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왜 벗고 나옵니까!2020.06.14.
“물을 뿌리고 간 건……!”
게스타의 시종은 몹시 억울하다는 듯 눈물까지 글썽이며 일어나려 했으나, 라틸의 뒤에 서 있던 서넛이 앞으로 빠르게 나오더니 검을 뽑아 그의 목에 겨누었으므로 도로 엎드려야 했다. 이를 본 게스타가 먼저 한숨을 내쉬며 순순히 대답했다.
“넘어가겠습니다, 폐하.”
클라인은 입술을 악물었으나 역시 알겠다고 수긍했다.
“알았습니다.”
하지만 둘 다 표정들이 좋지 않았다. 보나 마나 나중에 둘이서 꼬투리 잡아서 또 붙겠네. 라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서 둘을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갔다. 같은 생각을 한 건가. 하렘 밖으로 걸어가고 있자니, 서넛이 걱정스레 물었다.
“저 둘. 앞으로도 계속 싸워댈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아 뭐. 괜찮습니다.”
“걱정되신다면 기사 두 명을 각기 클라인 님과 게스타 님에게 붙여둘 수 있습니다. 폐하의 눈이 되어줄 겁니다.”
“좋은 방법이긴 한데. 진짜 괜찮습니다.”
서넛이 의아한 눈으로 라틸을 쳐다보았다. 왜 굳이 평화로워질 방법을 놔두고 괜찮다 괜찮다 말만 하나 의아한 눈이었다.
‘머리 아프긴 하지만 평화로워질 필요는 없습니다.’
두 사람의 다툼은 길어봐야 며칠간 머리 아프게 할 문제이지만, 후궁들 사이에 질서가 잡히면 이젠 라틸이 귀족들에게 국서를 뽑으라 달달 볶일 차례 아닌가. 라틸은 속으로만 솔직하게 대답해주고서, 겉으로는 계속 찡그린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고서 곧장 본궁에 돌아온 라틸은, 암살범 건을 처리하느라 하렘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서 그녀를 기다리던 시종장에게 물었다.
“사블레 후작. 자기가 황제 시해범이라 자백한 범인은요? 무사히 탈출했어요?”
“예. 완전히 엉터리는 아닌지 감옥에서 빠져나와 달아나고 있답니다.”
“길을 터주자마자 도망친 걸 보니, 자살하고 싶어서 잡힌 건 아니란 거네요. 역시 진짜 자백은 아니네.”
“아! 그래서 풀어주라 하신 겁니까?”
“그것도 있고. 다른 이유도 있고. 지금쯤 어느 위치에 있대요?”
“그리 속력이 빠르진 않은지, 아직 멀리 가진 못한 모양입니다.”
“그래요. 적당히 잡을 듯 말 듯 따라가다가, 수도를 빠져나갈 때쯤에 다시 잡아 와요. 시간이 몇 시이든, 잡아서 감옥에 도로 넣고 나면 내게 말해줘요.”
라틸이 지시를 내리고서 무거운 망토 자락을 한 손으로 끄르자, 시종장이 감탄하는 눈으로 라틸을 쳐다보며 칭찬했다.
“예전에 선황제 폐하께서 황제 폐하를 두고 늘 하신 말씀이 있는데. 정말인 모양입니다.”
“아바마마께서요? 나를? 뭐라 하셨는데요?”
“황녀님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분이라고요.”
“……칭찬인가?”
“흐뭇해하시며 한 말씀이시니 칭찬이지요.”
그런데 왜 칭찬처럼 들리지 않을까. 라틸이 끙 소리를 내며 미간을 구기자, 옆에서 서넛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 * * 라틸은 문득 아주 좋은 향기를 느꼈다. 어떤 향수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좋은 향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달콤하고 달콤하면서도 야한 향. 라틸은 천천히 그 향을 들이마셨다.
‘좋다. 향수 이름…… 궁금하네.’
언제든 맡고 싶은 향이다,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의 차가운 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간지러우면서도 소름이 돋아서 라틸은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뒤척였다.
‘어느 후궁이야?’
그러다가 라틸은 깨달았다. 오늘은 혼자 잠자리에 들었다. 자신의 침실에서. 절대로 이런 손짓을 할 이가 없었다.
“!”
판단을 내리자마자 라틸은 번쩍 눈을 뜨고 일어나 옆에 둔 칼을 뽑았다.
‘없다?’
하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라틸은 혹시나 해 창문을 쳐다보았다. 열려 있다. 그러나 창문을 열고 잔 건 라틸 자신이었다. 라틸은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는 까마득했다. 창문으로는 절대 드나들 수 없는 구조. 라틸은 손을 올려 귓가를 쓸었다.
‘그럼 그건 뭐였지? 꿈인가?’
