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주먹질이 언제부터 암투였나2020.06.10.
“암살자는 지하 감옥에 있습니다.”
“취조는?”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잡았지?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며?”
“그게…….”
라틸은 질문을 퍼부으면서 지하 감옥으로 바쁘게 걸어가다가, 째깍째깍 들려오던 대답이 사라지자 잠시 멈추어서서 옆을 쳐다보았다. 경비병이 난처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고 있었다. 원칙대로 잡은 게 아니구나. 라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어떻게 잡았는데?”
“자백했습니다.”
“자백?”
라틸은 황당해서 되물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시종장까지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럴 만도 했다. 황족 암살은 중죄 중 중죄로, 자칫하다가는 일가친척이 모조리 다 처형되거나 노예가 될지도 모를 범죄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죄라는 황제 암살이다. 그것도 폭군이 아니라, 인망이 두텁던 황제 암살. 그런 황제를 죽였다고 자백을 한다? 미친 일이었다. 진짜 죽였다고 해도 아니라고 발뺌해야 할 사안인데, 자기가 황제를 죽였다고 자백하는 범인이라니. 어이가 없을 만했다.
“수상한데. 일단 가보지.”
라틸이 돌로 만든 지하 감옥에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밑에서 구두굽과 돌이 부딪치며 때아닌 맑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음침한 감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지만, 이 소리를 들은 죄수들은 일시에 조용해졌다.
“몇 층?”
“지하 2층입니다.”
라틸은 황제를 암살했다고 자백한 자가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범인은 2층 한가운데 있는 추궁장 의자에 묶여 있었다.
‘저자가 아바마마를 죽인 자.’
먼발치에서 실루엣을 보았을 뿐인데도 화가 난다. 라틸은 표정을 굳히고 걸음을 아까보다 더 늦추어서 천천히 걸어갔다. 저자가 정말 아버지를 죽인 이라면……. 가까이 다가가자 범인의 얼굴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자백을 해서인가. 다른 흉악범들과 달리 체포 과정에서 부상을 입진 않은 듯했다. 문초가 시작되지도 않아서 아직 몸이며 얼굴에도 상처가 없었다. 짜증나게도. 라틸은 범인의 바로 앞으로 다가가 섰다. 그러나 범인을 코앞에서 보자 짜증보다는 의아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범인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어떤 멍청한 놈이기에 이런 자백을 하러 왔나 싶었는데. 이 범인은 황제 시해범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미 아는 듯 이 부딪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덜덜 떨어댔다.
“너냐. 네가 선제 폐하를 암살했다고 자백했느냐.”
그래도 라틸이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고서 묻자, 범인은 그제야 시선을 올려 라틸을 쳐다보았다. 라틸은 또 이상하다 생각을 했다. 암살범의 얼굴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이 남자는 인상도 전혀 암살범 같지 않았다. 라틸과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는 좀 놀란 눈을 하다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접니다. 접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라틸이 눈짓하자 교도병 한 명이 얼른 의자를 가져와 라틸의 뒤에 놓았다. 라틸은 의자에 앉으며 범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진짜야? 물어보는 것처럼.
“저, 정말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시선을 받은 범인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외관뿐만이 아니라 성격도 암살범 같진 않았다. 저렇게 자신 없는 성격으로 수많은 근위기사들을 뚫고 들어와 황제를 시해했다? 칼을 잡으면 성격이 돌변하나? 라틸은 범인의 팔과 다리, 어깨 등을 살폈다. 근육이 잡혀 있긴 한데…… 역시 몸이 날랜 근육도 아니었다.
‘점점 더 의심스럽네. 저거 혹시 암살자를 사칭하는 놈 아니야?’
라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제정신으로 황제시해범을 사칭하는 놈은 없겠지만, 세상엔 희한한 사람들이 많은 법이니까. 세기의 연쇄살인마를 자청해서 교수형을 받은 사람도 있지 않았던가.
‘어쩌면 진범에게 협박을 받아서 대신 자백하는 걸지도.’
황제시해범이 되면 자기 목숨은 물론 일가친척의 목숨이 날아가는데, 어떤 협박을 해야 황제시해범이라고 자백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라틸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범인이 시선을 떨구었다. 그래도 라틸은 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어떤 식으로 했어?”
“예?”
범인이 다시 겁먹은 시선을 들어 올렸다. 라틸은 다시 물었다.
“어떤 식으로 내 아버지를 죽였어?”
그 덤덤한 목소리와 무표정에, 오히려 범인의 목덜미에 소름이 올라왔다. 라틸은 눈도 거의 깜빡이지 않은 채 범인을 쳐다보았다. 범인이 말하기를 주저하자, 옆에 있던 교도병이 범인의 머리채를 콱 움켜쥐고 들어올렸다.
“윽, 다, 단도로.”
“…….”
“단도로 찔렀습니다.”
그러나 라틸은 이번에도 다시 물었다.
“어디를?”
“심장을…….”
“즉사?”
