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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40/367)

40화.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2020.07.15.

첫 춤은 항상 오빠랑 췄었는데. 라틸은 시종장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나란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후궁들을 차례로 보았다. 라나문은 이미 눈에서 이글이글 열기가 나오고, 타시르는 자신을 골라도 그만 고르지 않아도 그만이란 얼굴로 웃고 있었다.

16551077231921.png‘타시르 탈락.’

클라인은 두 손을 꼭 모은 자세였고, 게스타는 안 고르면 울 것 같은 모습이다. 칼라인은…….

16551077231921.png‘칼라인도 탈락.’

무표정한 칼라인까지 후보에서 제외하니, 간절히 바라보는 남자가 셋 남는다. 하지만 세 남자 사이에서도 고민은 길지 않았다.

16551077231921.png“라나문.”

어쨌든 아트락시 가문은 라틸이 황위 다툼에서 승리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가문이다. 하렘을 만들면서 한 차례 웃음거리가 된 아트락시 공작을, 이런 데서까지 민망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16551077231936.png“폐하.”

당연히 자신이 불릴 줄 알았다는 듯이 라나문이 다가와 라틸이 내민 손을 잡자, 아트락시 공작은 이를 지켜보며 흐뭇하게 옆사람에게 자랑했다.

1655107723194.jpg“내 아들이지만 참 잘났어. 군계일학이로군. 폐하께서 푹 빠질 수밖에 없지. 그렇지 않나?”

옆에 있던 사람이 게스타의 아버지인 로르드 재상이었기에 그 자랑은 효과가 없었지만.

1655107723194.jpg“푹 빠진 사람은 폐하가 아니라 자네 아들인 것 같은데? 눈 좀 똑바로 뜨고 보게.”

1655107723194.jpg“눈을 똑바로 뜨니 내 옆에서 분노에 타들어가는 자네가 보이는구만.”

1655107723194.jpg“아트락시!”

1655107723194.jpg“장관이로다…….”

1655107723194.jpg“아트락시이!”

로르드 재상이 분노에 차 씩씩거리는 사이. 라틸은 사람들 사이에서 라나문과 손을 잡고 가볍게 춤을 췄다. 어릴 때부터 무술을 익혀온 데다 원래 몸 쓰는 데는 천부적이라, 라틸은 춤 역시도 가뿐하고 수월하게 추는 편이었다. 그 덕분에 라틸이 라나문의 손을 잡고 한 바퀴를 빙그르르 가볍게 돌자, 사람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한 쌍의 연인이 춤까지 새처럼 춘다면서 감탄했다. 하지만 라틸은 찬사 속에서 라나문을 춤 상대로 고른 걸 후회했다.

16551077231921.png‘라나문 이 자식. 춤을 왜 이렇게 못 춰?’

라나문이 춤을 너무 못 춰서. 라틸의 풍성한 치마와 라나문의 수려한 얼굴 덕에 사람들은 라나문도 라틸만큼 춤을 잘 춘다는 착시 효과라도 받은 듯 다들 탄성만 뱉어대는데. 춤 상대인 라틸은 그럴 수 없었다. 파트너의 엉성한 춤 실력 때문에, 아까부터 연달아 밟힌 발이 얼마나 욱신거리는지 몰랐다.

16551077231921.png‘분명 멍이 들 거야.’

16551077231921.png“오늘 네가 짐의 마음에 제대로 발자국을 남기는구나, 라나문.”

16551077260571.png

  결국 참다 못한 라틸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면박하자, 라나문은 모른 척 차갑게 대꾸했다.

16551077231936.png“아무리 많은 발자국을 남긴다 한들, 폐하께서 제 마음에 남긴 숫자보단 적을 겁니다.”

16551077231921.png“난 네 발을 밟은 적이 없다.”

16551077231936.png“폐하의 무관심이 제 마음을 짓밟습니다. 매일매일. 매 시각.”

16551077231921.png“!”

