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바다 맛은 무슨 맛2020.07.12.
“폐하, 급히 보고해야 할 중요한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오늘은 당직이 아닐 텐데, 뜬금없이 서넛이 급히 달려오자, 라틸은 꽃 향기를 맡다 말고서 꽃다발을 내렸다.
“서넛 경? 무슨 일입니까?”
그러나 서넛은 고개를 저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여기서 말씀드리긴 곤란한 일입니다.”
또 무슨 일이야? 연달아 터진 사건들 때문일까. 라틸은 무슨 일인지 듣기도 전에 괜히 심장이 두근거리고 초조해졌다. 어쨌든 급한 일이니 가긴 가야 했다. 게다가 클라인도 이미 잠든 것 같고……라고 생각한 그 순간.
“폐하!”
‘쾅’ 문이 열리더니 클라인이 억울해 죽겠단 얼굴로 나왔다.
“클라인?”
사연 많은 표정을 하고 있는지라 라틸이 놀라서 부르자, 클라인은 라틸을 자기 품에 안더니 꽉 끌어안으며 항의했다.
“또 절 버리고 가실 겁니까? 가지 마세요!”
“클라인? 너 안 자고 있었어?”
이 자식, 그런데도 문을 안 열고 있었다고? 라틸이 한 소리를 하려 했으나, 클라인은 라틸을 단단한 팔로 끌어안은 채 놓으려 들지 않았다.
“왜 항상 절 버리고 가는 겁니까? 이번엔 가지 마세요. 절대로 안 놓아줄 겁니다. 갈 거면 절 업고 가십시오.”
클라인의 품에서는 시원한 향이 났다. 무슨 향수를 뿌린 건진 모르겠지만, 맑은 향이었다. 라틸은 클라인에게 한 소리를 하려다가, 그가 귀까지 빨개진 걸 걸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가지 말라고 붙잡고 있긴 한데, 자기도 이 상황이 몹시 부끄러운 게 틀림없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늘어지는 걸 보니 역시 전에 5분만에 가버린 데 많이 놀랐던 거겠지. 결국 라틸은 화를 내거나 호통을 치는 대신 클라인의 등을 두드리면서 달랬다.
“급한 일이니 가보긴 해야 돼.”
“폐하!”
“대신 이번에는 갔다가 바로 올게. 30분, 아니, 한 시간 안에 올게. 기다리거라.”
클라인은 그리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결국 순순히 손을 떨구었다. 몸을 꽉 감싸던 커다란 팔이 물러나자 라틸은 아주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 * *
“무슨 일이야?”
라틸이 하렘을 빠져나가며 묻자 서넛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전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대신관이 보내라 한 서신이라 합니다.”
“연락이 닿은 겁니까?”
“그런 모양입니다.”
라틸은 걸음을 빠르게 했다. 집무실 안에 들어가자 시종장이 책상 옆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라틸이 다가가자 시종장이 편지를 집어 라틸에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힛라 신관님의 일도, 폐하께서 저를 부르시는 일도 들었습니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사람의 생명이 오간 만큼 보통 일은 아니라 여겨집니다……. 라틸은 편지를 빠르게 읽고서 책상 위에 종이를 내려놓았다. 좀 구구절절하게 풀어 썼는데, 대충 요약하자면 이거였다.
“연회 때 찾아오겠답니다.”
라틸의 말에 서넛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공식 방문을 하는 겁니까?”
“아니. 비공식적으로. 정체를 드러내기 싫답니다.”
“?”
“연회에 참석하되, 내 곁이 안전하단 확신이 들 때에만 모습을 드러내겠답니다.”
서넛은 잠시 멍하게 책상 위 편지를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의외로 겁이 많은 자 같습니다.”
“뭐, 대신관이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래도 너무 예상 외입니다.”
“연회 경비 숫자를 배로 늘려야겠습니다. 사각지대가 없도록요. 경비할 수 없는 구역은 아예 막아놓고.”
몇 가지 지시를 더 내린 라틸은 시계를 힐긋 확인했다. 어느새 30분이 지났다. 클라인과 약속이 있단 걸 떠올린 라틸은 더 할 일이 없는 듯하자 돌아서서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서넛은 라틸이 휑하니 나가버리자 잠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종장은 뒷정리를 하다가 근위기사단장이 하염없이 아무도 없는 복도만 보고 서 있자 미간을 찡그렸다. * * * 모든 사람이 동시에 아파하고 동시에 즐거워하지 않는 법이다. 클라인의 방으로 간 라틸은 그의 시종 바닐이 문을 열어주자 이번에는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클라인은 보이지 않았는데, 대신 침대에 휘장이 처져서 안쪽이 가려져 있었다. 그 너머로 사람의 실루엣이 보이긴 했다.
‘저걸 걷으란 건가?’
