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또야. 왜 또 싸우고 있어?2020.06.07.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갔지만 조사는 지지부진한 채로 멈추었다. 라틸은 흑림에 대한 일, 선황제 무덤 훼손에 대한 일, 자신에게 남겨진 편지 등을 조사하면서 황제로서의 업무에 충실하느라 하렘을 찾지 못했다. 하도 피곤하다보니 밤이 되면 침대에 쓰러져 바로 잠들기 일쑤였다. 이런 와중에 하렘까지 걸어가는 것도 일이었다. 하지만 마냥 바쁘기만 한 라틸과 달리, 궁정인들은 조금씩 다시 평화를 찾아갔고, 궁 안의 분위기도 진정되었다. 그렇게 고요하던 어느 날. 카리센에서 뜻밖의 손님이 도착했다.
“악시안?”
게다가 그자는 라틸에게 온 손님이 아니었다.
“예. 하이신스 황제의 근위기사단 부단장이라 합니다.”
“근위기사단 부단장이 왜 하이신스 옆에 안 있고 여기에 왔는데요?”
“하이신스 황제께서 동생이 염려되신다며, 클라인 황자의 호위를 명령했다 합니다.”
시종장의 설명에 라틸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이유로 황제의 근위기사가 먼 타국까지 찾아왔다고요?”
카리센에서 온 황제의 근위기사는, 놀랍게도 황제의 심부름을 온 게 아니라 단순히 클라인 황자의 호위를 위해 왔다고 한다. 하지만 일반 근위기사도 아닌 근위기사단 부단장이었다. 그런 사람이 한 달 이내로 잠깐 다녀가는 것도 아니고, 몇 년, 혹은 평생 여기에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에 직접 왔다고? 호위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라틸 역시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 아버지의 근위기사단장인 서넛을 데리고 카리센에 방문한 적이 있지만, 일시적인 방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라틸을 아끼는 부황이라도, 라틸이 그 길로 결혼을 하러 갔다면 절대로 서넛을 보내진 않았을 것이었다. 라틸은 혀를 차고서 물었다.
“그래서 그자는 지금 어디로 갔는데요?”
“바로 하렘 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
“가보시겠습니까?”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라틸은 입술을 꾹 다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타시르가 흑림의 수장이라는 걸 알게 된 그 충격적인 날 이후. 라틸은 하렘의 그 누구를 따로 찾아가거나 부르지 않았다. 딱히 어떤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집권 초기이니만큼 이것저것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카리센에서 근위기사단 부단장 악시안을 보냈단 말을 듣자, 예전에 하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클라인 황자요.”
“예, 폐하.”
“진짜로 뭐 첩자질 같은 거 명령받고 온 거 아닐까요?”
시종장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클라인 황자를 싫어하는 그였지만, 한 사람을 첩자라고 몰아가는 건 단순히 호불호로 따질 일이 아니었다.
“아, 그렇게 진지하게 물어본 건 아닙니다.”
라틸은 시종장이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잠기자 웃으면서 손을 저은 후, 천천히 일어났다.
“폐하? 어디에 가시렵니까?”
“새로운 손님이 왔다니까. 그 핑계로 한번 가서 분위기를 보는 것도 괜찮겠지 싶어서요.”
* * * 그런데 하렘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어딘가에서 분노에 가득 찬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지?’
라틸은 클라인의 방으로 가던 발걸음을 틀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았다. 뜻밖에도 클라인이 거기에 있었다. 그 외 게스타와 그들의 시종들도 함께.
“황…….”
시종장이 그들에게 라틸이 온 걸 알리려 입을 열었으나, 라틸은 손을 들어서 그를 막았다. 무슨 일인지 조용히 지켜보고 싶어서. 그러자 후궁들은 라틸이 온 줄도 모른 채 계속 싸워댔다.
“죄, 죄송합니다. 절대로 일부러 그런 게 아닌…….”
“일부러 그런 게 아니면. 네가 마법사라도 돼? 왜 멀쩡한 물이 허공에서 쏟아지냐고.”
“잠깐 헛손질을…….”
“미친 새끼가 사람이 등신인 줄 아나? 변명을 해도 좀 성의 있게 하지그래?”
‘아. 저렇게 된 건가.’
몸을 감춘 채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자니 대충 상황을 알 것 같았다. 클라인은 아름다운 은발이 쫄딱 물에 젖어 있고, 그 앞에서 게스타는 벌벌 떨면서 변명 중. 아무래도 게스타가 뭘 어떻게 해서 클라인이 저 꼴이 된 모양인데, 클라인은 그게 실수가 아닌 고의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말릴까요?”
