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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43/367)

43화. 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2020.07.26.

16551078063173.png“네가 질투도 해?”

칼라인의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바람에, 라틸은 반사적으로 몸을 떨면서 물었다. 칼라인은 라틸의 몸에 더욱 바짝 자신의 몸을 붙이며 속삭였다.

16551078063181.png“항상 하고 있습니다. 주인, 그대가 날 생각하지도 않은 매 순간 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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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칼라인이 생각보다는 괜찮아 보이는 걸 확인한 라틸은, 그를 달랜 후 곧장 하렘을 나와 감옥으로 갔다.

1655107806319.png“함께 들어가겠습니다.”

16551078063173.png“아니, 혼자 들어갈 겁니다. 서넛 경은 사블레 후작과 같이 기다립니다.”

라틸은 함께 들어가려는 서넛에게 밖에서 기다리라 지시하고서, 붙잡힌 이들을 찾아 홀로 내려갔다. 감옥 안에는 라틸의 지시대로 습격자들만이 꽁꽁 묶여 각자 따로 갇혀 있을 뿐,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다른 죄수는 물론 간수까지도. 그들은 바닥을 파거나 철창살 사이로 빠져나가려 끙끙거리다, 라틸이 나타나자 행동을 멈추고 노려보았다. 잡혀갈 때는 좀 무서워하는 것 같더라니.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자 두려운 마음보다 분노가 더 커진 것 같았다. 라틸은 혀를 차고서 다짜고짜 창살을 퍽 발로 걷어찼다. 챙 소리가 나며 창살이 흔들리자, 그 칸에 있던 범인의 눈빛이 그나마 유순해졌다. 하지만 나머지 칸 범인들은 여전히 시선이 흉흉했다. 라틸은 혀를 쯧 차고서 구석에 놓인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작은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16551078063173.png“자…… 우선 본격적으로 취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제안을 하나 하겠다. 난 인자한 황제니까.”

16551078063205.jpg“…….”

16551078063173.png“혹시 자백할 사람?”

라틸이 손 드는 시늉을 하자 범인들이 입을 더욱 꾹 다물었다. 어차피 그러리란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라틸은 쓸쓸하게 혼자 들어 올린 손을 좌우로 몇 번 흔들면서 재차 물었다.

16551078063173.png“왜 내 연회 축하 파티에서 그 남자를 습격했는지, 뭐 변명이라도 해볼 사람은 없어?”

16551078063205.jpg“…….”

16551078063173.png“모두 알겠지만 이 몸은 인자하고 어진 군주거든. 그럴듯한 변명 하나라도 하면 넘어가 줄 수도 있어. 자백하면 가산점 붙는다.”

이어서 라틸이 착한 미소를 지었지만, 의외로 아무도 넘어오지 않았다.

16551078063173.png“잘 안 통하네.”

조금 기다려보다가 라틸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손을 내렸다. 너무 자주 써먹어서 다들 안 속나? 어쨌든 상관은 없었다. 그냥 수월하게 가고 싶어서 물어봤을 뿐이니. 그런 라틸을, 범인 중 한 명이 잔뜩 쉰 목소리로 끌끌 웃으면서 조롱했다.

16551078090657.jpg“우리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을 거다. 아무리 취조해봤자!”

16551078063173.png“응, 아냐. 취조하면 열 명 중 열 명이 다 입 열게 되어 있어.”

16551078090657.jpg“!”

16551078063173.png“아니라 하고 싶어? 그럼 버텨봐. 만약 버티면…….”

버티면? 버틴 사람은 봐 준단 이야기라도 하려는 건가? 범인들은 라틸이 어딘가로 걸어가더니, 정체불명의 까만 도구함 뚜껑을 여는 걸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라틸은 그 도구함에서 용도 모를 약병을 꺼내 돌아서며 히죽 웃었다.

16551078063173.png“그 다음에 갇힌 범인한텐 바꿔서 말해줄게. 열 명 중 아홉 명은 입 연다고.”

16551078063205.jpg“!”

  * * * 라틸이 취조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시종장과 서넛은 초조하게 감옥 입구에 서 있다가 얼른 가까이 다가갔다.

