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절 품어 주십시오2020.06.21.
칼라인을 보러 왔는데 라나문이 있다? 라틸은 칼라인의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뜻밖의 광경을 보고 당황했다. 라나문과 칼라인이 나란히 서 있다니. 퇴폐미가 강한 칼라인과 차갑고 고귀한 인상의 라나문. 이 둘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겉으로는 완벽하게 조화로웠지만, 둘의 배경이나 성격을 생각한다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 아니던가. 이 둘도 싸우고 있던 건가? 라틸은 게스타와 클라인 사태를 떠올리고서 둘을 빠르게 훑었다. 다행히 그런 기색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저 뒤쪽 테이블 위에 펼쳐진 체스판이 너무나 평화로웠다.
“주인?”
오히려 칼라인은 라틸이 떨떠름하게 서 있는 게 더 이상한지 덤덤히 묻기까지 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라나문이 여기 있을 줄은 몰라서. 둘이…… 체스 뒀나 봐?”
라틸은 질문을 받자 얼결에 대답을 했다. 그러나 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체스판에 머물렀고, 머릿속에서는 ‘쟤네 둘이 체스를 뒀다고?’ 하는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댔다. 칼라인과 체스도 어울리지 않는데, 상대방이 라나문이라니. 둘이서 체스라니.
“칼라인을 찾아오셨는데, 제가 있어서 방해되십니까?”
라나문이 차갑게 끼어든 후에야 라틸은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라나문의 목소리 느낌이 전에 만났을 때보다 더욱 차가워졌단 걸 알아차렸다.
‘아.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약간 분위기가 안 좋았지.’
라나문은 라틸과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는데도 선물을 받은 걸 자존심 상해하는 눈치였다.
‘그 일 때문인가?’
라틸은 괜히 라나문의 눈치를 살폈다. 후궁으로 들여놓고서 눈치를 보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그는 후궁이면서도 아트락시 공작의 장남이었다. 공신의 자제이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일단 저렇게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서 수심 깊은 표정을 하고 있으면 자꾸 눈길이 가는 법이다. 그러나 라틸이 칼라인 쪽을 향해 서서 라나문을 힐긋거리자, 이번에는 칼라인이 인상을 살짝 구기며 물었다.
“주인.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어? 아아. 그래. 널 찾아왔지.”
라틸은 그제야 다시 칼라인 쪽을 쳐다보다가, 그 사이 칼라인도 이마를 찌푸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아니, 쟤는 또 왜 인상을 쓰고 있는 거야? 라틸은 속으로 외치면서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오랜만에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그러나 이번에도 라나문이 끼어들었다.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궁금하지 않으셨나 봅니다.”
그 사이에 라나문의 목소리는 더 서늘해져 있었다.
“……그건 아니고.”
라틸은 아버지가 최대한 후궁들을 한 번에 한 명씩만 만나려던 걸 떠올렸다. 당시 라틸은 아버지가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방 안에 셋이 마주보고 서 있으려니, 싸우는 게 아닌데도 분위기가 어색했다. 라나문과 칼라인이, 분명 아까 전까지는 사이 좋게 체스를 두고 있었을 라나문과 칼라인이 자기들끼리 묘한 눈짓을 주고받는 것조차도 어색했다.
“차례대로 돌아볼 생각이었지.”
하지만 속마음을 드러내진 않고서, 라틸은 태연히 라나문에게 대답해주었다. 라나문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그 첫 상대가 칼라인입니까.”
차갑긴 하지만 또렷하게 서운해하는 기색이었다. 반대로 칼라인은 무표정하게 서 있지만, 입술 끝이 삐죽 올라가 있었다. 라틸은 어색하게 둘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뒷걸음질 쳤다.
“폐하?”
“왜 그럽니까, 주인?”
“어…… 급히 처리해야 할 안건이 생각났다.”
“예?”
“오셨는데 바로 가십니까, 주인?”
칼라인의 ‘주인’ 발언에 라나문의 시선이 휙 옆으로 돌아갔다. 마치 ‘저건 뭐지?’ 하는 눈초리였다. 칼라인은 그 시선을 받으면서도, 초록색 눈동자로 라틸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라틸은 그대로 몇 번 더 뒷걸음질 치다가 얼른 그 방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두 남자가 따라오지 못하도록 문부터 닫았다.
“폐하?”
라틸이 문고리를 꼭 붙잡고서 서 있자, 문 앞에서 지키고 있던 서넛이 의아한 듯 라틸을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세 번.”
“?”
“왜 그러냐는 말. 세 번인가 들은 것 같습니다.”
“잘 이해가 안 갑니다.”
“……별말은 아닙니다.”
라틸은 기계적으로 웃고서 손가락으로 복도를 가리켰다.
“일단 돌아가죠.”