귓가를 스친 손길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데. 그게 꿈이라고? 의아해하면서 다시 침대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기분이 이상했다. 결국 침대에서 다시 일어난 라틸은 이번에는 검을 든 채 천천히 문으로 다가가 열어보았다. 시녀들은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깜짝 놀라 작게 비명을 질렀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폐하, 검이……!”
“호위들을 부를까요?”
그중 시녀장이 가까이로 와 물었다.
“폐하, 찾으시는 게 있습니까?”
침실 밖을 빠르게 눈으로 살핀 라틸은 시녀와 호위들 외에는 아무도 없단 걸 확인하자 검 끝을 조금 아래로 내렸다.
“누가 들어오진 않았지?”
그래도 혹시나 싶어 묻자 시녀장이 어리둥절해서 대답했다.
“네? 예. 저희들뿐이었습니다.”
“……그래.”
라틸은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며 돌아섰다. 그럼 정말로 꿈이었던 건가? 그때, 누군가 응접실 문을 두드렸다. 라틸이 열어주어도 좋단 신호를 보내자 시녀 한 명이 얼른 문을 열었다.
“폐하.”
문을 두드린 이는 시종장이었다.
“암살자를 다시 체포해 감옥에 넣었답니다.”
라틸은 힐긋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한 시였다. 평소라면 취침하고 있을 시간. 하지만 이미 잠은 달아났다.
“옷을.”
“예, 폐하.”
라틸은 시녀에게 옷을 가져오라 지시한 후 시종장에게 말했다.
“지금 그쪽으로 가지요. 갑시다.”
평소 업무복도 활동성을 중시했으나, 평소보다 더 가볍게 입은 라틸은 곧장 감옥으로 걸어갔다, 라틸이 지하 감옥으로 들어오자, 경비병 두 명이 양옆에서 길을 밝혔다. 곧 선황제의 시해범을 밝힐 수 있어서인가. 라틸은 그들이 이 상황을 걱정하면서도 즐거워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막상 이 일을 지시한 라틸은 멍한 기분이었다. 누군가 혼란을 틈타 감옥에 다녀갔단 이야기를 들은 지 얼마나 됐다고.
“폐하? 귀가 아프십니까?”
“네?”
“계속 귀를 건드리셔서…….”
“아아. 아닙니다.”
라틸은 서넛의 질문을 받고서야, 자신이 잠결에 차가운 손이 건드린 부위를 계속 만지작거렸단 걸 깨달았다. 자꾸 뭐가 다른 데로 신경이 간다 싶었더니. 그 일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모양이다.
‘내가 가위에 눌렸던 건가?’
보통 사람이라면, 아니 아무리 훈련을 한 사람이라도 몇 초 안에 방을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그러니 분명 아무도 없던 게 맞을 텐데…….
'혹시 모르니 다음부터는 창문을 닫고 자야겠다.'
그 사이. 어느새 일행은 죄수를 가두어 둔 지하 2층의 감옥에 도착했다. 범인은 어제의 그 장소에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잡혀 있었다. 라틸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잡혀온 범인은 자신이 이토록 손쉽게 도로 잡혀 온 게 어리둥절한지 아직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잘 다녀왔어?”
라틸이 약간 허리를 숙이면서 눈을 맞추고 웃자, 범인은 그제야 표정이 일그러졌다.
“설마…….”
“어. 일부러 풀어준 거야.”
“!”
“바로 나가더라?”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지 범인은 폐가 쥐어짜이다 풀어졌다 하는 듯한 괴상한 소리를 냈다. 여러모로 억울해 보였다. 참 웃기게도.
“그러게 왜 진범도 아니면서 나서고 그래.”
라틸이 혀를 차면서 질책하자, 암살자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쪽 진범 아닌 거 어차피 확신하고 있어. 이유 하나. ‘자백’을 했는데도 기회가 되자 도망쳤어. 이유 둘. 빠져나가는 실력이 엉망이야. 이유 셋. 그쪽 무술 실력, 황제 시해범치고는 형편없어. 기타 등등 성격적인 문제 요소는 짚지 않을게.”
라틸이 줄줄 이유를 대자, 암살자는 거의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얼굴로 라틸을 올려다보았다. 라틸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다가가 그를 내려다보며 제안했다.
“뭐 때문에 남의 범행을 대신 자백했어? 그것부터 말해봐.”
“…….”
"난 막 피 보고 그런 거 좋아하지 않아, 아저씨. 솔직하게 말해봐. 협박받아서 자백했어? 그런거라면 내가 구해줄 수도 있어."
라틸이 틀라 황자를 처형시키기 전에 보여주었던 착한 미소를 띠고 묻자, 시종장과 서넛 기사단장이 괜히 시선을 피했다. 저 미소 다음 어떤 행동이 나타나는지 이미 본 적이 있기에. 하지만 이를 모르는 암살자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라틸을 올려다보았다. 라틸은 최대한 자애로워 보이도록 표정을 꾸며냈다. 마침내 한참을 망설이던 암살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틀라-.”
