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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또 그 남자에게 가시다니 (32/367)

32화. 또 그 남자에게 가시다니2020.06.17.

라틸이 눈짓하자, 시선을 받은 시녀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얼른 서넛에게로 다가갔다.

1655107459113.jpg“벗은 옷을 제게 주세요.”

시녀가 근처로 오자 서넛은 다시 욕실로 들어가더니 벗은 제복을 가지고 나왔다. 욕실 안에서 나름 빨래를 하긴 했는지, 제복은 물에 젖어 있었다.

16551074591136.png“죄송합니다. 이 모양이라.”

1655107459113.jpg“괜찮습니다.”

옷에 물든 피는 쉽게 빠지지 않기에 빨아도 제복은 여전히 핏자국이 가득했으나, 시녀는 서넛의 벗은 몸에 더 정신이 팔려서 피투성이 제복을 덥석 받아들었다. 근위기사단장답게 서넛의 몸은 잘 다듬은 조각 같았다. 근육이 대칭적일 뿐만 아니라 군살이 하나도 없고, 심지어 얼굴은 더욱 잘났다. 시녀가 넋을 놓을 만도 했다. 시녀의 눈동자가 시선을 어디 둘지 몰라 정처 없이 벽과 천장, 엉뚱한 방향에 있는 가구 사이를 갈팡질팡 움직이는 걸 보며 라틸은 소리 없이 어깨를 떨었다. 얼굴이 빨개진 시녀가 옷을 잘 챙겨서 침실 밖으로 도망치듯 나가자, 라틸은 결국 내내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서넛은 얄밉다는 듯 라틸을 쳐다보았다.

16551074591136.png“이 상황이 그렇게 웃기십니까?”

16551074591151.png“미안합니다. 그런데 내 방에서 서넛 경이 그러고 서 있으니까. 상황이 좀 웃기네요.”

16551074591136.png“제가 벗은 게 웃기다는 분은 폐하가 처음입니다.”

16551074591151.png“이야. 벗은 몸 좀 여기저기 보여주고 다니셨나 봐?”

16551074591136.png“……기사들끼리 있을 땐 같이 씻기도 하고, 훈련하다 상의도 탈의하고 하니까요.”

서넛이 정색하고 변명하는 말에, 라틸은 히죽 웃으면서 농담했다.

16551074591151.png“내 방까지 와서 벌거벗은 남자도 경이 처음입니다.”

16551074591136.png“!”

서넛은 한 손을 뒤로 하더니 어색하게 문고리를 붙잡았다. 욕실 안으로 들어가 숨어 있을지 밖으로 나와 있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듯했다. 그걸 보는 라틸도 궁금해졌다. 나올까 들어갈까? 하지만 서넛은 그 애매한 상태에 멈춰섰다. 더 들어가지도 더 나오지도 않은 채, 거기서 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만 냈다.

16551074591136.png“옷 좀…….”

16551074591151.png“네?”

16551074591136.png“옷 좀 가져다 달라고 해주십시오.”

16551074591151.png“어? 뭐라고요?”

16551074591136.png“폐하. 아무 옷이나 좀 가져다 달라 명령해 주십시오.”

16551074591151.png“어? 안 들리는데요?”

16551074591136.png“…….”

서넛이 퀭한 눈으로 쳐다보자, 라틸은 배를 잡고 웃어대다가 두 손을 휘저었다.

16551074591151.png“미안. 미안합니다.”

서넛에게는 주로 놀림을 받는 입장이라, 오래간만에 먼저 그를 놀려주고 나니 기분이 다 상쾌했다. 하지만 더 놀려댔다가는 서넛이 정말로 감정이 상할까 봐, 라틸은 입술을 깨물고서 탁자에 놓아둔 종을 흔들었다. 맑게 종소리가 나자 아까와 다른 시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서넛의 제복을 받아들고 나간 시녀가 무슨 이야기를 해준 건지, 그녀는 들어올 때부터 얼굴이 벌게져서 아예 카펫만 쳐다보고 있었다.

1655107459113.jpg“부르셨습니까, 폐하.”

16551074591151.png“서넛 경이 입을 만한 옷 좀 구해다 줘. 부끄러워서 못 나오겠다니까.”

