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후궁들은 여가 시간에 뭘 하고 지낼까2020.07.29.
대신관의 벗은 몸은 옷으로 감싸고 있을 때보다 훨씬 자극적이었다. 얼핏 보아도 존재감이 뚜렷했던 근육이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자, 라틸은 저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저 길고 매끈한 손가락과 지방이라곤 일절 없어 보이는 딴딴한 팔뚝이라니. 만약 대신관이 성전을 앞둔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더라면 팔랑 넘어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야시시한 분위기라곤 1g도 없는 그의 표정 덕에, 라틸은 넘어가긴 커녕 티베트여우 같은 얼굴로 대신관을 쳐다보았다.
“타락할 준비는 내가 안 되어 있다.”
라틸은 저벅저벅 걸어가 그가 옆으로 밀어둔 이불로 대신관의 몸을 덮었다.
“이런 성스러운 몸을 취한 기회는 자주 오지 않습니다, 폐하. 다시 생각해 보시지요.”
라틸은 들고 온 책으로 대신관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아주 살짝 콩 두드렸다.
“폐하!”
“옷 입어.”
“절 이렇게 대한 분은…….”
“나 하나가 아닐 텐데? 그거 안 통해. 옷 입어.”
대신관은 무어라 더 반박하려 했으나, 라틸이 떨어트린 쪽지들을 줍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맸다. 라틸은 쪽지를 다 주워서 돌아서다가, 그 모습을 보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이불이 새하얀 색이다 보니, 셔벗 위에 대신관의 얼굴 하나만 똑 올라와 있는 거 같아서.
“제 신성한 몸을 취할 생각이 아니라면 왜 오신 겁니까?”
“수식어가 길다?”
“큰마음을 먹었는데 폐하께서 엎으셨으니까요.”
“넌 진짜 후궁이 아니잖아. 그런 마음까진 안 먹어도 돼.”
라틸이 단호하게 말하자, 대신관은 충격 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꼭 대신관 같은 소릴 하시는군요.”
‘그러니까 이걸 왜 내가 말하고 있냐고! 그쪽이 말해야지!’
라틸은 황당해서 대신관의 입술을 한 번 잡아당기고 싶었지만, 어쨌든 대신관 같지 않아도 상대가 대신관이긴 한지라 차마 그러진 못했다. 대신 책을 펼쳐서 미리 준비해 온 질문을 읽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일단 하나. 혹시 은밀하게 부릴 수 있는 부하가 있어?”
“은밀하다면……?”
“뭐. 썩 좋은 일이 아닌 명령이라도 입을 꾹 다물고 수행할 수 있는 부하. 그러다 걸리더라도 추궁받기 전에 알아서 자결할 부하.”
라틸의 냉랭한 설명에 대신관은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속세에 파묻혀 살아온 그이지만, 어쨌든 대신관다운 면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부하라 해도 같은 신을 모시면 다 형제이고 자매인데, 어떻게 그런 명령을 하겠습니까.”
“없단 거지?”
“백화랑술이라고, 성기사들로 이루어진 단체가 있습니다.”
백화랑술? 라틸은 스치듯 들어본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물었다.
“그럼 있단 거야?”
하지만 그게 어떤 단체인지는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타리움은 종교가 지배적인 국가가 아니었고, 라틸 자체도 그리 신앙심이 깊진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가 지배적이지 않더라도 대다수 국민이 종교를 가지고 있었고, 라틸 역시 신앙심이 깊지 않아도 신에 대한 본능적인 숭배는 했지만 말이다.
“그들이 제 뜻을 따르긴 하지만, 아마 폐하께서 원하는 타입은 아닐 겁니다. 부하라기보다는 그저 제가 대신관이기 때문에 존중해주고 여러 도움을 주는 집단에 가깝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존중이 아냐. 무조건적인 충심이지.”
“그럼 아닙니다. 그들이 무조건 숭배하는 대상은 오로지 신 뿐입니다.”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무릎에 팔을 괴었다. 틀라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단 정보를 얻었으니, 그에 관련해 조심스럽게 조사하고 싶었는데. 그럼 대신관의 도움을 받긴 어려울 테고. 역시 기존 세력 중에서 골라 명령을 내려야 할까…….
“그걸 물어보러 오신 겁니까?”
“아, 하나 더. 혹시 말이야. 갑자기 이상한 능력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는…… 뭐 그런 현상에 대해 들은 적이 있어?”
“마법이요?”
“말고.”
대신관은 곰곰이 고민해보더니 자기는 들은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래.”
너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구나. 라틸은 속으로 이 말을 삼켰다.
‘하긴. 도움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지. 얘가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흑마법 관련된 것들은 접근하지 못한다니.’
* * * 대신관의 방에서 나간 라틸은 계속해서 자신의 능력이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상황에서 발휘되는 걸까 고민하며 걸어가다가 하렘 출구 부근에서 멈추어 섰다.
