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나는 이쁜 충견, 너는 그냥 개2020.05.31.
라틸이 클라인을 데리고 식당으로 들어서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담당 궁정인들이 놀라워하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쫓아다니더니 결국 같이 왔구나, 하는 눈빛들이었다. 그들이 무어라 하든, 라틸은 태연하게 테이블 가장 상석에 앉았다. 미리 지시한 것도 아니건만, 궁정인들은 요령 있게 2인분의 식사를 가져왔다. 오늘 역시 샐러드와 구운 빵, 잼, 버터, 우유, 수프 등으로 된 간편한 식사였다. 한 번 와 본 적이 있어서인지 클라인은 자연스레 라틸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궁정인들이 음식을 내려놓고 물러간 후, 라틸은 포크를 쥐며 힐긋 클라인을 보았다. 대체 얼마나 자신에 방 앞에서 기다린 건가. 배가 많이 고팠던지 클라인은 바로 수프부터 마시고 있었다. 그래도 황자라고, 급히 먹는 것 같은데도 제법 모양새가 나왔다. 라틸도 식사를 시작하자, 잠시 식당 안에는 두 사람이 조용하게 식사하는 소리만이 났다. 식사하는 소리라고 해도, 둘 다 먹으며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기에 무척이나 조용했다. 라틸은 적당히 배를 채운 후에야 빵을 찢으며 클라인을 황자를 불렀다.
“클라인.”
“예, 폐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보십시오.”
“혹시 돌을 던진 게 누구인지, 짐작 가는 사람 없어?”
“남 일엔 관심이 없습니다.”
라틸은 웃음을 터트렸다. 시종장의 말처럼 클라인이 범인일 것 같아서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을 뿐. 하지만 곧장 솔직한 대답, 그것도 무척이나 솔직한 대답이 나오자 저절로 웃게 되었다. 걱정이 된다거나, 모른다거나, 누구 같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라 관심이 없다니.
‘또라이긴 한데 재미는 있네.’
시종장은 사적인 감정을 가득 넣어서 클라인 황자를 범인으로 지목했으나, 라틸은 어쩐지 아닐 것 같았다. 그리 오래 안 사이는 아니지만…… 클라인 황자는 기분이 상해도 몰래 돌을 던질 것 같진 않았다. 앞에서 던지면 몰라도.
“범인이 이번엔 네게 던질지도 모르는데, 신경 쓰이지 않아?”
그의 대답이 재미있어서 놀리듯 묻자, 클라인 황자는 “네.” 하고 즉답했다.
“전 그런 무말랭이 같은 체질이 아닙니다. 공격이 들어오면 스스로 방어할 수 있으니까요.”
‘무말랭이…….’
라틸은 예전에 그가 소리 없이 의자와 의자 사이를 이동했던 걸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몸을 사용하는 게 남다른 듯했지.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아니, 걱정한 건 아닌데.’
“그래.”
라틸은 웃음을 참으며 다시 빵을 찢었다. 그런데 빵을 수프에 찍어 먹다 보니, 클라인 황자가 계속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식사를 다 하진 않은 것 같은데. 왜 저렇게 유심히 보지?
“왜 그러느냐?”
의아해서 묻자, 클라인 황자가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선황제 폐하의 무덤에 흑림 표시가 되어 있다 들었는데. 조사엔 진전이 있습니까?”
“아직 수사 중인데. 그건 왜 묻는 거지?”
클라인의 질문은 무척 이질적으로 여겨졌다. 아름답긴 하지만 클라인은 머리가 좋아 보이는 황자는 아니었다. 알아본 바로는 실제로도 공부를 못했다 하고. 그런 이가 온갖 사탕발림을 해야 할 타이밍에 저리 진지한 질문을 하다니……. 게다가 흑림은 비밀스러운 집단이라는데 그 이름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니.
“아마 흑림이 범인은 아닐 겁니다.”