명찰 단 인형도 그렇고, 의외로 섬세한 걸 좋아하는구나. 라틸은 속으로 웃으면서 다가가 휘장을 슬쩍 들춰 보았다. 혹시 옷이라도 벗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으나 그건 아니었다. 클라인은 평소와 달리 옷을 단추 하나하나 꼼꼼히 여며 입은 채 가만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라틸이 휘장 안으로 들어오자 입을 조금 벌렸는데…… 혀 위에 새파란 색의 보석이 얹혀 있었다.
깨끗한 붉은 혀와 파란 보석은 색상이 아찔하게 대비되어 보기 좋았으나, 라틸은 그가 왜 굳이 이 와중에 보석을 입에 물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거?”
그래서 왜 보석을 입에 물고 있냐고 직접 물으려는데, 클라인이 보석을 입 안에 넣더니 와그작 와그작 씹어 삼키는 게 아닌가. 보석이 아니라, 보석 모양 사탕인 모양이었다.
“사탕? 무슨 맛 사탕인데 혼자 자랑하면서 먹느냐?”
그래서 라틸이 질문을 바꾸자, 클라인은 손을 뻗어 라틸을 자기 무릎 위에 앉히며 대답했다.
“바다맛이 납니다.”
“그게 무슨 맛인데?”
짠 맛? 소금맛? 시원한 맛? 통 짐작이 가지 않아 라틸이 다시 묻자, 코앞에 적당히 촉촉하고 붉은 기 도는 말랑해 보이는 입술이 다가왔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라틸은 그 입술을 빤히 바라보다가 웃으면서 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붙였다.
“그러지.”
* * * 휴식을 취할 겸 내내 책상에 앉아 있느라 굳은 몸도 풀 겸 간만에 라틸은 서넛과 대련을 했다. 라틸은 거의 한 시간 가까지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으나, 목검이 부러지자 더 움직이던 걸 멈추고 벤치로 걸어가며 물었다.
“서넛 경은 바다 가 본 적 있습니까?”
서넛은 자신의 검을 부하에게 맡기고 라틸을 따라가며 대답했다.
“있습니다.”
라틸이 벤치에 앉자 다른 호위가 얼른 손수건을 내밀었다. 라틸은 손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으면서 웃었다.
“난 가본 적 없습니다.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고요.”
“……언젠가 저와 함께 가보시겠습니까.”
“그것도 괜찮겠네요. 궁금해졌거든요. 진짜인가 가짜인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서넛은 의아해 했지만, 라틸은 더 설명하는 대신 시종이 건넨 물을 받아 마셨다. 그러다가 문득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하이신스랑 클라인은 대체 어떻게 자란 건지 짐작이 안 갑니다. 형제인데 어떻게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을까?”
서넛은 라틸의 입에서 나온 두 남자의 이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를 감추기 위해 서넛은 자신도 수건으로 괜히 얼굴 옆을 닦으며 대답했다.
“틀라 황자님과 폐하도 안 닮으셨습니다. ……두 분은 이복형제라 그렇다지만, 사실 레안 황자님과 폐하도 안 닮으셨지요.”
라틸은 히죽 웃으며 수긍했다.
“오빠보다 내가 낫지 않습니까?”
그러나 서넛이 바로 대답하지 않자, 라틸은 미간을 찡그리고서 허리를 세웠다.
“대답하는 시간이 너무 깁니다?”
서넛은 수건을 무릎에 내려놓고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우정과 충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중이었습니다.”
“와.”
라틸은 충격 받은 척 괜히 입을 크게 벌렸다.
“그게 갈등까지 할 일입니까?”
“폐하는 둘 중 어느 쪽이 우선인지 확실한가 봅니다?”
“난 선택할 일이 없잖습니까. 난 충심을 받는 쪽이니까.”
“그렇군요.”
서넛이 말이 된다면서 납득해 고개를 주억거리자, 라틸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서넛 경. 아직도 대답 안 했습니다. 나야 오빠야?”
“…….”
“어어? 진짜 대답 안 하네?”
“망설이는 시간이 길수록 절 오래 보고 계시니 좋습니다.”
“다른 데 보면 대답할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서넛이 정말로 대답을 하지 않자 라틸은 괜히 기분이 상해서 눈살을 찡그렸다.
“서넛 경. 그러다 오빠가 나랑 자기 둘 중 하나 선택하라 하면 진짜 갈등하겠습니다?”
그제서야 서넛은 시리게 웃으며 대답했다.
“전 늘 폐하의 편입니다.”
그의 손가락이 라틸이 부러뜨린 목검 조각의 날카로운 끝을 위태로울 정도로 깊숙하게 눌렀다.
“처음부터 전 그러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렇게까지 오버는 안 해도 됩니다.”
라틸이 치를 떨며 손을 휘젓자 서넛의 눈이 장난스럽게 휘었다.
“이런 대답을 원하신 거 아닙니까?”
* * * 라틸이 웃으면서 서넛과 장난치는 그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타시르와 게스타였다. 연회 관련해 마지막 보고서를 작성한 후 하렘으로 돌아가다가 황제가 연무장에 있단 소리를 듣고 그쪽에 가보던 중 이 광경을 보게 된 것이다.