16551078090657.jpg“폐하. 괜찮으십니까?”

16551078063173.png“응, 내 피 아니에요, 후작.”

16551078090657.jpg“입을 열었습니까?”

16551078063173.png“뭐. 만족할 정도는.”

1655107806319.png“이런 일은 직접 나서지 않으셔도 됐을 텐데요…….”

서넛이 중얼거리는 말에 라틸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물론 나도 직접 나서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습격하려던 게 대신관이란 건 아직 라틸과 대신관 본인 외엔 아무도 몰랐다. 그러니 직접 나서서 취조할 수밖에. 애초에 남에게 취조를 시키려면, 그냥 현장에서 지시하면 됐을 일이었다. 연회가 끝나기 전까지 입을 열어두라고.

16551078063173.png“그보다 엄청난 얘기를 들었습니다.”

라틸이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튄 피를 닦고서 서넛에게 건네자, 서넛은 자연스럽게 그 손수건을 다시 시종장에게 전달했다.

16551078090657.jpg‘이놈이 자연스럽게 나한테 쓰레기를……?’

시종장은 황당해서 피에 젖은 손수건을 받아들었으나, 라틸 앞이라 무어라 말을 하진 못했다. 라틸은 이 상황을 모른 채 다른 수건을 꺼내 남은 피를 닦고는, 궁 쪽으로 걸어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16551078063173.png“범인들 말입니다. 배후로 틀라를 불었습니다.”

시종장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수건을 두 손가락으로 집은 채 걸어가다가 깜짝 놀라 손수건을 떨어트렸다.

16551078090657.jpg“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넛 역시 놀란 표정으로 라틸을 쳐다보았다.

1655107806319.png“틀라 황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16551078063173.png“응. 그렇답니다.”

시종장은 대번에 반박했다.

16551078090657.jpg“거짓일 겁니다.”

서넛 역시 시종장의 말에 바로 동의했다.

1655107806319.png“저도 후작님 말씀이 맞다 생각합니다. 틀라 황자의 처형 때 참관한 사람은 하나둘이 아닙니다. 살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틀라 황자는 황족인데다 어머니가 달라도 라틸의 오빠였기 때문에, 최소한의 예우를 갖추어 공개 처형을 하진 않았다. 그러나 참관인 숫자는 적지 않았다. 개중 틀라의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처형 자체를 막을 수 없을 만큼. 그런데 죽은 틀라가 라틸 습격을 지시했다니? 당연히 말도 안 됐다. 시종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16551078090657.jpg“아. 혹시 틀라 황자님이 생전에 내린 명령…….”

16551078063173.png“아니요. 최근에 내린 명령이랍니다.”

16551078063205.jpg“!”

시종장과 서넛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 모두 라틸이 적의 헛소리에 넘어간 게 아닌가 우려하는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라틸은 그들이 거짓을 고하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그들의 입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속마음 때문에.

16551078063173.png‘이유가 뭐지? 이번에도 그자들의 속마음이 들렸어.’

물론 취조를 하자 그들은 라틸의 예고대로 온갖 이야기를 순순히 다 불었다. 틀라가 배후라는 것 외에도,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대신관을 찾아낸 방법까지. 그들이 말하길, 틀라 황자의 지낭 역할을 하는 ‘여우님’이란 자가 있는데, 그자가 그들 중 한 명의 머리에 이상한 구슬을 넣으며 ‘이걸 가지고 있으면 대신관이 누구인지 반응이 올 거다’고 말했다고. 그들은 여우님의 말을 듣고서도 반신반의했으나, 실제로 그 구슬을 가지고 있자 어떤 사람의 곁에서 머리가 몹시 지끈거리는 반응이 왔다 이야기 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모두 허무맹랑했다. 라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이 그들의 속마음까지 같이 듣지 않았더라면 취조한 결과를 다 믿진 못했으리라 여겨질 만큼. 그러나 이상하게도 라틸은 그들의 속마음을 같이 들을 수 있었고, 덕택에 그들이 한 그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적어도 그들에게는’ 진실이란 것도 알아낸 것이다.

