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용병왕인지 짐승인지2020.05.13.
“예, 폐하.”
라틸은 그로부터도 15분 정도 방 안에서 서성거리다가 복도로 나갔다. 밤이지만 복도는 일정한 간격으로 매달아 둔 등불 덕분에 운치 있게 밝았다. 밤공기는 서늘했지만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바람이 불어왔고, 풀벌레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인공 호수를 지날 때는 졸졸 물소리가 났다. 무심하게 걸어가다가 라틸은 잠시 회랑에 멈춰 서서 호수를 쳐다보았다. 저 인공 호수. 저 안에서 하이신스과 물을 튀기며 장난치다가 시종장에게 걸려 혼이 난 적이 있었다.
“…….”
흠뻑 물에 젖은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회색 눈동자는 부서지는 햇살처럼 아름다웠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라틸의 심장에 노크했다. 심장이 지끈거려 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내가 뭘 하고 있나’ 회의감이 든 라틸은 심호흡을 했다. 떠나간 남자야. 결혼한 남자라고. 잊기로 했잖아. 라틸은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꽉꽉 누른 후, 일부러 히죽거리는 미소를 만들었다. 그 모습을 쭉 지켜본 기사는 황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라틸은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서 하렘으로 들어갔다. 칼라인은 문과 문 사이, 즉 침실과 바깥문 사이의 복도에 나와 있었다. 라나문 때와 달리 미리 연락을 받아서 나와 있는 듯했다. 라틸은 ‘나와서 기다렸네?’ 하고 말을 하려다가 그를 보고서 어색하게 웃었다. 생각해보니 지금 하는 말이 처음 나누는 말인데. 아무 말이나 하긴 좀 그렇지 않나? 잠시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칼라인이 한 손으로 문을 열어 잡아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직접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문 앞에 선 채 라틸을 강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눈에 힘을 준 건 아닌데. 분명 아닌 거 아는데. 신기할 정도로 강렬한 눈매였다. 초록색 눈동자는 따뜻해 보이기보다는 음산해 보였다. 라틸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초상화를 보고서도 감탄하긴 했는데. 그 초상화는 이 남자의 섹시함을 10%도 담아내지 못한 것 같았다. 정말…… 정말로 섹시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제 뭐라고 하지? 뭔가 황제답게 딱 멋지게 말해야 하는데…….’
그때였다.
“기다렸습니다, 주인.”
다가온 칼라인이 라틸의 목덜미로 입술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아주 오랫동안…….”
다짜고짜 목덜미라니? 그가 목덜미에 대고 숨을 들이쉬자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라틸은 솜털까지 소름이 돋아 눈을 옆으로 굴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마치 라틸의 냄새를 맡고 싶다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어…… 안녕.”
덕택에 첫 대화는 뭐로 해야 할까, 뭐 이런 궁리를 하던 게 싹 날아가 버렸다. 저절로 아무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라틸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도, 칼라인은 여전히 라틸의 목덜미에 코를 박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피부에 차가운 숨결이 닿자 라틸은 괜히 등줄기가 간지러워졌다. 아니, 그보다 얘 뭐지? 왜 숨 쉬는데 차가워? 라틸은 좀 오싹해져서 슬쩍 몸을 뒤로 물렸다. 그제야 칼라인은 고개를 들었다. 몹시 아쉽다는 얼굴로. 라틸은 잠시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하하하 멋쩍게 웃었다.
“딱 이틀 기다려 놓고서는 오랫동안이라니.”
대화고 뭐고 만나자마자 페로몬부터 뿌려대는 상대에게 던지는 말꼬리 잡기였다.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러나 ‘이틀’ 이야기를 듣자 칼라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이틀 기다린 거 아니야?”
그 표정을 본 라틸이 옳다구나 싶어서 묻자, 칼라인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그보단 더 오래 기다렸지요.”
“후궁 서류 넣은 후부터……?”
‘하긴. 따지자면 그때부터 기다린 게 맞긴 하지.’
“그보다도 더 오래 기다렸습니다.”
라틸은 눈을 끔뻑거렸다. 그보다 더 오래 기다렸다고?
“옛날부터 날 알았어?”
라틸은 머리를 굴렸다. 예전에 내가 칼라인을 본 적이 있나? 아니. 없다. 저런 얼굴은 스쳐 지나가도 뇌에 새겨질 텐데. 분명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면 용병왕을 만난 적은 있나? 상대가 얼굴을 가리고 있다거나, 그런 상태로? 이번 대답도 ‘아니오’였다. 라틸은 용병왕을 따로 만난 적도 없었다.
“태어나실 때부터 알았습니다.”
라틸이 영 답을 찾아내지 못하자 결국 칼라인이 직접 정답을 알려주었다.
“아. 그래?”
‘하긴. 내 존재라면 뭐, 국민은 물론 외국인들도 알 테니까.’
라틸은 칼라인의 대답을 혼자 해석하고 수긍했다.