“이야, 우리 순진한 도련님 표정 무섭네.”
타시르가 말없이 연무장을 내려다보는 게스타를 놀렸으나, 게스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쑥스러운 듯 대답했다.
“연모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사이 좋은 모습을 보며 표정 좋을 남자는 없습니다.”
쑥스러운 척 하긴 하는데, 타시르 앞에서는 굳이 열렬하게 연기할 마음은 안 드는지, 목소리는 차가웠다. 타시르의 시종 겸 상단의 부하가 곁에 있었지만, 어차피 타시르에게 자기 얘길 들었을 거라 생각하는지 그쪽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난 안 그런데.”
타시르가 웃으면서 대답하자 게스타는 부끄러워하던 표정을 싹 지우고서 중얼거렸다.
“그러면 그쪽은 폐하를 연모하지 않는 거겠지.”
그리고는 더 말을 섞기도 싫다는 듯 휑하니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게스타가 저 멀리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호위와 만나 먼저 하렘으로 돌아가자, 입을 벌리고 지켜보던 히얼란이 혀를 찼다.
“소단주님 말씀처럼 참. 이미지 메이킹을 잘하는 도련님이네요.”
하지만 곧 히얼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히죽 웃었다.
“하지만 저분이 뭘 모르시네요. 도련님은 화나면 오히려 더 웃는데요. 아, 물론 도련님이 폐하를 연모하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요.”
타시르는 그렇지 그렇지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가 황당해서 물었다.
“내 마음을 왜 네가 확신하고 그래?”
그러나 히얼란은 당연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도련님은 자기 자신 외엔 아무도 좋아하지 않으시잖아요?”
* * *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마침내 무사히 연회 준비가 끝나고 초대를 받은 외국 귀빈들이 모여들었다. 라틸은 높은 창문에서 수많은 나라의 문양을 새긴 마차가 궁전 정문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차를 마셨다.
‘저 나라들 중 틀라와 손을 잡았던 나라가 있다……. 어느 나라일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틀라처럼 거래를 한 건 아니지만, 라틸 역시 ‘유약한 황제’ 시늉을 해서 인근 나라들의 지지를 끌어냈다. 그 나라들과 아직 충돌을 한 건 아니지만, 라틸이 그들이 기대한 ‘유약한 황제’가 아니란 걸 알게 될 때 어떤 식으로 관계가 변할지도 신경써야 했다. 게다가…….
‘대신관. 저 중에 대신관이 끼어 있다.’
차를 한 번에 다 털어넣은 라틸은 빈 접시를 옆에 선 하인에게 건네고서 돌아서며 서넛에게 지시했다.
“대신관이 내게 안심하고 접근하도록 안전에 만반을 기해야 합니다. 오늘은 절대로, 절대로 그 어떤 사고도 터져선 안 됩니다. 그대만 믿는다, 서넛 경.”
“대신관이 올 수도 있지만, 대신관으로 위장한 다른 누군가 올 수도 있습니다.”
“알아.”
라틸이 힛라 노신관에게 편지를 전달한 걸 아는 이는 극소수인데, 신관은 죽고 편지는 사라졌다. 물론 ‘신관을 죽이고 보니 편지가 있더라’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지만, 아예 처음부터 편지에 대한 걸 알고서 죽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게다가 이미 무덤 훼손 사건 때 라틸은 주범 혹은 공범이 내부에 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렇기에 당연히 서넛이 걱정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미리 계산을 한 상태였다.
“확인할 방법이 있다.”
“방법? 무엇입니까?”
서넛의 질문에 라틸은 웃으면서 어깨만 두드리고 지나갔다.
“비밀입니다. 혼자만 알고 있을 거라.”
“!”
* * * 저녁이 되자 마침내 연회가 시작되고, 라틸은 수많은 이들로부터 축하 인사와 선물을 받았다. 개중에는 라틸이 하렘을 만들었단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상상을 한 건지 아름다운 남자를 선물하는 이도 의외로 제법 있었다. 서넛은 처음엔 라틸과 함께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선물’이라면서 보내진 남자의 숫자가 30명을 넘어가자 점차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하지만 서넛의 표정은 그나마 나았다. 라틸과 가장 가깝게 앉은 라나문은 눈짓만으로 사람을 얼려버릴 기세인지라, 몇몇 외국인들은 자기들끼리 라나문을 가리키며 소곤거릴 지경이었다.
“저 사람은 폐하께 보내진 남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것 같습니다.”
“저 질투에 찬 눈을 보세요. 무섭군요.”
그 소리를 들은 타시르는 입술을 꽉 깨물고서 라나문을 놀리지 않기 위해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몇몇 이들에게 큰 분노를 안겨준 ‘선물 증정’ 시간이 끝난 뒤. 마침내 음악이 연주되고 춤을 출 수 있게 되자 라틸은 본격적으로 대신관을 찾기 위해 얼른 일어섰다.
“폐하.”
그런 라틸에게, 시종장이 얼른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후궁님들 중에 첫 춤 상대를 고르셔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