서넛이 눈썹을 들어 올리고서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방금 왔는데. 벌써 갑니까?”
“네. 생각해보니 업무 도중에 온 거잖습…… 뭐야. 서넛 경은 왜 갑자기 그리 음흉하게 웃습니까?”
“안 웃었습니다.”
“아닌데? 방금 웃었는데?”
“안 웃었습니다. 정말로.”
* * * 하렘을 나온 라틸은 곧장 공개 집무실로 갔다. 바쁜 일이 생겼다고 칼라인에게 둘러댄 건 핑계였지만, 아예 거짓말도 아니긴 했다. 어차피 집무실 안에는 늘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였으니까. 라틸은 책상 앞에 앉자마자 시종장을 부른 다음, 아까 감옥에서 지시한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물었다.
“초상화는 지금 그리는 중입니다. 흑마법사로 소문난 이들을 잡기 위해 수사관들이 출발했고, 그노시스 신관도 소스타 영지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래요.”
라틸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시해범을 잡는 문제도 단순하지 않은데. 그 문제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가지를 뻗어 나가고 있었다.
‘흑마법사니 저주니 하는 것까지 얽혀 있을 줄은…….’
그런데 한참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시종장이 할 말이 있는 듯 계속 머뭇거렸다.
“왜요?”
라틸이 쳐다보며 묻자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폐하.”
“말하세요, 사블레 후작.”
“왜 벌써 오셨는지……?”
“네?”
“칼라인 님을 뵈러 가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래서 다들.”
라틸은 힐긋 시계를 쳐다보았다. 서넛도 비슷한 걸 묻더니. 확실히 너무 빨리 나오긴 했나 보다. 시간을 확인하자 시종장이 이런 질문을 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하렘에 다녀왔는데 채 삼십 분도 지나지 않은 것이다.
‘하긴. 몇 마디 안 하고 바로 나왔으니까.’
하지만 시종장에게 ‘후궁 두 사람이 날 두고 이상한 기싸움을 벌이는 게 어색해서 나왔다’고 말하긴 쑥스러웠다. 라틸이 민망하게 웃고만 있자, 시종장이 걱정스레 물었다.
"폐하. 혹시…… 현재 후궁분들이 마음에 차지 않으십니까?"
"어휴,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혹시 마음에 차지 않으신다면 세 명 정도 더 받으시는 게-."
갑자기 쾅 소리가 나는 바람에 시종장은 말을 멈추었다. 라틸도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이런. 죄송합니다.”
서넛이 떨어진 검집을 줍고 있었다.
"느슨하게 묶어둔 모양입니다."
검집이 왜 떨어지지? 라틸이 황당해하며 쳐다보자, 서넛은 웃으면서 대답하고는 라틸이 보는 앞에서 검집을 제대로 띠에 연결했다. 그러고는 시종장이 무어라 잔소리하기 전에 얼른 라틸에게 물었다.
“폐하. 가짜 범인이 틀라 황자를 언급하려던 것 같았는데, 이는 조사하지 않으십니까?”
저주란 말에서 오는 충격과 피 분수를 뿜던 범인의 모습이 너무 인상 깊었나 보다. 그 일들에 대한 뒤처리를 지시하느라 틀라 황자에 대해서는 잠시 잊고 있었다.
“아. 맞아.”
라틸은 뒤늦게 그 일도 당장 처리해야 한단 걸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 ‘가짜 범인’은 죽기 전에 ‘틀라’란 이름을 말했지.
“그렇군요. 조사해 봐서 나쁠 건 없겠지요.”
서넛이 꺼낸 무거운 화제에, 옆에 있던 시종장도 새 후궁 이야기를 잊고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틀라 황자를 지지했던 사람이 진범일까요?”
서넛은 좀 더 다른 쪽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단순히 폐하를 모욕하기 위해 그런 짓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범위가 다른걸요.”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두 사람 모두의 말에 동의했다.
“틀라 황자를 지지했던 사람이 날 모욕하기 위해 일부러 가짜 황제시해범을 만든 걸지도 모르고, 정말로 틀라 황자 쪽 지지자들이 아바마마를 시해한 데 관여했는지도 모르죠.”
물론 어느 쪽이든 그냥 지나갈 수는 없겠지만.
“제가 이 일을 수사해 보겠습니다.”
잠시 라틸이 생각에 잠긴 사이, 서넛이 나섰다. 믿음직스러운 태도였다.
“아니요. 서넛 경이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라틸은 대번에 거절했다.
“신중하게 조사해야 하니 제가 나서는 게 나을 거라 생각됩니다, 폐하.”
서넛이 다시 한번 자진해서 조사하겠다 나섰으나, 라틸은 이번에도 반대했다.
“괜찮습니다.”