16551077231936.png“오늘은 오시나, 내일은 오시나, 지금은 누구와 계시나, 저는 하루종일 폐하만 기다립니다. 그 마음이 어떤지 폐하는 모르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춤을 추는 3분 만이라도 제가 밟게 해주십시오.”

라나문의 목소리는 냉랭하고 서늘했으나 질투하는 것처럼 들렸다. 라틸은 라나문의 품 안에서 빙그르르 돌다 말고서 우뚝 멈춰서서 그와 눈을 맞추었다. 사람들은 음악은 계속되는데 황제가 춤을 멈추고 후궁을 빤히 보고만 있자, 덩달아 춤 추던 걸 멈추고서 두 사람을 힐긋거렸다. 라틸은 라나문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자신을 똑바로 내려다보자, 씩 웃으면서 물었다.

16551077231921.png“날 기다렸느냐?”

16551077231936.png“예. 항상 기다리고 있습니다.”

돌아온 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하지만 별 감정이 없게 들리는 대답. 라틸은 그 목소리가 재미있어서 활짝 웃었다. 그 미소를 본 라나문이 손을 움찔하자, 그 감각이 라틸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16551077231936.png“뭐가 그리 재밌으신 겁니까.”

16551077231921.png“네가 기다리는 게 나일지 황제일지 생각해 보아서.”

16551077231936.png“!”

16551077231921.png“어느 쪽이지?”

뒤꿈치를 든 라틸이 라나문의 귀에 대고 그에게만 들리도록 묻자, 사정을 모르는 아트락시 공작이 뿌듯해하면서 사람들을 향해 건배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의 눈에는 아들과 황제가 목소리를 낮춰 싸우는 모습이, 춤을 추다 말고 둘이서 속닥속닥 사랑 가득한 말을 주고 받는 것처럼만 보였다. 사람들 역시도 보는 눈이 비슷한지라, 박수를 치면서 아트락시 공작을 향해 열심히 아부하는 발언을 날려댔다.

1655107723194.jpg“라나문 님이 곧 국서 자리에 오르시겠군요.”

1655107723194.jpg“하긴. 출신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1655107723194.jpg“폐하께서 라나문 님에게 완전히 푹 빠져 계신 모양입니다.”

1655107723194.jpg“누구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지요, 라나문 님은…… 저도 포함해서요.”

1655107723194.jpg“자작? 방금 뭐라고?”

1655107723194.jpg“앗!”

아버지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라나문만이,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차갑게 대답했다.

16551077231936.png“황제입니다.”

라틸은 잠깐 놀랐으나, 곧 눈이 휘어지도록 웃으면서 라나문의 어깨를 두드렸다.

16551077231921.png“잘 대답했다.”

16551077231936.png“!”

16551077231921.png“난 사랑을 속삭이는 입보다 욕망에 충실한 입을 더 믿거든. 네 입은 신뢰할 수 있겠구나.”

  * * * 춤을 마친 라틸은, 자신의 남자란 이유로 다른 영애나 부인들과는 춤을 출 수 없는 후궁들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돌아가면서 최소 한 번씩은 후궁들끼리 춤을 출 것. 후궁들이 하렘 안에서 자기들끼리 주야장천 싸워대니, 이 참에 손 잡고 춤이나 추면서 친해져 보라는 라틸의 배려였다. 대외적으로는. 당연히 이건 핑계고, 사실은 계속 머리 아프게 만든 데 대한 복수였다. 그리고 그 복수는 안타깝게도, 라틸이 ‘가장 속을 썩이지 않는다’고 평가를 내린 타시르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먹히고 말았다.

16551077321214.png“타시르. 손을 내놔라.”

타시르가 가장 무서워하는 칼라인이, 라틸의 명령을 듣자 옆에 있던 그에게 대번에 손을 내민 탓이었다.

1655107732122.png“뽑, 뽑아서 달란 건 아니지?”

16551077321214.png“순순히 주면 뽑히진 않겠지.”

