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울어도 돼, 클라인2020.07.01.
아무리 귀족들의 파티에 참석해 그들과 어울린다 한들, 타시르는 그래도 귀족이 아니란 말을 빙 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아니, 이 정도로 노골적이면 빙 둘러 표현했다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타시르는 잠시 게스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화를 내는 대신,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히죽 웃으며 턱을 괴었다
“우리 순둥이 도련님, 성격 좀 있는 분이라 생각은 했는데. 그걸 나한테 드러낼 줄은 몰랐네.”
“…….”
“그런데 귀여워. 드러낸 이가 아주 하찮고 잔잔해서 사랑스럽네.”
“!”
말을 마친 타시르는 손을 뻗더니 돌연 게스타의 뺨을 톡 두드렸다. 그 순간, 게스타는 눈 깜짝할 사이 타시르의 손목을 콱 낚아채어 탁자에 쿵 소리가 나게 꽂았다.
“무슨 짓이지?”
이어서 나온 목소리는 조금도 유약하지 않았다. 라틸이 몇 번이나 신기하게 여겼던 팔의 근육 역시 제대로 힘과 속도를 냈다.
“사람 없는 거 보고 성격 드러내길래. 나도 해도 되는 줄 알고.”
그러나 타시르는 여전히 실실 웃기만 할 뿐 조금도 상대를 위협적으로 여기지 않는 듯했다. 원래도 좋지 않던 분위기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누구라도 지금 이 방에 들어온다면,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서 다시 방문을 닫고 나갈 정도로. 그러나 더 화를 내는 대신, 게스타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순순히 타시르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후. 아파라.”
타시르는 과장되게 아픈 시늉을 하면서 게스타가 놓은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참을 만한 고통이긴 했으나 꾀병은 아니었다. 그새 손목에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걸 본 게스타는 다시 온순한 미소를 짓더니,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소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요, 타시르 님. 이번 연회를 얼마만큼 화려하게 하고 싶으시다고요?”
* * *
“아니, 아직도 의논만 하고 있다고요?”
이틀 뒤. 국무회의를 끝낸 라틸은 시종장에게 게스타와 타시르가 연회 준비를 어느 정도 했는지 질문했다가 깜짝 놀랐다. 아직 진행된 게 하나도 없단 대답 때문에.
“식사할 때랑 잘 때 외엔 계속 둘이 만난다면서요?”
“예…….”
“라우라는? 라우라는 뭐하고?”
라우라는 라틸이 게스타와 타시르의 연회 준비를 돕도록 붙여준 비서였다. 둘 다 준비 과정에 대해 잘 모를 테니 도우라고 붙여준 건데. 이틀이 되도록 아무것도 진행된 게 없다니…….
“첫날엔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라고 자리를 비켜드렸답니다.”
시종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의견을 못 맞추기에, 그 다음날부턴 직접 두 분이 토론하시는 데 들어가 있었대요.”
“그런데? 왜 결과물이 없습니까?”
시종장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 다 고집이 장난이 아니라, 자기 의견을 절대로 안 굽히신다는군요.”
라틸은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사실 두 사람을 붙이긴 했지만, 라틸은 아마 일방적으로 게스타가 타시르 뜻을 따를 거라 생각했다. 라틸이 사실상 게스타에게 기대한 건 사람들이 ‘황자와 공신의 아들이 있는데, 굳이 평민 출신 상인에게 연회 준비를 맡겼다’고 수군거리는 걸 막는 방패 역할이었다. 그런데 게스타가 고집을 안 꺾어서 일의 진행이 안 된다니.
“게스타가 의외로 고집이 세나 보네요.”
“두 분 다 세신 거지요.”
“아, 그렇긴 한데. 타시르 쪽은 뭐 처음부터 이미지가…….”
누가 봐도 고집이 세 보여서. 그쪽은 누가 자기 말을 안 들으면 협박을 해서라도 의견을 관철시킬 인상이라 애초에 의견 조율이 되리란 기대도 하지 않았다.
