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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왜 볼 때마다 싸우는 거야? (34/367)

34화. 왜 볼 때마다 싸우는 거야?2020.06.24.

타시르는 천천히 길을 걸어가며 떠올렸다. 소파 위, 쭉 뻗은 라틸의 긴 다리와 단단한 종아리, 의외로 굳은살이 많던 발을. 허벅지를 덮은 하얀 블라우스를. 이로 과자를 깨물 때마다 입술 사이에서 나던 바삭거리는 소리를, 당연하다는 듯이 흑림의 수장도 후궁 타시르도 자신의 것이라 말하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천방지축 황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영민한 황태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객관적인 ‘정보’로는.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도 타시르는 먼발치에서만 스치듯 본 그 황녀에 대해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도 거리가 가까워진 지금. 그는 그녀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수치상의 통계와 정보의 기록이 아니라, 진짜 그녀에 대해서. 그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타시르는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골든 레트리버를 닮은 순한 후궁 게스타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나무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16551075249563.jpg‘뭘 보고 있지?’

그 표정이 자뭇 진중해 보여서 덩달아 같은 방향을 쳐다보았지만, 나무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타시르는 다시 시선을 내리다가 잠시 놀랐다. 어느새 게스타가 그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16551075249563.jpg‘깜짝이야.’

눈이 마주치자 게스타가 산들바람처럼 웃어 보였다. 순하고 가볍고 따스한 봄 같은 웃음이었다. 타시르는 뒤늦게 게스타가 왜 나무를 쳐다보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품 안에 날개가 부러진 듯한 작은 새를 조심스레 안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나무에서 떨어진 새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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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075249563.jpg‘새를 나무에 올려주려고 저러나?’

도와줄까, 말해볼 틈도 없이 게스타는 새를 안고서 어딘가로 가버렸다. 바스락 나뭇잎을 밟는 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타시르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16551075249563.jpg‘정말로 착한 건가?’

사실 그는 물벼락 사건 때 본 게스타의 모습이 너무 작위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따금 의심했다. 저자, 착한 게 아니라 착한 척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날개가 부러진 새를 혼자서 챙기는 모습을 보니, 그냥 보이는 그대로의 성격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까 나무 위를 쳐다보던 표정은 또…….

16551075249563.jpg‘하긴. 어느 쪽이든 나와는 상관없지.’

잠시 고민해보던 타시르는, 곧 게스타가 실제로 착하든 착한 척을 하는 거든 그와는 관계가 없단 판단을 내리고서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갔다. 친하지도 않은 후궁 한 명에게 매달려 있기에는,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 * * 작은 영지의 귀족들조차도 작위를 잇게 된다면 친한 귀족이나 인근의 귀족들을 초대해 성대한 파티를 연다. 표면적으로는 축하 파티지만, 사람들을 불러다가 ‘이젠 내가 여기 주인이니 제대로 봐 둬라’ 선언하는 거나 다름없는 파티였다. 작은 영주의 영지들이 하는 그런 축하 연회를, 하물며 황제나 왕이 생략할 수는 없었다.

16551075249588.jpg“이제 슬슬 폐하께서도 즉위를 축하하는 연회를 열어야 합니다. 외국 귀빈들을 초대해서 폐하의 모습을 드러내셔야지요.”

그렇기에 시종장이 파티 이야기를 꺼냈을 때, 라틸도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사실 즉위 당시의 혼란이나 이런저런 일 때문에 지금도 다른 황제들에 비해 늦게 연회 이야기가 나온 것이긴 했다. 라틸은 조세 문제를 점검하다 말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16551075249592.jpg"하긴. 그럴 때가 되었지요."

시종장이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16551075249588.jpg“한데 폐하.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16551075249592.jpg“문제요? 예산 문제입니까?”

16551075249588.jpg“아닙니다. 그…… 보통 이런 연회는 황후 폐하께서 맡아 하시지 않습니까.”

16551075249592.jpg“아.”

16551075249588.jpg“하지만 타리움 제국에는 아직 국서가 없으니까요. 누구에게 이 일을 맡기시겠습니까?”

16551075249592.jpg“그야…….”

내가 직접 하면 되죠, 말하려다가 라틸은 책상에 놓인 자신의 달력을 확인했다. 작은 글씨가 빈 공간이 거의 없을 만큼 빽빽하게 달력을 채우고 있었다.

16551075249592.jpg‘내가 하긴 힘드려나?’

즉위 초이기 때문에 업무량이 말도 못 하게 많긴 했다. 기껏 만든 하렘에조차 제대로 가지 못할 만큼. 그런데다 부황의 암살 건, 틀라의 외세 건, 사라진 선물, 훼손된 무덤 등 여러 가지 정리되지 못한 사안들도 한가득이었다. 연회를 준비하는 건 세세하게 손이 많이 가는데다 의외로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 결과물을 평가하는 건 수십 수백 명의 귀빈들. 조금의 실수도 보이지 않도록 처리해야 하는데, 달력을 보니 라틸이 도맡아 하기에는 힘들 것 같았다.

16551075249592.jpg“음.”

라틸은 미간을 찡그렸다.