‘그럼 일찍부터 나랑 결혼하고 싶었는가 보네.’
황자나 황녀의 연인이 되길 바라는 어린아이들은 얼마든지 있다. 라틸은 칼라인이 지금은 퇴폐적인 매력이 넘치는 미남이지만, 한때는 그런 귀엽고 파릇한 꿈을 꾼 소년이었던 거라 해석하고 웃었다. 그러나 대화가 끝나자마자 칼라인이 다시 다가와 라틸의 목덜미에 코를 묻는 바람에, 라틸은 또 놀라 펄쩍 뛰었다. 아니, 얜 뭔데 자꾸 돌진부터 하는 거지?
“잠시만.”
놀라 머리를 밀자 순순히 물러나면서도, 칼라인은 마치 잡아먹고 싶은 먹이를 보듯 라틸의 목덜미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라틸은 손으로 오른손 목덜미를 가리며 뒷걸음질 쳤다. 얘 뭔데 자꾸 내 목에 집착해? 이번에는 칼라인의 시선이 왼쪽 목덜미로 다가왔다. 라틸은 황급히 왼쪽 목덜미까지 가렸다.
“왜 자꾸 가립니까, 주인?”
“그야 네가 자꾸 목을…… 아니, 근데. 넌 왜 자꾸 날 주인이라 불러?”
노예도 아니고 주인 주인. 그것도 주인님도 아니라 주인이라니. 좀 마니악한 호칭 같아서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주인이니까.”
“폐하라고 해.”
“글쎄. ‘주인’ 쪽이 더 좋은데.”
“폐하라고 해.”
안 그래도 야하게 생긴 놈이 ‘주인 주인’ 불러대면, 사람들이 널 이상하게 보겠냐 날 이상하게 보지? 딱 잘라 말하던 라틸은, 칼라인이 세 걸음 만에 곁으로 다가오더니 자연스럽게 라틸의 팔을 목에서 치우는 바람에, 놀라서 그의 머리를 이마로 박아버렸다. 용병왕이라더니. 통증에도 강한 듯, 칼라인은 이마를 맞고서도 웃으면서 목덜미에 또 얼굴을 묻으려 들었다.
“머, 멈춰.”
라틸이 명령을 내리자 그래도 말을 듣긴 했다. 칼라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라틸을 바라보았다.
‘뭐야 얘. 훈련이 될랑 말랑 하는 반야생 늑대 같아.’
라틸은 손을 들어 칼라인을 떼어내기 위해 그의 얼굴을 잡았다. 그러나 칼라인이 그대로 라틸의 손가락을 입에 담아버리자, 완전히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헉! 그걸 왜 물어!”
라틸이 기겁하거나 말거나, 칼라인은 라틸의 손을 핥으며 눈꼬리를 휘었다. 라틸은 심장이 찌그러지는 기분에 숨조차 쉬지 못했다. 야했다. 섹시한 게 아니라 정말로 야한 놈이었다. 이건 섹시하단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뾰족한 이 끝으로 살짝살짝 손가락을 깨물다 말기를 반복하대니, 손가락에서도 열기가 올라올 지경이었다. 라틸이 손가락을 빼내자 칼라인은 그대로 곧장 팔을 따라 입을 맞춰왔다. 눈 깜짝할 사이 라틸은 칼라인의 밑에 깔려버렸고, 어느새 칼라인은 그토록 소원하던 라틸의 목덜미에 매달려 있었다. 능숙하게 그의 손이 귓가와 목을, 어깨를 만지다가 망토의 끈을 건드리는 순간. 라틸은 뒤늦게 제정신을 차리고서 “멈춰!” 하고 다시 외쳤다. 명령은 잘 듣는 칼라인이 이번에도 우뚝 멈추긴 했다. 그러고는 시선을 들어 라틸을 내려다보았다. 라틸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에 마른침을 삼켰다. 이건 뭐, 후궁이 아니라 커다란 늑대 밑에 깔린 기분이었다.
“내려가.”
“…….”
다행히 말은 잘 듣는 늑대. 칼라인이 옆으로 내려가자마자 라틸은 몸을 세 바퀴 굴려 옆으로 물러난 후, 여유분의 베개를 가져다가 침대 중앙에 놓으며 경고했다.
“너, 이거 넘어오지 마.”
“……자러 오신 거 아닙니까, 주인.”
“잠만 자고 갈 거야. 넘어오지 마.”
“잠버릇 심하십니까?”
“그걸 왜 물어?”
“심하십니까?”
“나 잠든 사이에 슬쩍 베개 치우거나 위치 이동하지 마. 여기 이 조각상 아래로 직선 위치 내가 딱 기억했어.”
“심하십니까?”
“안 심해. 난 완전 일자로 칼같이 누워 잔다고! 옮기면 바로 아니까 머리 굴리지 마!”
이제야 흠, 아쉽다는 듯 베개 너머에 머리를 붙이는 칼라인을 보며, 라틸은 식식 숨을 내쉬었다. * * * 아침에 눈을 뜬 라틸은 옆에 놓인 빈 베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베개가 비어 있지?