* * * 결국 라틸이 약간이라도 연회 준비가 되고 있단 보고를 받은 건 그로부터도 3일이 더 지나서였다.
“잘됐네.”
라틸은 비서가 정리해 올린 보고서를 한 번 힐긋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잘 썼네.”
라틸은 몰랐다. 이 두 마디 칭찬을 위해 타시르와 게스타가 얼마나 많은 말다툼을 했는지.
“도련님. 도련님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이건 명심해. 결과물이 좋건 나쁘건, 우린 한 배를 타고 있단 걸. 엉터리로 연회를 준비했다간 나나 도련님이나 완전히 폐하한테 찍혀버릴걸.”
나중에는 정말로 안 되겠다 싶어서 타시르가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게스타를 달래야 할 정도였다.
“반씩 물러나자.”
내내 의견을 굽히지 않던 게스타는 타시르가 먼저 뒤로 물러날 태세를 취하자 그제야 자신도 뒤로 반 보 물러났다.
“그러지요. 하지만 손을 잡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란 걸 명심해야 할 겁니다.”
“도련님 진짜 재수없구나?”
“타시르 님. 주관적이고 사적인 감정을 제외하고 봐도 당신 의견은 엉터리입니다.”
어쨌든 이런 말다툼의 결과. 연회는 타시르가 주장하는 화려함과 게스타가 주장하는 검소함 사이에서 준비하기로 결정되었다. 비서는 처음 두 후궁이 완전히 상반되는 두 분위기를 섞을 거란 이야기에는 좀 뜨악했지만, 화려한 장식을 하되 색을 검은색으로 통일해 수수해 보이는 효과를 주잔 결과물을 보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비서의 보고서가 차츰 차츰 형태를 갖추어갈 즈음. 소스타 영지에서 힛라 노신관이 찾아왔다. * * *
“이 늙은이를 찾으신단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폐하.”
자기가 황제를 시해했다면서 자백한 범인에게 저주가 걸려 있었단 걸 알게 된 후. 이 사실을 확인해 준 신관은, 힛라 노신관이라면 이런 분야에 대해 잘 알 거라 말하고서 그를 데리러 떠났다. 그러나 궁전 알현실로 라틸을 찾아온 이는 노신관 뿐으로, 노신관을 소개해 준 신관은 보이지 않았다.
“그노시스 신관은?”
“자매님께서는 제게 이 일을 전하신 후, 소스타 영지에 남아 제가 하던 일을 맡아 돌보고 있습니다.”
“설명은 들었는가?”
“예. 들었습니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노신관을 개인 집무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개인 집무실은 공개 집무실과 달리 아무리 급한 일이 있더라도 함부로 비서나 시종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었다. 흑마법사나 저주에 대한 이야기는 아는 사람이 적기에 라틸은 일부러 그를 이 안으로 부른 것이다.
“이미 들었겠지만, 선제 폐하를 시해했다 자백한 놈이 나타났었네. 하지만 그자가 입을 열려고 하자마자 괴상한 일이 벌어졌어.”
라틸은 서넛에게, 노신관에게 의자를 가져다주라 지시한 후 자신은 책상에 걸터앉았다.
“저주에 걸린 범인은 죽어가면서 이상한 말을 했지. 로드를 경배하라던가, 그런 말이었어.”
노신관은 서넛이 가져다 준 동그랗고 푹신한 의자 위에 어색하게 앉았다.
“신관. 그대가 대답해야 할 건 두 가지다.”
“수십 가지라도 아는 대로 대답하겠습니다, 폐하.”
“아니, 두 개면 돼. 우선 질문 하나. 로드를 경배하란 게 무슨 뜻이지?”
“……다른 질문은 무엇인지요?”
“저주에 걸린 시체 때문에 좀비가 생길 수도 있다면서? 또 그런 게 나타나면 처리할 방법은 뭔가? 그노시스 신관은 구마에 관한 정보가 거의 다 사라져서 자기는 모른대.”