그러나 말을 다 마치기도 전. 그가 고개를 뒤로 확 젖히더니, 입에서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냈다. 보통은 각혈을 하면 피가 아래로 떨어지는데, 그가 쏟아내는 피는 분수처럼 위를 향해 솟구쳐 천장을 물들인 후에야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방에서 놀란 비명이 터져나왔다.
“폐하!”
서넛이 자신의 외투를 펼쳐 황급히 라틸을 덮었다. 피 분수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잠깐 기괴한 장면을 만들어 낸 그는, 마치 자신의 온몸의 피를 다 소진해버린 것처럼 부들거리다가 마지막으로 거품 섞인 피를 입에 물며 몸을 경련했다. 라틸은 인상을 찡그린 채 범인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기사들이 놀라서 막아서려 했으나, 라틸은 손을 저어 그들을 물리고서 범인을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암살자의 눈이 완전히 뒤집혀 있었고, ‘그륵 그륵’ 하는 소리가 목구멍에서부터 기괴하게 들려왔다.
“로드…… 로드…… 로드를 경배…….”
피거품을 물고서도 중얼거리던 가짜 암살자는 결국 생명이 다했는지 푹 고개를 거꾸러트렸다.
“저주, 저주입니다!”
기사 하나가 공포에 질려 외쳤다. 다른 기사들도 말은 안 하지만 상황은 비슷해 보였다. 몇몇은 소리를 내지 않고 빠르게 입술만 움직여 기도하고 있었다.
“신관을 불러와라. 혹시 모르니 다들 시체는 건드리지 말고.”
라틸은 사망한 암살자를 내려다보다가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이 흩어지자 서넛이 피로 축축해진 외투를 챙기며 물었다.
“혹시 모르니 일단 씻으셔야겠습니다, 폐하.”
* * * 라틸이 여기저기 피를 묻힌 채 나타나자 시녀들은 난리가 났다. 그래도 라틸은 그나마 나은 처지였다. 시종장이나 다른 기사들은 더욱 엉망이었으니까. 특히 겉옷을 아예 라틸에게 주었던 서넛은 보기 무서울 정도로 빨개져 있었다. 시녀들과 시종들이 굳은 얼굴로 자신을 살피자, 서넛은 머쓱하게 웃고서 라틸에게 작별 인사를 올렸다.
“편하게 쉬십시오, 폐하. 전 이만 물러갑니다.”
“서넛 경. 잠시.”
그러나 라틸은 물러나려는 서넛을 붙잡았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서넛이 의아해서 고개를 돌렸다. 라틸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방을 가리켰다.
“씻고 가라고요.”
“!”
“그 꼴로 어디로 갑니까. 나가자마자 체포당합니다.”
라틸이 웃으면서 말하자, 서넛은 피로 색이 완전히 변해버린 자기 겉옷을 힐긋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방안으로 들어왔다.
“폐하께서 먼저 씻으십시오.”
“난 별로 안 묻었습니다. 기분상 씻긴 해야겠지만. 먼저 씻어요.”
라틸이 손을 휘적휘적 저으며 욕실을 가리키자, 서넛은 이번에도 머뭇거렸다. 이래도 될지 모르겠단 듯. 그러나 서넛에게서 떨어진 피가 카펫에 떨어질 때마다 시녀들의 표정이 어두워졌으므로, 서넛은 더 미적거리지 못하고 재빨리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라틸은 안락의자에 앉은 채 범인이 죽기 전 남긴 말들을 되짚었다. 틀라…… 로드. 범인은 왜 죽은 틀라의 이름을 말한 걸까. 혹시 범인이 틀라인가? 그럴 확률은?
‘설마.’
라틸은 틀라가 살아서 이런 저주를 퍼부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그는 목이 잘려 죽었다.
‘아! 혹시 틀라의 지지자들이 선황제를 암살한 건가?’
일단 지금으로서는 이쪽 가능성이 가장 높긴 했다.
‘그래. 어쩌면 이 자백극 자체가 틀라의 지지자들이 꾸민 건지도 몰라. 나를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면서.’
이쪽도 가능성은 컸다. 라틸은 얼굴이 차가워지는 감각에 이를 악물었다. 살아 있을 때도 죽었을 때도 참으로 짜증 나는 이복오빠였다. 그때, 욕실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다 씻었습니까?”
그럼 이제 나 씻으면 되나? 라틸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다가,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서넛이 간신히 아래만 수건으로 감싼 채 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왜 벗고 나옵니까!”
미쳤냐는 말이 생략된 라틸의 추궁에 서넛이 최대한 담담한 척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갈아입을 옷이 없습니다.”
하지만 덤덤한 목소리와 달리 귀와 목덜미가 다 빨갰다.
“아.”
라틸은 그제야 자신이 한 실수를 알아차렸다. 피에 젖어 있는 걸 급하게 안으로 들여보내느라, 갈아입을 옷을 넣어주지 않았단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