16551075249592.jpg“그러게요. 누구한테 맡기지?”

보통의 경우, 황후가 없다면 황제의 어머니나 형제자매들이 맡아줄 것이다. 그러나 라틸의 어머니는 선황제가 살아 있을 적에 이미 황궁을 떠나 신전으로 들어갔다. 이복남매나 자매가 몇 있긴 하였으나, 이런 부탁을 할 만큼 사이가 좋진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라틸이 틀라를 처형시킨 일로 잔뜩 몸을 사리고 있었으니, 이런 큰일을 맡기려 들면 혹시 떠보는 건가 싶어 기겁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전 황태자이자 대학자의 제자가 되어 떠난 오빠 레안을 불러 일을 시킬 수도 없었다.

16551075249592.jpg‘어쩐다.’

자연스럽게 다음 순서로 라틸이 떠올린 이들은 하렘의 후궁들이었다.

16551075249592.jpg“후궁들…… 중 하나에게 맡기면 어떨까요?”

라틸이 제안하자 시종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16551075249588.jpg“실은 폐하. 저도 그게 좋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6551075249592.jpg“그러면 그렇게 하죠.”

16551075249588.jpg“예. 그러면 어느 분에게……?”

라틸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후궁 중 한 명에게 맡기기로 하자마자 바로 또 다른 난제가 나타나다니.

16551075249592.jpg“음. 누가 좋을까요.”

신분 상으로는 높은 귀족 가문 출신인 라나문이나 게스타가 적합했다. 이 일을 맡은 사람이 총애를 받는다거나 신뢰를 받는단 오해를 사겠지만 이걸 감안하더라도. 그러나 이 둘은 사교계와는 거리가 먼 이들이었다. 하나는 제 잘난 맛에 취해 사교계에 관심이 없었고, 하나는 너무 낯을 가려서 사교계에 스며들지 못했다. 클라인 황자에게 시켜도 될 테지만, 그는 아직 외국 황자 이미지가 강해서 신하들이 그를 잘 따를지 염려되었다. 이건 그냥 연회가 아니라, 라틸이 황제로서 주최하는 첫 연회가 아니던가. 게다가 이 연회는 원래라면 황후가 주최해야 할 연회. 상징성이 큰 만큼, 연회의 주최자는 성과에 따라 대외적으로 이런저런 평가를 받을 것이다.

16551075249592.jpg‘그렇다고 귀족과 황자를 제쳐두고 용병왕이나 상인에게 바로 시키기도 그렇고…….’

라틸은 힐긋 서넛을 쳐다보았다.

16551075249592.jpg‘서넛 경 같은 성격의 후궁이 한 명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차분하고 현명한, 신뢰가 가는 그런 사람.

16551075249592.jpg‘내가 너무 얼굴만 보고 후궁을 뽑은 건가.’

라틸은 뒤늦게 후회했다. 물론 정말로 얼굴만 본 건 아니었다. 외모 외에도, 정치적 배경이나 도움이 될 요소 등 두루두루 살피긴 살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안 본 게 딱 하나 있었다. 성격. 뒤늦게서야 라틸은 어이가 없어서 비실비실 웃었다.

16551075249588.jpg“폐하.”

그런 라틸에게 시종장이 다시 물었다.

16551075249588.jpg“어느 후궁에게 맡기실 생각이십니까?”

16551075249592.jpg“사블레 후작은 누가 가장 나을 것 같나요?”

16551075249588.jpg“제 생각엔 라나문 님이 제일 적합하지 않으신가 여겨집니다.”

16551075249592.jpg‘사블레 후작은 진짜로 라나문을 편애하네.’

16551075249592.jpg“라나문이라…….”

그러나 라틸이 썩 내키지 않는 얼굴이자 시종장이 물었다.

16551075249588.jpg“따로 염두에 두신 분이 있으십니까?”

16551075249592.jpg“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시종장도 알다시피 라나문은 사교계와 거리가 멀잖아요. 손님으로도 가본 적이 드문 연회를 자기가 주관한다? 글쎄요. 가능할지.”

결국 15분 가량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라틸은 결정을 내렸다.

16551075249592.jpg“일단 본인들의 의사를 들어봐야겠습니다.”

  * * * 오후 시찰을 평소보다 한 시간 빨리 끝낸 라틸은 통보 없이 하렘으로 갔다. 이래저래 걸리는 요소가 있긴 하지만, 우선 신분이 가장 높은 클라인과 라나문을 불러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렘 내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여러 무리의 하인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쑥덕거리고 있었다.

16551075293534.jpg“오셨습니까, 폐하.”

그들은 라틸이 나타나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으나, 흥분해서 붉어진 얼굴은 감추기 어려웠다. 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도넛 형태의 건물 전체에 묘한 긴장감과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16551075249592.jpg‘무슨 일이지? 사블레 후작과 둘이서 나눈 연회 이야기가 퍼졌을 리도 없는데?’