심지어 대답까지도 진지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라틸의 질문에 클라인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예전에 형님, 그러니까 하이신스 폐하께서 흑림에 의뢰를 넣으려 한 적이 있었는데 거절당했으니까요.”
‘그래서 흑림에 대해 알았구나. 하지만 세상에.’
“하이신스가? 누굴 죽이려고 했는데?”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클라인이 눈썹을 치켜뜨며 대답했다.
“헤움 황자요.”
‘아아. 그렇겠지. 반역을 일으킨 자니까.’
“왜 거절당한 건데?”
“황족들과는 어떤 식으로든 얽히고 싶지 않다더군요.”
“와.”
“방금 그 ‘와’는 무슨 뜻입니까?”
“아니. 의외로 제대로 대답하는구나 싶어서.”
“…….”
“아니, 황자 네가 멍청하단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도움이 되었단 뜻이다.”
라틸 역시 흑림이 선황제를 암살한 범인이라 하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많다 여기던 참이었다. 흑림 표식과 정반대의 내용을 담은 편지라던가, 이미 몇 개월이 지난 후에야 남겨진 표식이라던가 하는 것들. 그런데 클라인 황자의 말까지 합쳐지니 반쯤 그 생각에 확신이 생겼다. 역시 흑림이란 놈들 짓은 아닌 거 같아. 하지만 범인은…… 어째서 위험을 무릅쓰고 흑림에게 화살을 돌리려 한 걸까?
* * * 라틸이 클라인에게 도움을 받은 건 그가 준 정보뿐만이 아니었다. 의도한 건 아니겠으나 그는 라틸에게 새로운 수사 방식 역시 열어주었다.
“칼라인과 타시르를 불러와라.”
후궁들이라고 해서 꼭 품에만 끼고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 라나문이나 게스타 같은 귀족 영식들이야 온실 속 화초일 테니 이런 걸 잘 모르겠지만, 밖에서 온갖 경험을 쌓으며 성장한 용병왕이나 상단 후계자라면 흑림에 대해서도 달리 아는 바가 있을지도 몰랐다. 잠시 기다리자 칼라인과 타시르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집무실에 들어온 건 처음일 텐데, 칼라인은 들어오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반대로 타시르는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으면서도 사방을 살피며 다가왔다.
‘이런 데에서도 성격이 묻어나네.’
마침내 라틸의 책상 바로 앞까지 다가온 두 사람은 멈추어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면서 보인 행동은 달랐지만, 둘 다 여기로 불려온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런 일은 굳이 돌려 물을 것도 없었다. 라틸은 그들에게 바로 질문을 던졌다.
“혹시 흑림에 대해 아는 게 있는 사람?”
타시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반대로 칼라인은 표정 변화 없이 라틸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라틸은 두 남자의 반응을 샅샅이 훑으며 말했다.
“최근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둘 다 들었으리라 생각하는데. 안 그런가?”
편지 내용에 대해 아는 건 극소수이지만, 무덤 낙서는 워낙 노골적이다보니 이미 알 사람들은 다 알 터. 둘 역시도 순순히 인정했다.
“선황제 폐하의 무덤 건이라면, 예. 들었습니다.”
“들었습니다.”
“그 일 때문에. 너희는 한 명은 유명한 용병이고, 한 명은 상인이니까. 아무래도 그런 집단들하고도 좋든 나쁘든 얽혔을 것 같거든.”
칼라인과 타시르가 서로를 힐긋 쳐다보았다. 라틸은 두 사람의 대답을 기다렸다. 먼저 말문을 연 건 칼라인 쪽이었다.
“흑림에서 암살 타깃이 된 사람이, 보호해달라며 절 고용한 적이 있습니다.”
‘역시. 얽힌 적이 있구나.’
“그러면 그자들을 직접 만나 봤겠네?”
“예.”
“어땠지?”
“…….”
칼라인은 곧게 펴져 있던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아. 혹시 의뢰 실패였나? 흑림에게 진 건가?’
너무 대놓고 물었나 싶어 라틸은 조심스럽게 칼라인의 눈치를 살폈다. 의외로 대답은 덤덤했다.