타시르가 칼라인에게 잡혀가는 건지 끌려가는 건지 애매한 모습으로 댄스홀에 나가자, 선택권이 사라진 게스타와 클라인은 속으로 욕을 뱉으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16551077321232.png“내 발을 밟는 순간 난 네 발목을 걷어찰 테니 그런 줄 알아라, 무말랭이.”

그리고 라틸은 그런 후궁들을 바라보면서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자신을 힐긋대는 꺼림칙한 시선을 감지하고 인상을 굳혔다.

16551077231921.png‘아까부터 뭐지?’

위치가 위치인지라, 사실 라틸이 어디에서 무얼 하든 시선은 늘 따라 붙었다. 그나마 후궁들과 제각각 떨어져 있으면 시선이 분산되지만, 아까처럼 누구 하나와 붙어 있으면 따라오는 시선은 평소보다 배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고려하더라도, 유독 집요하게 달라붙는 시선이 하나 느껴졌다.

16551077231921.png“자몽을 가져와라.”

라틸은 과일 접시를 들고서, 윤이 나게 닦아둔 덕에 거울만큼 사물을 잘 반사시키는 커다란 기둥 부근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일부러 그곳에서 과일을 느리게 먹다가, 시선이 느껴지자마자 바로 기둥을 통해 자신을 쳐다보는 이를 확인했다. 그러자 반대쪽 계단 층계참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16551077231921.png‘왜 저렇게 보는 거지?’

심지어 그 사람은 라틸이 자연스럽게 몸을 돌리자 바로 자리를 비켜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16551077231921.png‘혹시?’

대신관은 손님들 틈에서 라틸을 지켜보다가, 안전하단 확신이 들면 접근하겠다고 했다. 어쩌면 그자가 대신관일지도 몰랐다.

16551077231921.png“가져가라.”

라틸은 그 생각을 하자마자, 지나가는 하인에게 접시를 건네고서 얼른 그자가 사라진 곳을 향해 걸어갔다.

16551077231921.png‘그새 어디로 간 거지? 안 보여.’

인적 드문 곳을 인기척을 죽이고서 은밀하게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어딘가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107723194.jpg[젠장. 대신관이 분명 여기 어딘가로 갈 거라 했는데?]

16551077231921.png‘대신관?’

라틸은 우뚝 멈춰서서 기둥 뒤에 몸을 감췄다. 방금 누가 대신관을 입에 담은 건가?

1655107723194.jpg[아직 붙잡지 못했나?]

라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대신관을 입에 담으면서 투덜거린 자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누가 저렇게 부주의하게 ‘대신관 대신관’ 하며 입에 담는진 모르겠으나, 대신관에게 그리 호의를 가진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16551077231921.png‘아니, 그보다 대신관이 여기에 왔다는 걸 어떻게 아는 거지? 그 사실을 아는 건 정말로 몇 안 되는데?’

일단 라틸은 부주의하게 투덜대는 목소리 쪽으로 가보았다. 그곳에는 염소 수염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타리움의 귀족이 있었다.

1655107723194.jpg“폐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타리움의 귀족. 그자는 라틸을 보자 놀랐는지 황급히 인사를 올렸다.

1655107723194.jpg“이런 곳에서 폐하를 뵙다니. 영광입니다.”

하지만 거의 동시에 다른 목소리가 하나 더 들려왔다.

1655107723194.jpg[왜 황제가 여기에 온 거지?]

라틸은 인상을 구겼다. 목소리를 낸 건 분명 이 귀족. 그런데 어떻게 두 가지 목소리를 거의 동시에 낸 거지? 게다가 자신을 앞에 두고서 ‘황제’라니. 모든 귀족들이 자신을 좋아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앞에서는 말과 행동을 조심하기 마련인데. 아까 대놓고 ‘대신관 대신관’ 거리던 것부터 황제를 앞에 두고 ‘황제 황제’ 칭하는 것까지. 참으로 부주의한 인간이 아닌가.

1655107723194.jpg[왜 황제가 아무 말도 않고 날 쳐다보지? 혹시…… 이상한 걸 눈치챘나?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괜찮아.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아직은.]

