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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순애보 황제라고는 기록 못 하겠네 (41/367)

41화. 순애보 황제라고는 기록 못 하겠네2020.07.19.

라틸이 오싹하게 중얼거리자, 습격자들은 이를 악물고서 검을 휘둘렀다. 잡히거나 죽는 것보단 황제를 공격하는 게 낫다고 여긴 모양이다.

16551077496676.png‘그냥 도망이나 갈 것이지, 멍청하네.’

하지만 라틸의 눈에는 그들의 판단이 한심하게만 여겨졌다.

16551077496676.png‘느려.’

라틸이 서넛과만 대련하는 건 라틸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정도나 되어야 마음껏 상대할 수 있어서일 뿐. 하지만 이상하게도, 라틸이 기사단을 따라다니며 검을 배운 걸 아는 사람들도, 라틸의 실력이 좋진 않을 거라 확신했다. 그 확신은 라틸이 직접 서넛과 대련하는 모습을 보면 바뀌었지만. 대부분 황족들이 검을 배워도 운동 겸 호신용으로 잠시만 배우고, 앞서 레안 황태자는 아예 운동에 관심이 없다 보니, 라틸도 비슷한 수준이라 여기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상대의 방심은 조금 짜증날 뿐, 오히려 실전에선 라틸에게 유리했다. -캉!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서 습격자의 검이 휙 날아가자, 그제야 적들은 무언가 잘못되었단 표정을 지었다.

16551077496676.png‘늦었어.’

라틸은 히죽 웃고서 그자의 등을 내리치고, 거의 동시에 다른 한 발을 옆으로 돌리며 다른 적의 검을 저 멀리로 차버렸다.

16551077496676.png‘다 처리한 건가?’

그러나 ‘난간 위에서 본 사람 숫자대로 처리한 것 같긴 한데……’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뒤쪽에서 [죽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16551077496676.png‘한 명이 더 있나?’

라틸은 확 돌아서며 검을 치켜들었다.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습격자를 받는 사이 붕 떠 버린 그 로브 입은 사람이 공격 당할까 봐 아차 싶었다. 그러나 눈에 들어온 건 습격 장면이 아니었다. 아니, 습격 장면이 맞긴 한데, 라틸이 예상한 습격 장면은 아니었다. 습격을 받는 건 자객 쪽으로, 아까 로브를 입고 있었으리라 추정되는 근육질의 남자가 적의 목을 꺾고 있었다.

16551077496676.png‘저게 대신관?’

로브를 쓴 사람이 대신관일 거라 생각하고 달려왔던 라틸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16551077496704.png“감히 날 습격하다니.”

남자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맹수처럼 으르렁거리자 라틸의 눈은 더욱 커다래졌다. 그 사이, 근육질의 남자는 이번에는 아예 적을 바닥에 냅다 꽂아버리면서 외쳤다.

16551077496704.png“이것은 신의 분노이다!”

16551077496676.png‘아니, 그건 신의 분노가 아냐! 어딜 봐도 그쪽 분노잖아!’

신 어쩌구 하는 걸 보면 대신관 맞는 것 같긴 한데. 라틸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일단 나서서 남자의 팔을 잡았다. 흉포하게 적을 제압하던 남자는 그제야 적을 놓아주었고, 라틸도 남자의 팔을 놓아주었다. 손 안에 잡혔던 팔은 눈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욱 굵고 탄탄했다.

16551077496676.png‘역시 대신관은 아닌 것 같다. 그럼 대신관의 호위? 비밀 호위 같은 건가?’

라틸이 혼란스러워하거나 말거나, 남자는 쓰러진 적을 발로 차 옆으로 치우고는 라틸을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16551077496704.png“목숨을 구해주셔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폐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16551077496676.png‘구하긴 구했지. 네가 방금 죽이려던 자객의 목숨을.’

은혜도 저쪽한테 내린 것 같은데……. 혼자 두어도 사태를 잘 수습하고 빠져나갔을 것 같은 남자를 잠시 멍하게 보다가, 라틸은 퍼뜩 제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얼른 사람을 불러 이자들을 감옥에 가두어야 했다. 그러나 라틸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16551077496704.png“폐하.”