“반은 살렸지만 반은 살리지 못했습니다.”
“의뢰를 반만 성공했단 거야?”
“네. 구체적인 의뢰 내용은 알려드리기 힘듭니다.”
라틸은 어째서냐고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타시르가 먼저 끼어들며 물었다.
“그런데 용케도 살아 있군, 자네?”
무슨 소리야? 라틸이 힐긋 쳐다보자, 타시르가 속삭이듯 말했다.
“흑림은 한 명이 당하면 백 명이 몰려가서 복수하기로 유명한 놈들이라서요.”
“진짜야?”
라틸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칼라인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칼라인은 대답 대신 미간을 찡그리고서 타시르를 힐긋 보았다.
“거짓말이야?”
라틸은 다시 물었다. 하지만 칼라인은 무언가 걸리는 게 있단 얼굴로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목덜미를 노리며 다짜고짜 달려들던 그 늑대는 어디 가고, 입이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진짜냐고 묻고 있는데. 칼라인, 황제가 안 보여?”
라틸은 가볍게 탁자를 퉁 내리치고서, 칼라인의 눈앞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이거 몇 개니? 그제야 칼라인은 라틸 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그런 심각한 표정으로 칼라인이 한 대답은 별거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아…… 모르는구나.”
라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대답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였나? 하지만 곧 칼라인이 왜 타시르를 이상하단 눈으로 쳐다본 건지 알 수 있었다. 어라? 그러네. 흑림과 싸워본 칼라인도 모르는 걸, 타시르가 어떻게 아는 거지? 라틸은 휙 타시르를 쳐다보았다. 타시르는 여전히 싱글 생글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진짜 대단하네. 정말 대단해. 그게 자네였어.”
게다가 중간에 아주 꺼림칙한 말이 하나 끼어 있었다. ‘그게 자네였어’라니. 라틸은 떨떠름해서 타시르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타시르. 넌 흑림에 대해서 아는 게 많은 모양인데. 뭐 접점이라도 있는 거야?”
“접점이라.”
타시르는 그제야 칼라인에게서 시선을 떼고 라틸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시원스러운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처음 보았을 때 라틸을 경악하게 했던 그 마약 범죄자 같은 미소로, 타시르가 가볍게 대답했다.
“흑림은 제가 운영하는 서비스 업체입니다, 폐하.”
찰나의 침묵 후. 라틸은 확 검을 빼 들어 타시르의 목 앞에 가져다 댔다. 타시르는 같이 검을 빼드는 대신, 항복 표시로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빠르게 말했다.
“일단 들어보세요, 폐하.”
“상인이라며. 언제부터 암살자들이 상인이 된 거지? 내가 너 얼굴 보고 딱 알았어. 너 마약상이지?”
“마약상이라니…….”
타시르는 억울하단 듯 중얼거리고서 재빨리 대답했다.
“선황제 폐하께 허락받은 업체입니다.”
“뭐?”
라틸은 미간을 찡그렸다. 검날이 더 목에 가까워졌으나, 타시르는 여전히 방어 자세를 취하지 않고 라틸을 까만 눈으로 응시하기만 했다.
“흑림은 선황제께도 그 전의 황제 폐하께도, 그리고 그 전, 거슬러 올라가자면 초대 황제 폐하께도 허락받은 업체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절대 범인이 아니란 소리죠.”
“들은 적 없는데.”
“보통은 양위하거나 유언을 남기실 때, 흑림의 수장을 불러서 다음 보위에 오를 분과 만나게 해 주시니까요. 극비 사안이기도 하고.”
‘극비’란 단어를 말하며 타시르가 힐긋 칼라인을 쳐다보았다. 칼라인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시선으로 타시르를 쳐다보고 있었다. 타시르는 슬그머니 손을 내리려다가 라틸이 검 끝을 꾸욱 목에 누르자, 얼른 손을 원위치시키며 빠르게 설명했다.
“나랏일을 하려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 거. 밑에서 위험한 일, 꼭 해야 하지만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요.”