수십 가지라도 대답하겠다던 노신관은, 그러나 라틸이 질문을 던지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라틸은 턱을 괴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수십 가지 질문하라는 게, 혹시 개중 하나는 답을 알 거란 뜻이었나?”
“아닙니다.”
“그럼 뭐든 아는 대로 대답해보게. 그쪽이 횡설수설해도 내가 알아서 들을 테니.”
라틸의 말은 맺고 끊는 게 확신해서 어떻게 들으면 단호하고 차갑지만, 달리 생각하면 헷갈리는 점이 없어서 좋았다. 황제가 말을 애매하게 돌려서 해대면 신하들은 오히려 그 말을 분석하고 해석하느라 힘들 뿐이니까. 힛라 노신관은 사람들이 새 황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던 소문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500년 전 흑마법사들이 몰살된 이야기는…….”
“안다.”
“그러면 1000년 전에도 흑마법사들이 몰살된 적이 있단 건 아시는지요?”
라틸은 심드렁하게 노신관의 수염을 쳐다보다가 눈썹을 치켜떴다.
“몰살을 두 번이나 당했다고? 그게 몰살이야? 확실한가?”
“흑마법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옛날 옛날’이란 설명 아래에 전설처럼 전해져서, 보통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500년 전 사건이라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 ‘옛날 옛날’은 1000년 전의 일입니다.”
“확실한가?”
“예. 기록 자체는 몇 개 되지 않으나, 그 기록 대부분이 멀리 떨어진 나라들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한두 국가의 일이 아니었단 거지요.”
“…….”
“1500년 전의 기록이 있더라면 더 정확하겠지만…… 어쩌면 500년 주기로 흑마법사들의 부흥기가 오는지도 모릅니다.”
“신관. 나는 어느 주기로 그들이 부활하는지 따위가 궁금한 게 아니야.”
라틸은 무릎을 꼬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들을 처리할 방법이 필요한 거지.”
“과거의 기록을 알 수 있다면 그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기록은?”
“그 기록이 실전되어서…….”
노신관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아니었더라면 라틸은 분명 “장난해?” 하고 차갑게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신관은 라틸이 만나본 그 어떤 사람보다도 나이가 많아서 함부로 말하기 쉽지 않았다. 라틸은 성질을 누르기 위해 자신의 눈가를 엄지로 눌렀다. 빙빙 돌려서 말했지만, 어쨌든 노신관도 구마 방법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뜻 아닌가. 첫 번째 질문 역시 아예 대답도 안 하는 걸 보니 답을 모르는 듯하고. 결국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 책상에서 일어섰다.
“모른다면 되었다. 먼 길을 오게 해서 미안하군. 좀 쉬다 가시오.”
“기록은 실전되었으나, 구마를 할 수 있는 분은 압니다.”
그러나 노신관이 덧붙인 말이 라틸을 붙잡았다. 라틸은 문으로 걸어가다가 그 자리에서 천천히 돌아섰다.
“그게 누구지?”
“대신관님입니다.”
“대신관? 그자가 구마 방법을 안다고?”
“정확히는, 대신관님의 존재 자체가 어둠 속에 있는 자들과 상극인 거지요.”
“잘됐군.”
라틸은 방긋 웃고서 노신관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면 대신관을 찾아오면 되겠네.”
사실은 노신관이 이어 대신관까지 찾을 생각에 한숨이 나왔지만, 그래도 아예 답을 모르는 것보단 찾을 사람이라도 있는 게 낫지 않은가. 그러나 노신관이 이어서 한 말은 라틸을 대번에 실망시켰다.
“대신관님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는 신관들도 모릅니다. 그분은 정체를 감추고 지내시니까요.”
라틸은 인상을 구겼다.
“그럼 소용이 없지 않는가.”
그런데 왜 말을 한 거야?