16551078090657.jpg“폐하, 전문가들을 시켜서 한 번 더 취조해 볼까요?”

16551078063173.png“아, 안 될 거예요, 사블레 후작. 내가 말 못 하게 만드는 약을 먹여놔서 더는 취조 못 할 거라.”

16551078090657.jpg“예? 왜 그런 일을……?”

16551078063173.png“시끄럽기에.”

16551078063173.png‘사실은 대신관 얘길 못 하게 하려던 거지만.’

라틸은 괜찮다 거듭 말하고서 자신의 침실 안 욕실로 들어갔다.

16551078090657.jpg“따뜻하게 준비해 둔 물이 조금 식었습니다, 폐하.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다시…….”

16551078063173.png“괜찮으니 다들 나가 있어라.”

라틸은 목욕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중인 시녀들까지 다 물리고서, 홀로 욕조 안에 들어가 머리 끝까지 물에 잠기도록 했다.

16551078063173.png‘틀라가 살아 있다…… 흑마법을 이용해 살아난 건가? 처음부터 흑마법사였나?’

어쨌든 틀라의 생존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일이었다. 라틸은 오랫동안 물 안에 얼굴을 담그고 있다가, 숨이 막혀올 때쯤 물 밖으로 확 나오면서 세수했다.

16551078063173.png‘이런 일일수록 신중하게 조사해야 할 텐데. 내부에 적이 있어. 문제는 난 그 적이 누구인지 모른단 거다.’

틀라에 대한 조사는 흑마법사를 조사하는 일보다 더욱 더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누구에게? 누구에게 이런 일을 맡길 수 있을까?

16551078063173.png‘젠장. 그 속마음 읽는 능력, 계속 나오게 할 수는 없나?’

그게 가능하다면 누가 충신이고 누가 배신자인지 대번에 알아내서 틀라에 관해 지시해보라 명령할 수 있는데.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그 능력은 나왔다 사라지길 계속 반복했다. 죄수들의 속마음은 들을 수 있었지만, 시종장과 서넛, 대신관의 속마음은 들을 수 없던 것처럼.

16551078063173.png‘일단 내일 오빠한테 사람을 보내서 대현자와 함께 방문해달라고 하자. 대현자가 구마 방법에 대해 알지도 모른다니까.’

  * * * 다음날. 라틸이 오빠가 있는 곳으로 사람을 보내 와달라 청하는 그 시각, 대신관은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하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탄탄한 팔 근육을 그대로 드러낸 대신관의 모습은 햇빛 아래에서 전쟁의 신처럼 눈부셨고 늠름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법이었고, 낯선 이는 쉽게 환영받지 못하는 법이었다. 하렘에서 일하는 궁정인들은 가슴을 쫙 펴고 하렘에 새롭게 들어오는 이방인을 지켜 보며 자기들끼리 입을 모으고 속닥거렸다.

16551078090657.jpg“카지노 딜러였대. 그것도 VVIP 상대하는 딜러.”

16551078090657.jpg“세상에. 한번에 신분 상승했네.”

16551078090657.jpg“그러니까. 인생이 도박이었는데 대박이 났어.”

16551078090657.jpg“일부러 폐하의 눈길을 끌려고 난리 부렸다면서? 엄청 흔들어 댔다던데?”

16551078090657.jpg“대놓고 폐하한테 하트를 보내고 쏘고 그랬대. 폐하는 그거 보고 끔뻑 넘어가시고.”

16551078090657.jpg“우리 폐하는 그런 거 좋아하시는구나.”

궁정인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는 제법 커서, 대신관 일행에게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16551078090657.jpg‘부끄럽다.’

시종인 척 함께 입궁하게 된 대신관의 수행사제는 그 소리를 듣고 목덜미까지 빨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생각 같아서는 ‘이분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분이 아니다!’고 버럭 외치고 싶었지만, 그 대단한 정체는 기밀이기에 절대로 발설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탓에 저 노골적인 수군거림을 죄다 받아들여야 하다 보니 저절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특히 이 수행사제는 세간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사제의 성품 그 자체이다 보니 이 상황이 더욱 곤혹스러웠다.