“그런 게 뭔데?”
“나라에 해가 되는 범죄자인 게 확실한데 한발 앞서 증거를 없애 버려서 재판에 가봤자 소용 없을 경우라던가…….”
“!”
“정확히 말하자면 흑림은 암살집단이 아니라 그런 일을 하는 집단입니다.”
“그런데 왜 암살단체로 알려진 건데?”
“세간의 눈을 돌려야 하니까요.”
“암살자 집단으로?”
“예. 그래서 일부러 암살을 했을 때에만 표식을 남겨두어서, 역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가린 거지요. 암살 외의 일은 우리가 한 게 아닌 것처럼 생각하도록.”
“…….”
얼추 말이 되긴 했지만, 바로 믿을 수는 없었다. 그 말을 확인해 줄 선황제가 무덤 안에 있지 않던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타시르가 끙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역대 황제 폐하들의 인장을 찍은 서류를 보관하고 있으니 그걸 보여 드리면 되겠습니까?”
황제의 인장은 절대로 위조할 수 없었다. 대신관이 신성력을 집어넣어 만들기 때문에, 확실하게 분간할 방법이 있기 때문이었다. 라틸은 천천히 검을 내렸으나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왜 대관식에 날 찾아오지 않고 이런 식으로 온 거지, 타시르?”
타시르는 눈동자를 데굴 데굴 굴리다가, 라틸이 다시 검 손잡이를 잡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대답하면 기분 나빠하실 것 같지만…….”
“말해.”
“그래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희 측에서는 라트라실 폐하도 믿기 어려웠던 상황인지라.”
라틸의 눈썹이 꿈틀했다.
“날 믿기 힘들다니?”
“선황제 폐하를 암살한 용의자 중 한 명이셨…… 이런. 때리는 건 안 됩니다.”
라틸이 움칠하자 타시르가 얼른 몸을 뒤로 빼며 말했다. 라틸은 꽉 쥔 주먹을 풀었다.
“안 때려.”
때리려고 주먹을 쥔 게 아니었다. 선황제의 무덤가에 놓여 있던 편지가 생각났기 때문에 한 행동이었다. 선황제를 죽인 게 라틸이라는 말. 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개소리이다. 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 게다가 아버지의 비밀 집단에서도 자신을 용의자로 생각했다고 하니 미심쩍었다.
‘누가 봐도 난 선황제의 죽음으로 손해를 본 쪽인데. 왜 저런 생각을 한 거지? 아니면 그 편지를 남긴 사람이 타시르일 가능성은 없나?’
“이유가 뭐지? 왜 날 용의자 중 하나라 생각했는데?”
라틸은 일단 편지 건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고 물었다. 타시르는 대답 대신 슬쩍 칼라인을 쳐다보았다. 그가 있는 곳에서는 말하기 곤란하단 눈치였다.
“나가 있어라, 칼라인.”
라틸은 타시르의 뒷말을 듣고 싶었기에 칼라인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칼라인은 나가는 대신 “위험합니다.”라며 버티고 섰다.
“아직 아무것도 확인된 게 없지 않습니까, 주인. 저자가 말하는 ‘황제들의 음지 단체’라는 건 아직 주장일 뿐입니다.”
타시르는 발끈하는 대신 히죽 찢어진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칼라인을 가리켰다.
“위험하기로 치자면, 폐하. 칼라인 쪽이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라틸이 눈썹을 치켜 올리자, 타시르가 조롱조로 설명했다.
“흑사신단은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해 주기로 악명 높은 단체니까요. 안 그래, 용병왕? 너희들은 한 명에 대한 암살 의뢰는 받지 않지만, 돈만 주면 어디든 가서 칼을 휘두르고 수십 수백 명을 베어내지. 어제의 의뢰인을 다음날 죽이기도 하는 놈들이, 한 명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우리를 두고 위험하다니…….”
“…….”
“똥 묻은 개가 이쁜 충견한테 헛소리를 짖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