범인이 손가락까지 달달 떨면서 ‘네 네’ 하고 허둥지둥 대답했다. 자기 아버지 죽은 얘길 저렇게 태연하게 하다니, 진짜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라틸은 지금 무뚝뚝한 표정 아래로 머리를 바쁘게 굴리고 있었다. 우선 암살 방법. 일반 국민들은 황제가 어떻게 암살당했는지 모른다. 발표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어째서인진 모르겠으나, 국민들 대다수는 황제가 독살당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제는 실제로 단도에 찔려 죽었다. 조사 결과 암살범이 이용한 무기는 단도 하나였고, 그조차 심장에 단번에 꽂아놓고 나갔다. 그 외에는 어떤 상처의 흔적조차 없었다. 저자의 말처럼.
‘일단 암살 방식을 알고 있는 걸 보니 완전히 관련이 없는 자는 아니겠고. 다른 질문을 더해볼까?’
“어떤 식으로 황궁에 들어왔는데?”
“예?”
“침입자는 흔적을 아예 남기지 않고 들어왔다 나갔거든? 그래서 항상 궁금했어. 어떤 식으로 들어왔나.”
“그게…… 그냥 담을 넘은 다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동했습니다.”
“그게 가능할 정도로 강해?”
“예, 에?”
“말이 좋아 ‘눈을 피해 이동’이지, 이 궁전 안에 사람들 눈이 얼마나 많은진 알아?”
“저, 정문 쪽에 배치된 경비대원 수가 오십이 명이고…… 3교대로…….”
‘경비대원 수까지 아네?’
“침실 안에 잠입했을 때, 방 안에 몇 명이 있었지?”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 그리고…….”
라틸의 눈치를 살핀 범인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침실이 아니라 집무실……입니다.”
‘안 속네.’
라틸은 미간을 찡그렸다. 암살 방법, 교대 상황, 경비병 숫자를 아는 건 물론, 말에 함정을 설치했는데도 넘어가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이 자백하러 온 자는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백했지?”
“예?”
“황제시해범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차라리 죽여달라 빌 만큼 고통스러운 벌을 받을 거야. 죽은 후에도 편안해질 수 없고, 네 가족은 심하면 처형, 가장 관대해봤자 노예가 되겠지.”
“!”
“노예가 되어도 그냥 부잣집 도련님 아가씨들 시중드는 그런 노예는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어. 가족도 친척도 없다고? 숨겨놔도 조사하면 다 나와. 네가 모르는 친척까지 다 찾아줄 수도 있어. 설령 그쪽이 정말 일가친척 하나 없는 혈혈단신 고아라 해도, 친구나 애인은 있겠지.”
범인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라틸은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면서 차갑게 알려주었다.
“법에 따르면, 황제 시해와 반역에만 연좌제가 적용되거든? 근데 궁금하지, 내가 왜 친구랑 애인 얘기까지 하는지?”
“!”
“연좌제 범위에 들어가진 않는데, 친구나 애인은 관련자로 처벌할 수 있거든.”
범인은 얼굴이 피 한 방울 남지 않은 사람처럼 창백해졌다. 시선을 내리깔고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하는 그를 쳐다보며, 라틸은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감수하고, 그쪽은 왜 자백한 걸까. 난 이게 궁금하네?”
* * * 약 40분 가량 직접 자백한 범인을 문초한 라틸은 지하 감옥 밖으로 나가며 지시했다.
“손을 느슨하게 묶은 다음, 스스로 감옥 문을 열고 탈출할 수 있게 유도해봐요.”
뒤에서 따라가던 시종장과 서넛이 동시에 놀라 움칠했다.
“예?”
“풀어주신다고요? 범인을요?”
“네. 진범 아닌 것 같아서. 근데 저 정도로 줄줄줄 정황을 알 정도면, 진범하곤 아는 것 같아서.”
그런데 지시를 내리면서 본궁 집무실로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급하게 뛰어온 비서가 헐떡거리며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폐하. 클라인 님이, 클라인 님이 게스타 님의 시종을 폭행하고 있습니다.”
“뭐?”
그제야 아까 암살범의 자백 소식을 듣기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떠올랐다. 게스타와 클라인이 싸우고 있었다. 누구 편을 들고 싶지도 않아서, 대충 사건을 끝내라 지시하고서 급히 자리를 떴던 것 같은데…….
“그 물잔 때문에 그래?”
라틸이 황당해서 묻자 기사가 허둥지둥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번에는 게스타 님이 산책 도중에 어디선가 물벼락을 맞았습니다.”
“!”
“그걸 본 게스타 님의 시종은 분명 클라인 님의 짓일 거라 항의하러 갔고…….”
라틸은 끙 소리를 내고서 하렘으로 달려갔다. 가만히 두기만 해도 알아서 열심히 궁중 암투를 벌일 거란 생각은 했지만, 뭐 이렇게 대놓고 주먹질들을……. 하렘 안으로 들어간 라틸은 클라인 황자의 방으로 찾아갔다. 찾는 건 쉬웠다. 방문이 열려 있고 그 앞에 사람들이 걱정스레 모여 서 있었으니까. 이런 분위기인데도 모여든 사람들 중 후궁은 타시르 뿐이었는데, 타시르는 이 싸움판이 흥미로운 듯 히죽히죽 웃으며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가 부업이 암살자 아니랄까 봐 진짜. 넌 또 그걸 보고 좋아하냐.’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라틸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얼른 두 갈래로 갈라졌다. 라틸은 두 개의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얼씨구?’