“다행히 저는 대신관님과 연이 닿아서 위치를 알고 있지만요.”
“잘됐군. 위치를 알려주게.”
“하지만 다른 사람이 찾아가면 절대로 만나지 않으려 하실 겁니다.”
라틸은 문득 노신관이 자기를 가지고 노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어서 눈썹을 치켜세웠다. 말을 왜 자꾸 저렇게 홱홱 바꾸는 거지? 그냥 한번에 다 해주면 안 되는 건가? 그 흉흉한 기세를 본 노신관은 몹시 죄송하단 투로 부탁했다.
“제게 서신을 써 주십시오. 대신관님께 폐하의 말씀을 직접 전하겠습니다.”
* * * 그날 밤. 라틸은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이다가, 새벽 한 시, 결국 이불 밖으로 도로 빠져나왔다. 여러가지 복잡한 일이 마구 겹치다보니 혼란스러웠다. 이런 감정을 정리하려면 혼자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침대에 누웠는데, 막상 눕고 보니 오히려 시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렇다면 차라리 잡념을 없애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클라인에게 가야겠다. 그 녀석이랑 말을 하다보면 머리가 싹 비워지니까.’
“폐하? 산책 나가십니까?”
“하렘에. 클라인에게 가자.”
라틸은 놀라서 다가온 호위에게 덤덤히 말하고서 풀벌레 소리만 들려오는 밤의 복도를 걸어갔다.
“폐, 폐하!”
오겠다는 말 없이 새벽에 갑자기 방문해서인가. 클라인은 얼굴에 미용팩을 올리고서 편안하게 누워 있다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그건 뭐야. 진흙이야?”
라틸이 클라인의 얼굴에 묻은 녹색 미용팩을 보며 놀리자, 클라인은 당황해서 쩔쩔매다가 황급히 욕실로 뛰어갔다.
“폐하, 세수만 빨리 하고 올 테니 계속 거기 계셔야 합니다! 잠시만요!”
클라인은 욕실에 들어가서도 문 너머로 쩌렁쩌렁 외쳤다.
“알겠다.”
라틸은 자기도 모르게 웃으면서 대답하다가 두 가지 상반된 기분을 느꼈다. 하나는 ‘역시 클라인에게 오길 잘했다’는 감정. 다른 하나는 ‘클라인이 첩자일 가능성이 풀린 건 아니야. 방심하지 마.’라는 생각이었다. 라틸은 눈두덩이를 누르면서 아까까지 클라인이 기대어 있던 침대 베개에 기대 누웠다.
‘멍청해 보이지만 하이신스의 형제다. 저런 모습조차 연극일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클라인이 세수를 하고 나타났을 때 얼마나 쑥스러워할지, 그걸 감추려고 또 무슨 헛소리를 할지 그 생각을 하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가 라틸은 클라인의 베개 옆에서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날카로운 곰인형을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뭐야, 이 기분 나쁘게 생긴 인형은?’
손바닥보다 좀 더 작은, 그리 크지는 않은 인형이었다. 하지만 그 조그만 게 목걸이까지 하고 있었다. 희한해서 한 손으로 인형을 들어올리자, 라틸은 인형이 한 게 목걸이가 아니라 명찰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명찰이 등쪽에 있도록 뒤로 돌려서 안 보이게 가려둔 것이다.
‘이름까지 달아놨어?’
황당해하면서 인형을 뒤집어보니, 작은 유리 위에 섬세한 금색 글씨로 ‘폐하2’라고 쓰여 있어서 라틸은 웃음을 터트렸다.
‘엉뚱하기는.’
그때.
“폐하. 잠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문 너머에서 서넛이 조용한 목소리로 라틸을 불렀다. 웬만한 일로는 서넛이 지금 부를 일은 없기에 라틸은 바로 허락했다.
“들어와.”
그러자 조용히 문이 열리더니, 서넛이 발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다가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어 알렸다.
“심각한 사안이 있습니다. 급히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