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누가 돌을 던졌나?2020.05.24.
라나문의 시종이 미리부터 조짐을 보이는 라나문의 질투심을 걱정하는 동안, 게스타의 시종도 이래저래 걱정이 많긴 매한가지였다. 물론 게스타의 시종이 하는 걱정은 라나문의 시종이 하는 걱정과 전혀 방향이 달랐다.
“게스타 님…… 라나문 님이라면 벌써 지나가셨습니다.”
“알아.”
게스타의 시종은 불안한 눈으로 게스타를 쳐다보았다. 라나문 지나간 지가 언제인데. 게스타는 아직도 바닥에 난 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모습에, 시종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그만 고개 좀 드세요. 뭐 죄지으셨습니까?”
게스타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종을 보았다. 머쓱한 표정은 참으로 부드럽고 포근해 보였다. 시종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귀엽게 웃으실 줄 알면 뭐하나. 미소는 백만 바르트짜리라지만, 정작 그 미소를 보아야 할 사람 앞에서는 늘 굳어 있는데.
“멀리 떨어졌어?”
“아주 멀리 떨어졌습니다. 안심하세요.”
시종의 답답한 속도 모른 채, 게스타는 그제야 다시 가던 길을 걸어갔다. 시종은 끙 소리를 내며 얼른 뒤를 쫓았다. 눈치가 없진 않은지, 게스타는 그 소리를 듣고는 시종 쪽을 힐긋 보며 물었다.
“왜? 할 말 있어?”
“폐하께서는 게스타 님을 친근하게 대해주시지 않습니까.”
“아…… 어어.”
게스타가 몹시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었으므로, 시종은 자신이 ‘친근하게 대하다’가 아니라 ‘야하게 대하다’라고 말을 한 건가 잠시 헷갈렸다.
“친근하게 대해주시지.”
게스타가 한 번 더 그의 말을 되풀이하자, 시종은 자신이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는 데 안심하고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움츠러드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후궁들 사이에서는 폐하 총애가 권력이란 거, 아시지 않습니까.”
“으응.”
기운 없고 맥빠진 대답 사이로 자박 발밑에서 나뭇가지와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아트락시 공작님과 로르드 재상님은 피장파장의 라이벌이신데. 전 게스타 님이 왜 라나문 님 앞에서 그리 기죽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속상합니다.”
게스타는 또다시 하하 어색하게 웃으면서 연한 갈색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혼자 얼굴이 벌게졌다. 아니, 이번엔 또 왜 저리 부끄러워하시나. 왜 뜬금없이 얼굴을 붉히시나 싶어 쳐다보자, 게스타는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총애라고는 하지만, 아직 그…… 그 단계까지 간 거 아니고. 폐하께서도 날 따로 찾아오신 적은 없고…… 그냥 도서관에서 뵈었을 뿐이고…… 사실 난 잘 모르겠어서.”
“아아. 잠자리요?”
“트리! 말을 좀 조심…….”
“그러면 밤일이라고 할까요?”
“트리!”
어떻게 잠자리나 밤일 따위의 흉측한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냐는 듯, 게스타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이 정도면 엄청나게 순화한 거지. 시종은 입을 꾹 다물고 미간을 찌푸렸다. 시종으로 따라오긴 했으나, 트리는 사실 게스타의 또래 호위였다. 게스타가 어린 시절. 로르드 재상은 ‘병약하고 마음 약한’ 차남을 위해서 일부러 차남과 비슷한 나이대의 평민 소년들 중 검술에 재능이 뛰어난 아이를 골라 호위로 길러냈는데, 그게 트리였다. 자연스레 트리는 게스타가 받는 수업 중 상당수를 함께 들었는데, 그가 기억하기로 분명 게스타는 성교육을 받았다. 성교육을 받을 당시에도 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긴 했지만, 당시에는 저 정도로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어릴 때보다 더 부끄럼이 많아져버린 걸까? 그때였다. 시종은 흠칫 놀라 게스타를 확 누르면서 검을 빼어들었다.
“트리?”
얼결에 머리가 눌린 게스타는 허리를 숙이면서 시종을 보았다. 대답 대신 탕 소리가 나며 시종의 검과 무언가가 부딪쳤다. 게스타는 멀뚱히 시종을 쳐다보았다. 아직 사태 파악이 안 된 얼굴이었다. 시종은 여전히 검을 들어올린 채 사방을 경계하며 물었다.
“날아온 게 뭔가요, 게스타 님?”
“어?”
“떨어진 거요. 제가 방금 쳐낸 거.”
둔하다 싶을 정도로 느릿하게 ‘떨어진 것’을 확인한 게스타가 “아.” 하고 작게 놀란 소리를 냈다. 그건 돌이었다. * * *
“게스타가 돌에 맞을 뻔했다고?”
국무회의를 마친 후, 라틸은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면서 편지와 무덤에 새겨진 경고 등을 곰곰이 떠올리다가, 시종장이 급하게 올린 보고에 놀라 되물었다.
