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덩치만 큰 울보 대형견2020.05.27.
클라인은 황제가 호통치는 와중에도 자신에게 눈짓을 보내던 걸 떠올리다 웃었다. 은근히 귀엽기는……. 손가락으로 마지못해 하트 모양을 만들어주자, 바로 웃음을 터트리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내가 그렇게 좋은가? 클라인은 쑥스러운 기분에 괜히 발걸음을 빠르게 했다. 대놓고 하는 연애도 재미있겠지만, 은밀한 연애에는 또 그 나름의 맛이 있었다.
“거기.”
상단의 후계자라는 놈이 다가온 건 한껏 기분이 몽실몽실 좋은 와중이었다.
“황자 전하.”
클라인은 자기를 부르는 소리도 들었고 다가오는 놈도 보았지만, 대답 없이 그냥 걸어갔다. 그는 타시르를 라이벌도 못될 놈이라 생각했으나, 그래도 후궁이었다. 황제를 뒤흔들 가능성이 있는 후궁. 그런 작자들과 말을 섞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타시르는 웃으면서 다가오더니, 나란히 속도를 맞춰 걸어가며 인사했다.
“이야. 한 번도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오는군요.”
넉살 좋은 목소리였으나 클라인은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우리가 대화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
“왜요. 앞으로 몇 년은 같이 있어야 할 텐데.”
하지만 타시르는 이번에도 자연스레 웃으며 대응했고, 클라인의 시종은 속으로 좀 감탄했다. 지랄 맞은 클라인만 보다가 유들유들한 타시르를 보니 신기했다.
“왜 온 거지?”
그러나 감탄한 건 시종뿐으로, 클라인은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실은 예전에 제가 카리센에서 하이신스 폐하를 뵌 적이 있습니다.”
“뭐 어쩌라고.”
“이렇게 대화를 시작하자는 거지요.”
저 시비를 저렇게 받아넘기다니……. 클라인의 시종은 이번에도 감탄했다. 자기도 모르게 박수까지 칠 뻔했다. 클라인은 미간을 찡그린 채 타시르를 쳐다보았다. 뜬금없이 다가와 옆에 달라붙은 이 상단 후계자는, 입가를 히죽 올린 채 무슨 말을 해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런 시늉을 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기분 나쁘지 않은 걸까? 고고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타시르가 물었다.
“이젠 좀 더 사적인 대화를 해 볼까요? 카리센의 황자 전하께선 어쩌다 여기에 후궁으로 오셨습니까?”
“불만이냐?”
“충분히 국서 자리를 차지하실 수 있는 분이 후궁으로 오셨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뭐 달리 이유라도 있습니까?”
“흠. 황제 폐하께선 황제가 되기 이전부터 날 짝사랑하셨거든.”
“!”
“하지만 내가 쉬이 받아들이지 않자 이런 수까지 쓰신 거다.”
“아……하. 진짜입니까?”
“넌 가짜였으면 싶겠지.”
클라인은 거만하게 고개를 저었다. 타시르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힐긋 부하를 돌아보았다. 부하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 황당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못 믿겠단 얼굴이구나.”
“아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믿습니다.”
타시르의 눈가가 가늘게 휘었다. 하지만 속내는 말과 전혀 달랐다. 타시르는 ‘클라인 황자는 자기 형과 라트라실 황제의 사이를 모르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그 표정을 본 클라인은 괜히 불쾌해져서 물었다.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는 거지?”
“아…… 죄송합니다. 전하를 보니 막…… 괜히 슬퍼지고 그러네요.”
“넌 이유 없이 기분 나쁜 작자로군.”
“하하.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긴 합니다.”
“이상한 놈.”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우연이고 인연인데. 형님 얘기 좀 더 해 볼까요?”
이렇게 만난 게 우연이고 인연인데 왜 여기에 있지도 않은 형님 얘기를 하자는 거지? 클라인은 이상하게 여겨져 인상을 찌푸렸으나, 타시르는 자연스럽게 자기 의도까지 속였다.