16551078090657.jpg‘대신관님…… 카지노에서 딜러 하신다 할 때도 생각했지만, 왜 항상 이런 쪽으로…….’

16551078090657.jpg“여기입니다.”

그 사이. 시종장은 하루 동안 빠르게 준비해 둔 새로운 후궁의 방 앞에 멈추어 서며 웃었다.

16551078090657.jpg“앞으로 여기서 늘 좋은 일들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자이신 님.”

대신관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16551078202251.png“괜찮군.”

방은 하루 안에 급조한 것치고는 깨끗하고 화사하게 꾸며져 있었다. 아직은 가장 기본적인 가구만 있었으나, 그 가구 모두 고가품인데다가 번쩍거리는 재질이어서 휑한 느낌도 없었다. 그가 대신관이란 걸 염두에 둔 라틸이 일부러 반 장난삼아 전부 다 하얀색으로 꾸미라 지시했기에 더욱 환해 보이기도 했다. 수행사제는 시종장이 물러나자, 얼른 짐가방 두 개를 챙겨 따라 들어오며 구시렁거렸다.

16551078090657.jpg“전 너무 무섭습니다, 대신관님. 카지노도 무서웠는데 하렘이라니요. 이래도 되는 걸까요?”

16551078202251.png“적들을 피하려면 넓은 그늘에 들어가야 한다. 그분의 품은 넓고 검은 강력했지. 게다가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분이시니, 충분히 날 지켜주실 거다.”

16551078090657.jpg“그래도 하렘은 좀…….”

16551078202251.png“정체 모를 적들이 날 노리고 있으니 어쩔 수 없잖아.”

그래도 역시 하렘은 아닌 것 같다고 수행사제가 말하려는데, 갑자기 문이 발칵 열렸다. 수행사제는 얼른 주저앉아서 가방 문을 열고 짐 정리를 하는 시늉을 했다.

16551078090657.jpg“이런. 죄송합니다, 자이신 님.”

들어온 사람은 아까 안내해 준 황제의 시종장이었다.

16551078202251.png“괜찮습니다.”

대신관이 넉넉하게 웃으면서 대답하자, 시종장은 ‘생각보단 사람이 진중하군. 춤은 방정맞았지만.’ 하고 생각하면서 알려주었다.

16551078090657.jpg“폐하께서 오늘 밤 자이신 님을 찾아오겠다 하셨습니다.”

수행사제는 그 말에 정리하던 옷가지를 움켜잡고 눈을 부릅떴다. 오늘? 그리고 시종장이 나가자마자, 수행사제는 겁먹어서 대신관에게 물었다.

16551078090657.jpg“대, 대신관님, 정말로 밤, 밤, 그거까지 하실 건 아니시죠?”

  * * *

16551078063173.png‘하렘에 숨어 있겠다 했지만 진짜로 후궁 노릇을 하진 않겠지.’

그날 밤. 라틸은 대신관이 자신이 전한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하고서 대신관에게 배정된 방을 찾아갔다. 손에는 작은 책이 들려 있었는데, 사실 책은 위장일 뿐. 이 안에는 대신관에게 의논할 사안 몇 가지를 적은 쪽지가 있었다. 갑자기 사람에게 이상한 능력이 생길 수도 있는지, 대신관은 혹시 은밀하게 부릴 수 있는 믿을 만한 정보원이 있는지, 죽은 사람이 깨어나는 것도 흑마법인지 등등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런데 방문 두 개를 지나 침실 안으로 들어간 순간.

16551078063173.png“으아!”

라틸은 깜짝 놀라 들고 온 책을 떨어트렸다. 퍽 소리가 나며 책이 바닥을 굴렀고 사이에 끼워둔 쪽지가 흩어졌으나, 라틸은 거기에 신경조차 쓸 수 없었다. 대신관이 홀랑 다 벗은 채 침대에 옆으로 누워 라틸을 기다리고 있었다.

16551078063173.png“뭐, 오, 옷은 어디 갔어?!”

16551078202251.png“오십시오, 폐하. 저는 타락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16551078063173.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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