‘아. 맞아. 내가 칼라인한테 이 베개 넘어오지 말라고 했지.’
라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베개는 멀쩡하게 놓여 있었다. 칼라인은 침대 머리 판에 기대어 앉은 채 라틸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칼라인은 웃으면서 베개를 가리켰다.
“침대 조각상 좌측 기준으로 직선. 안 건드렸습니다.”
“좋아. 잘했어.”
“…….”
“뭐야. 왜 웃어?”
“아니, 아닙니다.”
왜 저러는 거야? 뭐가 웃기다고 저러고 웃지? 라틸은 괜히 찝찝한 기분에, 칼라인을 경계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발이 땅에 닿고서야 라틸은 자신이 망토도 벗지 않은 채 누웠단 걸 깨달았다. 아니, 어제 저 목덜미 귀신을 피해 급하게 눕느라 아예 옷이 그대로였다. 하지만 인제 와서 옷을 벗기도 뭐해서, 라틸은 눈을 비비며 문가로 갔다.
“나 간다.”
멀뚱히 가고 있으려니 칼라인이 가까이로 다가왔다. 설마 똑 목덜미를 노리는 건가 싶어 주춤했으나, 그는 목덜미에 코를 박는 대신 반쯤 풀어진 망토 끈을 묶어주었다.
“이렇게 해야 바닥에 망토가 안 끌립니다.”
‘뭐야. 해가 뜨니까 멀쩡해졌잖아?’
“손가락 기네.”
칼라인의 길쭉한 손가락이 자신의 쇄골 부근에서 움직이는 걸 내려다보다가, 라틸은 괜히 쑥스러워져서 칼라인의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내리깐 속눈썹은 그의 머리카락과 같은 연한 금색이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어? 어. 예쁘네.”
“제가, 손으로 하는 건 다 잘합니다.”
아. 속눈썹 얘기가 아니었구나. 자기 예쁘냐고 묻는 건 줄 알았다. 라틸은 하하 솜씨 좋다면서 어색하게 덧붙였다. 마침내 망토 리본을 다 묶어 준 칼라인은 냉담하게 웃으면서 문을 열어주었다. 라틸은 그제야 칼라인을 다시 똑바로 보았고, 조금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밤새 잠을 잔 건 마찬가지일 텐데. 그는 신기할 정도로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채였다. 게다가 어제 밤 그렇게 적극적으로 돌진할 때는 언제고. 밤에 또 오란 말은 없다. 그 자존심 덩어리 라나문도 한 말인데.
‘이상한 남자야.’
라틸은 문을 나가기 전 힐긋 그를 돌아보았다. 칼라인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라틸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틸은 나가려다가 다시 돌아와 그를 불렀다.
“칼라인.”
“네, 주인.”
“……너, 오래전부터 날 기다렸다 했잖아. 진짜로는 언제부터 안 거야?”
“실은…….”
“실은?”
“태어나기 전부터.”
“…….”
라틸은 문을 닫고 나갔다. * * * 이상한 녀석이야. 하렘을 나가며 라틸은 칼라인에 대해 생각했다. 라틸은 기사들과는 잘 어울렸지만, 용병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보니 구분이 가지 않았다. 용병들은 다들 저렇게 제멋대로일까? 굳이 ‘폐하’ 대신 ‘주인’이라 부른다거나, 태어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단 농담을 하고? 아니면 그냥 칼라인이 특이한 건가?
‘외모는 생각보다 더 섹시하긴 하지만.’
그런데 막 하렘 문을 나서려는 때였다.
“폐하!”
누군가 멀리서부터 라틸을 불렀다. 라틸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클라인 황자였다. 라나문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거만한 클라인 황자가 돌길을 열심히 달려오고 있었다.
‘클라인 황자?’
체통을 집어 던진 채 필사적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안 되어 보여서, 라틸은 일단 기다려주었다. 멀뚱히 보고 있자니, 바로 앞까지 다가온 클라인 황자는 뒤늦게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자기가 어떤 꼴로 달려온 지 이제야 자각이 된 모양이었다.
“할 말이 있느냐?”
그래도 저렇게 올 정도면 급한 볼일이 있겠지. 라틸은 그렇게 생각하며 물었다. 클라인 황자는 바로 대답했다.
“꼭 이렇게 절 가지고 노셔야 합니까?”
아니, 항의했다. 그러나 라틸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가지고 놀다니? 내가 언제? 클라인과는 말도 거의 나누지 않았는데, 가지고 놀고 뭐고 할 틈이 있나? 어리둥절해 쳐다보자, 클라인 황자는 거듭 상처받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 질투심을 자극하시려는 거라면, 네. 제대로 하셨습니다.”
“……뭐?”
“인정하겠습니다. 내내 폐하 생각 외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
“이게 목적 아니었습니까?”
“내가?”