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굴러온 돌이 반짝거리면2020.07.22.
“어디 다녀오신 겁니까, 폐하?”
라틸이 연회장에 돌아가자 서넛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걱정했습니다.”
라틸이 혼자 구석에서 과일을 먹다가 사라지더니 한동안 나타나지 않자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잠깐 한 바퀴 돌았습니다.”
라틸이 웃으면서 둘러댔지만 서넛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못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닙니다. 날씨가 좋더라고요.”
라틸은 서넛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서 자신의 전용 의자로 가 앉았다. 라틸의 자리 곁에는 후궁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마침 그곳에 있는 건 게스타 하나뿐이었다.
“폐하. 목이 말라 보이시는데…… 이걸 드시겠어요?”
라틸과 단둘이 앉아 있게 되자 게스타는 하인에게서 에메랄드색 예쁜 빛깔의 샴페인을 받아 내밀었다.
“고마워, 게스타.”
라틸이 인사를 하며 받아 들자 게스타는 얼굴이 벌게져서 고개를 숙이고 주춤거렸다. 이것만으로도 부끄러워 죽겠다는 듯. 게스타는 잔뜩 귀여운 모습을 보였으나, 라틸은 돌아오기 전 정원에서 대신관과 나눈 이야기를 생각하느라 보지 못했다.
* * * 한 시간쯤 전.
“그래, 하렘에 들여보내 주마. 그런데 어떻게 들어오려고?”
“저는 속세를 떠난 몸.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 대신전에 머물진 않는다 들었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데?”
“카지노 딜러로 있습니다.”
‘전혀 속세를 떠나지 않았는데? 누구보다 속세에 찌든 거 같은데?’
신분을 숨길 필요가 있다지만 왜 하필 카지노에 있는 거야? 라틸이 황당해서 쳐다보자, 대신관은 쑥스러운 듯 웃으면서 설명했다.
“압니다. 이상하지요. 하지만 그래서입니다.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도 의심받지 않을 수 있거든요.”
‘하지만 신은 자기 안목을 의심하겠지.’
라틸은 대신관의 설명을 온전히 납득하진 못했으나, 그가 어떻게 곧장 하렘에 몸을 숨기겠단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는지는 깨달았다. 원래 저랬구나.
“그런데 카지노 딜러가 연회에는 어떻게 들어온 거냐?”
“VVIP 고객 중 한 분이 연회에 초대받은 이야기를 자랑하기에, 함께 데려가 달라 청했습니다. 초대장을 두고 내기를 했지요.”
“그래서. 이겼어?”
“물론입니다.”
씩 웃는 대신관에게, 라틸은 칭찬을 해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떨떠름해졌다. 어쨌든 확실한 건, 저 카지노 딜러를 하렘 후궁으로 들인다고 해서 그가 대신관이라 의심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란 점이었다.
“이렇게 하자. 네가 연회에서 돋보이면, 내가 너한테 반한 척 할게.”
“폐하께서 제게요?”
“어. 하렘에 들어오겠냐는 제안을 공개적으로 할 테니까 넌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돼. 단, 주의점이 있어.”
“무엇입니까?”
“내가 너한테 반할 수밖에 없다고, 누가 봐도 인정할 만큼 돋보여야 돼. 그래야 자연스러워. 적들도 믿을 만큼. 할 수 있겠어?”
라틸의 질문에 대신관은 잠시 생각하다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늘 숨어서 살아온 탓에 자신은 없지만…… 꼭 해내겠습니다.”
* * * VVIP를 상대하는 카지노 딜러였으면서 숨어서 살았다고? 그 얼굴과 그 몸을 가지고서? 글쎄…….
“폐하?”
라틸은 상념에 잠겨 있다가 게스타가 옆에서 부르자 얼른 표정을 관리하고서 돌아보았다.
“응? 왜 그러지?”
눈이 마주치자 게스타는 쑥스러운지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물었다.
“저기…… 괜찮으시면 폐하, 저와도 춤을 추시면…….”
안 되겠냐고 물으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게스타가 말을 다 잇기 전. 갑자기 춤추는 구역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게스타와 라틸 모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뭔가 싶어서 쳐다본 라틸은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놀란 마음이 너무 커서 순간 벌떡 일어날 뻔했다.
‘저게 뭐야?’
그곳에는 대신관이 있었다. 혼자서 열심히 춤을 추고 있는 대신관이. 파트너 따윈 집어치우고, 은은한 하프 선율에 맞추어 하프를 박살내버릴 듯 격정적으로 춤추는 그는 라틸이 요구한 대로 아주 돋보였다. 아니, 돋보이다 못해 홀 안에 있는 모든 시선과 관심이 그 한몸에 집중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라틸의 귀에 들려왔다.
“굉장해. 박자를 죄다 무시하고 있군!”