  * * * 즐겁고 유쾌한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날, 불려온 신관이 시체를 확인하고서 어두운 얼굴로 한 말 때문이었다.

1655107459113.jpg“저주에 걸린 시체가 맞습니다.”

그녀의 확답에 근처에 서 있던 이들은 모두 충격을 받아 웅성거렸다.

1655107459113.jpg“저주라니. 세상에.”

1655107459113.jpg“흑마법사들이 돌아온 건가?”

라틸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서 신경질적으로 검집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저주는 금기시되어 있었다. 저주를 사용하는 흑마법사들은 500년 전 벌어졌던 전쟁 당시, 이단으로 분류되어 대부분 처형당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극소수였으며, ‘보통 사람들’에게 유용성과 공적이 인정된 이들뿐이었다. 심지어 그들조차도 지금은 명맥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그런데 완전히 자취를 감춘 줄 알았던 저주가 이런 형태로 끔찍하게 다시 드러나다니. 상황이 더욱 복잡해지겠구나. 라틸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 신관에게 물었다.

16551074591151.png“그럼 시체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따로 절차가 있나?”

신관은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으며 대답했다.

1655107459113.jpg“예. 저주에 걸린 시체는 태워 없애는 게 가장 효율적입니다.”

16551074591151.png“태우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1655107459113.jpg“사실 대부분의 경우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아주 악독한 저주일 경우가 문제입니다. 시체가 부패하면서 땅이나 그 주변을 좋지 못한 기운으로 물들일 수 있거든요.”

16551074591151.png“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1655107459113.jpg“사람들이 쇠약해지고 이름 모를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지요. 최악의 경우에는 죽은 이들이 깨어나기도 합니다. 좀비가 만들어지는 거지요.”

좀비란 말에 다들 몸을 움칠했다. 몇 세대 전에는 인간 형태의 몬스터들이 숲에서 나오는 몬스터들만큼 흔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시대에는 뱀파이어니 좀비니, 식시귀 같은 것들은 역사책에서나 약간 언급될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좀비라고? 인간 형태 몬스터들을 흔히 볼 수 있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좀비를 두려워했다. 그런 무시무시한 존재를 과연 현대 사람들이 제대로 막아낼 수 있을까? 생각보다 심각한 사태에 라틸은 미간을 찡그렸다. 같은 생각인지 시종장이 걱정스레 의견을 제시했다.

1655107459113.jpg“폐하. 얼른 태우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는 시체에서 갑자기 검은 물이라도 떨어질까 두려워 보였다. 그러나 라틸은 “그렇긴 한데…….” 하고 말끝만 흐렸다. 바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모습에 서넛이 조심스레 물었다.

16551074591136.png“폐하. 달리 걱정하는 바가 있으십니까?”

16551074591151.png“응. 진범은 아니지만, 이 사람, 진범과 연관은 있어 보여서요. 적어도 초상화라도 그려서 사람들의 제보를 받고 싶습니다.”

라틸은 신관을 향해 다시 물었다.

16551074591151.png“당장 안 태우더라도 그, 뭐라고 해야 하지? 그 좋지 못한 기운이란 거. 안 풍기게 할 수는 없는가?”

1655107459113.jpg“죄송합니다, 폐하. 구마 신관들은 신전에서도 거의 사라진 추세여서,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권력을 동원해서 일을 빨리빨리 처리하는 수밖에. 라틸은 질문을 그만하고 시종장을 불렀다.

16551074591151.png“사블레 후작, 초상화를 빠르고 정확하게 그릴 수 있는 사람들을 모두 모아 주세요. 그리고 최대한 많은 얼음을 이쪽으로 가져와요. 시체가 부패하는 걸 막아야겠습니다.”

1655107459113.jpg“예, 폐하.”

16551074591151.png“그리고 암암리에 흑마법이나 저주를 사용한다고 이름난 이들을 잡아와요. 혹시 모르니까 체포한단 건 알리지 말고.”

1655107459113.jpg“예.”

지시를 끝낸 라틸은 잠시 시체를 착잡한 시선으로 보다가 몸을 돌려 감옥을 빠져나갔다. 어쨌든 라틸이 여기서 더 처리할 일은 없었다. 그때였다.