그러나 귀족에게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어딘가 이상했다. 귀족은 마치 라틸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1655107723194.jpg[그냥 바람을 쐬러 나왔다고 하자. 그런 사람이 하나둘도 아니고.]

그러다가 귀족이 슬며시 고개를 들더니, 순종적으로 웃으면서 “바람이 좋지요. 바람을 쐬려고 나가는 길이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라틸은 더욱 깜짝 놀랐다.

16551077231921.png‘뭐야. 저 사람? 자기 생각을 나한테 보낸 거야? 아니면 내가 저 사람 생각을 읽은 거야?’

처음 있는 일이라 몹시 당혹스러웠다.

1655107723194.jpg“폐하……?”

하지만 라틸은 상대가 두려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얼른 다정해 보이는 미소를 띠고서 손을 저었다.

16551077231921.png“아니다. 마저 바람 쐬러 가거라. 짐은 여기서 만나기로 한 후궁이 있어서.”

1655107723194.jpg“그럼…….”

그러나 귀족이 물러나자 라틸의 표정은 바로 싹 굳었다.

16551077231921.png‘내가 방금 저자의 속마음을 들은 건가? 정말로?’

조상 중에 이런 능력을 가진 조상이 있었단 말은 들었지만, 그냥 허구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게다가 라틸은 마법사도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의 속마음이 들리다니…….

16551077231921.png‘아니, 속마음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자의 속마음 속에 대신관에 대한 좋지 못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게 중요하지.

16551077231921.png‘저자. 분명 대신관을 붙잡니 어쩌니 했어. 대신관이 누구인지 아는 건가? 대신관이 위험에 처한 건가?’

고민한 끝에 라틸은 우선 자신이 ‘들은’ 게 진실이라 믿고서, 인기척을 더욱 죽이고서 아까의 그 귀족을 거리를 두고 쫓아갔다. 그 귀족은 처음에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 보았지만, 라틸이 완벽하게 기척을 감추고 쫓자 나중에는 안심했는지 뒤를 힐긋거리는 걸 멈추고 최대한 속도를 빠르게 해서 어딘가로 달려갔다. 얼마나 그렇게 이동했을까. 후원 베란다 쪽으로 간 귀족이 난간을 붙잡고 허리를 깊숙이 숙여 어디를 유심히 보더니, 다시 돌아서서 근처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자가 내려가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라틸은 아까 그 귀족이 내려다보던 난간으로 걸어갔다.

16551077231921.png‘뭘 본 거지?’

허리를 숙인 라틸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16551077231921.png‘저기?’

마침내 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높은 관목으로 둘러싸여 조명이 흐릿한 곳에, 화려한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을 중심에 두고 몇몇이 그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불빛이 거의 없는 곳이지만 라틸은 밤눈이 밝은 편이라 그 모습들이 똑똑히 보였다.

16551077231921.png‘저기다.’

게다가 빼곡하게 경비병들을 배치했는데도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습격자 중 한 명의 복장이 경비병의 복장이었던 것이다.

16551077231921.png‘역시 내부에 문제가 있었어.’

라틸은 치렁한 치마 반쪽을 빠르게 찢어낸 뒤, 난간을 밟고 단번에 그쪽으로 뛰어내려갔다.

16551077403785.jpg“!”

습격자 중 한 명의 등을 밟고 착지하자, 로브를 쓴 사람과 습격자들이 모두 당황해서 라틸을 돌아보았다. 습격자들은 바로 검을 빼들었으나, 라틸은 그보다 한 발 앞서 가장 앞에 선 습격자의 목을 단도 뒷부분으로 빠르게 내려쳐 기절시켰다.

1655107723194.jpg“윽!”

습격자들은 난데없는 황제의 등장에 당황한 듯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도망쳐야 할지 황제라도 공격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듯. 이에 관련된 명령은 없던 게 분명했다. 그 혼란스러운 시선들을 보며 라틸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16551077231921.png“너희는 선택권이 없으니 고민 안 해도 된다. 고민은 내가 해야지.”

라틸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휘어졌다.

16551077231921.png“죽일까, 잡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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