“음악과 완벽하게 따로 노네요. 하나도 안 맞다 보니 오히려 신기할 지경입니다. 일부러 언밸런스하게 추는 건가요? 저걸 뭐라 하죠?”
“뭐라 하긴요. 그냥 막 추는 거죠.”
그가 움직일 때마다 화려하게 함께 율동하는 커다란 근육을 보며 몇몇 귀족들은 얼굴을 붉혔다. 라틸은 멍하게 있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저 자기주장 강한 댄스도 놀라웠지만, 저걸 보고서 반한 척해야 한단 게 당혹스러웠다. 춤은 저쪽이 추는데 왜 부끄럽긴 이쪽이 부끄러울까. 라틸은 얼굴이 벌게져서 대신관에게 손짓으로 신호했다. 다른 거 없어? 다른 춤 춰봐. 그냥 하프 소리에 맞추어서 몸만 까딱거려도 눈에 띌 텐데, 왜 굳이 저러고 있단 말인가. 저걸 보고 반했다 하면 그날 라틸의 안목은 리듬과 함께 박살날 터였다. 그러나 대신관은 라틸의 신호를 긍정적으로 해석했는지, 춤을 추면서 라틸을 향해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근육으로 꽉 찬 팔이 앙증맞은 하트를 만들어 쏘자,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세상에. 저 남자가 폐하께 공개적으로 구애했어요.”
“손으로 사랑을 날리다니. 저럴 수가 있나.”
“저돌적이로군요. 참 튼튼한 하트입니다.”
‘아아. 하지 마.’
그걸 본 라틸이 이 상황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자, 사람들은 더욱 놀라 수군거렸다.
“폐하께서 마음에 드시나 봐요. 얼굴이 빨개지셨습니다.”
“저런 걸 좋아하시는 걸까요?”
“하긴. 보통 용기로는 저런 춤은 출 수 없죠…….”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게스타가 라틸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진짜 저런 걸 좋아하신다고?’라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라틸은 홀로 창피해하느라 게스타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라틸은 저런 춤을 추는 대신관에게 반한 척해야 한단 생각만으로도 이미 머릿속이 포화 상태였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속세를 떠나기 위해 카지노 딜러가 되었다는 저 대신관이 또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르니, 이쯤 하게 끊고서 얼른 데리고 들어와야 했다.
‘후…….’
굳게 결심한 라틸은 빠르고 깊게 숨을 들이쉬고서 벌떡 일어나며 호탕한 척 웃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대신관을 구경하던 모든 사람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져서 황제를 주시했다. 라틸은 귀에 열기가 화끈 올라왔으나, 애써 태연한 척 두 팔을 벌리고 대신관에게 다가가며 칭찬했다.
“이름 모를 근육아! 그대의 춤은 내가 지금까지 본 어떤 춤보다 박력이 넘치는구나!”
그 말에 대신관이 춤을 멈추고서 부끄럽다는 듯 얼른 무릎을 꿇었다.
“별거 없는 춤솜씨로 폐하의 눈을 어지럽혔습니다.”
“별거 없기는! 그대가 내 마음에 걸린 빗장을 부수고 들어왔다.”
라틸이 대신관을 일으켜 세우자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수군거렸다.
“폐하께서 정말 저자가 마음에 드나 봅니다.”
“그런데 저 남자가 누구지요? 처음 보는 사람인데.”
“누군지 몰라도 참 잘생겼군요. 하긴. 폐하의 하렘 속 남자들은 다들 대단한 미남이지요.”
“폐하는 확실하게 얼굴만 딱 보시는군.”
귀족들은 자기들이 아는 남자 중에 저 정도로 잘생긴 남자가 없나 떠올려 보았다. 황제의 안목을 보니, 일단 잘생기기만 하면 금방 사랑에 빠지는 듯해서.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몇몇은 이 상황을 그저 재밌게 구경할 수만은 없었다.
‘저렇게 마음이 가벼울 수가 있나!’
아까까지 황제 며느리를 보겠다며 좋아하던 아트락시 공작.
‘지금 폐하는 내가 춤을 못 춘다고 일부러 저러시는 거다.’
라틸에게 춤을 못 춘다고 대놓고 타박을 들었던 라나문.
“…….”
조금 전 라틸에게 함께 춤을 추자 제안하려 했던 게스타 등등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쳐다보는 걸 알면서도 쉽게 표정을 관리하기 어려웠다. 게스타가 가라앉은 눈으로 대신관을 주시하자, 칼라인에게서 가까스로 빠져나와 자리로 돌아온 타시르가 히죽 웃으면서 게스타를 약올렸다.
“하렘에 들어오면 저자에게도 접근해 모략을 꾸밀 건가? 그만두는 게 좋을 걸, 도련님. 저놈 주먹 봐봐. 도련님 정도는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질지도 몰라.”