1655107459113.jpg“저, 폐하.”

뒤에서 따라오던 신관이 라틸을 조심스레 불렀다. 돌아보자 그녀는 계단을 빠르게 올라오더니 좀 더 라틸에게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1655107459113.jpg“힛라 노신관님께서 어쩌면 이 부분에 대해 아시는 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분께 여쭤보고 전해드릴까요?”

16551074591151.png“그 신관님은 어디 있는가?”

1655107459113.jpg“소스타 영지에 계십니다.”

소스타 영지라면 수도에서 마차로 닷새가량 걸리는 거리였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였다.

16551074591151.png“그래 주게.”

그런데 신관이 떠나고 다시 걸어가던 중이었다. 이번에는 말없이 따라오던 시종장이 “폐하.” 은근한 목소리를 꺼냈다. 지금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은, 조금 쑥스러워하는 듯한 투였다. 라틸이 돌아보자 시종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보고했다.

1655107459113.jpg“상황이 상황인지라 지금 말씀드리려니 좀 그렇지만, 실은 폐하께서 전에 명령하신 일에 대한 조사가 끝났습니다.”

라틸은 고개를 기웃했다.

16551074591151.png“내가 명령한 거요? 그게 뭡니까?”

시종장에게 명령한 건 한두 개가 아니기에 바로 짐작이 가지 않았다.

1655107459113.jpg“칼라인 님의 과거를 조사해 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시종장의 설명을 듣고서야 라틸은 “아아…….” 하고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51074591151.png“그랬죠. 어떻던가요?”

당시에는 그의 야하고 섹시한 면모가 많이 충격적이었는데. 시일이 지나서인지 아니면 충격적인 사건들이 계속 터져서인지, 이전만큼의 호기심은 가지 않는 상태였던 것이다. 하지만 시종장이 열심히 조사를 해 왔으니 듣긴 들어야 했다.

1655107459113.jpg“요란하게 연애를 했단 소문은 없습니다.”

16551074591151.png“요란한 연애가 뭔데요?”

1655107459113.jpg“그러니까, 연애사에 관련된 소문은 없었단 뜻입니다. 하지만 은밀하게 비밀 연애를 했을지도 모르니까요.”

16551074591151.png“아아. 이해했습니다.”

1655107459113.jpg“게다가 용병 활동으로 온갖 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허황된 소문이 너무 많아서 뭐가 진짜 소문이고 뭐가 가짜 소문인지 진위여부를 가리기가 어려웠습니다.”

라틸은 시종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그러면 그 남자는 도대체 어디서 그런 야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배운 걸까?

16551074591151.png‘……타고났나?’

희한하게도 그 생각을 하자 다시 한번 칼라인이 조금 보고 싶어졌다. 때마침 눈치 좋은 시종장이 라틸에게 부채질을 한 번 해주었다.

1655107459113.jpg“그리고 폐하. 하렘을 만들어 후궁들을 모아 두시고서, 막상 너무 방치하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16551074591151.png“그런가요?”

1655107459113.jpg“예. 자주자주 가 주셔야지요. 폐하께서 그들을 모아만 두시고 총애하지 않으시면, 귀족들은 다시 국서 이야기를 하며 폐하를 귀찮게 굴 겁니다.”

  * * *

1655107459113.jpg“또 귀찮게 굴 겁니다! 분명해요!”

트리가 씩씩거리면서 주먹을 파르르 떨자 게스타는 어색하게 웃었다.

16551074734613.png“이틀이나 지난 일이잖아. 너무 화내지 마.”

1655107459113.jpg“이틀 밖에 안 지났는데 어떻게 화를 안 냅니까!”

16551074734613.png“하지만…….”

1655107459113.jpg“분명 그놈입니다. 그놈 아니면 게스타 님에게 물을 끼얹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16551074734613.png“여기서 지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

1655107459113.jpg“그런데 그 한둘이 아닌 사람 중에 게스타 님과 싸운 사람은 그놈 하나 뿐이라고요!”

16551074734613.png“그래도…….”

1655107459113.jpg“뭐가 그래도입니까? 그 망아지 같은 황자 성격은 원래 지랄 맞기로 유명하다고요, 게스타 님!”