서넛은 이미 맡은 일이 많았다. 근위기사단을 이끌어야 하고, 가문의 후계자로서도 여러 가지 할 일이 있을 텐데, 라틸에게 편지 도둑에 대해 단독으로 수사하란 밀명까지 받았다. 이 와중에 황제의 최측근 호위 일까지 해야 했으니 몸이 세 개라도 부족할 터인데, 또다시 비밀스러운 임무를 맡긴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제가 하고 싶습니다. 이런 일일수록 기밀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폐하.”
“서넛 경은 지금도 너무 바쁩니다.”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요. 전 솔직히, 지금도 서넛 경이 제대로 잘 수는 있나 모르겠습니다.”
라틸이 딱 잘라 말하자 서넛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서넛 경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서넛 경이 너무 많이 일하는 것 같아서 걱정되니까 하는 말입니다.”
라틸은 다시 그에게 달래듯 말한 후 잠시 생각해보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타시르에게 이 일을 맡겨 볼 생각입니다.”
서넛과 시종장 모두 놀라서 라틸을 바라보았다. 특히 서넛은 말도 안 된단 표정이었다. 서넛은 라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물었다.
“그자를 믿으십니까?”
라틸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그 답을 알게 되겠죠.’
* * * 라틸은 타시르를 방으로 데려오라 지시한 후, 시녀에게는 커피와 과자를 가져다 달라 부탁했다. 갑갑한 제복 재킷과 바지를 벗고 긴 블라우스 차림만으로 소파에 앉은 라틸은, 시녀가 가져다준 간식을 먹으며 타시르를 기다렸다. 그는 30분쯤 지났을 때 나타났다.
“폐하, 타시르 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해.”
라틸은 과자를 입에 문 채 뭉개진 발음으로 소리쳤다. 방 안으로 들어온 타시르는 긴 맨다리를 쭉 뻗은 채 소파에 앉은 라틸을 보자마자 이마를 짚었다.
“커피?”
“방으로 부르신 걸 보니 승은을 내려주실 생각은 아닌 듯하고. 인내심 시험인가요?”
라틸이 맞은편 소파를 가리키자, 타시르는 주춤거리면서 소파에 앉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문입니까.”
“뭐가.”
“제가 셔츠 한 장만 입고 폐하 앞에 그런 자세로 앉아 있으면,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좋을 것 같아.”
“……그렇군요.”
미묘한 표정을 지은 타시르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기 힘들었다. 라틸은 피식 웃고서, 그가 오기 전까지 보고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자. 확인해 봐.”
타시르는 서류를 받아 훑었다.
“내용이 거의 비어 있는데요?”
“채워와.”
힐긋 타시르가 시선을 들어 라틸을 보았다.
“설마. ‘후궁 타시르’가 아니라 ‘흑림의 수장’으로 절 부르신 겁니까?”
“뭘 구분해? 둘 다 내 거잖아.”
“!”
“황제시해범이 자백했단 건 너도 알지?”
“예.”
“죽었단 것도 들었어?”
“저는 들었지요.”
“다른 후궁들은 모르고 있단 거네.”
타시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까진 저도 모르겠습니다. 정보력 좋은 후궁들이 몇 되는 것 같아서.”
“그러면 황제시해범이 죽기 전에 틀라 황자 이름을 말한 건 알아?”
여기까진 모르는지 타시르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정말입니까?”
물론 연극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라틸은 그가 이 정보를 모른단 걸 깊게 생각하는 대신 바로 지시했다.
“틀라 황자를 지지했던 자들이 선황제의 죽음으로 장난질을 친 건지, 아니면 진짜로 그들이 선황제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지 알아봐.”
라틸은 말을 마친 후 과자를 집어 먹으며 와삭와삭 씹었다. 당연히 타시르가 자신의 말을 따를 거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타시르는 쉽게 대답하는 대신, 서류를 한 번 라틸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하기 싫은가? 라틸은 과자 먹기를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타시르의 입가에 농염한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라틸의 정체를 아는 듯 중얼거리며 지었던 미소였다. 서류를 가볍게 탁자 위에 도로 내려놓은 타시르는 나른하게 등을 소파에 기대었다.
“개를 길들이는 법을 아십니까?”
그러고는 뜬금없이 던진 질문에, 라틸은 “개?” 하고 되물었다. 갑자기 웬 개?
“가끔은 엄해야 하지만, 말을 잘 들으면 고깃덩어리를 보상으로 주어야 하지요. 칭찬과 함께.”
“?”
“말을 잘 들으면, 제 입에 물려주실 보상은 무엇입니까?”
생각해보지 못한 제안에 라틸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타시르는 허리를 숙이며 무릎에 팔을 괴더니, 눈웃음을 지으며 요구했다.
“일을 잘해 오면 절 품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