“진짭니까?”
라틸의 하렘 안 남자들은 3분만 대화해도 성격들이 대단하단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개성적이었다. 자기들끼리 치열하게 싸워댈 거란 생각은 했다. 좀 기대하기도 했고. 아니, 그래도 그렇지 입궁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돌이 날아다닌단 말인가. 시간이 지나면 바위라도 집어던지는 거 아닌가?
“누가 던졌답니까?”
라틸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묻자 시종장이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그걸 모르는 모양입니다.”
“그걸 왜 모르지? 주위에 아무도 없었대요?”
“게스타 님이 데려온 시종이 있었답니다. 하지만 그 시종이 호위도 겸하는 모양이라, 자기가 범인을 찾아보러 간 사이 공범이 게스타 님을 공격할까 봐 범인을 추적하지 못했다더군요.”
“어?”
라틸은 시종장의 설명을 듣고서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또 되물었다.
“왜요? 게스타도 같이 뛰어가면 되잖아요?”
시종장은 볼을 안쪽으로 빨아들이면서 붕어처럼 뻐끔거리다가 대답했다.
“……달리기를 못 하신답니다, 게스타 님은.”
“아아…….”
하긴. 걔는 맨날 도서관에서 책만 읽고 있지. 그게 한두 해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내내 그랬으니, 충분히 체력이 안 좋을 만도 하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 허우대는 꽤 멀쩡했는데. 아니, 멀쩡한 정도가 아니었다. 게스타는 수줍음이 많긴 하지만, 외관만 보면 키도 크고 어깨도 넓은 데다 뼈대도 튼튼했다. 그러니 몸도 적당히 쓸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 넓은 어깨는 그냥 타고난 골격일 뿐인가. 시종장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폐하?”
“글쎄요. 사블레 후작이 보기엔 누가 한 짓 같습니까?”
“전 클라인 님이 의심스럽습니다.”
“사심 빼고요.”
라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하자, 시종장은 헛기침을 하고서 말을 바꾸었다.
“사심을 빼고 말씀드리자면 짐작 가는 바가 없습니다. 게스타 님이 순한 성품이긴 하시지만, 아직 이렇다 할 두각을 못 드러내는 편 아닙니까. 굳이 견제할 필요는 없지요.”
“그런가요?”
“같은 맥락에서, 원한 문제로 보기도 애매하고요. 게스타 님은 원체 온화한 성품이시라 적을 만들지 않으니까요.”
“그래요…….”
라틸은 손에 깍지를 낀 채 곰곰이 생각하다 일어섰다.
“누가 한 짓이든 누군가는 했단 거지요. 일단 전체적으로 잔소리를 해 둬야겠습니다.”
* * * 라틸은 그 길로 곧장 하렘으로 간 다음, 그곳에서 일하는 궁인들과 후궁들, 후궁들이 데려온 고용인들을 모두 불러보았다. 사람들은 황제가 갑자기 나타나 모두를 소집하자 두려워하며 모였다. 라틸은 수많은 궁인들을 쭉 둘러보며 일부러 평소보다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게스타가 하렘 내에서 다른 사람이 던진 돌에 맞았다.”
“…….”
“물론 다들 이미 아는 이야기겠지. 여기서 벌어진 일이니.”
궁인들을 보며 기초를 깐 라틸은 이번에는 후궁들 쪽을 쳐다보며, 하나하나 눈을 맞추고 경고했다.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란 말은 안 한다. 어차피 안 될 거 아니까. 하지만 되도록 유혈 사태는 없었으면 하거든?”
그러다가 순서가, 시종장이 의심스럽다면서 사적인 감정을 담아 찍었던 클라인 황자 쪽에 갔을 때였다. 시종장에겐 사심을 담지 말라 했지만 그래도 원체 또라이다 보니 라틸은 ‘혹시?’ 하는 마음이 들어서 클라인을 좀 더 유심히 보았다. 그러나 클라인 황자는 두려워하기는 커녕 픽 웃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품 안에서 손을 꺼내어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자기가 찍혔단 생각은 1g도 하지 않는 듯했다.
‘아…… 진짜 저 또라이.’
라틸은 잠시 멍하니 그 하트 모양을 바라보다가 결국 픽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 *
“하여튼 결론은,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겼는데 범인을 알 수 없을 이런 경우, 단체로 기합을 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단 말이다. 알아들었나? 기합이라고 우습게 보지 마라. 하렘이 도넛 모양이지? 귀여운 모양이라 생각하지 마. 그 도넛 백 바퀴를 돌고나면 입에서 영혼이 빠져나갈 테니.”
매섭게 경고하는 황제의 연설이 끝난 후. 타시르는 해산하자마자 혀를 찼다.
“여기가 용병단인지 기사단인지 모르겠군. 뜬금없이 단체 기합이라니.”