들어가자마자 펼쳐진 광경은 가관이었다. 라틸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게스타의 시종으로 추정되는 이는 바닥에 엎어져 있고, 클라인은 그 옆에서 강제로 시종의 입을 열어 물을 들이붓고 있었던 것이다.
“클라인.”
라틸이 조용히 이름을 부르자, 클라인은 그제야 잔을 놓고 물러났다. 패기는 자기가 팬 것 같은데. 뭐가 그리 억울하다고, 얼굴이 분노로 완전히 벌게져 있었다. 그러다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클라인이 항의했다.
“먼저 이자가 찾아와서 저한테 몹쓸 말을 했습니다!”
라틸은 얼굴이 호빵처럼 부은 게스타의 시종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조곤조곤 잘 밟아 놨는지, 그 사이에 사람이 아주 반죽이 되어 있었다. 저것도 능력이다 싶어 혀를 차고 있자니, 게스타가 달려와서 라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라틸이 쳐다보자 게스타는 울먹거리면서 자신의 시종을 끌어안았다.
“트리가 화가 나서 클라인 전하께 감히 못 할 말을 했나 봅니다.”
게스타가 자기 시종이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했는데도 클라인을 두둔하자, 그 착한 마음씨와 처연한 모습을 본 구경꾼들이 한탄 같은 감탄을 뱉었다. 클라인은 얼굴이 벌게져서 게스타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기사에게 사정을 한 번 듣긴 했지만, 그래도 본인들을 통해 들어봐야 할 터. 라틸은 분위기에 휩쓸리는 대신 다시 물었다. 클라인은 주먹을 콱 틀어쥐고서 이를 갈며 말했다.
“누가 2층에서 저자한테 물을 끼얹었다는데, 트리인지 뭔지 하는 이 시종놈이 절 찾아와서 모욕적으로 따지고 들었습니다.”
“뭐라 했는데?”
“저 같은 성질머리는 얼마 못 가 폐하께 버림받을 거라거나, 카리센 출신이라 난폭한 거다, 머리에 든 게 없다고 소문이 났다더니 딱 그대로다 등등 온갖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게스타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반박했다.
“우리 트리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폐하.”
“아니, 너네 나무가 그랬다고 이, 망할 자식아!”
라틸은 손을 들어 휘휘 허공을 저었다. 시종이 퍼부은 폭언이 사실이라면, 클라인이 저렇게 화를 낼 만도 했다. 보통은 저렇게 직접 화를 토해내기보다는 권력으로 벌을 내리겠지만. 문제는 실제 저 말을 했다 한들 저 시종이 수긍할 리 없으니, 클라인의 말은 증명할 방도가 없단 것이었다. 게다가…….
“게스타. 네 시종은 왜 물을 끼얹은 게 클라인이라 한 거야?”
대답은 기진맥진해 있던 시종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대신했다.
“한 시간도 지나기 전에 클라인 님께서 게스타 님이 실수로 물을 쏟은 일로 난리를 부리셨는데, 정황상 클라인 님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클라인은 바로 반박했다.
“전 계속 여기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종은 악시안을 노려보며 덧붙였다.
“물을 끼얹는 거야 굳이 클라인 님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누구든 시킬 수 있는 거잖습니까.”
라틸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클라인에게 물었다.
“진짜야?”
“아닙니다!”
클라인은 단호하게 소리치더니, 잠시 주춤하다 털어놓았다.
“복수할 생각이긴 했지만, 아직 실행하기 전이었습니다.”
“……그 짓을 할 마음이 있긴 있었어?”
“조금.”
라틸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자 클라인은 미간을 찡그리며 툴툴댔다.
“저 녀석이 분명 제 쪽을 향해 물을 뿌렸단 말입니다, 폐하.”
라틸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궁들 싸움은 적당히 자기들끼리 치고받게 두면 되겠지, 싶었는데. 의외로 그 사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다. 너무 성격들이 개성적이라 그런가. 조용한 물밑 암투가 아니라, 아예 대놓고 주먹질 발길질을 해대니 이건 도대체가……. 언제부터 주먹질이 암투였더라. 라틸은 이번에는 클라인과 게스타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둘 다 주장하는 게 다른데, 내가 듣기엔 둘 다 그럴듯하거든? 둘 중에, 혹시 심증 말고 물증 가지고 행동한 사람은 없어?”
“…….”
“…….”
게스타와 클라인이 조용해졌다. 그 모습을 본 라틸은 다시 물었다.
“선택해. 둘 다 이대로 넘어간다. 혹은, 클라인은 게스타의 시종을 두드려 팬 일로, 게스타의 시종은 클라인을 모욕한 일로 둘 다 벌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