그러나 트리가 속이 터져라 외쳐대도 게스타는 여전히 머쓱하게 발만 꼼지락거렸다. 트리는 게스타의 머리를 빗겨주다 말고 빗으로 머리를 두들길 뻔했다. 저절로 ‘아이고 아이고’ 소리가 나왔다. 그래도 어릴 땐 조금 영악하다 싶은 면도 있었는데. 도대체 그의 도련님은 뭘 잘못 먹었기에 날이 갈수록 사람이 물렁해지는 걸까. 이렇게 매가리 없이 굴 때마다 오히려 옆에서 지켜보는 그가 더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집에서야 괜찮다. 집이니까. 다들 그를 사랑하고, 그를 지켜주려 하니까. 그러나 여기는 하렘이었고 사방이 적들 아닌가. 그런 곳이니 이젠 좀 정신을 빠릿빠릿하게 해서 남들보다, 아니, 남들만큼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대야 하는데. 게스타는 이래도 헤 저래도 헤 웃기만 하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1655107459113.jpg“사실 폐하도 너무하십니다. 우리 게스타 님 착해빠진 걸 다 아시면서, 거기서 중립을 딱 지키시다니요. 좀 섭섭합니다.”

16551074734613.png“…….”

또 웃으면서 ‘아니야’라고 할 줄 알았던 게스타가 이번에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그 꼴을 보자 마음이 약해져서, 트리는 잔소리를 멈추고 빗을 화장대 위에 내려놓은 후, 옆에 놓인 브로치를 여기저기 게스타에게 가져다 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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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스타는 이목구비가 단정한 미남이었으나 원체 타고난 분위기가 수수했다. 그런데 주위에는 화려한 미남들 뿐이니, 최대한 전략적으로 꾸며서 이 편안한 분위기를 강점으로 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속마음도 모른 채 게스타는 이번에도 둔하게 물었다.

16551074734613.png“브로치는 왜? 나 도서관 갈 건데.”

1655107459113.jpg“예. 압니다. 그러니 예쁘게 하고서 도서관에 가시라는 겁니다.”

16551074734613.png“어?”

1655107459113.jpg“전에 거기서 폐하와 마주쳤잖아요. 혹시 압니까. 이번에도 좀 진득하게 있어 보세요.”

16551074734613.png“그런데 도서관에 왜 굳이 브로치를……”

1655107459113.jpg“게스타 님!”

트리가 갑갑해서 고함을 빽 지르자 게스타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트리는 간신히 도련님의 입을 닫고는 단단히 당부했다.

1655107459113.jpg“오늘은 제가 다녀올 곳도 있어서 그러니, 혼자 돌아다니다 봉변당하지 말고 제가 다시 데리러 갈 때까지 쭉 도서관에 계세요.”

16551074734613.png“어디 가려고?”

1655107459113.jpg“화장품 좀 사오려고요.”

16551074734613.png“화장품?”

게스타가 당황해서 묻자, 트리는 “네.” 하고 비장하게 대답했다.

1655107459113.jpg“게스타 님은 분위기가 너무 수수하시니까, 이미지 메이킹을 잘해야 해요.”

16551074734613.png“그렇지만 넌 화장하는 법도 모르잖아. 나도 모르는데.”

1655107459113.jpg“하다 보면 늘겠죠.”

콧김까지 뿜으면서 트리가 나가자, 혼자 남겨진 게스타는 머쓱해서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나갔던 트리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 쾅 문을 급하게 닫았다.

16551074734613.png“트리? 왜 그래?”

게스타가 놀라 다가가자, 트리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1655107459113.jpg“밖에…… 밖에 폐하께서……!”

게스타는 표정이 환해졌다.

16551074734613.png“나한테 오고 계셔?”

맞다고 대답하면 뒤에서 몽실한 꼬리가 튀어나와 고속으로 움직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참으로 귀여운 표정이었으나…… 그 기대 어린 표정을 본 트리는 더욱 우울해졌다.

1655107459113.jpg“아니요. 그 용병왕이란 작자한테 가셨습니다.”

16551074734613.png“또……?”

1655107459113.jpg“네. 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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