‘이렇게 넘어갈 게 아니지. 이론으로 알 수 없으면 직접 하나하나 시험해보고 알아내면 되잖아?’
라틸은 일이 잠시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고 기죽는 성품이 아니었다. 하이신스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도 그 감정을 바로 분노로, 야망으로 승화시킨 것처럼, 라틸은 우울한 감정을 조그만 계기만으로도 바로 추진력으로 삼아 앞으로 달려가는 데 사용하곤 했다.
‘최대한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자. 날 보고 많은 생각을 할 사람들을. 그러면 힌트가 생길지도 몰라.’
이번에도 라틸은 바로 달려갈 방향을 찾아내고서, 얼른 몸을 돌려 하렘 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그리고서 제일 처음 찾아간 사람은 게스타였다.
“없다고?”
“예. 책을 읽으러 도서관에 가셨습니다.”
하지만 게스타는 자리를 비운 후여서, 라틸은 다음으로는 라나문을 찾아갔다. 다행히 라나문은 얌전히 방 안에 머물러 있었다.
“폐하께서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라나문은 속마음을 읽어내기에 딱 적합한 상대였다. 거의 변동이 없는 얼음 같은 얼굴, 차가운 목소리, 과묵한 입까지 삼박자를 그대로 갖춘 상대.
“우리가 늘 밤에만 만나야 하느냐?”
“!”
라틸은 능청스럽게 말하고서 라나문이 앉아 있는 창가로 다가가 옆에 나란히 앉았다. 라나문은 라틸을 밀어내진 않았다. 하지만 별 말을 하지도 않아서, 잠시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평소라면 먼저 말을 걸어보았을 라틸은, 이번에는 라나문의 속마음을 듣기 위해 껄끄러워도 일부러 계속 조용히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무릎을 맞대고 멍하니 있었을까.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거야, 생각을 하는데 내가 못 듣는 거야?’
30분쯤 지나자 라틸은 인정했다. 여기 더 있어봐야 라나문의 속마음은 들려오지 않으리란 걸. 결국 다른 후궁에게 가보기로 결심한 라틸은 먼저 창틀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십니까.”
그러자 내내 얼음조각처럼 있기만 했으면서, 라나문이 아주 조금 아쉬운 내색을 비추며 따라 일어섰다.
“네가 막 방해된다고, 계속 가라 하던데? ……속으로.”
“제가 언제요.”
“음. 안 그랬구나. 하긴. 조용하더라.”
“?”
“아냐, 그냥 말해봤어. 어쨌든 간다.”
라틸이 어깨를 두드리자, 라나문의 손이 아주 조금 위로 올라왔다. 라틸이 문을 열고 나갈 즈음, 그의 손이 허공 위로 더 올라왔다. 붙잡고 싶은 듯 그의 손은 괜히 바람만 쓸었다. 허무하게 허공에서 손을 움직인 라나문은 냉정하게도 문이 닫혀 버리자 주저하다가 손을 내렸다.
“…….”
닫힌 문이 꼭 라틸의 마음 같아서, 라나문은 주먹을 쥐고 우두커니 한참을 서 있었다. 하지만 저 문은 돌리면 바로 열리겠지. 아무리 돌리고 두드려도 소리 없는 님 마음의 문짝과 달리. 라나문과 라틸이 대화를 할 동안 잠시 자리를 피했던 그의 유형제 카르둔은, 그런 라나문을 보자 두 손으로 입가를 막더니, 괜히 자기가 우울해져서 눈이 촉촉해졌다.
“도련님……. 그렇게 서 계시니 정말 처량하기 짝이 없네요. 그 카지노 딜러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아니.”
라나문이 차갑게 대답하고서 다시 창가로 갔지만, 카르둔은 라나문이 저러는 게 황제가 카지노 딜러와 밤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고서 코를 훌쩍였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폐하 취향이 천사 같은 얼굴에 짐승 같은 근육이었단 걸 도련님이 어찌 아셨겠습니까.”
“천사 같은 얼굴? 그자가 나보다 잘생겼단 뜻이냐.”
자신의 아름다움에 크나큰 자부심을 가진 라나문이 차갑게 말하자, 카르둔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도련님 얼굴이야 세계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걸요! 도련님 얼굴은 신께서 손수 정성 들여 빚은 얼굴인 걸요!”
맞았다. 그의 아름다움은 가히 저런 칭송을 들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했다. 그런데 왜? 라틸 황제는 왜 그에게 홀리지 않은 걸까? 라나문의 표정이 풀리지 않자, 카르둔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저…… 도련님. 폐하 취향이 부푼 근육인 것 같은데. 도련님도 벌크업을 해보시면 어떨까요?”
“!”
* * * 라틸이 다음으로 찾아간 사람은 타시르였다. 타시르는 방 안에 있진 않았으나, 다행히 처소 근처에 있었으므로 먼저 라틸을 발견하고는 얼른 여유롭게 다가왔다.
“이게 누구야. 우리 폐하 아니십니까.”
