마찬가지. 그 때문에 ‘능력이 그새 사라졌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퍼뜩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내가 속마음을 읽었을 때, 모두 상대가 놀라거나 마음이 약해져 있거나, 아니면 속으로 강하게 외칠 때였어. 외친다고 하니 좀 이상하지만 하여튼!’
첫 번째 상황에서 라틸을 보기 전, 그 귀족은 대신관을 찾는 데 몰두해 있었다. 그러다 라틸을 만나자 몹시 놀라고 당황해 했다. 이후 두 번째 상황. 뒤에서 라틸을 습격한 그 습격자는 라틸을 기습하면서 마음을 다잡는 것처럼 속으로 크게 ‘죽어!’ 하고 외쳤다. 세 번째 상황. 감옥에서 만난 습격자들. 그들은 처음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라틸의 문초를 받아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지자 점차 속마음이 들렸다. 마지막 네 번째 상황에서 클라인. 처음엔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으나, 뒤쫓아 와서 산책을 제안해 달라고 간절히 염원했을 때. 그땐 그의 생각이 들렸다.
‘이거야. 분명해. 상대 마음이 약해지거나, 반대로 또 엄청나게 강해질 때 나한테 들리는 게 틀림없어.’
라틸은 흥분해서 물컵을 서넛에게 건네며 다급히 지시했다.
“서넛 경! 지금 당장 1경비단을 모아 주세요! 기합을 내려야겠습니다!”
난데없는 기합 얘기를 라틸이 활짝 웃으면서 하자, 서넛은 “예?” 하고 되물었다.
“빨리!”
그러나 라틸이 너무 좋아하면서 재촉했으므로, 서넛은 당황해하면서도 얼른 1경비단을 연무장에 집결시켰다. 1경비단은 사자의 궁이 훼손된 일로 이미 한 차례 강도 높은 기합을 받았기에, 이번에 또 불려오자 잔뜩 긴장해서 얼어붙었다.
‘하지만 이 정도론 부족해.’
아직 누구의 속마음도 들리지 않는다. 라틸은 자신의 가설이 옳기를 바라면서, 경비단에게 차가운 척 명령을 내렸다.
“사자의 궁이 훼손되도록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건 너희가 그만큼 방심하고 있어서 그런다. 한 번 기합을 받았지만, 또 방심할 수도 있으니 한 번 더 받자. 기합.”
라틸의 명령에 경비단원들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연무장 50바퀴!”
그러나 황제가 몸소 손가락으로 방향까지 가리키며 지시하자, 경비단원들은 어쩔 수 없이 연무장을 뛰기 시작했다. 라틸은 그 모습을 보며 서서히 미소를 지었다. 43바퀴쯤부터 슬슬 한두 명씩 속마음이 들려오더니, 50바퀴를 다 돌고 나자 속마음이 아주 와글와글 시끄럽게 들려올 지경이 되어서.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라틸은 일부러 더욱 싸늘한 표정을 만들며 말했다.
“사실 너희가 이번에 기합을 받은 건 사자의 궁 때문이 아니다.”
그러면 왜 이러시는 건데요! 수많은 속마음들이 라틸을 향해 항의했다. 라틸은 서늘하게 웃으면서 일부러 그들을 떠보았다.
“바로 곁에 첩자가 있는데 이걸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곧이어 속마음들이 더욱 시끄러워졌다. 대부분은 ‘그게 누구지?’ ‘애리나 양과 몰래 데이트를 했는데, 혹시 이것 때문에 첩자로 오해 받으면 어쩌지?’ 등등 긴장하거나 걱정하는 소리였다. 그 가운데서 하나. 라틸을 자극하는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거짓말일 거다. 증거는 단 하나도 남기지 않았어.]
라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저자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