“저희 상단이 외국과도 거래를 많이 합니다. 특히 카리센 쪽과는 최근에 공격적으로 거래를 트고 있거든요. 하이신스 폐하에 대해 알게 되면 아무래도 유용할 거라 생각하는데.”
밑밥을 던진 타시르가 자연스럽게 물었다.
“하이신스 폐하께서는 어떤 성정이십니까?”
“욕심 많고. 원하는 것, 필요한 것 등 마음먹으면 무엇이든 놓치지 않으려 들지.”
“아. 의외네요?”
“게다가 골초고.”
“흐음.”
타시르가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끄덕이자, 클라인은 그의 어깨를 잡아 멈춰 세웠다. 타시르가 멈춰서자 클라인은 차갑게 웃으면서 속삭였다.
“상인아. 네가 무슨 머리를 굴리고서 내 옆에서 이렇게 살살거리는진 모르겠지만. 네가 형님에게 도움이 되거나 형님 마음에 든다면, 형님은 네가 도망가도 알아서 쫓아오실 거다. 그러니 이것저것 계산할 필요 없어.”
* * *
“클라인은? 아직도 편지가 안 왔느냐?”
하이신스 황제의 질문에 수석비서가 머쓱하게 웃었다. 한 통도 없어서. 하이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동생 같으니라고……. 근위기사단 부단장 악시안을 보내두긴 했지만, 카리센에서 타리움 제국까지 오는 데는 거의 보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쉬지 않고 이동한다 한들, 아직 도착하지 못했을 터. 이런저런 걸 알면서도 괜히 타리움에서의 소식이 궁금해지는 건, 그가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받고 싶은 한 여자 때문일 것이다. 하이신스는 한숨을 내쉬고서 반짝거리는 샹들리에를 쳐다보았다.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눈부신 빛이 방향을 바꿨다. 그 사이로 몇 년 전의 라틸이 어른어른 떠올랐다. 둘이서 나란히 잔디밭에 드러누운 채 태양을 쳐다보던 게 떠올랐다. 누가 눈을 더 오래 뜨고 있나 내기를 했던가. 그는 먼저 내기를 제안해 놓고서는, 라틸이 태양을 쳐다보는 틈에 뺨에 입을 맞추었다. 벌칙으로 입술에 키스를 받았다. 입술에 닿던 말랑하면서도 따뜻한 감촉은 이리도 생생한데.
“…….”
하이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움은 하루하루 쌓이고 쌓여서 그를 짓눌렀다. 감정의 무게는 너무나 무겁고 무거운데, 눈에 보이지 않으니 이만큼 힘들다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도 없었다.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이는 다른 비서였다. 다급한 얼굴을 하고서 들어온 비서는 하이신스에게 다가와 얇은 종이를 내밀었다.
“폐하. 전에 말씀하셨던 사안에 관한 조사 결과가 나았습니다.”
수석비서가 막 들어온 비서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사안이 한두 개냐! 무슨 사안인지부터 말해야지!’ 하는 표정이었으나, 신입 비서는 긴장해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이신스는 말없이 종이 겉장을 들추어낸 후 안을 살폈다. 그 안에는 그가 3년 동안 라틸에게 보냈던 편지와 선물들이 모조리 사라진 안건을 조사한 결과가 들어 있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선물의 반절 가량은 무사히 카리센에서 발송되었다. 하지만 반절 가량은 카리센을 나가지도 못하고 탈취되었다. -편지와 선물을 탈취해 간 범인은 다가 공작으로 추정됩니다. 설령 탈취한 쪽이 아니더라도, 폐하의 물품이 탈취되었다는 걸 숨기라 지시한 이는 다가 공작이 분명합니다. 수사관은 선물을 잃어버렸던 관리들에게 이미 확인한 사실이라며, 그들의 명단까지 작성해 두었다. 보고서에는, 그들이 다가 공작에게 협박과 뇌물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고 쓰여 있었다.