남자가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라틸을 붙잡았다.

16551077496704.png“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폐하.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정체를 들키면 안 됩니다.”

남자의 정체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던 라틸은 황당해서 되물었다.

16551077496676.png“네 정체가 뭔데? 격투가?”

겉으로만 보면 칼라인이 아니라 이쪽이 용병왕 같은데……. 그 질문에 남자는 쑥스러운 듯 빙그레 웃었다.

16551077496704.png“이렇게까지 배려해 주시다니…… 소문보다 더욱 마음이 깊으십니다. 하지만 모른 척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16551077496676.png‘아니, 진짜 모르겠어서 물은 건데.’

16551077496704.png“대신관입니다, 폐하.”

스스로를 대신관이라 주장한 이가 늠름하게 말하는 순간, 라틸의 머릿속에 있던 천사 같은 대신관의 이미지는 박살이 나 버렸다.

16551077496676.png‘대신관은 명화에 등장하는 천사처럼 생겼을 줄 알았는데. ……신의 사랑을 받아 근육이 저렇게 부푼 건가.’

라틸은 놀란 마음에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나가는 머리를 빠르게 젓고서, 황제다운 위엄을 되찾고서 물었다.

16551077496676.png“아직 기절하지 않은 적이 하나 있는데. 그렇게 정체를 밝혀도 되느냐. 물론 네 정체를 아니까 습격했겠지만.”

그 말에 대신관은 빙그레 웃으면서 수월하게 대답했다.

16551077496704.png“기억을 지우면 됩니다. 괜찮습니다.”

16551077496676.png‘대신관은 기억을 지울 수도 있나?’

라틸은 놀라워하면서 얼른 그러라고 허락했다. 기억을 지우다니. 위험한 능력 같지만 한 번 보고 싶기도 했다. 라틸의 허락을 받은 남자는 “예.” 하고 대답했다. 라틸은 두근두근해서 대신관이 자신의 팔목을 만지작거리는 걸 지켜보았다. 그 순간.

16551077496704.png“합!”

대신관이 주먹을 쥐고서 적의 머리를 퍽 내려쳤고, 눈을 뜨고 있던 적은 주먹질 한 번에 기절해버렸다. 그러고서 대신관이 주먹을 다시 쥐자, 라틸은 당황해서 말렸다.

16551077496676.png“잠시!”

16551077496704.png“예, 폐하.”

16551077496676.png“지금 그거, 원, 원리가 뭔가? 기억이 날아가기 전에 목숨이 날아갈 것 같은데?”

16551077496704.png“예. 진실을 땅에 묻어버리려는 겁니다.”

16551077496676.png‘그냥 죽여서 함구시킨단 거잖아!’

아니, 저자 진짜로 대신관이 맞긴 맞나? 겉모습이야 그렇다 쳐도 사상이 전혀 대신관이 아닌데? 라틸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대신관을 향해 손을 저었다.

16551077496676.png“죽이지 마. 널 왜 습격한 건지 알아내야 하니까.”

16551077496704.png“죽이다니요. 신은 대신관, 사람을 절대로 해치지 않습니다.”

16551077496676.png“……일단 때리지도 마.”

라틸이 단호하게 명령하자, 대신관은 순순히 물러났다.

16551077496676.png“부하들을 부를 테니 잠시 숨어 있어라.”

어쨌든 정체를 감추고 싶다 하니 라틸은 대신관에게 숨으라 명령하고서, 아까 부르려던 부하들을 다시 불렀다. 달려온 경비병들은 쓰러진 습격자들을 보자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전에 무덤이 훼손된 일로 관련자들이 일주일 내내 쓰러지기 직전까지 기합을 받았는데. 쓰러진 습격자들을 보자, 그 전해 들은 이야기가 곧 자기들의 미래가 될 거란 걸 깨달은 것이다.

16551077582432.jpg“폐하,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16551077582432.jpg“폐하, 몸은 괜찮으십니까?”

16551077496676.png“난 괜찮으니, 소란 피우지 마라.”

16551077582451.jpg“예.”

16551077496676.png“그리고 이놈들. 손님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끌고가 감옥에 가둬. 그 감옥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경비병 하나가 아까 대신관이 바닥에 꽂아버린 습격자를 힐긋거리며 물었다.