귀족들에게 기사도란 의무이자 명예였다. 종종 명예를 건 결투가 벌어지기도 해서, 그들은 검술에 재능이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검술 교육은 받았다. 하지만 타시르는 날 때부터 상인이었고 크면서도 상인이었고 현재도 상인이었기에, 그런 교육은 받은 적이 없었다. 그가 샌님처럼 지내서 약하단 뜻은 아니다. 다만, 단체 기합 같은 걸 받아본 적 없었을 뿐.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기사들을 따라 다니셨다더니. 소문이 진짜였나 봅니다, 소단주님.”
“그런가보다.”
타시르는 괜히 뒤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성정이 저러신데, 부부싸움 하면 검 뽑으시는 거 아닌가 몰라.”
“어휴, 단주님도 참. 황제 폐하와 부부싸움을 어떻게 합니까?”
“왜. 그래도 야금야금 다 하는 모양이던데. 역사에도 황제 부부 부부싸움 얘기 꽤 나오잖아.”
“그렇죠. 근데 부부싸움을 하려면 일단 부부가 되어야죠.”
그리고 단주님은 아직 온전한 부부는 아니시지요. 뼈를 때리는 시종의 조언에, 타시르는 말없이 웃고서 걸어갔다.
“그건 알아봤느냐? 폐하의 첫사랑.”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 했습니다만…….”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던 걸, 왜 내가 먼저 묻기 전까지 말하지 않았을까?”
“그게요. 좀 확실하게 해야 하는 점이 있어서요. 이게 확실한 정보는 아닌 데다 상대도 상대다 보니 좀.”
타시르는 뒷짐을 지고서 천천히 걸어가다가, 시종의 묘한 뉘앙스에 힐긋 돌아보았다.
“무엇인데? 첫사랑이 뭐, 어디 다른 나라 왕이냐?”
“예. 그렇더라고요.”
농담조로 한 말에 진지한 반응이 돌아오자, 타시르는 멈춰 서서 입을 벌렸다.
“진짜?”
“예. 왕이랍니다.”
“왕이라면…….”
타시르는 잠시 말을 멈추고서 머리를 굴리더니, 5초 만에 계산을 마치고서는 작게 탄식했다.
“카리센 황제겠군. 하이신스 황제. 맞지?”
“어찌 아셨습니까, 소단주님?”
더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일부러 황제가 아니라 ‘왕’이라 표현했던 시종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타시르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설명했다.
“모인 후궁들 나이를 보아하니, 위로든 아래로든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남자는 취향이 아니시고. 모인 후궁들 얼굴을 보아하니 얼굴도 제법 보실 테고. 미혼 왕이라면 국혼을 추진할 텐데, 안 그러고 하렘을 만드신 걸 보니 상대는 지금 기혼이고. 때마침 하이신스 황제는 우리나라에 몇 년 유학도 와 있었고. 그러면 남는 게 누구겠어?”
줄줄 흘러나오는 대답에 부하는 혀를 내둘렀다.
“며칠 동안 조사한 제가 꼭 바보가 된 기분입니다.”
“바보가 되긴. 네가 왕이란 걸 알아 왔으니 유추한 것뿐이지.”
“그래도요.”
“그래, 다른 건?”
“예?”
“하이신스 황제가 첫사랑이라면, 뭐 어떻게 연애했다던가 그런 게 있을 것 아니냐.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거잖아.”
“그러니까요. 그런 부분이 확실한 게 없어서 말씀을 못 드렸던 겁니다.”
“하이신스 황제가 어떤 성품이었더라.”
타시르는 예전에 상단 일로 카리센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우선 잘생겼고. 목소리가 좋았다. 하지만 그 외에는 기억에 남는 게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카리센의 황제와는 고작 몇 마디를 나누어 본 게 다였다. 그 대화조차도 상대의 성격이 드러날 그런 대사가 아니다보니, 당연히 기억할 만한 부분이 없었다.
“모난 성격은 아닌 것 같았는데.”
“따라 하실 겁니까?”
“글쎄. 첫사랑이 현재 유부남이라면 사랑의 끝이 좋지 못했단 이야기잖아. 잘못 따라 했다가는 역효과가 날 것도 같고…….”
타시르는 미간을 찡그리고서 자신의 까만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쿡 쿡 찔렀다.
“게다가 황제의 성격은 파악하기 힘들지. 사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우니.”
“예. 그래도 일단 조사할 수 있는 대로 조사해 보도록 하였습니다. 상단주님께서도 소단주님께 필요한 게 있다면 최대한으로 도우라 하셨고요.”
“그래.”
잘하고 있다고 건성으로 칭찬하다가, 타시르는 인기척을 느끼고서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어딘가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덤덤하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아니면 내가 직접 알아봐도 좋고.”
시종은 타시르가 쳐다보는 방향으로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가 흠칫했다. 건너편의 산책로를 통해 클라인 황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카리센 황제의 동생이.
“지, 직접 물어보시려고요?”
설마 그건 아니지? 시종이 기겁해 물었지만, 그 짧은 사이 타시르는 이미 클라인 황자 근처까지 도달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