“다가 공작…….”
하이신스는 보고서를 읽은 후 서류를 콱 한 번에 구겼다. 다가 공작. 아이니 황후의 아버지인 그는, 하이신스가 황제 위에 오를 때부터 수시로 황제를 감시하려 들었다. 결혼 사절단을 외국에 보내기 전까지는 심지어 개인적인 편지 한 통 쓸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이신스가 권력을 굳혀갈수록 점점 상황은 역전되어 갔으나, 여전히 그는 거슬리는 점이 많았다. 하이신스는 이런 점 때문에라도 아이니를 부인으로, 황후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가 적극적으로 아버지를 돕지 않았단 건 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알면서도 말리지 않았고, 다가 공작이 이루어낸 혜택을 최대한으로 누렸다. 아니, 오히려 다가 공작이 하이신스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해 알려주면, 그 정보를 읽고서 이용했다. 그러나 하이신스는 그녀에게는 배신감조차 느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처음부터 두 사람은 부부가 아니라 황관을 나누어 쓴 적이었고, 아이니는 그의 아내가 아니라 다가 공작의 자식일 뿐이었으니. 하이신스는 무거운 숨을 내쉬고서, 책상 안쪽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입에 물었다. 눈을 감고서 연기를 뿜어내자, 분노는 더욱 까맣게 타들어갔으나 머리는 차갑게 식어갔다.
“어찌하시겠습니까, 폐하?”
“한 번에 터트린다. 이것도 모아두어라.”
“예.”
하이신스는 10억 바르트를 걸고 내기할 수도 있었다. 다가 공작은 아이니 황후가 후계자를 낳으면, 그를 암살하고도 남을 인물이라고. 아이니는 즐거워하면서 그의 시신에 대고 조롱하겠지. 자신의 연인을 죽인 대가를 드디어 치르게 했다며.
“일단…… 로어트.”
“예, 폐하.”
“편지지를 가져와라.”
“예.”
수석비서가 가져온 편지 위에, 하이신스는 라틸에게 전할 이야기를 빠르게 적었다. 어쨌든 반은 여기서 없어진 거지만, 반은 타리움에서 사라진 거였다. 라틸 역시도 이 사실을 알고 대비해야 했다. 라틸에게 전할 이야기를 빠르게 적은 하이신스는 그걸 봉투에 넣고 밀랍으로 잘 봉인한 후 다시 수석비서에게 내밀었다.
“서신청을 통해 보내지 말고, 믿을 만한 이가 직접 전달하게 하라. 전에 결혼 사절단을 보낼 때처럼, 다른 사절단으로 위장해서 가도 좋고.”
“예, 폐하.”
* * * 사건이 터진 날 저녁. 라틸은 생각할 것도 없이 게스타를 찾아갔다. 게스타를 위로해주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돌을 던진 사람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괴롭히면 오히려 오히려 괴롭힘당한 사람을 더 챙길 거라는 경고.
“폐, 폐하?”
게스타는 라틸이 올 거란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도, 라틸이 찾아오자 허둥지둥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괜찮아?”
라틸은 허둥거리는 게스타를 침대로 데려가 앉힌 다음, 그의 머리카락 사이를 확인하며 물었다. 얼추 여기쯤을 맞았겠지, 생각하고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마도 머리통도 깨끗했다.
‘아. 안 맞았다고 했지.’
그 호위 겸 시종이 검으로 튕겨냈다고 했다. 뒤늦게 그 일을 기억해낸 라틸은 괜히 게스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내렸다. 게스타는 라틸의 손끝이 닿자 정전기가 강하게 튀는 듯 움찔거렸다.
“괘, 괜찮습니다. 맞은 것도 아니고.”
“호위가 실력이 꽤 좋은가 보던데.”