이때다 싶어 타시르가 계속 깐죽대자 게스타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으나, 타시르는 게스타가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성격을 드러내지 못한단 걸 알기에 혓바닥을 멈추지 않고 나풀거렸다.
“그만하세요, 타시르 님.”
“뭐라고? 주위가 시끄러워서 잘 안 들려, 도련님.”
“그만하세요…….”
“응? 안 들리는데?”
타시르가 히죽히죽 웃는 걸 보며 게스타는 남몰래 주먹을 움켜쥐었다. 타시르는 낄낄 웃으면서 라나문에게도 말을 걸려 했으나, 라나문이 서릿발 같은 시선을 보내자마자 얼른 칼라인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러나 의외로 칼라인 역시 게스타와 비슷한 짓을 하는 중이었다. 아니, 칼라인은 게스타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혼자 춤을 춘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에. 용병왕님도 질투를 하나?”
그걸 본 타시르가 이때다 싶어 칼라인도 놀렸으나, 칼라인은 게스타와 달리 아예 타시르의 놀림에 반응하지 않았다. 타시르도 더 깐죽거리지 않고 멈추었다. 칼라인의 표정 때문에.
“어이 용병왕님? 괜찮아?”
게스타와 달리 칼라인은 화난 표정이 아니라, 어딘가 아픈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창백한 사람이 표정까지 저러자, 타시르는 조금 걱정이 되어서 물었다.
“체했어?”
“몸이 좀 안 좋군.”
“정말 체했어?”
칼라인은 구체적으로 어디가 안 좋단 말은 하지 않았으나, 라틸의 시종에게도 몸이 안 좋단 말을 하고서 연회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 * * 연회가 끝난 새벽. 라틸은 대신관을 습격하려던 이들을 몸소 취조하기 위해 감옥으로 가려다가, 칼라인이 몸이 좋지 않아 일찍 처소에 돌아갔단 이야기를 듣고 방향을 바꾸어 하렘부터 갔다. 만난 지 오래된 사이는 아니지만, 라틸이 아는 칼라인은 꾀병을 부릴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고고한 늑대 같아서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 고통을 참으려 들 타입 아닌가? 물론 실제로 늑대가 아파도 아픈 척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 앞에서 몸이 안 좋다고 돌아갈 정도면 많이 안 좋은 거야.’
칼라인의 방문 앞에 가자, 웬일로 그가 흑사신단에서 시종으로 데리고 들어왔다는 용병이 문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오셨습니까, 폐하.”
몇 번 만난 적이 없지만, 칼라인이 데려온 부하는 그만큼이나 눈에 확 띄는 얼굴이라 라틸은 대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이 부하는 칼라인만큼 얼굴이 창백했는데, 늘 불만에 차 있고 항상 기분이 나빠 보여서 사람들 틈에 있어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칼라인은?”
“안에 계십니다.”
칼라인의 부하가 문을 열어주자, 라틸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작게 헛기침을 해 칼라인에게 자신이 들어간단 신호를 보냈다.
“칼라인?”
침대에 누워 있을 줄 알았는데, 칼라인은 창가에 앉아 창틀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목욕을 했는지 머리카락은 축축했고, 반쯤 벗겨진 목욕 가운 사이로는 아직 물기가 덜 마른 몸이 보였다.
“칼라인. 아프다더니. 그러고 있어도 괜찮으냐?”
라틸이 들어가면서 묻자, 칼라인은 창틀에서 다리를 내리고는 곁으로 다가왔다. 라틸은 그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항상 창백한 남자라, 낯빛만 보아서는 상태가 좋은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보자. 괜찮나.”
라틸이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고서 뚫어져라 입술이며 눈매를 쳐다보자, 칼라인은 순순히 얼굴을 맡긴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음. 괜찮아 보이는데.”
구석구석 칼라인의 얼굴을 뜯어 본 라틸은 중얼거리면서 손을 내렸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도 원래 창백하던 피부를 제외하면 딱히 아픈 곳은 없어 보였다.
“제가 걱정되어서 오셨습니까.”
“갑자기 아프다면서 돌아갔다니까.”
칼라인의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마치 할 말이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뿐. 칼라인은 그냥 입을 닫아버렸다. 라틸은 연회장에서 잠깐이지만 자신이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들었던 걸 떠올리며 안타까워졌다. 그거 참 편리했는데. 칼라인처럼 말 없는 사람을 앞에 두면 특히 더 편할 것 같은 능력이었다. 그러나 능력이 그새 사라진 건지, 아니면 잠깐 뭐가 어떻게 되어 나타난 능력이었던 건지, 아무리 쳐다보아도 라틸은 칼라인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안 아파?”
결국 라틸이 대놓고 묻자, 칼라인은 라틸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비비적거리며 대답했다.
“아프지 않습니다. 그냥 질투 때문에 이러는 겁니다. 괜찮습니다, 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