무슨 일이기에 다들 이러나, 라틸은 궁금해하면서 복도를 계속 걸어갔다. 라나문과 클라인의 방은 가장 거리가 멀었기에, 라틸은 연회나 대규모 티파티 등에 사용되는 커다란 ‘축제의 방’으로 향했다. 일단 거기로 간 다음 두 사람을 부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라틸은 축제의 방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멈춰서야 했다. 방 근처에서 이미 싸움이 벌어져 있던 것이다.

16551075249592.jpg‘또 클라인인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 본 라틸은 ‘또’ 싸움의 한복판에 있는 클라인을 발견하고서 혀를 찼다. 먼발치에서 이미 목소리를 듣고 예상하긴 했지만. 그곳에서는 클라인이 화려한 극락조처럼 차려입은 채 여러 사람들을 요란스럽게 닦달하는 중이었다.

16551075249592.jpg‘아무리 봐도 하이신스가 날 엿 먹이려고 보낸 사람 같단 말이지.’

아니라면 이렇게 자주 싸워댈 리가 있을까? 의외인 건, 그 싸우는 무리 속에 이번에는 라나문까지 있단 점이었다. 비록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고 홀로 고고하게 서 있긴 했지만, 지금 싸움과 완전히 관련이 없진 않은 눈치였다. 라틸은 혀를 차고서 시종에게 눈짓했다.

16551075249588.jpg“황제 폐하께서 오십니다!”

라틸의 신호를 받은 시종이 큰소리로 알리자, 한창 언성을 높여대던 사람들은 동시에 소리를 빼앗긴 것처럼 조용해졌다. 좋지 못한 장면을 보인 탓에 궁정인들의 표정이 한결 어두워졌다. 라틸은 그들 가까이로 다가가며 물었다.

16551075249592.jpg“또 무슨 일들이지? 왜 또 싸우고 있는 거냐.”

라틸의 ‘또’라는 말에 클라인이 억울하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클라인이 게스타와 싸운 게 고작 3일 전이었다. ‘또 싸운 건 아니다’고 반박하기에는 분명 찔리는 부분이 있었다. 라틸은 클라인과 라나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16551075249592.jpg“대답해 봐, 클라인. 라나문.”

클라인의 수행원은 하렘에 들어올 때, 특별히 시종장에게 클라인과 라나문의 방을 멀찍이 떨어트려 달라 부탁했다. 두 사람의 사이가 몹시 나쁘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런데 사이 나쁜 두 사람이 한곳에 있다면, 역시 이 두 사람이 싸운 걸까? 라나문은 라틸의 시선이 자기에게 닿자 무심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16551075307999.jpg“클라인 황자의 부적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언성을 높여 싸우던 클라인과 달리 라나문은 이 와중에도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었다.

16551075249592.jpg“부적?”

라틸은 이번에는 클라인을 보았다.

16551075249592.jpg“무슨 부적 말이냐?”

클라인은 최대한 신경질을 누르고서 대답했다.

16551075308012.jpg“카리센에서 챙겨 온 부적입니다. 대신관님께서 직접 써 주신 부적이지요.”

신전에서는 부적이나 성수 등을 팔아 수입을 짭짤하게 얻는데, 고위 신관이 쓴 부적일수록 더욱 가격이 비쌌다. 그런데 평범한 고위 신관이 아니라 대신관이 쓴 부적이라니. 돈을 싸 들고 가도 사기 어려울 정도로 귀한 부적임이 틀림없었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부적을 잃어버렸다면 화가 날 수밖에 없지. 일부러 잃어버린 척하는 것도 아닐 거다. 아무리 클라인 황자가 제멋대로여도 그런 귀하고 신성한 물건을 가지고서 장난질을 치진 않았을 테니. 판단을 마친 라틸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16551075249592.jpg“이런. 어디서 없어졌는데?”

16551075308012.jpg“방에 두었는데 사라졌습니다.”

16551075249592.jpg“네가 나간 사이에?”

16551075308012.jpg“예.”

라틸은 위병을 불만스레 쳐다보았다.

16551075249592.jpg“도대체 치안 유지를 어떻게 하고 있는 거냐. 뭘 얼마나 엉망으로 하기에 내 후궁이 하나는 물벼락에 돌멩이를 맞고 다니고, 다른 하나를 귀중품이 사라져? 경비를 서긴 서는 거냐?”

위병은 얼른 몸을 움츠렸다.

16551075249588.jpg“죄송합니다, 폐하.”

16551075249592.jpg‘책임은 나중에 묻자.’

더 잔소리할 말이 남았으나, 라틸은 우선 이 일부터 해결하기 위해 클라인에게 물었다.

16551075249592.jpg“그래, 클라인. 누가 가져갔는지는 짐작이 가?”

클라인은 힐긋 라나문을 보았다. 라틸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여기서 라나문을 보지? 설마…… 클라인은 라나문이 가져간 거라 의심하는 건가? 라틸은 놀라 라나문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클라인의 시선을 받자 의외로 라나문이 순순히 입을 먼저 열었는데, 그는 용의자가 아니라 목격자였다.

16551075307999.jpg“부적을 훔쳐간 건지 다른 볼일 때문에 다녀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후궁이 클라인 황자의 방에서 몰래 나오는 건 제가 보았습니다.”

16551075249592.jpg‘그래서 라나문이 여기에 휩쓸려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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