16551077582432.jpg“저 사람은 귀족 같은데, 괜찮을까요?”

16551077496676.png“날 습격하려 한 자다. 봐주지 말고 다 쳐넣어.”

16551077582432.jpg“예, 폐하.”

경비병들은 쓰러진 이들의 머리와 다리를 2인 1조로 잡고서 신속하게 손님들이 드나들지 않는 궁 쪽으로 이동했다. 경비병들이 모두 사라지자 라틸은 주위를 둘러보며 아까 그 자칭 대신관을 불렀다.

16551077496676.png“대신관.”

그러자 커다란 꽃나무 뒤에 몸을 숨겼던 대신관이 얼른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자, 꽃나무의 향이 라틸에게까지 불어왔다. 좀 더 밝은 조명 쪽으로 이동하자 라틸은 대신관의 근육에 가려졌던 외모를 보고 조금 놀랐다. 이미지가 예상 밖이라 미처 깨닫지 몰랐는데. 그는 얼굴만큼은 정말 상상 속 천사 같았다.

16551077496676.png“네가 정말 대신관이 맞으냐.”

라틸이 묻자 대신관은 부드럽게 웃더니 라틸을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손 안에서 별가루를 뿌린 양 반짝거리는 빛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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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077496676.png“그건……?”

놀라워서 보고 있자니, 대신관은 가까이 다가와 라틸의 앞에 무릎을 굽혔다. 뭘 하는 건가 싶어 내려다보지, 그는 라틸이 베란다에서 뛰어내릴 때 나뭇가지에 부딪혀 까진 종아리에 그 빛을 대고 있었다. 피부에 빛이 닿자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16551077496704.png“이러면 믿으시겠습니까?”

16551077496676.png“……믿지.”

라틸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신관은 천천히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 태도는 달빛을 받아 흔들리는 잔잔한 호수처럼 아름다워서, 라틸은 다시 감탄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신관을 보면서 놀라워할 때가 아니었다.

16551077496676.png“내가 무슨 일로 널 찾았는지 아느냐.”

16551077496704.png“힛라 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일과 관련된 일이겠지요?”

라틸은 자칭 황제 시해범이 나타난 일, 그자가 범인에 대해 말하려다가 갑자기 죽은 일, 죽어가면서 ‘로드’란 말을 뱉은 일, 다른 신관이 와서 그 시체가 저주에 걸렸다 확인해준 일 등등을 이야기한 후 물었다.

16551077496676.png“힛라 노신관이 죽고 너까지 습격 받은 걸 보니, 저주를 사용하는 적들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모양이다. 그러려면 적들에게 대항할 방법이 필요해. 너는 그 방법을 아느냐?”

제발 알고 있어라, 제발 알고 있어라. 라틸은 속으로 간절히 중얼거렸으나, 대신관은 고개를 저었다.

16551077496704.png“구마 방법은 저 역시 알지 못합니다.”

이럴 수가. 라틸은 주먹을 꽉 쥐었다.

16551077496676.png“곤란한데.”

적은 이미 한 번, 저주에 걸린 사람을 감옥을 통해 들여보냈다. 만약 그자들이 저주에 걸린 사람을 광장 같은 데서 죽이면 어떻게 될까? 거기서 좀비나 식시귀 같은 것들이 발생하면? 상상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피해가 생겨날 것이다.

16551077496676.png“아는 게 전혀 없느냐? 흑마법에 대해서도?”

대신관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16551077496704.png“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대현자님이라면 무언가 아는 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16551077496676.png“대현자?”

16551077496704.png“예. 그리고 전 구마 방법을 모르오나, 제 존재 자체가 흑마법을 누를 수는 있습니다. 폐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어쩌면 저주를 사용하는 적들은 그 때문에 절 미리 죽이려 드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신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16551077496704.png“실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후, 습격 받는 빈도가 부쩍 늘었습니다.”

16551077496676.png“정말이냐?”

16551077496704.png“예. 그래서 폐하께서 절 찾으신단 이야기에 바로 응한 겁니다.”