서넛이 옆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 라틸이 대답하기도 전에, 라틸의 기척을 눈치챈 건지 클라인이 휙 고개를 돌렸다. 덩달아 게스타도 라틸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라틸을 발견한 게스타는 얼굴이 하얘져서 고개를 숙였다. 반대로 클라인 황자가 데려온 수행원은 염려되는 얼굴로 클라인부터 살폈다.
“무슨 일이냐.”
더 숨어 있을 수 없게 된 라틸이 다가가자, 클라인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페하, 저 비루먹은 망아지 같은 놈이 제게 물을 끼얹었습니다!”
게스타는 얼른 두 손을 휘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제 시종과 대화를 나누면서 가고 있었는데 헛손질이-.”
“아, 그러니까 어떻게 헛손질을 했기에 물이 내 머리 위까지 날아와서 튀냐고. 애초에 내 쪽을 향해서 물을 들이붓지 않는 이상 말이 안 되잖아? 네놈은 헛손질하면 손이 위로 치솟냐?”
“그냥 제스처를 좀 크게 하다가…….”
“됐고, 네놈도 머리통 대라. 빨리.”
클라인이 주먹을 위협적으로 쥐자, 게스타의 시종이 앞을 막아서며 눈을 매섭게 빛냈다. 그 모습에 이번에는 클라인 황자의 뒤에 서 있던 갈색 머리에 적색 눈을 한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게스타의 시종을 견제했다.
‘아. 저자가 악시안인가 보다.’
게스타의 시종도 제법 기세가 좋았지만,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기세를 가진 남자였다. 게다가 처음 보는 얼굴. 라틸은 저자가 하이신스가 보내온 카리센의 근위기사단 부단장 악시안이라는 걸 눈치챘다. 무력 싸움까지 날 것 같자, 시종장이 “무엄합니다!” 하고 소리를 우렁차게 질렀다.
“감히 폐하 앞에서 이게 무슨 짓들입니까!”
그제야 게스타의 시종과 악시안 모두 뒤로 물러나서, 라틸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라틸 역시도 악시안에게서 시선을 떼고서 게스타와 클라인을 쳐다보았다. 게스타는 눈가가 붉어진 채 울음을 참고 있었고, 클라인은 뚝뚝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 아래로 파란 눈을 매섭게 빛내고 있었다. 둘 다 표정도 분위기도 달랐지만, 두 눈동자는 제법 비슷하게 보였다. 라틸은 그들이 원하는 바를 짐작해냈다. 그들은 라틸이 누군가를 편들어 이 상황을 끝내주길 바라고 있었다.
‘난감하네. 난 또 하필 이 타이밍에 여길 왔냐.’
하지만 일의 전후를 모르는데 당장 누군가를 편들어주기 애매했다. 물론, 차분하게 자리를 잡고서 수사관들을 불러다가 샅샅이 따진다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일을 키우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는 수밖에. 라틸은 먼저 게스타를 보았다. 게스타는 커다란 눈으로 라틸을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을 보고 있자니 편을 안 들어주는 게 좀 미안해졌지만, 라틸은 시선을 외면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실수든 고의든 물을 끼얹은 건 네 잘못이야, 게스타. 사과는 해야지.”
쳐다보고 있지 않은데도 게스타의 표정이 짐작이 갔다. 충격받은 얼굴이겠지. 라틸은 속으로 일부러 그 시선을 외면한 채 이번엔 클라인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클라인. 사람이면 다 실수할 수 있는 일이잖아. 고의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일단은 사과받고 넘어가.”
평소 이미지라는 게 있는 덕인가. 클라인 역시 라틸이 자신을 편들지 않은 게 분하단 표정이었지만, 말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라틸은 게스타에게 눈짓했다. 사과. 빨리. 결국 게스타는 우물거리면서 클라인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클라인의 표정은 영 좋아지지 않았다. 클라인은 라틸이 자신을 배신한 것처럼 쳐다보다가, 결국 입술을 꽉 깨물고서 확 돌아섰다.
“저, 저런……!”
그 태도를 본 시종장은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라틸은 클라인이, 자신이 편들어 주지 않은 데 의외로 큰 상처를 받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설령 게스타가 진짜 실수로 엎었다 한들, 클라인 본인이 실수라 받아들이지 않으면 고의나 실수나 기분 상한 정도는 똑같을 텐데. 너무 일방적으로 대인배적인 면모를 바란 걸까? 보다 못한 라틸은 클라인을 따로 불러 달래주려 했다. 어차피 클라인을 데리고 가서 악시안에 대해 떠볼 생각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막 입을 열려 할 때였다.
“폐하! 폐하!”
경비병 세 명이 헐레벌떡 다급하게 뛰어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자, 그중 가장 중앙에 선 사람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보고했다.