라틸과 자신이 20년 지기 소꿉친구라도 된 것처럼 능청스럽게 다가온 타시르는 “예쁜 짓 좀 하겠습니다.” 하고 중얼거리면서 라틸을 품 안에 폭 안고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타시르의 부하 히얼란은 ‘역시 우리 소단주님은 계산적이고 여우같은 분이시구나!’ 감탄하며 속으로 눈물까지 흘렸다. 라틸은 얼결에 타시르의 가슴에 기대 눈을 끔뻑거리다가 픽 웃고서 쏙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이런 데 행동만 빠르지.”
“사랑이 고파서요.”
거기에 대고 라틸이 웃으면서 한마디를 더하려는 그 순간. 갑자기 타시르가 입고 있던 옷이 툭 끊어지더니, 가슴 한쪽이 훤히 드러났다.
놀란 라틸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타시르는 “어이쿠.” 하고 탄식하면서 가슴을 가리기는커녕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옷이 낡아서 뜯어졌군요. 폐하 앞에서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다니.”
부끄러우면 가리는 게 어떨까. 라틸은 타시르가 손을 위로 올리는 바람에 옷이 좀 더 아래로 흘러내리자 혀를 찼다.
“속이 다 보인다, 다 보여.”
“보고 감상까지 말씀해주시니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그래, 어떠십니까?”
“그 속 말고!”
그리고 화끈거리긴, 아주 태연한 얼굴인데! 라틸은 타시르가 옷을 올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자, 결국 직접 허리춤에 걸린 그의 옷자락을 직접 위로 세워주었다. 그러다 손가락이 살에 스치듯 닿자 괜히 자신의 어깨가 들썩였으나, 라틸은 모른 척 정색하고서 경고했다.
“엉뚱한 짓 좀 하지 마.”
“옷이 낡아서 그런 걸요.”
“어느 낡은 옷이 천은 반들반들한데 실밥만 뜯어져?”
“절 너무 자세하게 관찰하시니 두근거립니다, 폐하.”
라틸이 가자미 눈을 뜨고 쳐다보자, 타시르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그제야 옷자락을 팔로 감싸 고정했다. 라틸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이상한 놈이야. 하지만 별개로 타시르에게서도 속마음은 들을 수가 없었다.
‘쟤는 속마음이고 뭐고 그냥 떠오르는 대로 다 말하는 것 같긴 하지만.’
“폐하? 그런데 정말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제게 뭐 따로 명령하실 거라도?”
뒤늦게 진지하게 물어보는 타시르에게, 라틸은 손을 저어 보이고서 다시 다음 후궁을 찾아 이동했다. 그러나 다음으로 찾아간 칼라인 역시 자리를 비운 상태라 방에 없었다.
“어디 갔는데?”
라틸이 묻자 칼라인이 흑사신단 용병단에서 데려온 시종은 제 주인과 꼭 닮은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간만에 몸을 풀고 싶으시다며 연무장으로 가셨습니다.”
“그래.”
“폐하께서 오셨다고 전할까요?”
“아니. 됐다. 급한 일은 아니니.”
어차피 칼라인은 어제 만나기도 했고. 그때 분명 칼라인에게서도 아무 속마음이 들려오지 않았다. 제발 좀 듣고 싶을 만큼. 결국 라틸은 마지막으로 클라인을 찾아가보았다.
“폐하!”
클라인은 방 안에서 혼자 뭘 하고 있던 건지 목덜미와 이마가 땀으로 젖어 있었는데, 방 옆에서는 클라인이 모국에서 데려온 시종이 바이올린을, 악시안은 북을 매고 있었다.
“뭐 했어?”
셋이서 파티했나? 라틸이 황당해 묻자, 클라인은 얼굴이 벌게져서는 자신이 부하들에게 악기에 대해 알려주었다고 횡설수설했다. 뭘 얼마나 열정적으로 가르쳤기에 너 혼자 그렇게 땀범벅인 건데? 라틸은 진지하게 궁금해졌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 클라인의 얼굴이 펑 터져나갈 것처럼 보였으므로 말을 도로 삼켰다.
“그래. 계속…… 연주 가르쳐줘.”
어쨌든 클라인의 속마음도 들려오지 않아서, 라틸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얼른 자리를 피해주었다.
‘결국 성과가 없네.’
그런데 터벅터벅 하렘 출구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폐하!”
뒤에서 클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왜? 라틸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클라인이 목에 수건을 걸고서 황급히 앞으로 달려왔다.
“왜 그러느냐?”
다가온 클라인은 다급히 와 놓고서는 막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커다란 눈으로 라틸을 계속 보기만 할 뿐. 그때.
‘같이 가자고 해줘. 같이 산책하자 해줘. 날 보니 좋다고 해줘. 연회 때 나랑 춤추고 싶었다고 해줘. 그냥 가지 마. 나 보러 온 거잖아. 맞다고 해줘.’
클라인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또렷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