그렇다면 역시 아버지의 암살과 지금의 사건들은 모두 이어져 있는 건가. 라틸의 머릿속에 가짜 황제 시해범이 죽기 직전 ‘틀라’라고 말했던 걸 떠올렸다.

16551077496676.png‘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혹시 틀라가 아버지를 암살했을 가능성은 없나? 그러면 뭔가 이어지는 것 같은데.’

그때였다.

16551077496704.png“폐하.”

라틸이 생각하는 동안 침묵하던 대신관이 갑자기 조용한 목소리로 라틸을 부르더니, 다시 무릎을 굽혔다.

16551077496704.png“절 하렘에 받아주십시오.”

라틸은 자꾸 무릎을 굽히는 그를 일으켜 세우려다가 깜짝 놀랐다.

16551077496676.png“하렘?”

뜬금없는 청이었다. 갑자기 대신관이 하렘에 들어오겠다니.

16551077496676.png‘아. 혹시 하렘에 신전이 있다면 거기서 일하겠단 건가?’

너무 의외인지라 라틸이 이렇게 생각하려는 찰나.

16551077496704.png“후궁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대신관이 몸소 라틸의 추측을 부정했다. 놀란 라틸을 올려다보며 그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16551077496704.png“아까도 말씀드렸듯 절 노리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폐하를 뵈니, 폐하라면 절 지켜주실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아니 왜. 혼자 잘 지켜나갈 것 같던데. 라틸은 순간 입 밖으로 튀어나갈 뻔한 말을 눌렀다. 아냐. 머릿수로 밀리면 저렇게 강해도 밀릴 수 있겠지.

16551077496676.png“하지만 대신관이 하렘이라니……. 좀 그렇지 않은가?”

16551077496704.png“그 때문입니다.”

16551077496676.png“그 때문?”

16551077496704.png“웬만해서는 대신관이 하렘에 들어가 있단 생각은 하지 못하니까요. 제가 평범한 후궁인 척 들어가 있으면, 아무도 절 대신관이라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파격적인 말이었으나 꽤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아무도 신성한 대신관과 은밀한 하렘을 연결지어 생각하진 못할 터. 그냥 마음에 드는 남자를 발견해 하렘에 넣었다고만 둘러대도, 다들 ‘저게 폐하 취향이구나’ 하고 말지 ‘혹시 대신관?’이라 의심하진 못할 것이다. 어차피 이 대신관은 겉으로 볼 땐 전혀 대신관 이미지가 아니기도 하고. 게다가 대신관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흑마법을 막을 수 있다면, 그 존재만으로도 도움이 될 터.

16551077496676.png“괜찮네.”

16551077496676.png‘후궁 숫자가 다섯을 넘었으니, 순애보 황제란 기록은 못 하겠지만.’

  * * * 모든 창문을 다 가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돌로 된 성 안. 온기조차 없이 차가운 그 성의 지하 옥좌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16551077582432.jpg“습격이 실패했다?”

남자의 질문에 여우 가면을 쓴 사람이 대답했다.

16551077582432.jpg“예.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대신관이 머리에 넣어둔 구슬을 눈치채고 부숴버린 것 같습니다.”

남자는 혀를 찼다.

16551077582432.jpg“의외로 골치 아프군. 그러면 대신관은? 황제와 만난 건가?”

16551077582432.jpg“구슬이 부서져서 그 이후의 일은 모르겠습니다.”

여우 가면의 대답은 남자에게 그리 유쾌한 소식이 아니었으나, 남자의 입가에는 즐겁단 미소가 떠올랐다. 그걸 본 여우 가면은 고개를 기웃했다.

16551077582432.jpg“기쁘신 듯합니다?”

16551077582432.jpg“안 기쁠 이유가 있나.”

남자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16551077582432.jpg“사랑하는 동생이 똘똘하게 해나가고 있다는데. 쉽게 당하면, 그 녀석한테 잘린 내 머리가 가엾지.”

남자가 자신의 목 부근을 문지르자, 목을 따라 실선처럼 그어진 붉은 선에서 희미하게 피가 새어 나왔다. 그걸 본 여우 가면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남자는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으며 물었다.

16551077582432.jpg“헤움은? 깨어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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