“네. 제가 병약하다 보니, 아버님께서 신경을 많이 써 고른 친구입니다.”
그렇구나, 대답하려다가 라틸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눈을 깜빡거렸다.
‘게스타가 병약했던가?’
얌전하고 온순한 건 알고 있었지만 병약한 줄은 몰랐다. 딱히 어디가 아프단 이야기는 들은 바 없는데. 아니, 게스타는 오히려 어깨도 넓고 키도 크고 혈색도 좋았다. 그런데 언제부터 병약해지기까지……? 하지만 허우대만 멀쩡할 뿐 속은 비실한 사람도 많은지라, 라틸은 그냥 그러려니 넘어갔다. 오빠인 레안 황자만 하더라도 딱 그 꼴이지 않았던가. 물론 레안은 운동신경이 빵점일 뿐 병치레가 잦은 건 아니지만…….
“게스타. 전에 내가 한 말, 기억해?”
“폐하께서 하신 말씀이라면…… 아.”
“기억해?”
“예.”
게스타가 얼굴이 빨개져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이르라고…….”
“유효하니까 꼭 명심해.”
라틸은 게스타의 옆에 앉아 그의 꼬인 손가락을 푼 다음 눈을 맞췄다. 시선조차 맞추지 못하고 사정없이 움직이는 연한 갈색 눈동자가 귀여웠다.
“내가 널 지켜줄 테니까.”
게스타는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리고서 고개를 끄덕였고, 라틸은 팔을 뻗어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덩치는 커다란데 막상 나가면 여기저기 맞고 다니는 울보 대형견을 키우는 느낌이었다. 그의 등을 토닥거린 후, 라틸은 몇 번이나 누가 괴롭히면 이르라 당부했고, 게스타는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후우. 진짜 여리네. 내가 더 신경 써 줘야겠어.’
* * * 다음 날 아침, 라틸은 멍하니 일어나 눈을 비비적거렸다. 게스타는 아침잠이 많은 듯 거의 영혼이 빠져나간 수준으로 깊게 잠들어 있었다.
라틸은 그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말랑해 보이는 뺨을 쿡 찔렀다. 그는 입을 우물하고는 잠깐 미간을 찌푸렸으나 일어나진 않았다. 라틸은 속으로 웃었다. 라나문이나 클라인처럼 화려한 미남은 아니고, 칼라일이나 타시르처럼 인상 깊은 미남도 아니었지만 이렇게 보니 이목구비가 반듯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라틸은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서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라틸이 게스타의 배웅 없이 나오자 게스타의 시종은 황망한 표정으로 방과 라틸을 번갈아 보았다.
“곤히 자고 있으니 깨우지 말거라.”
라틸은 게스타의 시종에게 당부한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방에 와 보니 뜻밖의 손님이 있었다.
‘클라인 황자?’
이전에도 한 번 왔던 손님이었다. 클라인 황자. 그가 또다시 이전의 그 의자를 복도에 놔둔 채 앉아 있었다. 클라인 황자의 시종은 익숙한 일인지 체념 조로 커피까지 다시 채워주고 있었고. 라틸이 다가오자 클라인은 활짝 웃으며 일어나다가 2초 만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여기 있는 거냐? 네 방은 어쩌고?”
“폐하를 기다렸습니다. 통 오시질 않아서요.”
라틸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넌 진짜 네 형을 안 닮았구나.”
“감사합니다. 자주 듣는 소리입니다.”
칭찬이 아닌데, 생각하면서도 라틸은 피식 웃고 말았다.
“여기에 얼마나 오래 있었지?”
“그리 오래 있진 않았습니다.”
클라인 황자가 가볍게 대답하자, 라틸의 방문 앞에 서 있던 기사 한 명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오래 있었단 거다. 라틸은 잠시 클라인 황자의 깨끗한 은발을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제안했다.
“아침 식사나 함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