“폐하, 암살자가, 선황제 폐하의 암살자가 체포되었습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굳었다. 라틸 역시도 몹시 당황했다. 이전까지는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던 암살자가 뜬금없이 잡혔다니? 하지만 병사들이 거짓을 고하는 것 같진 않았다.
“가면서 듣지.”
라틸은 휙 그들을 지나쳐 급하게 하렘 정문으로 나가며 말했다. 어쨌든 게스타와 클라인 사이에서 싸움 조정을 하는 것보다는 더 중요한 일이었다. 남겨진 클라인이 할 말이 가득한 시선으로 라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지만, 이미 앞서가는 라틸은 그를 볼 수 없었다. 라틸이 멀어진 후.
“전하.”
악시안이 조심스럽게 부르자, 클라인은 그제야 라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뗐다.
“괜찮으십니까?”
“괜찮겠느냐?”
클라인은 짜증스럽게 되묻고는, 게스타 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게스타는 겁먹은 얼굴로 쭈뼛거리고 있었다. 클라인은 그를 노려보다가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클라인은 커다란 의자 위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씩씩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분에 가득 차 보였다. 클라인의 수행원은 얼른 마른 수건을 가져와 그의 젖은 얼굴이며 머리카락을 닦아주었다. 악시안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잘 지내고 있나 폐하께서 무척 염려하셨는데. 그리 잘 지내는 것 같진 않으십니다, 전하.”
“방금 온 놈이 뭘 안다고.”
“방금 온 놈 눈에 더 확실하게 보이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
“전하를 총애하신다면 전하를 편들어 주셨겠지요.”
뼈 있는 악시안의 말을 클라인은 냉담하게 부정했다.
“속으론 날 총애하고 계신다.”
“?”
클라인은 수행원이 찔끔찔끔 물기를 닦는 게 마땅치 않은 듯, 수건을 빼앗듯 가져다가 머리카락을 북북 문질렀다.
“하지만…….”
클라인은 한숨을 내쉬고서 수건을 떨어트렸다.
“그걸 잘 표현하지 않으셔.”
“표현할 마음이 없는 건 아닐까요?”
“방금 온 놈이 뭘 안다고!”
“방금 온 놈 눈에…….”
“아아, 됐다. 그만해.”
클라인은 손을 휘휘 젓고서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기가 쭉 빠진 버릇없는 고양이의 모양새에, 악시안은 덩달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가 주군으로 모시는 이는 하이신스 황제였으나, 클라인 역시 옛날부터 보아 온 황자였다. 자신감으로 가득 차서 세상 무서운 것 하나 없이 돌아다니던 황자가, 싸우고 나서 씩씩거리며 혼자 화를 삭이는 모습이 괜히 가엾게 여겨졌다.
“그래도 많이 의젓해지셨습니다. 옛날 같으면 주먹질부터 하셨을 텐데요. 하이신스 폐하께서 보셨더라면 자랑스러워하셨을 겁니다.”
“설마. 개가 똥을 싸지.”
개는 당연히 똥을 쌉니다만……. 수행원이 옆에서 작게 중얼거렸으나, 클라인도 악시안도 듣지 않았다. 클라인은 발을 까딱거리면서 멍하니 침대 기둥에 머리를 대고 있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악시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보다 악시안. 넌 여기에 왜 온 거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형님이 날 보호하라 했다고?”
“예.”
“나보다 약한 녀석에게, 날 보호하라 시켰다고?”
“!”
당연스레 자신의 능력을 높이 사는 클라인의 말에 악시안은 자존심이 상해서 미간을 찌푸리긴 했으나 부정하진 않았다. 사실은 사실이니까. 클라인은 기둥에서 머리를 뗐다. 다리를 약간 벌리고 앉은 그는, 다리 위에 팔꿈치를 괴고 손을 깍지낀 채 악시안을 빤히 쳐다보며 웃었다.
“솔직히 말해봐. 뭐 때문에 왔는데?”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호위입니다. 정말로.”
클라인의 입꼬리가 비웃듯 올라갔다.
“감시는 아니고?”
“호위입니다.”
아무리 캐물어도 악시안이 빙그레 웃으면서 같은 대답을 반복하자, 클라인은 혀를 차고서 손을 저었다.
“하긴, 무슨 명령을 받고 왔든 네가 입을 열겠냐. 난 형님이 아닌데.”
“그렇죠.”
“그럼 호위는 됐고. 온 김에 심부름이라 해라.”
“심부름이라 하시면……?”
설마 물 떠 오란 심부름은 아닐 것이다. 악시안이 분위기를 타고 목소리를 낮추자, 클라인이 히죽 웃었다.
“너. 은신술에 뛰어나지?”
“?”
“나한테 물 부은 놈. 가서 똑같이 해주고 와. 들킬 필요는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